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 외전: 헬게이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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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 외전: 헬게이트 (4)
2022.05.12.
※ 이 이야기는 좀비 세상 첫날, 박테리아가 확산되는 과정을 담은 외전입니다.
외국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봤다.
“When was the last time you see him?(걜 마지막으로 봤던 게 어디야?)”
“Down there…….(지하철역 아래…….)”
흑인이 지하철역을 가리키자 콧수염이 비장한 얼굴로 내뱉었다.
“No man left behind!(낙오자는 없다!)”
그러자 다른 녀석들도 한목소리로 외치며 다시 SUV 밖으로 나왔다.
“No man left behind!(낙오자는 없다!)”
흑인과 다른 부상자들까지 차에서 내리려 들었지만, 콧수염은 그들을 제지했다.
“No, you’re injured, not just hurt. Go to medic. It’s an order.(너흰 부상자야. 가서 치료 받아. 명령이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도로 위에 선 둘에게 말했다.
“Ok, very simple. we go back, get Max, and we get up back here. Got it?(자, 아주 간단해. 돌아가서, 맥스를 찾고, 다시 이리로 온다. 알았지?)”
“Yes sir!”
세 명의 외국인이 다시 지하철역으로 뛰어가려 할 때, 운전자가 외쳤다.
“Gee, Larry! You’re unarmed! You got nothing! Gate 3 is right there! Just 200yards away. we can ask for back up or bring our guns.(젠장, 래리! 너희는 지금 비무장 상태야! 무기랄 게 없다고! 3번 문이 바로 저기야! 200야드만 가면 돼. 가서 지원 요청을 할 수도 있고, 무기를 가져와도 되잖아.)”
콧수염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It doesn’t matter. U. S. army never leave wounded fellow behind. That’s the ground rule!(그런 건 상관없어. 미 육군은 부상자를 홀로 두고 가지 않는다. 이건 최우선의 원칙이야!)”
“Ok, ok. Open the trunk, there's my golf bag. Pick any clubs you like.(알았어, 알았어. 트렁크 열면 골프 가방 있어. 아무거나 빨리 채 하나씩 챙겨.)”
트렁크에서 골프채를 골라 든 뒤, 콧수염이 말했다.
“Thank you, Glen.”
“Na~ just bring’em back.(아냐, 돌려주기나 해.)”
어이없어 하는 성준을 놔두고 세 명의 외국인은 다시 광인들로 가득한 지하철역을 향해 뛰었다. 멋지기는 하지만, 미친놈들이었다. 이제는 자기도 좀 태워 달라는 말은 할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그녀를 태운 SUV가 미군 부대 안으로 사라져 간다. 유리창 너머로 뒤돌아보던 그녀의 애타는 얼굴을 보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순식간에 외톨이가 돼버린 성준은 잠시 멍해져 있다가 삼각지 방향을 향해 뛰었다. 일단 살아야 나중에 데이트를 해도 할 수 있다.
***
그 시각, 민구는 왼쪽으로 고개를 틀고 앉아 그의 어깨를 꿰매는 의사의 손길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의사의 손길이 부들부들 떨린다. 민구가 주방에서 가지고 올라와 옆에 놓아 둔 커다란 식칼 때문만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민구는 턱을 쓸며 생각했다. 조금 전부터 병원이 영 시끄러운 걸 보니, 아무래도 그놈들이 여기까지 퍼진 모양이다. 아직 발목 치료를 받지 못했는데…….
하지만 마취를 하지 않은 건 잘한 것 같군.
민구는 귀찮다는 듯 혀를 찼다. 크지 않은 규모의 교통사고 환자 전문 병원을 골라 들어온 것이 다행이었다. 여기라면 죽여야 하는 놈들이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콰장창!
문밖에서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자, 의사는 또 한 번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저, 저…… 선생님, 아무래도 이렇게 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의사는 꿰매던 손을 멈추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럼 뭘 해야 하는 땐데?”
민구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끼야악―!
그사이에도 아래층에서는 또 비명이 울려 퍼진다. 의사 옆에서 보조를 하던 간호사가 겁에 질려 귀를 막고 주저앉았다. 의사가 간곡하게 사정했다.
“아니, 지금…… 뭔지는 모르겠지만, 밖에서 난리가 난 것 같은데요. 저 비명 소리하며……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돕지도 않고 이대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의사 양반.”
울먹이는 의사의 말을 끊고 민구가 물었다.
“당신, 대학에서 사람 죽이는 거 공부했소?”
“네?”
의사가 눈을 껌뻑였다.
“사람 죽이는 거 배웠냐고?”
“어, 아닙니다. 무, 무슨 말씀을…….”
“그럼 뭐 배웠어?”
“그, 그야, 의대였으니까 병 고치는…….”
“그럼 할 줄 아는 거나 열심히 하시오.”
민구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명령했다. 그 박력에 거역할 수 없어진 의사는 또 손을 떨며 바늘을 놀려 상처를 대충 맞물려 놓은 뒤, 실을 꽉 조였다.
쾅쾅쾅!
그사이를 못 참고 누군가 잠긴 문을 두드려 댔다. 여전히 복도에서는 비명과 고함이 난무하고 있었다.
두려워진 의사와 간호사는 몸서리를 치며 울상을 지었다. 어깨가 봉합된 것을 확인한 민구는 식칼을 집어 들고 천천히 일어난 뒤 문을 확 당겼다.
“어! 도와주세요! 지금 밖에……!”
문을 두드리던 남자가 이제 살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심하게 물어뜯긴 그의 팔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져 흘렀다.
“그러기엔 이미 늦었어.”
민구가 빠르게 팔을 휘둘렀다. 남자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깨닫기도 전에 목을 움켜쥐고 무너져 내렸다. 사내의 시체를 걷어차 뒤로 밀어버린 후, 민구는 복도로 몸을 내밀었다.
복도 건너편에서는 괴물이 간호사들을 닥치는 대로 물어뜯고 있다. 살이 뜯겨 나간 간호사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비명을 질렀다.
민구는 속도를 높여 걸어간 다음, 괴물의 뒷목을 서너 차례 세차게 내려쳐 잘라냈다. 그러고는 이제 막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맙다고 고개를 숙인 간호사들도 함께 처리했다.
일단 이 정도면 발목 치료를 받을 시간은 번 것 같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문을 잠근 민구는 피 묻은 칼을 탁자 위에 올려 놓은 다음, 바짝 얼어붙은 의사와 간호사를 보고 씨익 웃었다.
“각자 잘하는 걸 합시다.”
***
녹사평에서 삼각지까지는 불과 지하철 한 정거장. 하지만 너무 많은 사건을 겪은 뒤여서 그 길지 않은 거리를 뛰어가는 것도 힘이 들었다. 숨이 차오르고 허벅지의 근육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그렇게 휘청거리면서도 겨우겨우 움직여 주던 발이 뭔가를 밟고 갑자기 쭉 미끄러지는 바람에 성준은 중심을 잃고 굴렀다.
“아, 아야! 이게 뭐야?”
넘어진 자리를 돌아보니 군데군데 토사물이 흩뿌려져 있다.
재수가 없으려니 별…….
성준은 먼지를 탁탁 털고 일어났다. 무릎과 팔꿈치의 살갗이 벗겨져 나갔다. 10미터쯤 앞에는 대머리 아저씨가 무릎을 꿇은 채 엎어져서 또 새로운 토사물 함정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우웩― 우웨엑!
흔들거리는 대머리 아저씨의 두툼한 옆구리가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다. 이 사람도 광인들을 피해 지하철에서 도망쳐 나온 게 분명해 보인다.
‘너무 오랜만에 뛰셨구만. 그러게 아저씨, 평소에 운동을 좀 하셨어야지.’
영화에서라면 아저씨의 등을 두드려 준 다음 부축을 해서라도 함께 뛰어 도망가겠지만, 지금 성준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다.
토하다가 머리를 감싸고 쓰러져 뒹구는 아저씨를 뒤로하고 성준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애애앵~!
맞은편 도로에서 여러 대의 경찰차들이 꼬리를 물고 녹사평역을 향해 달려간다. 광인들의 그르렁대는 소리와 비명도 조금은 작아진 기분이다.
‘나중에 어떻게 연락을 하지? 그 시간에 지하철역에서 기다리면 될까? 그때도 또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고 끌어안을 수 있을까?’
그녀를 태운 SUV가 들어간 미군 부대의 게이트를 지나칠 때, 성준은 그녀를 생각했다. 언젠가 두 손을 꼭 마주 잡고 웃으면서 이 길을 걸어가리라. 낙엽이 가득 쌓일 때의 삼각지 가로수 길은 꽤 그럴듯하다.
그리고 아름드리나무에 기대 키스를 나눠야지…….
성준의 입가에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아까 그녀가 숨을 헐떡거릴 때 얼굴에 닿았던 복숭아 냄새가 지금도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르르르…….
그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그의 즐거운 망상을 깼다.
아냐, 이건 말이 안 된다…….
성준은 속도를 올리면서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분명히 광인들은 그보다 훨씬 뒤에 처져 있었다. 게다가 불길에 휩싸인 차가 인도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지금 그는 꽤 안전하다고 믿고 있었다.
암만 미치광이들이라고 하지만 무슨 원수 사이도 아니고, 차도를 넘어 저 많은 사람들 중 자신만을 노리고 달려올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바로 뒤쪽에는 아주 먹기 좋으라고 내장을 비우고 엎어져 있던 대머리 아저씨도 있고…….
“왜 하필 나야?”
버럭 소리를 지르며 뒤를 돌아본 성준의 가슴이 철컹 내려앉았다. 조금 전 지나친 대머리 아저씨가 사방으로 분비물을 튀기며 빠르게 달려온다.
왜…… 왜? 이건 대체 뭐 이런 게 다 있단 말인가.
방금 전 그가 지나쳤던 것은 분명히 괴로워하며 쓰러진 피해자였는데, 이제는 광인이 되어 그를 쫓는다. 그리고 치사할 정도로 빠르다. 평소에 운동을 했어야 한다고 아저씨를 비웃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아저씨, 이러지 마요!”
한계까지 몰린 근육에게 채찍질을 해서 달리는 속도를 높인 성준이 울부짖었다. 아저씨는 방금 전부터 한 가지 단어만 계속 반복해서 내뱉고 있었다.
그롸아악!
직선으로 정직하게 달려서는 절대 뿌리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성준은 차도를 가로질렀다.
빠아앙! 빠빵!
등 뒤에서 달려오던 자동차들이 그를 피해 핸들을 틀면서 경적을 울려 댔다.
‘어머, 자기야. 이거 뭐야?’ 차 안에서 핸드폰을 내밀고 찰칵거리는 것들도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준은 서울 운전자들의 실력에 자신의 목숨을 맡기고 무작정 뛰었다. 막 중앙선을 넘었을 때, 번쩍거리는 경광등의 불빛이 성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성준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콰앙~!
채 완전히 멈춰 서지 못한 경찰차가 성준을 들이받았다.
“으으윽…….”
고통스런 비명을 흘리면서도 성준은 무릎을 감싸 쥐고 다시 일어났다. 깨진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려 눈이 잘 떠지지 않는다.
그래도 달아나야 한다. 이를 악문 성준은 뜨끈뜨끈하게 달궈진 경찰차 보닛 짚고 절뚝이며 걸음을 옮겼다.
“어이, 뭐하는 거야? 차도로 뛰어들면 어떡해?”
경찰차 문이 열리고 운전석에 있던 경찰이 호통을 쳤다. 성준은 손을 들어 경찰의 뒤를 가리켰다.
저 아저씨 좀 잡아줘요…… 라고 말하고 싶은데, 바짝 말라 있는 입에서 소리가 잘 나오질 않는다. 말을 하려고 힘을 줄 때마다 폐가 터지는 것 같다.
“저기, 저…… 으으윽, 조심…… 어으!”
갈비뼈가 부러진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아플 리가 없다. 성준은 옆구리를 감싸 쥐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뭐라는 거야? 어이, 술 먹었어요? 지금 가뜩이나 비상이 걸려서 바빠 죽겠구만…….”
경찰의 뒤쪽으로 대머리 아저씨가 뛰어오는 게 보인다. 아주 가까워졌다. 성준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뒤! 뒤! 으윽!”
성준이 소리를 낼 때마다 부러진 갈비뼈는 확실하게 응징을 해 준다.
성준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다시 눈을 꾹 감은 채 몸을 움츠렸다. 감긴 눈의 깜깜한 시야 저 너머에서 경찰의 비명이 들린다. 그리고 또 다른 경찰들의 당황한 목소리도…….
“으아악! 이건 또 뭐야? 으악!”
그롸아아악!
“김 순경! 김 순경, 괜찮아? 야! 이 새끼가!”
목을 물린 경찰이 곤봉을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동안, 조수석에 있던 경찰이 벌컥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갑자기 열린 조수석 문에 맞아 성준은 뒤로 벌렁 넘어졌다. 조수석 경찰은 성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대머리 아저씨에게 뛰어가 곤봉으로 등짝을 후려갈기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새끼야! 이 미친 새끼!”
아마 그는 그 정도면 충분히 대머리 아저씨를 제압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준은 잘 안다. 고환이 터져도 끄떡없는 놈들이다. 이쪽에서도 죽일 생각을 하고 싸워야 하는 상대다.
“이…… 이게 왜 안 떨어져? 이 개새끼야!”
당황한 조수석 경찰이 곤봉으로 대머리의 어깨며 다리, 등을 계속 후려쳤다. 아무 효과도 없다.
대머리는 여전히 경찰의 목을 단단히 깨문 채 고개를 흔들어 더욱 깊숙이 이를 찔러 넣었다. 근처의 경찰차들도 차를 세우고 달려왔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조수석 경찰에게 성준이 말했다.
“……쏴요. 때려 봐야 소용없어.”
너무 작은 소리로 우물거려 그런 것인지, 아니면 성준의 말을 귓등으로 듣는 것인지 조수석 경찰은 여전히 곤봉만 휘둘렀다. 답답하다. 성준은 숨을 고른 뒤, 있는 힘껏 외쳤다.
“씨발, 쏘라고!”
타앙!
마침내 총성이 울렸다. 성준은 그제야 그가 목표로 했던 인도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멈춰 서 있던 자동차의 승객들은 난데없는 총소리에 의자 깊숙이 몸을 숨기며 짧은 비명을 질렀다.
타앙! 타앙!
계속해서 도로를 뒤흔드는 소리.
그런데도 여전히 그놈의 그롸악거리는 울부짖음은 끊임없이 계속 이어진다. 성준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여기서 달아나는 게 먼저다.
“끄응, 제기랄. 이거 후유증 남는 거 아니겠지?”
절뚝거리는 오른쪽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성준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꺾였던 무릎이 땅을 디딜 때마다 불로 지지는 것 같다.
한 가지 그에게 위안을 주는 사실은 이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끝난다는 것이었다. 삼각지역까지 100미터도 남지 않았다. 이제 다 왔다.
“근데…… 내가 어디를 가고 있는 거지?”
성준은 스스로에게 물으며 고개를 들었다.
새벽까지 비가 그렇게 쏟아졌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화창하게 갠 하늘, 그리고 요새처럼 커다란 빌딩.
별과 닻이 그려진 깃발을 보자 그제야 비로소 성준은 자신이 왜 삼각지까지만 가면 안전하다고 생각했는지 깨달았다.
무장한 군인들이 저기에 있다. 다시 힘을 얻은 성준은 부지런히 걸었다.
그리고 국방부 정문에 도달했을 때, 이미 그곳에는 먼저 도망쳐 온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다들 생각하는 게 비슷비슷한 것이다.
하지만 분위기는 그가 기대했던 것과 영 달랐다. 입구 초소를 지키고 있던 헌병은 흰 장갑을 낀 손을 들어 올리며 난입하려는 사람들을 제지하고 있었다.
“왜 못 들어가게 하냐고! 지금 저기 뭔 난리가 난 줄은 알아? 사람들을 잡아먹는다고!”
“제발 들여보내 줘요. 여기까지 얼마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왔는데…….”
몸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숨을 헐떡거리며 애원을 한다. 흘러내린 피만 봐도 그들이 얼마나 힘겹게 달려왔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헌병의 대답은 기계적이고 단호했다.
“사정은 알겠습니다만, 이곳은 피신하는 곳이 아닙니다. 인근 경찰서나…….”
“그럼 너희는 대체 뭐하러 있는 거야, 이 새끼야!”
눈가에서 피를 흘리는 아저씨가 헌병의 말을 끊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헌병의 눈빛이 흔들린다. 그의 뒤에서 총을 들고 있는 다른 보초병은 잔뜩 긴장한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우리를 지키라고 있는 거잖아? 이 건물, 너희 총! 이, 이 쇳덩어리까지 전부 다 우리 세금이야!”
이번에는 젊은 여자가 바리케이드를 두드리며 호통을 쳤다. 사람들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직전이지만, 헌병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그 누가 21세기 서울에서 집단으로 사람을 잡아먹는 대규모 광인들의 습격을 예상할까. 헌병은 그저 근무수칙대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어쨌든 물러서 주십시오. 여기는 피신하는 곳이 아닙니다. 저는 그 말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게 기폭제가 되어 사람들은 이성을 잃고 덤벼들었다.
화가 난 사람들은 헌병의 멱살을 잡고 밀친 뒤, 억지로 국방부 차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지그재그로 설치된 노란색 바리케이드를 넘기도 하고, 허리를 숙여 그 아래로 기어 들어가는 이도 있었다.
“멈춰! 쏜다!”
뒤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보초들이 총을 겨누며 외쳤다.
아주머니 하나가 목이 찢어져라 고함을 질렀다.
“쏴! 쏴봐! 이 미친 새끼들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들 설마 민간인에게 총을 쏠까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 믿음은 배신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헌병들은 그녀를 곱게 들여보내 주지도 않았다.
언덕길을 뛰어 영내로 들어가려던 아주머니는 헌병에게 밀쳐져 나뒹굴었고, 그때부터 들어가려는 자들과 막아서려는 자들의 정말 말도 안 되는 몸싸움이 벌어졌다.
성준은 그 싸움에 참전하지 않았다. 걷는 것도 힘에 부치는 몸으로 저 헌병들을 뚫고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여기는 틀렸어. 다른 살길을 찾아봐야지.’
성준은 힘이 빠져 꺾여 버린 무릎을 달래며 다시 인도로 나섰다. 그리고 마지막 희망까지 날아가는 광경을 보고 말았다.
저 멀리서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삼각지역 바깥으로 뛰어나오고 있다. 울상이 된 사람들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쓰러뜨린 광인들이 살을 뜯고 내장을 파낸다. 이제 앞뒤가 다 막힌 것이다.
“……씨발. 흐흐흐, 진짜…….”
성준은 다시 차도로 뛰어들었다. 소용없다는 건 잘 알지만, 한 발짝이라도 더 도망가보고 싶었다.
빠앙!
차들이 아슬아슬하게 그를 피해 간다. 자동차가 갈라놓은 바람이 휙휙, 코끝을 스쳤다.
하지만 성준은 겁내거나 멈춰 서지 않고 똑바로 걸었다. 광인들의 이빨에 물어뜯겨 죽는 것에 비하면 별로 무서울 것도 없다. 몇 몇은 차를 세우고 좀 태워 달라며 사정을 했다.
그러나 차 안의 그들은 이 느닷없는 혼란과 위험으로부터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자동차들은 매정하게 쌩쌩 달려 그들을 피해갔다.
“아아악!”
뒤쪽 길 건너편에서는 계속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더 자주, 더 많은 사람들이 광인들에게 목숨을 잃고 있다.
콰콰쾅!
자동차가 어딘가를 들이받고 터지는 소리도 간간이 끼어든다. 지옥이다.
“하아, 하아…….”
정말 열심히 걸었는데, 차도를 다 건너는 데만도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 아픈 것은 이루 말할 수도 없다. 어린애 머리만큼 부어오른 무릎도 한계지만, 갈비뼈가 쑤셔 대는 통증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애교였다.
게다가 아까 광인에게 물렸던 왼팔…… 이제 아예 감각이 없다. 멈춰 선 성준은 비통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녹사평역 쪽을 돌아보았다.
아까 그 차에 탈 수 있었더라면…….
“끄으응.”
그가 선택한 길은 숨어 보는 것이었다. 정말 하늘이 돕는다면 광인들도 그를 보지 못하고 지나칠지도 모른다.
군인 형제가 서로 끌어안는 커다란 구조물 밑에는 개구멍처럼 조그만 구멍이 앞뒤로 뚫려 있다. 성준은 그 안에 기어 들어가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
“아야야…… 어흐.”
온몸의 상처에서 한꺼번에 고통을 쏟아붓는다. 성준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젠장, 끝내 이름도 못 알아냈잖아.”
마지막 가는 길에 적어도 애인 이름은 부르고 싶었는데, 그것도 잘 안 된다. 군대에서 유격을 뛰었을 때도 그냥 같은 과 여자애 이름을 애인인 것처럼 외쳤었는데…….
‘…… 대체 이름이 뭐야? 장미는 무엇이라 불러도 그 향기 그대로인 것을…….’
어울리지도 않는 셰익스피어의 문구가 난데없이 머릿속에서 튀어나오는 바람에 성준은 잔뜩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크극, 문학 C를 맞은 주제에.
“날 걱정해 줬지…….”
자신이 광인에게 끌려갈 때 보여주었던 그녀의 안타까운 눈빛이 생생하게 떠올라서 고통을 좀 달래 주었다.
우린 아마 분명히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거야…….
성준은 다시 한 번 망상에 빠져 보기로 했다.
그녀와 행복하게 사랑을 나누고, 함께 아침을 맞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상상까지 다 해보려 한다. 이제 그에게 허락된 것은 그 정도뿐이다. 우울하거나 나쁜 생각은 하지 않을 거다.
그르르르…….
익숙한 소리, 익숙한 냄새.
굴의 입구가 어두워진다. 더 알고 싶지 않아서 성준은 눈을 꼭 감았다. 피로 물든 광인의 머리가 굴속으로 쑥 들어오는 것을 그는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