257. 마이 프레셔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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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 마이 프레셔스 (3)
2022.05.15.
“회장님, 오해십니다. 무슨 말을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다급해진 기동이가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지껄이자, 육만배는 또 한차례 호되게 뺨을 후려쳤다.
쫘악!
빈 사무실 전체를 울릴 만큼 큰 소리가 났지만, 어차피 바깥에 퍼져 나갈 위험은 없다.
지금 건대 쉘터는 북쪽에서 쉬지 않고 울리는 총성에 완전히 덮여 있기 때문에 설령 여기에서 누가 죽어 나가도 모를 것이다.
세 대나 같은 자리를 맞고 나니 살집 좋은 기동이의 볼도 빨갛게 달아올랐다. 여전히 기동이의 오른쪽 귀를 꽉 움켜쥐고 있던 육만배가 귀 끝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언제부터 나한테 거짓말을 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응? 이 멍청한 새끼야.”
귀 끝이 찢기는 동안 기동이는 당혹스러운 척 연기를 했다.
이 정도로 당황한 기색을 보여 줘야 그 뒤에 이어질 변명이 그나마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잠시 더 시간을 보내던 기동이는 눈을 내리깐 채 다급하게 외쳤다.
“죄, 죄송합니다, 회장님! 사실대로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무서워서 그만…….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강 실장 언제 만났어? 왜 시비가 붙었나?”
육만배는 그제야 귀를 놓아 주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기동이는 얼른 불부터 붙여 준다.
후우우~ 육만배는 언짢은 표정으로 연기를 뿜어내며 기동이를 노려보았다.
“형님이 다치셨다니까 제가 미련한 마음에 걱정이 돼서 몇 번 들렀습니다. 회장님께 따로 아뢰지 않았던 건 찾아갈 때마다 형님이 의식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요즘 신경 쓰시는 것도 많은데 희소식도 아닌 걸 전해 드려 봐야 공연히 심려만 끼쳐 드리게 될까 봐……. 회장님께서 강 실장 형님 아끼시는 마음이야 제가 제일 잘 알지 않겠습니까.”
기동이의 말을 들은 육만배가 어이없어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놈이 진짜……. 그쪽 건물로 민간인은 아예 못 들락거리게 하는데, 몇 번이나 들렀다고? 초희도 의무대 군인 놈한테 애원을 해서 겨우 따라다녔다고 하던데, 네가 오늘 아주 매를 맞고 싶어서 안달이 났구나?”
“저, 정말입니다, 회장님! 밤에 교대 시간 지나고 철망을 넘으면 쉽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건물 문은 따로 잠가 두지를 않습니다. 그, 그리고 제가 군인들 피해서 숨느라 화단 뭉개진 데도 다 있습니다. 맹세합니다!”
다급해진 기동이가 두 손을 내저으며 지껄여 댔다. 육만배는 여전히 화를 풀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애초에 거길 왜 찾아가? 네깟 놈이 간호에 대해서 뭘 안다고? 뭘 어쩌고 싶었던 거냐?”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무슨 말씀을 드려봐도 다 마뜩잖으시겠지만, 저는 반갑기도 하고, 걱정도 됐습니다. 제가 혼자서 회장님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는데…… 강 실장 형님이 오셨고…….”
타타타타탕― 타타타타타― 투투투둑―
총소리가 너무 시끄럽게 울려 대서 기동이는 잠시 말을 끊었다. 오늘따라 어지간히들 볶아 댄다. 잠시 후 조금은 조용해졌을 때, 기동이가 이야기를 이었다.
“그런데 그 믿음직한 형님이 사경을 헤매고 있는 걸 보니 참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저로서는 우리 만배파의 큰 기둥 하나가 없어진 것 같아서…… 그래서 형님 누운 자리 옆에 앉아서 혼자 중얼중얼거리다가 오곤 했습니다. 어서 일어나셔야 한다고.”
기동이의 이야기가 장황해지자 육만배가 차갑게 끊어버렸다.
“말 같잖은 소리는 작작 지껄이고, 그렇게 존경하는 형님이랑 왜 칼부림을 벌였는지나 털어놔. 그 지랄을 해 놓고 어제오늘 나를 피해 다녔어?”
“어이구, 칼부림이라니요. 회장님, 그건 아닙니다. 형님이 날카로워져서 일방적으로 저한테 화풀이를 한 거였습니다. 억울합니다. 그리고 제가 짱 박혔던 거는…… 이 나이 먹고 형님한테 그렇게 혼이 난 게 딴에는 또 창피하고 애들 보기에도 낯이 안 서는 것 같아서 눈에 띄지 않으려 했던 거…….”
육만배가 피우던 담배를 땅바닥에 집어 던지면서 소리를 질렀다.
“왜 싸움이 났냐고 물었다! 이 새끼야!”
“애들 때문입니다! 강 실장 형님이 자기 애들을 제대로 챙겨 오지 않았다고 화를 낸 겁니다!”
육만배가 멈칫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지금 남아 있는 조직원들 중에 민구의 새끼들은 한 놈도 남아 있지 않다.
문제의 그 트럭을 훔치던 새벽에 민구네 애들이 꽤 많이 상하기도 했거니와, 건물을 지키느라 매일 좀비들과 벌인 싸움에서 죽어 나간 놈들이 대부분 민구의 식구들이었다.
기동이 놈이 잔꾀를 부려 제 부하들은 안으로 돌리고 민구네 애들에게만 위험한 일을 맡겼다는 걸 당시에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육만배는 별로 간섭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민구는 녀석이 데리고 있는 부하들의 수가 아니라, 그놈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는 무기다.
반면에 이 기동이 놈은 머릿수가 필요한 놈이라서 육만배로서는 균형을 맞추고 싶기도 했다. 그래야 부려 먹기가 좋으니까.
그러면서도 힘의 서열이 깨질까 봐 걱정이 들지는 않았다. 어차피 넘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육만배가 노기를 조금 거두자 기동이는 자신의 말이 먹힌다고 생각했는지 더 열심히 지껄여 대기 시작했다.
“저로서는 정말 당황스러웠습니다. 제가 아무리 강 실장 형님을 존경하고 마음으로부터 따른다고는 하지만, 식구들 안부를 묻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난데없이 칼을 막 휘두르시니까…….”
“됐다.”
육만배가 짧게 말하고 다시 의자에 걸터앉자 변명을 늘어놓던 기동이는 깜짝 놀라 물었다.
“네?”
“그만 떠들어, 다 알아들었으니까. 참 꼴좋다, 식구들끼리……. 더 말하기도 싫다. 이만 나가 봐. 너희들도 다 나가!”
육만배는 뒤에 서 있던 조직원들에게도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아…… 네. 네, 회장님.”
갑작스레 모든 걸 용서받게 된 기동이는 오히려 떨떠름한 표정이 되어 쭈뼛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뭔가 한마디를 더 할까 망설이던 기동이는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인사를 하고 문을 닫았다.
“후우우~”
혼자 남은 육만배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동이, 저 멍청한 새끼가 대충 꾸며 대는 이야기들을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기껏 둘러댄 게 저 정도라면 두 새끼가 서로 칼을 들고 생지랄을 했다는 것 하나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뭐, 조직 내에서 그런 짓이 벌어진다는 게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깡패 새끼들이니까 이해 못 할 부분도 아니다. 어차피 힘이 곧 법인 세계, 약해진 놈이 도태되는 일은 일상다반사다.
그런데도 육만배가 충격에 빠진 이유는, 기동이의 몸에 남은 상처가 너무 얕아서였다.
오늘 저놈의 반창고 속 칼자국을 보며 확신할 수 있게 된 것은, 민구가…… 자신이 지금껏 보았던 놈들 중에 가장 뛰어난 칼잡이가…… 이제 아주 못쓰게 망가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가 알고 있는 민구는 기동이 같은 놈이 감히 먼저 칼을 꺼낼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만약 서로 칼을 겨누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엔 저 정도만으로 봐주는 인간도 아니다.
아둔한 놈의 모가지는커녕 힘줄 하나 도려내지 못할 만큼 민구의 칼끝은 무뎌졌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줄행랑을 쳐버릴 정도로 약해져 있기도 하다.
기동이가 무서워서 도망을 쳤다고? 민구가?
하아……. 육만배는 고개를 저었다. 빤히 보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으음…….”
육만배의 입에서 회한이 가득 담긴 신음이 터져 나온다.
‘총에 맞았다고 들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까지 형편없어진 건가.’
담배를 입에서 뗄 수가 없었다. 입이 쓰다. 마음이 아리다.
보물이…… 절대 깨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단단한 보석이 깨졌다. 칼 한 자루만 쥐여 주면 피바람을 일으키면서 길을 터내던 민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예전 같았으면 얼마가 들든 상관하지 않고 한국 최고의 의사에게 부탁을 해서 원래대로 복원을 했겠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그런 돈지랄도 할 수 없다.
돈을 뽑을 은행도, 의사도 다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민구는 운에 맡겨졌다.
운이 좋으면 예전의 반만큼이라도 기량을 회복할 것이고, 운이 없으면 저렇게 비실대다가 어딘가에서 성질을 못 이겨 뒈지리라.
그렇기 때문에 육만배는 기동이에게 더 책임을 묻지 않고 돌려보낸 것이다. 민구라는 날카로운 칼을 잃었으니, 기동이의 저 미련한 힘이라도 어찌어찌 써먹어야 한다.
만에 하나 민구가 몸을 만들어 다시 돌아온다면, 그때 선물 삼아 기동이를 내주면 될 터였다. 목을 따든 포를 뜨든 제가 알아서 하도록.
가능성이 아주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민구는 워낙에 독하고 명이 질긴 놈이었으니까. 어차피 제 놈도 조직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운신할 수 있을 지경만 되면 반드시 돌아오려 할 것이다.
‘벌써 13년이나 됐나? 세월 빠르군.’
‘돌아온다’는 단어에 예전 일이 떠오른 육만배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직 자신이 젊던 시절, 처음으로 민구를 만났던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바짝 마른 거지새끼 주제에 눈에서는 퍼런빛이 뿜어져 나오던 그 애송이…….
신문지로 감싼 식칼을 주며 첫 번째 사지로 내몰았을 때만 해도 녀석이 살아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질긴 인연, 그러나 이제는 훌훌 털어버려야 하는 때가 됐다.
***
육만배가 그렇게 회한 속에서 계산을 하고 있을 때, 기동이는 부하들과 함께 쉘터 구석으로 물러나와 담배를 피우는 중이었다. 연기를 뻑뻑 뿜어내는 기동이의 표정은 한결 밝았다.
애들이 보는 데서 망신은 좀 당했지만, 걱정했던 것에 비해 이만하면 선방한 거다.
“형님, 귀 괜찮으십니까? 의무대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부하 놈 하나가 눈치를 살피며 묻는다.
“왜? 많이 찢어졌어?”
“예. 윗부분이…… 속살이 다 보입니다. 피도 좀 닦으셔야 할 것 같고.”
자신의 귀를 만져 본 기동이는 피식 웃었다.
까짓 귀 하나쯤이야.
“야야, 긁힌 거다. 괜찮아. 저번처럼 네가 가서 반창고나 좀 얻어 와.”
“그런데 회장님께서 좀 너무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화가 나셨어도 그렇지, 형님을…….”
다른 놈이 투덜대다가 힐끗 눈치를 본다. 기동이가 별로 제지하려는 기색이 없자 녀석은 이야기를 마저 끝냈다.
“사실 기동이 형님 안 계시면 그분이야 이제 그저 힘없는 늙은이 아닙니까? 다 형님이 힘을 쓰고 하셔야 무슨 일이 되는 거지…… 윽!”
기동이가 갑자기 손을 뻗어 볼을 꽉 쥐자 부하 놈은 입을 다문다. 기동이는 녀석의 볼살을 꼬집어 돌리며 말했다.
“야, 이 미련한 씨발 새끼야. 그 늙은이가 줄서서 기다리다가 그 자리에 올라간 게 아니야. 알어? 짓밟고 올라간 이름들이 다 쟁쟁하단 말이야.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이지, 뒤에 여우 꼬리가 주렁주렁 달렸어. 꾀가 어마어마하다고. 네깟 새끼가 뭘 안다고 깝쳐? 그냥 얌전히 시키는 대로 하고 있어. 아까도 너 내가 싸대기 맞을 때, 움찔하더라? 왜? 뒤에서 쑤시려고? 그러고 나면 뒷감당할 자신 있어? 응? 여우 같은 저 육 회장이 머리 팽팽 굴리지 않았으면 우리 벌써 잠실에서 다 군대 끌려갔던 거야. 아니지, 애초에 잠실은 어떻게 갔겠냐? 다 그 노인네 잔대가리 덕분이라고.”
“혀, 형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용서해 주십쇼!”
“그래, 이 빠가 새끼야. 너나 나나 생각이 짧아. 대가리가 돌이라고. 그러니까 아직은 깝치지 말고 시키는 대로 얌전히 따르는 흉내나 내, 이 개새끼야. 괜히 툭 튀어나와서 사람 곤란하게 만들지 말라는 말이야. 알아들었어?”
“네! 네!”
“으이구, 대답은 잘하네. 씨발 놈.”
기동이는 놈의 뺨을 놓아주고 두어 대 쫙쫙 두들겼다. 그리 오래 잡아당긴 것도 아닌데 이미 피멍이 들 기세다.
하지만 꼬집어 뜯은 놈이나 뜯긴 놈이나 무슨 우스운 일이라도 한 것처럼 낄낄댄다.
투투투투― 투투투― 투투투―
북쪽 건물의 옥상과 대로 쪽에서는 끊임없이 총성이 울리고 있다. 처음에 기동이의 귀 걱정을 했던 부하 놈이 대로 쪽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좀 세게 나오는 모양입니다. 아까부터 꽤 오래 쐈는데……. 군인 새끼들, 지금도 정신 하나도 없어 보이네요. 허, 가희 년 신랑 지금 밖에 나가서 작업할 시간인데, 이러다가 뒈져 버리면 그동안 공들여 놓은 거 다 나가리되는 거 아닙니까?”
“누구? 박 소위?”
기동이는 마뜩찮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신랑은 니미……. 아, 그 새끼 진짜 어지간히 밝히긴 하더라. 애새끼 얼굴 유심히 보고 있는데, 하루가 다르게 삭아. 큭큭큭, 기가 다 빨리나? 하긴 가희 년이 좀 유별난 데가 있기는 하지. 암만 그래도 그렇지, 씨발, 살이 쪽 내릴 때까지 그 짓을 하고 자빠졌냐? 존나 미련하게 생긴 값을 하더구만. 아마 지금도 다리가 후들대고 있겠지.”
“큭큭큭.”
기동이가 음담을 하자 부하 놈들도 장단을 맞춰 낄낄거린다.
그렇게 놈들이 씹어 대던 시각에 가희 신랑, 박 소위는 정말로 대로 위를 뛰어다니며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좀비들의 포효와 커다란 총성, 그리고 두통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투투투투― 투투투투투―
병사들은 철책 위로 총구를 내밀고 열심히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암만 열심히 갈겨 봐도 접근해 오는 놈들을 다 잡을 수가 없다. 이러다가 정말 철책이 무너지는 건 아닌지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도로 폐쇄 공사를 위해 좁혀 놓은 도로에 너무 많은 놈들이 한꺼번에 몰려 버렸다. 제 속도로 원활히 코너를 돌아 나가지 못하게 된 좀비들은 자꾸 흩어져 쉘터 방향으로 돌아 들어오려 했다.
놈들과의 거리는 불과 50여 미터. 까딱하면 좀비들의 파도가 쉘터를 휩쓸 수도 있다.
‘이러다가 쉘터에 고립되어 버리면…….’
박 소위는 얼른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버렸다. 그렇게 되면 외부 건물로 나갈 수 없어지고, 외부 건물을 쓰지 못하면 가희와 밀회를 가질 공간이 없어진다. 그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가희…… 갑자기 박 소위의 머릿속에 가희에 대한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당장 오늘 밤에 어디에서 그녀를 만나야 하는 건지, 예전에 사용하던 건물 쪽은 한동안 발길을 끊어야 할 것 같은데……. 외부인들을 수용하던 그 건물로 가자고 할까?
하지만 거기 옥상에는 저격조 애들이 항상 배치되는데…… 소리가 나지 않으려나?
어젯밤에도 절정의 순간에 그녀의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그렇게 상념에 푹 잠겨 버린 박 소위가 멍하니 전방을 보고 서 있을 때, 병사 하나가 그를 애타게 부른다.
“소대장님! 소대장님!”
“……응?”
박 소위는 얼빠진 얼굴로 병사를 돌아보았다.
“뭐야? 왜?”
“저희밖에 없습니다! 다 후퇴하라는 명령 떨어졌습니다!”
박 소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말로 도로 위에 서 있는 것은 그가 통솔하고 있는 몇 명뿐이다.
명령? 언제 그랬지?
기억을 되짚어 봐도 들은 것 같지가 않다. 하지만 주변 상황으로 미루어 보니, 꽤나 긴 시간 동안 그 혼자서만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남겨진 병사들은 사격을 하면서 한 번씩 불만과 불안이 가득한 얼굴로 박 소위를 돌아보았다.
“계속 여기 사수해야 합니까?”
물어보는 병사의 얼굴에도 두려움이 가득하다. 박 소위는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야! 이제 충분하다! 퇴각해! 전원 퇴각!”
박 소위는 모든 게 다 계획되어 있었다는 눈치를 주기 위해 애를 썼다.
야! 그만 쏘고 다 빠져! 애들 다 챙겨!
병사가 자신의 분대원들에게 돌아가 명령을 전달하는 모습을 보며 박 소위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등골이 서늘하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요즘 가끔 이렇게 정신 줄을 놓는 일들이 생긴다. 하마터면 오늘 이 자리에서 인생이 쫑날 뻔했다.
‘스트레스 때문인가? 하긴 너무 피곤했지. 이 염병할 놈의 임무, 임무! 젠장,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씻지도 못하고 죽어라 일만 한 거잖아! 아흐, 지겨워! 지겹다고! 씨발!’
쉘터를 향해 달려가는 동안 박 소위는 진저리를 치며 마음속으로 고함을 질렀다. 이렇게 봉사를 죽어라 하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면서 아무 소리나 지껄이는 문 대위가 점점 더 증오스럽다.
좀비든 국가의 의무든 싹 다 잊어버리고, 그저 가희와 단둘이 어디 따뜻한 남쪽 나라에나 가버릴 수 있다면 좋겠다.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그 보석 같은 육체를 마음껏 탐하고 싶다. 파도 소리가 귓가를 울리면 더 로맨틱할 것이다…….
총성이 빗발치는데도 박 소위의 아랫도리는 불룩해진다. 조금 전 자신의 얼빠진 행동 때문에 열 명이 넘는 무고한 젊은 목숨이 위험에 빠질 뻔했다는 자책 같은 것은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병사들의 눈총을 받으며 열린 게이트 문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에도 박 소위는 오늘 밤 가희를 어디로 불러낼 것인지, 그 쪽지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에 대해서만 고민하고 있었다.
다른 놈들이 어찌 되든…… 아무 상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