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 외전: 헬게이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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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외전: 헬게이트 (1)
2022.05.09.
※ 이 이야기는 좀비 세상 첫날, 박테리아가 확산되는 과정을 담은 외전입니다.
“비켜! 비켜!”
새벽 네 시. 조용하던 용산 프란체스코 병원 응급실의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검은 양복을 입은 덩치들이 들이닥쳤다.
험상궂은 그들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밀치며 들어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았다.
그들 중 맨 뒤의 남자가 들쳐 업고 있는 것은 만배파의 넘버 투, 최성호.
“으~으으!”
천오백만 원짜리 양복을 온통 피로 적신 채 의식을 잃고 널브러져 있는 최성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의사 나와!”
빡빡 깎은 머리의 사내가 응급실이 떠나가라 외쳤다. 응급실 침대에 누워서 고통을 호소하던 다른 환자와 보호자들은 겁에 질려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힘겹게 돌아누웠다.
“응급실에서 이러시면 안 돼요. 먼저 수속부터 밟으시고…….”
용기가 있는 것인지,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간호사 하나가 다가가서 사내들을 진정시켜 보려 했지만, 그들은 예의를 갖추기엔 너무 다급했다.
빡빡머리사내는 옷깃을 잡으려는 간호사의 따귀를 사정없이 후려치며 악을 썼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이 싸가지 없는 년아! 여기 이분이 누구신 줄 알고! 야이…… 씨발, 의사 안 나오고 뭐하냐?”
간호사의 편을 들기 위해 다가오던 인턴들은 그 장면을 보고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용식아!”
중년의 사내 하나가 근엄하게 이름을 부르자 핏대를 세우던 빡빡머리는 곧 입을 다물었다.
“이봐, 거기, 의사 선생.”
중년 사내가 손을 들어 바짝 긴장해 있는 인턴들 중 하나를 가리켰다.
“빨리 외과 과장 호출해서 내려오라고 해. 오는 길에 전화해 놨으니까, 육 회장님이 보낸 분이라고만 하면 알 거야.”
그의 말이 다 끝나갈 때쯤, 응급실 반대편 문을 열고 외과 수술팀이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스태프들이 수술용 침대에 환자를 옮겨 눕히고 각종 측정기를 매다는 동안 젊은 의사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헉, 허억, 최성호 님 보호자분이시죠? 지금 곧바로 수술 들어가겠습니다.”
“누구지? 낯이 선데? 조 박사님이 집도하는 거 아니었나?”
중년 사내가 의심쩍은 눈초리로 물었다.
“전 외과 2팀장입니다. 조 박사님도 곧 도착하신다고……. 일단 응급처치는 제가 맡습니다.”
의사는 말을 마치자마자 돌아서서 최성호의 상태를 보고 받았다. 심각했다.
한눈에도 알 수 있는 과다출혈에, 호흡도 불안정하고 심박 수는 20 언저리에 머물고 있었다. 게다가 어찌 된 영문인지, 그렇게 피가 돌지 않는데도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뜨겁다.
동공의 반응 역시 간헐적으로만 일어났다. 그는 일단 강심제와 혈액 투여부터 명령했다. 이대로 두었다간 뇌까지 산소가 닿지 못해 몇 분 내에 뇌사가 일어날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그런 생각이 들자 젊은 의사의 목덜미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전국 최대의 폭력 조직 넘버 투가 자기가 집도하는 수술에서 죽었다가는 골치가 아픈 정도로 일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수술실로 곧바로 이동한다. 마취팀, 준비됐지?”
스태프들을 다그치는 젊은 의사의 목소리가 더욱 다급해졌다.
“네!”
수술용 침대를 밀며 수술실로 뛰어가려는 그를 중년 사내가 붙잡았다. 중년 사내의 손은 피에 전 붕대로 감겨 있었고, 그 피는 고스란히 의사의 하얀 가운에도 묻어 붉게 번졌다.
“젊은 선생!”
“뭡니까?”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에게는 목숨보다 귀한 형님이십니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사내의 눈은 의사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협박이었다. 중년 사내가 고개를 숙이자, 뒤에 서 있던 덩치들도 일제히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크게 합창을 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 그만두세요.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어지간히 질린 젊은 의사는 곧바로 뒤돌아 뛰었다. 그가 긴 복도를 지나 수술실 문을 양쪽으로 젖히고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문 위에는 수술 중이라는 램프에 불이 들어왔다.
“수, 수술실 왼편에 대기실이 있습니다. 수술이 끝나자마자 만나실 수 있으니, 그쪽에서 기다리시는 게…….”
인턴 하나가 다가와 쭈뼛거리며 말했다. 돌려 말하고는 있지만, 응급실 분위기 험악하게 만들지 말고 이제 좀 다른 사람들 시야 밖으로 사라져 달라는 주문이었다.
“……그럽시다.”
선선히 대답을 한 중년 사내가 뒤에 섰던 덩치들을 거느리고 사라지자, 그제야 응급실을 가득 채우고 있던 긴장감이 걷히며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충기 형님, 여기 앉으십시오. 고생 많으셨습니다.”
대기실에 들어서자마자 빨간 구두를 신은 녀석 하나가 앞질러 달려가 의자의 먼지를 털어낸 뒤 중년 사내에게 자리를 권했다.
“어흐으!”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자마자 중년 사내의 입술 사이로 가볍게 앓는 소리가 삐져나왔다.
강서 정수장에서 프란체스코 병원이 있는 용산까지, 새벽 서울 도로를 신호도 무시하고 시속 200킬로미터 가까이 내달렸던 긴장이 조금은 풀어진 탓이었다.
건달 밥을 먹은 지 20년이 되었지만 오늘 밤 같이 지랄 맞은 경험은 처음이었다. 사시미 칼을 맞고도 고꾸라지지 않는 괴물들을 다 만나게 될 줄이야.
“야, 커피 한 잔 뽑아 와라. 형님 목마르시겠다.”
충기에게 의자를 권했던 빨간구두가 대기실 입구를 막고 나란히 서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했다. 충기는 붕대 감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커피는 됐고, 소주나 두어 병 사 와. 다들 어지간히 기운도 뼀으니까 술심이라도 빌어서 버텨야지. 수술도 길어질 것 같으니까……. 어이, 담배 하나 줘라.”
빨간구두는 잽싸게 담배를 꺼내 라이터를 켰다.
비에 흠뻑 젖은 담배에 겨우 불을 붙여 왼손에 끼워 주자, 충기는 깊이 한 모금을 들이켠 뒤 천천히 내뱉었다. 차갑고 청결한 냄새가 나는 수술 대기실의 공기 속으로 뿌연 담배 연기가 번졌다.
“윽!”
긴장이 풀어진 몸에 고통이 번져서 충기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정체 모를 괴물에게 물려 잘려 나간 오른손 검지에서는 아까부터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계속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하나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은 간간이 오른팔 전체로 번져 올라오는 저릿저릿한 감각이었다. 누군가 그의 팔에다가 전깃줄을 꽂아 두고 스위치를 켰다 껐다 하는 것 같았다.
“형님도 이거 치료받으셔야 하는데…….”
곁에 서 있던 빨간구두가 충기의 다친 오른손에 시선을 두며 아첨이 섞인 걱정을 했다. 충기는 담배를 이로 문 채 과장스럽게 턱을 치켜들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야, 이놈아, 지금 성호 형님이 큰 수술을 받으시는데 이까짓 손가락 한두 개가 뭐 대수라고.”
“역시 형님께서는 진짜 사나이십니다. 제가 또 배웁니다.”
두 건달이 입에 발린 소리들을 늘어놓고 있는 동안 심부름을 갔던 녀석이 소주를 사서 돌아왔다. 충기는 종이컵을 꽉 채워 한 잔을 들이켠 후, 나머지를 부하들에게 돌렸다.
“그거 마시고 다들 기합 바짝 넣어라. 성호 형님 무사히 나오실 때까지 우린 이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다.”
“네! 형님!”
말은 그렇게 해 두었지만 피로가 무겁게 짓누르는 새벽 시간인 데다가 비에 흠뻑 젖고 피까지 흘린 덕에 충기의 눈꺼풀은 매초, 매초가 흐를 때마다 점점 더 무거워졌다.
줄담배를 피워 물었다가 바닥에 비벼 꺼 보기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서성대 보기도 했지만, 그래 봐야 잠시였다.
오히려 지독한 통증이 머리까지 번지는 바람에 하마터면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헛구역질을 할 뻔했다.
……나이는 못 속이는 건가.
고작 이 정도의 부상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약해진 자신을 느끼며 충기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가운데 그는 깜빡 졸고 말았다.
잠에 빠져들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인식했던 것은 급하게 수술실 안으로 들어가는 조 박사의 모습이었다.
***
한편, 육만배의 수행 차량과 괴물을 실은 봉고는 그 시각에 인천공항 화물 터미널에 막 도착해 있었다. 갑자기 전화가 와서 접촉 장소를 이곳으로 바꾸는 바람에 방향을 돌려 달려온 것이다.
길게 늘어서 있는 여러 개의 거대한 상업용 항공 화물 카고들을 지나 거의 끝에 이르자, 전해 들었던 대로 간판도 없는 카고에서 그들을 마중하는 불빛이 비쳤다.
“저기에다가 세워.”
육만배가 손짓을 하자 두 대의 검은 승용차와 승합차는 나란히 카고 앞에 멈춰 섰다. 경호원이 문을 열어주고 육만배가 차에서 내려서자, 안쪽에서 경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이고, 뭐 이렇게 한참 걸려? 하여간 노인네들이랑 일하면 아예 시계를 차고 오지 말아야 한다니까.”
30대 중후반의 남자 하나가 과장된 몸짓을 하며 다가온다. 곱상한 이미지와 달리, 실은 천하의 개망나니라고 소문이 자자한 태양 그룹의 후계자였다.
젠장, 속았나…….
남자의 얼굴을 본 육만배는 속으로 끌탕을 했다. 어제 회장의 직속 비서가 찾아와 이 건을 부탁할 때만 해도 육만배는 그것이 태양 그룹 황 회장의 주문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지금 그의 눈앞에서 사악하게 웃고 있는 저 망나니가 중간에서 뭔가 장난을 친 모양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작은 회장님, 오셨습니까?”
육만배는 마음을 속이는 미소를 보이며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돈이 어른인 세상이라, 이 망나니가 이 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사람인 것이다. 작은 회장이 낄낄대며 말했다.
“아이구, 왜 이러셔? 당신도 회장이잖아, 육 회장. 씨발, 그러고 보니 내 주변엔 개나 소나 다 회장이야. 우리 집 노친네도 회장, 울 할망구도 뭔 협회 회장, 그리고 지금 육 회장. 어이, 육 회장. 고개 들어요! 난 사장이니까 당신이 더 높잖아.”
“천만의 말씀을 다 하십니다. 저야 그저 애들 몇 명이랑 밥값이나 벌어 보자고 뛰어다니는 중입니다. 어디 비교가 되겠습니까.”
굴욕적인 말이지만, 동시에 사실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육만배를 가리켜 밤의 황제이니 전국구 보스니 하지만, 황 회장이 마음만 먹으면 단 며칠 만에도 그의 조직은 먼지처럼 산산이 부서져 버릴 터였다.
“아, 아, 그런 소리 들으러 온 거 아니니까 됐고, 물건이나 넘겨받읍시다. 잘 가지고 왔수?”
“네, 저기 승합차 안에……. 얘들아, 어서 물건 옮겨 넣어드려라.”
“아니야! 너넨 그냥 문이나 열어 두고 가만히 있어. 어디, 태양 그룹 소유지에 깡패 새끼들이 더러운 족발을 들이밀려고. 야, 챙겨.”
작은 회장이 손가락을 튕기자 창고 안쪽에서 경찰 특공대처럼 검은 헬멧에 마스크까지 낀 녀석들이 우르르 뛰어나와 승합차를 점거했다.
그리고 지게차가 작은 컨테이너를 싣고 접근했다. 컨테이너의 내부를 힐끔 보니 두꺼운 금속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마 납일 것이다. 납으로 싸두면 혹시 있을지 모르는 GPS 발신도 차단하고, X―레이 투시도 막아 준다. 작은 회장 뒤에 버티고 선 경호원들에게 시선을 돌리니, 양복이 유난히 불룩한 것이 육만배의 눈에 들어왔다.
‘기관단총을 채워 놨군. 겁쟁이 놈…….’
사람에게 심부름을 시켜 놓고는 총을 찬 채 맞이하다니, 그리고 그런 사실을 굳이 숨기려고도 하지 않다니…….
이런 방식의 거래는 반감만 산다. 무력에 그렇게 자신이 있었다면 남에게 시키지 말고 자신의 손으로 했으면 될 일이다. 이 망나니 자식은 말만 번지르르하지, 도무지 제대로 하는 게 없다.
눈빛과 목소리만으로도 상대를 제압하던 제 아비에 비하면 이런 건 그냥 잔챙이도 못 된다. 그저 아비의 후광만 믿고 미쳐 날뛰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그래, 뭐가 들었습디까?”
짐을 카고 안으로 들이는 동안 작은 회장이 물었다.
육만배는 억울하다는 듯 두 손을 들어 손사래를 쳤다.
“하, 하하, 저야 그저 심부름이나 하는 놈인데, 어디 감히 회장님 물건에 손을 대겠습니까? 믿어 주십시오. 그냥 얌전히 가지고만 와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캬하하하! 지금 그걸 믿으라고? 시발, 사람을 무슨 코찔찔이 중학생으로 아나? 크크크큭! 아, 뭐, 됐수다. 열어 봤어도 뭐, 어쩔 수 있는 물건도 아니고. 어이, 준비한 거 드려라.”
경호원 중 하나가 다가와 007가방 두 개를 내밀자 육만배의 경호원이 나서서 받아 들었다.
“안 세어 봐요? 얼마인지도 모르잖아?”
돈 가방을 트렁크에 실을 때, 작은 회장이 놀리는 것처럼 물었다. 순박한 사람의 가면을 쓰고 있는 육만배는 뒷머리에 손을 올리며 대답했다.
“허허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작은 회장님께서 저희를 신경 써 주신 것만 해도 그저 감사한데, 액수야 문제가 되겠습니까?”
“흥, 그럼 줄 거 줬고, 받을 거 다 받았으니, 가쇼. 애들 입단속 잘 시키고. 멀리 안 나갑니다.”
육만배가 재차 허리를 숙이고 있는 동안 작은 회장은 카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다시 고개를 들 때, 육만배의 얼굴에서는 약자 특유의 독기가 잔뜩 풍겨 나왔다.
“공항이라니, 이걸 수출이라도 할 셈인가……. 대체 뭘 하자는 거야, 저 미친 망나니 놈이.”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육만배는 담배 연기와 함께 욕설을 내뱉었다.
쿠우우―
새벽 첫 비행기들이 이륙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 육중하게 울렸다.
***
“……님!”
“형……님!”
“형님!”
혼탁해진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와 먼 메아리처럼 울리는 큰 소리 때문에 충기는 깜짝 놀라 얕은 잠에서 깨어났다. 빨간구두가 곁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하지만 목청을 높여서 그를 부르고 있었다.
“……큼, 큼, 뭐야?”
“수술실이 너무 시끄럽습니다. 이상합니다.”
“이상하긴, 이 새끼야. 네깟 새끼가 수술에 대해서 뭘 안다고!”
졸고 있었다는 것을 들킨 게 부끄러워 충기의 언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빨간구두는 다급했다.
“좀 들어보십시오. 수술을 하면서 저런 소리가 납니까? 저는 당최 이해가…….”
“끼야아악!”
수술실 안쪽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빨간구두는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여러 겹의 문을 넘어 들려오는 것이어서 큰 소리는 아니지만, 그것은 분명히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이었다. 놀란 충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수술실 문 앞으로 다가갔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빨간구두와 부하들 역시 그의 바로 뒤에서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잡아! ……지 말고 눕혀! 진정제! 디프리반! 디프리반 20밀리 투여해!”
“벌써 주사했…… 니다! 이게 벌써 ……번 째입니…….”
“끄아악! 이 사람! 떼어내! 으악!”
가끔 끊겨 들리기는 해도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대충 다 그려졌다. 이건 심상치 않다. 듣고 있던 충기와 빨간구두의 눈이 마주쳤다. 빨간구두는 충기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지? 수술실에 난입했다가 혹시라도 그게 문제를 일으켜 수술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충기는 고민했다. 그때, 그의 우유부단함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수술실의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리고 여자 간호사 하나가 뛰어나왔다.
“아아아악!”
왼 팔목을 부여잡고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달려 나오던 간호사는, 미처 그녀를 피하지 못한 빡빡머리에게 부딪혀 나동그라졌다. 살이 움푹 잘려 나간 그녀의 팔목에서는 말 그대로 피가 샘솟고 있었다.
얼굴이 완전히 파랗게 질린 그녀는 대리석 바닥과 간호사복을 온통 붉은 피로 물들이며 일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다.
“읍! 으, 우웨에엑!”
갑자기 쇼크가 온 때문일까, 간호사는 토사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로비와 응급실 주변을 서성이던 사람들의 시선도 대기실을 향해 집중되었다.
“대체 뭔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야!”
더 이상은 참고 볼 수 없어진 충기와 부하들은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제지하는 사람 하나 없는 널찍한 마취실을 지나 걸어가는 동안, 수술실에서는 계속해서 엄청난 고함과 비명이 들려왔다.
설마, 설마……. 앞쪽으로 발걸음을 떼면서도 충기는 자꾸 뒤돌아 뛰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뭔가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목도하게 될 것만 같아 두려웠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충기가 문제의 소란스런 수술실을 열었다.
“이런 씨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충기에게 저절로 욕설을 내뱉도록 만들었다. 수술실 내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간호사들과 스태프들, 그리고 그들에게서 쏟아져 나온 것이 분명한 엄청난 양의 피. 수술 도구와 기계들은 엉망으로 흩어져 있고, 한 무리의 의사들이 최성호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롸아악!
최성호가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며 팔을 거세게 휘두르자 그의 팔을 잡고 있던 의사가 벽에 내동댕이쳐졌다.
조금 전까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대단한 힘이었다. 최성호의 얼굴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고, 목에는 주사기가 박혀 덜렁거렸다.
“……형님! 성호 형님!”
빨간구두가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의 말에 반응을 보인 것은 최성호가 아니라 조 박사였다. 최성호의 턱을 밀어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던 조 박사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아! 그래! 자네들, 이 사람 좀 떼어내! 빨리!”
빨간구두와 부하들이 일제히 최성호에게 달라붙었다. 조 박사를 물어뜯기가 어려워지자 최성호는 곧바로 방향을 바꾸어 가장 가까이에 있는 빡빡머리의 두툼한 가슴팍을 노렸다.
“끄윽! 혀, 형님! 왜, 왜 이러십니까? 끄윽!”
가슴팍을 물린 빡빡머리는 비명을 지르며 사정을 했다. 그러나 있는 힘껏 턱을 꽉 다물며 사방으로 피를 튀기는 최성호의 눈빛에 이미 자비심 따위는 없었다.
만배파 조직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최성호의 몸을 잡아끌 뿐이었다. 그 사이를 틈타 재빨리 뛰어나가려는 조 박사의 수술복 자락을 충기가 붙잡았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거 놔!”
조 박사가 노기 어린 목소리로 소리를 내질렀다. 그 굉장한 박력에 충기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서 힘을 뺐고, 풀려난 조 박사는 벽에 붙어 있던 비상 경보 스위치를 누르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얇은 플라스틱 커버가 부서지면서 빨간 스위치가 쿡, 눌리자 삐잉! 삐잉! 하는 사이렌이 병원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여전히 최성호는 괴력을 휘두르며 부하들의 몸에서 닥치는 대로 살점을 뜯어내고 있었다.
“…….”
충기는 붕대로 감은 오른손을 들어 이마를 감쌌다. 모든 게 꿈속처럼 아득하고 어지럽다. 주변이 너무나 시끄러워 오히려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어버렸다.
앞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하들과 최성호의 피 튀기는 활극, 쓰러져 죽어가는 의사들과 간호사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병원 내의 경보음. 그 모든 것이 현실이라기엔 너무나 기괴했다.
“끄으으으으~!”
혼란스러워서 멍하게 서 있던 충기는 누군가 피 끓는 소리를 내며 안기는 바람에 흠칫 놀라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조금 전, 응급실에서 보았던 그 젊은 의사였다.
그는 어떻게든 충기에게 기대 보려고 간절히 손을 뻗다가 쓰러져 버렸다. 의사의 얼굴이 충기의 배와 다리를 타고 힘없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흐으으~ 끄극, 끅.”
목이 뜯겨 나간 젊은 의사는 벌어진 입술 사이로 피를 쏟아내며 눈으로 애원을 했다.
비록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아무 의미 없는 신음뿐이지만, 충기는 젊은 의사가 하고 싶은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충기는 의사를 향해 고개를 저으며 발목을 잡으려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무리야. 이미 너무 늦었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촉망받는 인생을 살던 젊은 의사의 처참한 몰골은 충기에게 현실적인 감각을 되돌려 주었다.
그는 치열한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최성호와 부하들을 그대로 남겨 둔 채 뒷걸음질을 쳐서 혼자만 수술실을 빠져나왔다. 이제 충성이니 의리니 찾는, 빤한 가면 놀이를 끝낼 때가 온 것이다.
“제기랄, 왜 이렇게까지 일이 커진 거지?”
얼굴을 가린 채 빠른 걸음으로 병원 복도를 가로지르면서 충기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최성호가 되살아나 미친 새끼처럼 의사들을 죽여 버린 덕에 오늘 그들이 벌인 범죄들, 국가 요원 살해에 주요 기밀 강탈까지…… 그 모든 것들은 이제 비밀로 남겨지기 어렵게 됐다.
잡혔다간 일이 십 년 감옥에서 썩고 나온다고 될 일들이 아니었다.
아마 죽을 때까지 바깥 공기는 못 마시게 될 테지…….
충기는 늘 이런 날이 올 때를 상상하며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를 궁리해 왔다. 가능한 한 빨리 해외로 달아나야 한다.
“가게! 내 가게로 가야 해, 먼저.”
가산 디지털 단지에는 그가 운영하는 룸살롱이 있다. 가게 사무실 금고에 보관해 두었던 달러와 엔화를 챙겨서 곧바로 공항으로 가면 아직 수배가 내려지기 전에 이 나라를 뜰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그는 은행보다 지폐를 더 신뢰하던 사람이어서 항상 달러를 넉넉히 꿍쳐 두어왔다. 나머지는 차후에 마누라에게 챙겨 오라고 하면 된다.
“열쇠! 열쇠 내놔!”
주차 관리소의 창문을 거칠게 두드리면서 충기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단 1초라도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무슨 열쇠요?”
주차 관리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좀 전에 타고 왔던 검은색 아우디! 이 개새끼야, 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