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 외전: 헬게이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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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외전: 헬게이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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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외전: 헬게이트 (2)
2022.05.10.
※ 이 이야기는 좀비 세상 첫날, 박테리아가 확산되는 과정을 담은 외전입니다.
“여, 열쇠, 저한테 없어요. 여기 맡겨야 한다니까 그, 그냥 가셨잖아요.”
그 말을 하는 주차 관리원의 목소리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그랬지…….
충기에게도 기억이 되살아난다. 자동차 열쇠는 운전을 했던 빡빡머리의 주머니 안에 있다. 그리고 지금 그 빡빡머리에게 되돌아가서 열쇠를 찾아오려 했다가는 오히려 발목을 붙들리게 될 것이다.
차는 포기해야 한다. 덜덜 떠는 주차 관리원 뒤편에는 무수한 자동차들의 열쇠가 유혹하듯 걸려 있다. 저 열쇠 중 아무거라도 하나 집어 들고 잠시만 차를 빌리고 싶은 유혹에 1초쯤…… 충기는 갈등했다.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만약 그랬다간 저 멍청한 새끼가 신고를 할 테고, 괜히 긁어 부스럼만 될 터다. 이제부터는 외국행 비행기에서 내릴 때까지 가능한 한 눈에 띄는 짓은 하면 안 된다.
“이런 씨발!”
마음이 급해진 충기는 욕설을 내뱉으며 거리로 뛰어나갔다. 까짓거, 택시를 잡아타면 된다. 아니, 어쩌면 이 몽롱한 정신으로 운전을 하는 것보다 그 방법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어느새 동이 터 오는 거리에 발을 내딛자 피로에 지친 몸이 휘청거렸다. 아직 출근 시간 전의 거리에는 빈 택시가 오가는 사람보다 많았다.
“택시! 어이, 택시!”
충기는 크게 손을 저으며 애타게 택시를 불렀다. 간간이 병원 쪽에서 들려오는 괴성과 비명은 그의 마음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택시들은 그를 보지 못하는 것처럼 멈춤 없이 쌩쌩 지나가 버렸고, 개중에는 일부러 피하는 놈들까지 있었다.
“왜 이러는 거야? 개새끼들이 단체로 나를 엿 먹이는 것도 아니고…….”
한참 동안 허탕을 친 충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투덜거렸다. 신호에 막혀 그의 앞에서 멈춰 선 검은 자동차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훨씬 더 오랫동안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이런 씨발, 이러니까 택시들이 부리나케 도망을 쳤지…….”
검은 자동차에 비친 그는 얼굴부터 허벅지에 이르기까지 온통 시뻘건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야말로 야차의 모습이다. 하얀 와이셔츠의 가슴부터 배까지가 빨갛게 물들어 있어서 해부실에서 막 튀어 나왔다 해도 믿어질 정도다.
“이게 대체 어디서 이런 거야?”
이유를 생각하자마자 떠오른 것은 최성호가 날뛰던 수술실에서 자신에게 기대 보려던 젊은 의사였다. 그의 목과 입에서 줄줄 흘러내리던 피의 색깔이 눈에 선하다.
“맞아, 그 개새끼가 피 칠갑을 하고 있었지. 그때 묻었구나.”
충기는 답답한 마음에 혀를 끌끌, 찼다. 확실히 지금 자신의 꼬라지를 보고도 태워 줄 택시 기사는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지……. 병원 화장실에라도 가서 좀 씻고 와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맞은편 차로에서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온 경찰차 세 대가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 조 박사가 울렸던 경보를 듣고 달려온 것이리라.
이제 병원에 돌아갈 수는 없다. 가뜩이나 눈에 띄는 덩치와 외모인데, 이렇게 피까지 뒤집어쓴 채 어슬렁거렸다간 곧바로 체포될 것이 분명하다.
충기는 다른 방법을 찾기로 하고 일단 병원에서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윽!”
또 팔이 찌릿해지며 마비가 온다. 잘린 손끝에서 시작된 통증은 이제 목덜미까지 옮아갔다. 충기는 이를 악물고 버티며 필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어떻게 하면 빨리 가게까지 갈 수 있을까……. 지금 여기서 잡히기에는 목숨을 걸고 살아왔던 지금까지의 세월이 아깝다.
“어푸, 어푸, 으으, 씨발. 퉤!”
썩 내키지는 않지만, 어젯밤에 내렸던 빗물이 고인 곳을 찾아 얼굴이나마 대충 피를 씻어냈다. 담배꽁초가 떠다니는 물에서는 지린내가 났다.
이른 출근을 위해 지하철역을 빠져나오던 사람들이 더러운 물로 얼굴을 씻는 충기의 별난 꼴을 보고 놀라 슬금슬금 갓길로 피해 갔다.
“하필이면 사람들 많은 지하철 쪽으로 와버렸군…….”
투덜대던 충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하철! 그랬지…….
높은 계단 위에 박혀 있는, 용산역이라는 세 글자가 구원처럼 다가왔다. 왜 그 생각을 못 했던 건지 우습기까지 했다. 가게 자리를 알아볼 때 역세권에 사야 한다고 그렇게 신경을 썼으면서…….
구로까지만 가면 그의 룸살롱이 그리 멀지 않다. 충기는 미친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며 역 계단을 뛰어올랐다.
“꺄아아악!”
탕! 탕!
역 안에 들어서기 직전에 병원 쪽으로부터 들려오는 비명과 총소리에 충기는 잠시 경직되어 뒤를 돌아보았다. 몇 명인가 피를 흘리는 사람들이 병원 정문 밖으로 뛰어나오며 살려 달라고 고함을 치는 중이었다.
“어어! 저, 저거!”
충기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질렀다. 조금 전, 병원 안으로 들어갔던 경찰차 중 한 대가 사람들을 깔아 죽일 기세로 급하게 달려 나온다.
비명과 브레이크, 경적 소리를 뚫고 도로로 진입한 경찰차는 채 몇 미터도 지나지 않아 달려오던 차들에 받혀 중앙선 너머로 미끄러졌다.
빠아아앙~!
마주 오던 차들이 경적을 울려 봤지만, 이미 경찰차는 제어 능력이 없었다.
콰콰쾅!
대여섯 대의 차들이 연쇄 추돌을 일으켰고, 경찰차는 날아가다시피 밀려 상가 유리창을 박살 냈다.
와장창!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순식간에 꽉 막혀 버린 용산역 앞 6차선 거리에는 소음과 고성이 난무했고, 그렇게 멈춰 선 자동차들 사이를 피투성이가 된 병원 탈출자들이 헤집으며 뛰어다녔다.
탕―!
병원 안쪽에서는 다시 한 번 총성이 울렸다.
“지옥이 따로 없네……. 미친 새끼들, 잘해 봐라. 난 뜬다.”
충기는 저주를 떼어내듯 침을 탁, 뱉은 후, 지하철 역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가 가장 마지막으로 지하철을 타 봤던 것은, 아마 15년보다 더 오래 전이다.
역 내부의 풍경은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해서 충기는 잠시 우왕좌왕해야 했다. 표를 파는 곳도 없고, 역무원도 보이지 않았다.
“에라이!”
표 사는 것을 포기한 충기는 개찰구를 풀쩍 뛰어넘었다.
혹시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돈으로 물어주면 그만이야…….
“후웁, 욱!”
머리가 흔들렸더니 또다시 구토가 밀려와 충기는 입을 막으며 플랫폼을 향해 걸었다. 몸이 점점 뜨거워진다. 그리고 주변의 소음들이 조금씩 메아리치며 웅웅― 울리기 시작했다.
악몽을 꿀 때처럼 무거워져서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며 세 번의 구토를 거친 끝에 충기는 겨우겨우 플랫폼 위에 도달했다.
“허억, 허억…….”
피가 튄 양복과 와이셔츠를 걸친 충기가 비틀대며 사람들과 부딪칠 때마다 모세의 기적처럼 그의 앞쪽으로 길이 트였다.
사람들은 수군대거나 혹은 외면하면서 가능한 한 그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기를 원했다. 열차가 도착해서 문이 열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로 붐비던 객차지만, 충기의 주변만은 한산했다.
‘여섯 정거장을 가야 하는 건가……. 젠장, 견딜 수 있을까? 끄으응, 으윽!’
머리가 욱신거리고 눈이 가물거려서 문가에 붙은 노선도를 알아보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고통이 파도처럼 휩쓸고 가는 주기가 점점 더 짧아져서, 이제 30초가 길다 하고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다.
충기는 기둥을 붙잡은 손에 힘을 꽉 주면서 쓰러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올 때마다 그의 주변에 둘러져 있던 사람들의 원은 더욱 넓어졌다.
“응? 여기가…….”
또다시 발작처럼 온몸이 불붙는 것 같은 통증이 지나가고 눈을 떴을 때, 충기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깨닫지 못했다.
“뭐지? 여기가 어디야? 사람이 왜 이리 많아? 응? 기차인가? 기사 놈은 어디로 가고 내가 이런 걸…….”
머리통 한구석이 싹 비워진 것처럼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욱씬!
혼란스런 머리가 정리되기도 전에 재차 찾아오는 통증!
충기는 귀신들린 사람처럼 눈을 까뒤집고 거품을 물어 가며 비명을 질렀다. 같은 칸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그런 충기의 기행을 보면서 불평스런 혼잣말을 수군거렸다.
“어우, 무서워. 저 사람, 왜 저래?”
“아, 씨발. 아침부터 재수 없게…… 뭐야?”
“정신병자가 어디서 뭔 사고를 치고 왔나, 가뜩이나 좁아 죽겠는데. 쯧!”
그리고 몇 초 후에 광기 어린 발작을 멈추었을 때, 거기에 웅크리고 있는 것은 더 이상 예전의 충기가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검게 번들거리던 눈동자에는 하얀 막이 씌워졌고, 이빨 사이에서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점액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르르…….
주위를 둘러보던 충기가, 아니, 한때 충기였던 괴물이 목젖을 울리며 그르렁거렸다. 그 소리는 가뜩이나 눈살을 찌푸리며 긴장하고 있던 사람들이 더더욱 뒷걸음질을 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괴물의 몰골을 보지 못하는, 객차의 반대편에 서 있던 승객들은 그들의 자리를 비집으며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의 무례함에 오히려 짜증을 부렸다.
“아, 그만 좀 미세요! 여기도 자리 없어요.”
“그게 아니라 뒤에서 자꾸 밀어서 저도 밀리는 거예요.”
괴물이 최초의 희생자로 점찍은 것은 그로부터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중년의 여성이었다.
힘 싸움에 밀려 도무지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겁에 질린 눈으로 괴물을 바라보고 있던 중년 여성에게 괴물이 달려들었다.
괴물은 중년 여성이 반사적으로 들어 올려 막은 작은 핸드백을 후려치고, 주름이 생기기 시작한 볼에 송곳니를 박아 넣었다.
주변의 사람들이 말리거나 가로막을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꺄아악!”
중년 여성이 비명을 지르며 괴물을 밀쳐 내 봤지만 괴물의 힘은 상상 이상으로 셌고, 볼살을 물어뜯는 힘은 더욱 강해졌다.
으득!
마침내 살점이 뜯겨 나가고 중년 여성의 얼굴은 곧장 피범벅이 되었다.
그롸아악!
괴성과 함께 괴물이 두 번째 공격을 가했다. 이번엔 얼굴을 감싸 쥐고 있는 여자의 손이었다.
빠드득!
손등의 가느다란 뼈들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핏줄이 터졌다.
“뭐, 뭐야, 이게!”
잠시 얼어붙어 있던 주변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괴물의 얼굴과 몸을 밀쳐 냈다. 개중에는 용감한 이들도 있어서, 괴물을 진압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기도 했다.
처음엔 요지부동이던 괴물도 한꺼번에 대여섯 명이 달려들자 결국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밀려 넘어졌다.
“야이, 미친 새끼야!”
파란 폴로셔츠를 입은 청년과 알로하셔츠 차림의 아저씨 둘이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욕설을 퍼부으며 괴물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다른 사람들은 졸지에 봉변을 당한 중년 여성의 상태를 걱정스럽게 살폈다.
“아이고, 아이고……. 이 사람 어떡해. 아줌마, 정신 좀 차려 봐요!”
아무리 애타게 불러봐도 피를 사방에 흩뿌리며 사람들에게 안긴 중년 여성은 깨어나질 않았다.
“누가 119에 전화 좀 해요!”
“세상에, 이게 웬일이야…….”
승객들의 관심이 반쯤 피해자에게 옮겨갔을 때, 괴물에게 발길질을 하던 알로하셔츠가 고통 어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괴물은 알로하셔츠의 허벅지를 꽉 잡고 몸을 날리면서 올라타 옆구리를 깨물고 비틀어 댔다. 폴로셔츠가 아무리 발로 차고 등에 주먹질을 해봐도 괴물은 꽉 다문 턱에서 힘을 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끄으윽!”
솟아나온 피로 옆구리를 물들인 알로하셔츠의 비명이 높아지면서 그 사이로 우적우적! 사람의 생살을 씹어 삼키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리가 섞여 아수라장이 된 지하철 안을 울렸다.
“이런 씨발 새끼가!”
분노한 한 무리의 승객들이 들고 있던 가방을 휘둘러 괴물의 머리를 후려치고, 구둣발로 얼굴을 걷어찼다. 일부는 괴물의 등 뒤로 돌아가 머리채를 잡아당기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괴물은 알로하셔츠의 옆구리를 파먹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 모든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가고, 마침내 알로하셔츠가 단말마를 남긴 채 숨을 거두고 나서야 괴물은 입을 떼고 머리를 들었다.
주르르, 알로하셔츠의 뻥 뚫린 상처에서는 피에 섞여 내장이 흘러내렸다. 그 끔찍한 참상에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비명을 질렀다.
“비켜요, 비켜! 아, 좀 제발!”
“아악! 내 팔! 악!”
“사람 넘어졌어요! 밀지 마!”
뒷줄 대부분의 승객들은 어떻게든 다음 칸으로라도 피신하기 위해 문가에 몰려 난리를 치르고 있었다.
문틀에 끼인 사람, 넘어져 깔린 사람, 옴짝달싹도 할 수 없이 앞뒤로 꽉 밀려 숨조차 쉬지 못하는 사람들이 일제히 고성을 질러 대는 바람에 객차 내부는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그르르르…….
고개를 돌린 괴물의 흰 눈동자가 번득이고, 피가 줄줄 흐르는 입이 벌어진다.
가장 용감하게 발길질을 해 대던 사람들조차 이미 섬뜩한 공포를 느끼고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는 중이었다. 괴물이 일어나는 동안에도 그들에게는 달아날 공간이 없었다.
서로 밀치고 밀쳐지며 엎치락뒤치락해 보지만, 그래 봐야 결국 괴물로부터 몇 미터도 멀어지지 못한다.
괴물이 한 발짝, 한 발짝을 내디딜 때마다 미처 달아나지 못한 사람들의 가슴은 얼음처럼 차갑게 쪼그라들었다.
“제발, 제발, 제발……. 으아아, 안 돼! 안 돼!”
그롸아아악!
간절한 애원 소리는 괴물의 울부짖음으로 덮였고, 몸을 날린 괴물은 애꿎은 한 사내의 목덜미를 덥석 깨문 뒤 마구 흔들어 댔다.
피시싯!
찢어진 사내의 경동맥에서 분사기처럼 뿜어져 나온 핏방울들로 지하철 한쪽이 붉게 물들었다. 피를 뒤집어쓴 사람들의 비명 소리는 더없이 높아졌다.
사내의 몸이 축 늘어지자 괴물은 제4의 먹잇감을 고르기 위해 눈을 희번덕거렸다. 괴물이 다가오는 것을 막아보려던 사람들의 손가락이, 그리고 뒤돌아서서 달아나려던 이들의 귀가 차례로 잘려 나갔다.
괴물은 아가리를 크게 벌린 채 닥치는 대로 잡아당겨 깨물고 할퀴고 찢었다. 아무도 이렇다 할 저항 한 번 해 보지 못한 채 다들 달아나기만 급급하던 그때, 괴물의 뒤쪽에서 폴로셔츠가 고함을 내질렀다.
“이야아아!”
그새 어디서 구한 것인지, 큼직한 소화기를 휘두르며 폴로셔츠가 몸을 날렸다.
빠가각!
두 손으로 내려찍은 소화기가 괴물의 등뼈를 박살 냈다. 휘청하던 괴물이 곧바로 몸을 돌려 폴로셔츠의 팔목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달려들었다.
아그작!
얕게 물린 상처의 고통을 이겨내며 폴로셔츠는 괴물을 사정없이 내려찍었다.
콰직! 콰직!
단단한 소화기에 갈비뼈와 어깨가 차례로 부서졌지만, 괴물의 공격은 멈추질 않았다.
“죽어! 이 씨발!”
두어 발짝 물러난 폴로셔츠는 자신의 키보다 높은 곳에 있는 괴물의 머리를 후려치기 위해 있는 힘껏 소화기를 휘둘렀다.
부웅―!
첫 번째 스윙은 허공을 갈랐고, 폴로셔츠는 중심을 잃은 채 비틀거렸다.
대엥~!
소화기에 맞은 지하철의 기둥 손잡이가 큰 소리로 울렸다. 등을 보인 폴로셔츠를 향해 괴물이 달려들려는 바로 그때, 건장한 남자 하나가 괴물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야!”
건장한 남자는 이종격투기의 태클처럼 두 팔로 괴물의 다리를 안고 밀쳤다.
꽝!
넘어지며 날아가던 괴물의 머리가 노약자석 창문에 부딪히며 엄청난 소리를 냈다. 기묘한 각도로 꺾여 의자와 바닥에 널브러진 괴물에게 올라탄 건장한 남자는 쉴 새 없이 펀치를 날렸다.
“빨리 소화기로! 빨리!”
구경하던 승객들이 폴로셔츠에게 응원과 주문을 섞어 일제히 외쳤다. 폴로셔츠는 소화기를 높이 들고 괴물을 향해 뛰었다.
“아저씨, 비켜요!”
폴로셔츠가 소리를 지르자, 괴물에게 파운딩을 하고 있던 건장한 남자가 몸을 뺐다.
빠각!
떡메를 휘두르듯 내려친 소화기에 괴물의 얼굴과 머리통은 박살이 나버렸다.
하지만 광기에 가까울 만큼 흥분한 폴로셔츠는 두 번, 세 번 같은 자리에 소화기를 내려찍었다. 괴물의 얼굴은 곤죽이 되었고, 이빨과 뼛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것은 보고 있기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그를 말리려고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인정을 두기에 저 괴물은 너무 위험하다는 것을 다들 절실하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허억, 허억…….”
마침내 탈진한 폴로셔츠가 소화기를 떨어뜨리며 주저앉았을 때, 분사구를 꽉 움켜쥐고 있던 그의 손은 엉망으로 찢어져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고생했어요.”
건장한 남자가 손을 내밀어 폴로셔츠에게 악수를 청하자 어떤 승객들은 박수를 치면서 용기 있는 두 사람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수 소리보다 더 크고 자주 울린 것은, 찰칵거리는 카메라 셔터 소리였다.
이제까지 계속 달아나려고만 했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한 발짝이라도 더 앞쪽으로 나오기 위해 몸싸움을 벌였고, 핸드폰을 꺼내 신들린 것처럼 사진을 찍어 댔다.
잠시 후, 지옥 같던 한 정거장의 여행이 끝나고 대방역에 도착한 지하철의 문이 활짝 열렸을 때, 사람들은 눈물과 피가 범벅이 된 채 앞다투어 기차 밖으로 뛰어나가면서 진저리를 쳤다.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끔찍했던 3분이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
구로역이나 신도림역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콧방귀를 뀌며 비웃을 테지만, 6호선도 출근 시간대에는 꽤나 붐빈다.
아침부터 끈적거리는 땀 냄새와 불쾌한 열기가 가득 차 있는 승강장에서 인파에 부대끼며 열차를 기다리고, 그보다 더 붐비는 열차 안에서 한 시간여를 시달리고 나면 사람의 인내는 한계까지 내몰린다.
그 짓을 매일 아침 반복해야 한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람이란 적응의 동물이니까 참고 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스물다섯 살 성준에게도 녹사평에서 출발해 2호선으로 갈아타야 하는 매일의 등교 시간은 몸에 익은 고통이었다.
하지만 요 근래 두어 달, 성준은 그 괴로운 시간을 오히려 즐기며 기다리게 되었다.
“흠, 흠, 흠~ 아직 안 왔네.”
플랫폼을 한 바퀴 둘러본 성준은 안심하며 스마트폰을 꺼내 음악 플레이어를 열었다. 듣는 노래는 당연히 이번에 발매된 핑크 펀치의 새 앨범. 성준은 신작이 발표된 첫날, 전곡을 구입했다.
헤드폰으로 흘러나오는 핑크 펀치의 노래를 속으로 따라 부르며 자신을 현실로부터 떼어놓고 있으면, 가슴을 눌러 숨을 쉴 수 없게 하는 만원 지하철도 그나마 견딜 수 있다.
핑크 펀치 신보 열 곡이 전부 한 번씩 재생될 때쯤 그는 지옥 같은 지하철에서 풀려나 학교로 가는 길 위에 서곤 한다.
이번 앨범에서 성준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두근두근’이다. 비록 타이틀곡은 아니지만, 어쩌면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냈는지 신기할 지경이어서 몇 번이나 반복 재생 버튼을 누르게 된다.
“엇, 왔다.”
7시 20분쯤 정장을 깨끗이 차려입은 아가씨 하나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자,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성준의 얼굴이 약간 상기되었다.
‘아, 오늘도 예쁘구나.’
짙은 남색 레이온 치마 정장에 어깨를 덮는 긴 머리, 스물대여섯쯤으로 보이는 그녀의 검은색 스타킹을 신은 다리가 날씬해서 보기 좋다.
성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아직 이름도 모르는 그녀가 바로 요즘 성준의 등굣길을 기쁘게 만드는 이유였다.
두어 달 전, 우연히 일찍 집을 나섰다가 출근하는 그녀를 처음 보았고, 그때부터 늘 이 시간을 기다려 지하철을 같이 타고 간다.
- ♪~난 그대 잘 알죠, 뭘 좋아하는지.
아침마다 타 줄 수 있는데~ 부드러운 밀크 커피~♪
그녀가 플랫폼에 섰을 때, 마침 ‘두근두근’이 흘러나왔다. 도입부는 청순한 테라의 목소리. 생각해 보면 성준이 매일 뒤에 서서 훔쳐보는 그녀도 어딘가 테라를 닮았다.
물론 그만큼 예쁘다고 하면 조금 거짓말이겠지만, 느낌이 비슷했다. 테라의 뒤를 이어 섹시한 제니가 노래한다. 이 듀오의 하모니는 정말 기가 막히다.
- ♪~한 번만 내게 웃어준다면, 손 내밀어준다면~
I’m yours~ 달려갈 텐데, 아주 깊은 밤에라도~
선이 고운 손으로 쓸어 넘기자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이 흩날리듯 찰랑거린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뒤에 서서 상큼한 샴푸 냄새를 맡고 싶지만, 성준은 그렇게 하수는 아니다.
그는 늘 그녀로부터 대여섯 발짝 뒤처진 곳에 서서 지켜보기만 했다. 혹시라도 그녀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채고 부담스러워하거나, 피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언제나 이어폰을 꽂은 채 핸드백에서 조그만 문고본을 꺼내 읽는다.
요새 그녀가 읽고 있는 것은 까뮈의 <페스트>. 조금이라도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욕심에 성준도 도서관에서 빌렸지만, 재미라고는 없다.
- ♪~멀리서 이렇게 뒷모습만 봐도 좋은걸요.
그대 옷자락, 향기처럼 날리면 내 가슴은 두근두근.
한 번 더, 하루만 더 먼발치서 그댈 훔쳐볼래요.
아직 내 심장 너무 떨려, 고백은 못 해요. 두근두근~♪
테라와 제니가 합창을 하면서 성준의 마음을 대변해 준다. 그 가사 그대로다. 비록 오늘은 아니지만, 언젠가 반드시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 날이 올 거라고 성준은 굳게 믿고 있었다.
친구들은 그런 그를 용기가 없다고 놀리지만, 성준은 내일 더 좋은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 고백을 미루고 있다.
남들보다 잘난 구석이 별로 없는 자신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뭔가 기가 막힌 계획이나 절호의 찬스가 필요하다.
‘뭐, 앞으로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열차 도착이 꽤나 지연되는 바람에 오늘 그녀와 가지는 혼자만의 밀회는 조금 더 길어졌다. 처음엔 시계를 힐끔거리고 초조한 듯 발을 동동거리던 그녀는 결국 포기하고 책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여기저기서 불평불만이 터져 나오는 동안에도 성준의 시선은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바로 옆줄에는 한눈에도 군인으로 보이는 젊은 외국인들 예닐곱 명이 배낭을 멘 채 수다를 떨고 있다. 아마 가까운 곳으로 하이킹이라도 가는 모양이다.
‘좋겠다. 나도 곧 저렇게 그녀와 마주 보고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그들 중 한 쌍의 금발 남녀가 즐겁게 재잘대는 모습을 보고 나자 성준의 상상은 그를 데리고 긍정적인 가까운 미래로 간다. 그녀가 그를 위해 라면을 끓여 주는, 아주아주 바람직한 미래다.
뚜르르륵~ 땡땡땡땡.
상상 속에서 라면을 얌전히 먹을 것인가, 아니면 밥상을 옆으로 밀쳐 내고 그녀를 와락 안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을 때, 열차가 들어온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여전히 그녀는 고운 손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다.
“어, 어…… 이게!”
열차가 속도를 줄이며 승강장에 멈춰 설 때, 성준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제대로 말을 할 수조차 없었다. 이럴 수가 있나……. 객차의 유리창이 전부 피투성이였다.
지하철 문은 피로 찍은 손바닥 자국이 가득하고, 수많은 승객들이 마치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몰골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한쪽에서는 입가에 피를 묻힌 사람들이 얼굴에 피를 흘리는 사람들을 쫓아 뛰고, 또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사람들을 잡아먹고 있다.
너무나 의외의 장면이었기에 아주 잠깐 성준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열차를 기다리던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헤드폰을 넘어서까지 들려왔다.
“저거 뭐냐……. 뭐야……. 이상해!”
미지의 공포에 사로잡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던 사람들 중 절반가량이 멈춰 선 열차가 입을 벌리기 전 뒤를 돌아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상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지 그 자리를 그대로 지켰다.
성준은 도망치는 쪽이었다.
응? 그렇다면 그녀는?
몇 걸음을 달리던 성준은 계단 앞에서 멈춰서 그녀를 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