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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외전: 헬게이트 (3) (253/449)


253. 외전: 헬게이트 (3)
2022.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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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이야기는 좀비 세상 첫날, 박테리아가 확산되는 과정을 담은 외전입니다.

아, 다행이다. 그녀 역시 울상을 지으면서 계단을 향해 뛰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택한 계단은 성준이 고른 것보다 사람들의 줄이 더 긴 쪽이었다.

드르르릉.

차단벽 열리는 소리가 죽음의 선고처럼 들린다. 이제 1초 후면 지하철의 문도 열릴 것이다. 자기가 올라갈 차례가 왔지만, 성준은 뒤돌아서서 뛰었다.

“이쪽이 더 빨라요! 이쪽으로 와요!”

사람들에게 밀려 맨 뒤에 서 있는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아끌며 성준이 외쳤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희고, 부드럽고, 가느다란 팔목이다.

“네?”

깜짝 놀란 그녀가 울상을 짓고 물었다.

“빨리 와요!”

성준과 그가 가리킨 계단을 번갈아 본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함께 뛰기 시작했다. 지하철 문은 벌써 열렸다. 그와 동시에 피투성이의 광인들이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일제히 튀어나왔다.

광인들에 섞여 멀쩡한 사람들도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는데, 모두 다 피를 뒤집어쓴 채여서 겉모습만으로는 누가 광인이고, 누가 멀쩡한 사람인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었다.

성준과 그녀는 가능한 한 광인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플랫폼의 반대편으로 돌아 뛰었다.

그래 봐야 불과 5미터 정도의 거리였다. 그들이 계단에 닿을 때까지 제물이 되지 않을 수 있던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으악! 으아아!”

광인들에게 붙잡힌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우적! 콰직!

광인들은 두셋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사람을 덮친 다음, 닥치는 대로 물어뜯었다.

“여기로 도망가면 돼요!”

누군가 지하철역 맨 끝의 비상 대피 통로 문을 열고 외치자 일부는 그쪽을 우르르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성준이 보기에 그리로 가는 건 자살행위였다.

“우린 위로! 위로 가요! 뛰어요!”

사람들이 빠진 계단을 두 걸음씩 뛰어올랐다. 그녀 역시 하이힐을 신고서도 잘 따라와 줬다. 승강장 위쪽에서는 다른 계단으로 올라온 광인 몇이 벌써 자리를 차지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꺅!”

앞서 달리던 여자 하나가 머리채를 휘어 잡혀 쓰러졌다. 또 다른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피해서 달리려다가 제풀에 걸려 넘어져 버렸다. 광인들은 인정사정 보지 않고 올라타 살점을 뜯어내고 피를 뿌렸다.

그들의 처지가 불쌍했지만, 내 몸이 먼저다. 성준은 정의감을 잠시 버리기로 하고 그녀의 팔목만 꼭 잡고 죽어라 뛰었다. 긴 에스컬레이터에서는 대혼잡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한 칸에 두 명밖에 탈 수 없는 걸 빤히 알면서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몸을 쑤셔 넣으려 들었고, 결국 세 명씩, 네 명씩이 억지로 한 계단을 차지했다.

그렇게 하는 바람에 얌전히 순서대로 올라가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허비된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 같았다.

“하아, 하아…… 구두 좀……. 구두 좀 벗을게요.”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초조하게 좌우로 서성거리고 있을 때,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팔목을 놓아달라는 말일까……. 하지만 놓고 싶지 않다. 지금 이 손을 놓아버리면 왠지 다시는 그녀를 못 볼 것만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성준이 잠시 망설이는 동안 그녀는 오른손만으로 하이힐을 벗었다. 언제 살갗이 벗겨졌는지 찢어진 스타킹 사이로 피가 조금 맺힌 발목이 보였다.

“으아악!”

뒤쪽이 더욱 혼란스러워져서 성준은 고개를 돌렸다.

계단을 뛰어 올라온 여러 명의 광인들이 뒤처진 사람들을 붙잡고서 피와 살이 튀는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높은 비명이 울렸다.

끼이익! 쿠쿵!

“어! 어! 어! 으악!”

이번엔 앞쪽이다. 뒤쪽보다도 오히려 더 큰 비명을 지르며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에서 기우뚱거린다. 한꺼번에 제한 중량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타는 바람에 에스컬레이터의 모터가 멈춰 서버린 모양이다.

갑자기 멈춰 버린 충격에 억지로 좁게 끼어 서 있던 사람들이 중심을 잃으며 비틀거리다가 옆으로 떨어져 내린다. 그리고 그들이 휘두른 팔에 맞아 더 많은 사람들이 도미노처럼 차례로 떨어졌다.

으아아아~!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며 떨어지는 사람들의 비명, 적어도 3층 높이는 될 것 같은 바닥에 그들의 몸이 부딪혀 터지며 나는 끔찍하고 둔중한 소리, 그리고 뒤쪽의 아비규환까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공포심 때문에 미치기 직전까지 내몰렸다.

“뒤쪽으로 돌아가면 계단이 있어요. 그리로 가요! 여기는 버리고.”

멈춰 놓은 반대 방향 에스컬레이터로 사람들이 몰려가는 동안, 성준과 그녀는 계단을 택했다.

그쪽이 훨씬 더 넓다. 곁에 서 있던 한 무리의 외국인들도 일제히 그를 따라 뛰어왔다. 계단을 향해 돌아 뛰는 동안, 그들은 사람들이 몰려서서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지나쳤다.

“아, 탈 수 있다는데 왜 이래? 좀 같이 삽시다.”

“이 미친 새끼야, 벨 소리가 나잖아! 내리라고!”

성준과 그녀가 계단 어귀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밀고 밀치는 싸움은 계속되었고, 엘리베이터 문은 닫히지 못했다. 그리고 뒤쫓아 달려온 광인들의 이빨이 승강이를 하고 있던 사람들의 뒷목에 박혔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뿔뿔이 흩어지고 두 명의 광인이 풀쩍 뛰어 안으로 들어가 버린 다음, 마침내 몇 분간이나 열려 있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God damn it!”

성준보다 앞서 달리던 외국인 중 하나가 욕설을 내뱉으며 멈춰 섰다. 언제 그 위에까지 올라가 있던 것일까, 피투성이 얼굴의 광인 셋이 그르릉, 소리를 내며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중이었다.

그롸아악!

광인 하나가 부웅― 몸을 날려 외국인 무리를 덮쳤다. 사람들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와중에 성준의 얼굴보다도 커 보이는 삼각근을 가진 흑인이 날아오는 광인의 턱에 주먹을 날렸다.

빠악!

엄청난 소리가 났지만, 광인은 조금도 아픈 기색 없이 달리던 기세 그대로 흑인을 들이받고 쇄골을 깨물었다.

“끄아악!”

흑인이 비명을 지르며 밀려 넘어졌다.

“Jake!”

그의 동료들은 메고 있던 배낭을 벗어 그것으로 광인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특수 투명 아크릴로 만들어진 계단 아래로 광인이 굴러떨어진다. 성준은 그녀의 팔목을 놓지 않은 채 옆으로 피하며 뛰었다. 여기에서 멈추면 죽는다.

흑인 역시 어깨에서 피를 뚝뚝 떨어뜨리면서도 동료들의 부축을 받아 곧바로 벌떡 일어났다.

앞쪽에서는 다른 외국인들이 가방을 방패 겸 무기 삼아 열심히 광인들과 싸우고 있었다. 다행히 이쪽이 수적으로 매우 우세했고, 외국인들은 싸움에 익숙해 보였다.

“괜찮아요?”

조금은 마음을 놓은 성준이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게 방심하면 안 되는 거였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의 눈동자가 갑자기 공포로 물들며 커졌다.

“조심해요!”

그녀가 외치는 소리보다 빠르게 성준의 몸이 뒤로 당겨졌다. 광인이 휘두른 팔에 성준의 배낭이 걸린 것이다.

멍청한 놈, 왜 이렇게 짐만 되는 무거운 걸 계속 달고 다녔지?

강력한 힘에 끌려가는 동안 성준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그거였다. 그리고 곧 엄청난 공포가 밀려왔다.

‘……죽는구나!’

그녀의 팔목을 잡았던 손이 풀어진다. 올라오는 내내 얼마나 세게 잡아당기고 있었는지 그녀의 가느다란 팔목에는 도장을 찍어 놓은 것처럼 붉게 성준의 손 모양이 그대로 남았다.

그리고 추락하는 중력에 의해 시선이 옮겨 가면서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찌푸려진 이마와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공포보다 더 커다란 감정을 본 순간, 성준은 갑자기 이를 악물었다. 엄청난 용기와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이익!”

아가리를 쩍 벌리고 달려드는 광인의 얼굴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먼저 몸을 날려 있는 힘껏 박치기를 했다.

콰각!

성준의 단단한 머리에 받힌 광인의 코가 무너지고 광인의 이빨은 허공을 깨물었다.

성준은 있는 힘껏 고개를 젖혔다가 다시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연속해서 박치기를 날렸다.

콱! 콰직!

광인의 눈가가 함몰되면서 눈알이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으아아아아!”

여전히 광인에게 두 팔을 붙들린 채였지만, 성준은 기죽지 않고 계속해서 들이받았다.

이마가 이지러지고 찢기는 고통보다, 그녀 앞에서 멋지게 승리하겠다는 초인적 의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드레날린의 힘이 몇 배나 더 강했다.

그리고 마침내 성준은 미친 듯이 몸부림을 쳐서 단단히 조이고 있던 광인의 손아귀로부터 빠져나왔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이전에 그는 한 번도 이만큼 치열한 싸움을 해본 적이 없었다.

빠악!

성준과 광인의 거리가 조금 떨어지자 곁에서 가슴을 졸이고 있던 그녀가 하이힐을 휘둘러 광인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나를 위해서……. 성준에게는 감동적인 일이었지만, 공격의 실효는 없었다. 광인은 하이힐을 휘두르기 위해 가까이 다가왔던 그녀의 팔을 덥석 물었다.

“아얏!”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

그건 성준이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소리 중 하나였다. 성준의 눈에 불이 켜졌다.

“이 개새끼야!”

성준은 가방을 휘둘러 광인의 머리를 후려쳤다.

뻐걱!

광인의 턱이 빠져 덜렁거리고, 그 틈에 그녀는 풀려났다. 가방 안에 들어 있던 두꺼운 토익 책이 처음으로 제 값어치를 했다. 이어 앞 발차기로 광인의 배를 밀어 찼다.

중심을 잃고 계단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 내려가는 광인의 꼴을 보고 나서도 흥분해서 벌렁거리는 가슴이 도무지 가라앉질 않아, 성준은 씩씩거리며 아래에서 기어 올라오고 있는 광인들의 행렬을 노려보았다.

“빨리 가요.”

이성이고 뭐고 닥치는 대로 죽이고만 싶어진 성준의 눈앞으로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땀에 젖은 작은 손을 꽉 잡고 나니 미친 듯이 뛰던 심장도 조금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뭐라고 멋진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아 성준은 그냥 맞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녀와 성준은 부지런히 계단을 뛰어올랐다. 앞쪽에서도 외국인들이 하나 남았던 광인을 난간 아래로 밀어 던지는 데 막 성공한 참이었다.

햇살이 내리쬐는 대지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성준과 외국인들은 눈빛으로 웃음을 교환하며 마지막 계단을 뛰어넘었다.

빠아아앙!

핵 벙커처럼 깊은 녹사평역을 겨우 탈출했다 싶었는데, 도로 위에서도 이미 난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성준보다 앞서 올라온 사람들이 신호를 무시하고 차도를 가로질러 내달리는 바람에 거리는 날카로운 브레이크 파열음과 경적 소리, 범퍼가 부딪치며 내는 소음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최악은 아니었다.

조금 전 광인들을 태운 채 출발했던 엘리베이터가 지상에 도착해서 문이 열리자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두 팔을 휘두르며 뛰어나왔고, 그게 신호가 되어 거리 위의 모든 사람들은 더욱 필사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롸아악!

으르르!

광인들은 토끼를 쫓는 사냥개처럼 빠른 속도로 사람들을 따라잡았고, 제압한 뒤 물어뜯었다.

“으악!”

목덜미를 물린 남자가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발버둥을 쳐서 광인을 밀어냈다.

광인이 옆으로 넘어지자 남자는 피가 콸콸 흘러나오는 목을 움켜쥐고 벌떡 일어나 반대쪽으로 몸을 날려 데굴데굴 굴렀다. 어떻게든 살아 보려는 노력이었는데, 방향이 좋지 않았다.

“어어어…… 이런!”

차도로 뛰어든 사내를 보고 기사가 급하게 핸들을 돌려봤지만, 대형 관광버스는 그만큼 민첩하게 움직여 주지 않았다.

콰직!

사내를 깔아뭉갠 버스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옆 차선의 승용차 두 대를 연달아 들이받은 뒤, 인도를 덮치며 옆으로 누워버렸다.

빠아아앙! 빵! 빵!

버스를 피해 보려던 차들이 경적 소리를 내면서 지그재그로 춤을 추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서로를 들이받은 다음에야 멈춰 섰고, 그 급정거는 뒤에서 따라 달리던 자동차들의 연쇄 추돌로 이어졌다.

그렇게 대혼잡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광인들은 꾸역꾸역 계단을 기어 올라왔다. 성준과 그녀는 외국인들과 함께 삼각지 방향으로 달렸다.

삐이익!

맞은편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고 근처 의경들이 역사를 향해 뛰어왔다. 경찰을 보고 그렇게 반가운 적은 또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대로 그들에게 몸을 맡긴 채 이젠 그만 좀 쉬고 싶었다.

하지만 믿음직한 것도 잠시. 그들이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성준은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의경들을 지나쳤다.

의경들도 외국인들과 한 무리를 이루며 뛰고 있는 그들에게까지는 관심을 줄 수 없을 만큼 다급한 표정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힘내요. 조금만 더 가면…… 하아, 하아…….”

성준은 그녀를 돌아보며 기운을 내라고 격려했다. 그녀는 신뢰가 가득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여 준다.

하지만 실제로는 조금 간다고 해서 무슨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말해서 안심을 시켜 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게 남자가 해야 할 일 같았다.

끼기긱!

혼란스럽던 왼편 도로에서 갑자기 자동차 한 대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인도 위로 날아올랐다. 성준 일행은 차에 깔리지 않기 위해 몸을 움츠려야 했다.

콰콰쾅!

휘청대던 자동차는 도로변에 설치된 변압기를 들이받고 나서야 멈춰 섰다. 철제 변압기가 날아가고 매설되어 있던 굵은 고압선들이 당겨져 올라왔다.

파짓! 파짓!

피복이 벗겨진 고압선들이 촉수처럼 흔들리면서 위협적인 파란 불꽃이 튀었다. 그다음에 일어날 일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성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뒤돌아 뛰었다.

퍼엉! 퍼, 퍼펑!

변압기가 폭음을 일으키면서 폭발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화약 놀이 정도의 작은 폭발이었지만 곧 커다란 연쇄 폭발로 이어졌고, 자동차에는 화르르, 불이 붙어버렸다.

뒤쪽엔 미치광이 피투성이들, 앞쪽엔 불이 붙은 자동차에 고압선까지…….

인도 양쪽이 딱 막혀 버린 성준 일행이 택할 수 있는 방향은, 이제 패닉에 빠진 자동차들이 내달리는 차도로 뛰어드는 것뿐이었다. 변압기와 배전반이 망가지는 바람에 더 이상 신호등조차 작동하지 않았다.

그르르르!

어느덧 익숙해지기까지 한 그르렁 소리가 가까이에서 울려 성준은 뒤를 돌아보았다.

5미터 뒤에서 광인 셋이 숨도 쉬지 않고 달려온다. 피하기 어려울 만큼 가깝고 빠르다. 그 뒤쪽으로 광인들과 사투를 벌이는 의경들의 모습이 보였다.

“제 뒤에 숨어요.”

성준은 그녀를 막아선 뒤, 손을 놓고 싸울 준비를 했다. 외국인들도 비장한 표정으로 자세를 낮췄다.

그롸아악!

울부짖음을 앞세워 광인들이 몸을 날렸다. 성준은 배낭으로 그 입을 틀어막았다.

와직!

배낭을 물어뜯는 광인의 힘에 밀려 성준이 주춤거렸다. 찢어진 배낭에서 필기구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애꿎은 배낭에 구멍을 뚫어 놓은 광인은 곧바로 다시 아가리를 벌리며 성준의 목을 노렸다.

성준은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광인의 사타구니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아무리 미친놈이라고 해도 그곳만큼은 아플 테니까…….

발차기는 제대로 들어갔다. 신발 너머로 발끝에 걸리는 느낌.

이건 분명히 터졌다!

“어?”

하지만 광인은 곧바로 달려들어 성준을 밀치고 올라탔다.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는단 말인가…….

필살기가 무산된 성준의 얼굴에는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갸악!

성준의 광대뼈를 향해 광인의 누런 이가 내리꽂힌다. 성준은 왼팔을 들어 막았다.

꽈드득!

인정사정 두지 않는 광인의 이빨이 성준의 팔뚝을 파고들었다.

“으윽!”

성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독하게 고통스럽다. 그런데 동시에 이 정도 아픔이라면 충분히 참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도망을 쳤는지 우스울 정도였다. 무서워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였는데…….

광인이 왼팔을 물어뜯고 있는 동안 성준은 오른팔로 바닥을 더듬어 뭔가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았다.

‘제기랄, 아까 떨어진 볼펜이라도 좀 걸려 줘라.’

바닥을 곁눈질하는 성준의 시야에 그녀의 흰 손이 들어왔다. 그녀가 화단에서 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야아!”

우는 것인지, 기합을 넣은 것인지 모를 소리와 함께 몸을 날린 그녀는 두 손으로 돌을 꼭 쥐고 광인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퍼걱!

그래도 성준의 팔뚝을 물고 있는 광인의 턱에서는 힘이 빠지지 않는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온 몸을 이용해 돌을 내려쳤다.

퍼걱!

또 한 번!

퍼걱!

광인의 머리가 이제야 조금 흔들린다. 그때, 성준의 손에도 볼펜이 걸렸다.

“죽어!”

성준은 금속제 파카 볼펜을 길게 쥐고 광인의 귀를 찔렀다.

푹! 고막 저 안쪽까지 볼펜이 들어가 꽂히는 느낌이 손을 타고 전해졌다. 뭔가에 꽉 껴서 잘 빠지지 않는 볼펜을 억지로 비틀어 뺀 성준은 다시 한 번 같은 자리에 볼펜을 쑤셔 넣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 역시 쉬지 않고 돌을 휘둘렀다. 둘 중 누구의 공격이 효과를 거둔 것인지는 모른다. 분명한 것은 절대로 멈추지 않을 것 같던 광인이 나무토막처럼 맥없이 쓰러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끄응.”

광인의 시체를 밀쳐 내고 일어난 성준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손은 돌을 휘두르며 난 상처 때문에 엉망이 되어 있었다. 손톱이 부러지고 살갗이 찢겨 손바닥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성준의 가슴 저 안쪽에서 뜨거운 기운이 확 올라왔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성준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흐느낌이 가슴을 통해 전해지자 행복해서 미칠 것 같았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 왼팔의 고통이 제대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바로 곁에서는 피범벅이 된 외국인들이 두 명의 광인을 상대로 한 싸움을 거의 끝내 가고 있었다. 광인 한 놈은 차도로 떠밀려져 박살이 났고, 또 다른 광인은 온몸의 뼈가 부러진 채 바닥을 기었다.

“Finish him.”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명령하자, 워커를 신은 외국인이 머리를 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광인의 턱을 향해 킥을 날렸다.

빠각!

광인의 목이 정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더니,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살인의 현장을 지켜보게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성준은 죄의식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게 광기에 사로잡힌다는 걸까…….’

감상에 빠질 시간은 없었다. 앞쪽의 불길은 잦아들 기미가 없이 무섭게 타오르고 있고, 주변에서는 광인과 사람들이 얽혀 비명을 질러 댔다. 성준은 그녀의 손을 다시 잡고 차도 위를 뛰었다.

하지만 어디로?

그걸 알 수가 없어 두려웠다. 과연 삼각지까지 가면 안전할 수 있을까?

그때, 백마를 탄 기사가 그들 앞에 등장했다.

“Hey, Larry! You’re here. What the hell is going on? Terror? Oh, my…… you’re bleeding!(여, 래리! 여기 있었네. 이게 대체 뭔 난리야? 테러야? 어, 너…… 피 흘리잖아!)”

커다란 미제 SUV를 그들 앞에 세우고 군복을 입은 운전자가 물었다.

“Thank God. Glen, You’ll never know how glad I am. Are you going to camp?(아이구, 하나님. 글렌, 너를 만나는 게 얼마나 반가운지 넌 모를 거야. 부대로 들어가나?)”

조금 전 명령을 내렸던 콧수염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안도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운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Yes, you wanna ride? Hop in.(응, 태워 줄까? 타.)”

콧수염이 SUV 뒷문을 열고 사람들을 태웠다. 뒤쪽이 트럭처럼 긴 3열짜리 차였다.

“Injured fellas first.(부상자 먼저.)”

콧수염의 명령에 따라 아까 어깨를 물린 흑인, 조금 전 얼굴이 찢긴 여자, 피를 많이 흘린 백인 사내가 차례로 차에 올라탔다.

‘좋겠다. 이 자식들, 자기 부대로 들어가나 본데.’

그들의 대화를 반만 알아들었어도 성준에게 부러움을 불러일으키긴 충분했다. 사람들이 흰색 SUV에 오르는 동안 어딘가에서 또 비명이 울려 퍼졌다.

성준은 옆에 선 그녀의 발을 내려다봤다. 신발도 없이 달려온 그녀의 발은 벌써 아까부터 만신창이였다. 이제는 좀 그녀를 쉬게 해주고 싶었다.

젠장, 회화 공부 좀 열심히 하는 건데…….

“어, 음…….”

성준이 잘 떨어지지 않는 혀를 억지로 굴리며 입술을 뗐다. 외국인들이 그를 돌아보았다.

“어, 쉬…… 투…… 플리즈!”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의 발을 가리켰다. 아까 광인에게 물린 상처와 싸우다가 얻은 상처도. 멈칫하던 콧수염이 운전자와 눈빛을 교환하더니 타라는 손짓을 했다.

성준은 주저하는 그녀를 달래 차 안에 밀어 넣었다. 그러면서 은근히 바라고 있던 것도 사실이다. 외국인들이 잠시나마 함께 싸웠던 그 역시 태우고 가주기를…….

그런데 사건은 엉뚱하게 전개되었다.

성준이 그녀에게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라도 알려 줄까 하던 순간이었다. 문 앞에서 사람들을 차례로 태우던 콧수염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물었다.

“Where’s Max?(맥스 어디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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