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 던전 & 아이템즈 (4) 2022.05.07.
친구들이 좁고 어두운 건물 내부에서 아주 느린 싸움을 버텨 내고 있는 동안, 진우는 어느 이름 모를 산기슭에서 나무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타타타타― 투투투― 타앙― 타앙― 멀리서 쉬지 않고 울려오는 총소리. 고막을 살살 긁어 내고 뇌 속까지 파고들어 오려는 것 같다. 스트레스를 참아내기 위해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그를 목표로 하고 쏘는 총알은 아니다. 아마 이 부근 어디선가 교전이 벌어진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위험하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소총에서 발사된 총알은 400미터 이상, 어쩌면 600미터까지도 위력을 잃지 않고 날아간다. 어제 보았던 저격수의 총이라면 그보다도 훨씬 더 멀리까지 날아가서 박힐 것이다. 최소한 1킬로미터? 허, 그 거리가 너무 황당해서 진우의 입에서는 헛웃음이 터졌다. 이 산속의 1킬로미터 떨어진 어딘가에서 그를 노리지도 않고 발사한 총알이 우연히 날아와 아무 곳이나 한 군데 꿰뚫기만 하면 그걸로 끝이다. 쏜 놈이 보이지도 않고, 어디에서 발사된 것인지도 모른 채 죽어가야 한다. 너무 허망한 이야기다. 그래서 진우는 총성이 울리기만 하면 이렇게 엄폐물을 찾아 숨었다. 목표물에서 빗나간 애먼 총알에 목숨을 빼앗기고 싶지 않으니까. 문제는 이 지긋지긋한 소규모 교전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재개된다는 데 있었다. 산굽이를 하나 돌고 나면 타타타타― 언덕 하나를 넘을라 치면 또 투투투투― 그럴 때마다 납작 엎드려서 어디에서 울리는 총성인지 확인하는 것도 고역이고, 언제 어디서 군 병력과 맞닥뜨릴지 몰라 도무지 이동 속도를 올리지 못하는 것도 짜증난다. 그리고 거기에 가끔 한 번씩 등장하는 좀비들까지…… 모두 그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뿐이다. 도와주는 착한 친구 같은 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젠장, 내가 왜 너희들 미친 짓 하는 데 끌려와서 덩달아 이 고생을 해야 하냔 말이야!” 진우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자신을 이 산속으로 끌고 들어온 그 소령과 중위를 원망했다. 아까부터 내리고 있는 부슬비 덕분에 아직 대낮인데도 하늘은 어둑하다. 워낙 더운 날씨였기 때문에 비 자체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 시원하기까지 하다. 다만, 시야가 좁아진 게 부담스럽다. 아주 미세한 빗방울들이 쉬지 않고 쏟아지는 산속의 대기는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변해 있다. “후우~ 먹자, 먹어. 일단 시간 있을 때 먹어 두자.” 진우는 등에 지고 있는 보따리에서 인삼 뿌리들을 꺼내 빗물에 씻은 후 입에 넣고 와득와득, 씹었다. 세상이 다 좃같아도 인삼만은 여전히 맛이 좋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제 인삼을 배부르게 먹고 나서부터는 피곤한 것도 훨씬 덜해진 듯한 기분이다. “횡성…….” 진우는 반쯤 잘라 먹은 인삼 뿌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주변에 산이 많다는 걸 정보로 치지 않는다면,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지리 정보는 여기가 횡성이라는 것뿐이다. 밭에 박혀 있던 ‘횡성 인삼 영농 조합’이라는 표지를 보고 얻은 정보다. 그러니까 화천에 닿으려면 북서쪽을 향해 가야 한다. 젠장, 북서쪽은 무슨. 총소리에 쫓겨 산을 뺑뺑이 돌다 보면 어디가 동쪽인지도 잘 분간이 가지 않는데……. 진우는 또 끌탕을 했다. 투투투투투― 투투투― 투투두둑― 진우의 전방에 펼쳐진 계곡을 끼고 양쪽 산에서 서로를 향해 쏴 대는 총성은 좀처럼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서로들 어지간히 대단한 군인이든가, 아니면 지독하게도 못 맞추나 보다. 아무래도 저쪽으로 가는 건 포기하고 우회로를 찾아야 할 것 같다. 또 돌아가야 하나…….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한숨이 나온다. 다리가 아프고 발이 피곤한 건 괜찮다. 등에 인삼을 한 보따리 짊어지고 있으니, 하루나 이틀 시간이 더 경과되는 일도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강제적인 뺑뺑이가 진우에게 압박으로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개인화기 때문이다. 멀리 빙 둘러서 길게 이동하다 보면 만나는 좀비의 수도 늘고, 그만큼 실탄도 소모된다. 게다가……. 게다가 이 총, 정이 들 대로 든 K―2, 총번 927307. 얘가 정말로 수명이 다됐다. 진우는 자신의 품 안에 든 총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늘 불안불안한 구석이 있었지만, 오늘 아침 좀비들을 만났을 때 방아쇠를 당겨 보고 확실히 알게 됐다. 어제 그 저격수와의 싸움에서 얘가 마지막 불꽃을 화려하게 피워 올렸다는 걸. 이 녀석은 협곡에서의 그 한 발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그동안 애쓴 걸 생각해 보면 좀 더 버텨 달라고 말하기도 미안하다. 사실 이미 총열이 소모되고도 남았을 시점이 한참 전에 지났다. 삼척으로 이동한 날부터 대체 이 녀석으로 몇천 발이나 쏜 건지……. 어제 그 좀비에 물려 죽은 병사의 총을 집어 왔어야 했는데……. 피투성이 총이라 왠지 꺼려졌고, 손에 길이 든 내 총이 더 낫겠지 하는, 막연하고 어리석은 기대가 있었다. 특히 어제 하루는 유난히 잘 맞기도 했고. “뭐, 이젠 후회해도 다 소용없는 일이잖아. 가볼까?” 배도 어느 정도 채웠겠다, 총성이 잠시 뜸해진 틈을 타서 진우는 얼른 뒤쪽 산길로 내달렸다. 젖은 산길은 미끄럽고, 안개비가 자욱하게 내린 산속은 30미터 앞도 잘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래도 언제까지 그 자리에 앉아서 버틸 수만은 없기에 탄착군이 형성되지 않는 죽은 총을 꾹 붙들고 뛰었다. 투투투투투― 투투투투― 등 뒤에서 또다시 시작된 난사. 자신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진우는 저절로 목을 움츠렸다. 그리고 가능한 한 언덕을 옆에 끼고 걷기 위해 애를 썼다. 한 시간여 동안 더 산속을 헤매고 난 뒤, 그의 앞에 좁은 오솔길이 나타났다. “이리로 가도 되나…….” 진우는 나무 그늘 안에 숨은 채 주변의 산들을 둘러봤다. 뿌연 안개비 속에 잠긴 녹색의 산봉우리들 하나하나가 다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혹시 저 중간 어딘가에 매복하고 있는 병력이 도로를 겨냥하고 있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바로 옆, 1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중위의 가슴이 뻥 뚫리는 걸 보고 난 뒤부터 생겨난 그 공포심은 도로를 볼 때마다 저절로 되살아난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워낙에 시야가 좁아진 터라 산속에서도 도로가 그리 훤하게 보이지 않을 것 같은데……. 떨리기는 하지만 이럴 때를 틈타 이동할 수 있는 만큼 잽싸게 가두는 게 낫다. 안 그러면 내전이 벌어지는 험한 산속에서 계속 헤매고 다녀야 한다. 후우~ 후우~ 진우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조심스레 오솔길로 내려섰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 떨어야 하는 거냐, 대체. 그냥 길을 걸어가는 것뿐이잖아.” 그렇게 혼잣말을 할 만큼 겁이 나기는 해도 막상 평지 위를 걸어보니 확실히 좋다. 숨 막히는 비탈도, 발목을 휘감는 잡초도 없고, 돌부리에 걸려 비틀거릴 일도 없다. 이렇게 편안한 길이라면 멈추지 않고 열 시간도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진우는 기죽은 눈초리로 사방을 훑어보면서도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몇 개의 굽이를 돌고, 다시 또 굽이를 만나고 방향마저 슬슬 어지러워질 무렵, 앞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딸랑~ 딸랑~ 진우는 바짝 얼어붙어 버렸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수만 가지 경우의 수가 떠오른다. 뭐지?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이런 이상한 방울 소리를 내는 건 대체……. 하지만 도무지 추측이 되지 않는다. 진우는 길가의 수풀 속으로 쓰러지듯 몸을 숨겼다. 그러고는 숨을 죽인 채 가만히 기다렸다. 잠시 후, 굽이를 돌아 나오는 방울 소리의 주인공들을 보고 진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음머~ 소다. 누런 황소. 어떻게 풀려난 건지는 모르겠는데, 방울까지 단 세 마리의 황소가 아주 한가롭게 오솔길을 타박타박 걸어오고 있다. 송아지 한 마리와 어른 소 두 마리. 마치 가족처럼 보이는 녀석들은 진우를 보고도 별 놀라는 기색 없이 걷다가 또 길가의 풀을 뜯는다. “……횡성 한우.” 퀭한 눈으로 소들을 보고 있던 진우는 아무 생각 없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단어를 듣자마자 반사작용처럼 입안 가득 침이 고인다. 한우…… 등심, 육회, 갈비, 불고기……. 주머니 사정 때문에 예전에도 별로 먹어 본 기억은 없지만, 세상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앞으로는 더 먹기 어려워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큭큭큭, 미친놈아. 고기 한입, 그것도 날고기 한입 먹자고 저렇게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놈들을 죽이겠다고? 너 뭐냐? 악마냐? 큭큭큭.” 잠시나마 총을 만지작거렸던 자신이 우스워서 진우는 혼자 문답을 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너희 오늘 용꿈 꾼 줄 알아, 인마! 대검만 있었으면 나도 어떻게 했을지 몰라.”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소 일가족에게 인사를 한 진우는 괜히 유쾌해져서 피식거리며 소들이 왔던 길을 따라 걸었다. 녀석들이 잘 가고 있나 다시 한 번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콰쾅! 전방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들려온다. “으앗!” 진우는 또 바짝 엎드렸다. 곧이어 시작되는 총성. 메아리가 사방에서 울리지만, 11시 방향인 것 같다. 젠장! 교전을 피해서 얼마를 돌아왔는데, 여기에서도 또 이 난리라니. 그럼 대체 어디로 가라는 말이야, 어디로……. 이젠 이러는 거 정말 지긋지긋하다. 수풀 속으로 기어 들어가면서 진우는 총을 가진 모든 족속들을 저주했다. 쑹쑹쑹쑹쑹― 머리 위로 울리는 요란한 소리. 바람을 가르며 지나가는 것은 헬리콥터다. 크기나 모양이 아마도 블랙 호크인 것 같다. 블랙 호크는 능선에 바짝 붙어 낮게 날면서 진우가 숨은 곳을 지나쳤다. 어딜 목표로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저기에서 쏴 대기 시작하고 특수부대원들이 추가 투입된다면 더 크고 진한 피바람이 불 것만은 분명했다. “……미쳤네. 이젠 공중전까지…….” 순식간에 저 멀리까지 날아가는 헬기의 꽁무니를 보면서 진우는 맥없이 중얼거렸다. 말로는 타박을 하고 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부러움의 감정이 더 컸다. 저 스피드…… 저 강인함…… 그리고 저 헬리콥터 내부의 병사들이 소지하고 있을 막강한 개인화기……. 수명이 다해 버린 총을 들고 산속을 정처 없이 헤매고 있는 자신의 입장에서는 모두 다 부러울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물론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건 질색이지만. ‘또 있는 건가?’ 세 대의 헬기가 더 지나갈 때까지 가만히 숨어 있던 진우는 수풀 밖으로 삐죽 고개를 내밀고 전방의 먼 산 쪽을 주시했다. 쑹쑹쑹쑹― 아직도 작게 프로펠러 소리가 울린다. 그게 지나가 버린 헬기들이 남긴 메아리인지, 아니면 저 봉우리 앞쪽을 넘어오고 있는 또 다른 헬기가 만들어내는 소리인지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 동안에도 저 멀리 산속에서는 쉼 없이 총성이 난다. 잠시 후, 봉우리 사이로 다섯 번째 블랙 호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능선에 바짝 붙어 날아오는 비행의 고도나 속도, 모두 앞서의 네 대와 거의 같았다. “죽인다, 진짜…….” 자신은 일주일이 걸려도 다 주파하지 못할 것 같은 지형을 순식간에 가로질러 날아오는 블랙 호크를 보며 진우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1초도 지나지 않아 열한 시 방향의 산기슭에서 대각선으로 수천 개의 불꽃 기둥이 솟아올랐다. “어!” 진우의 입에서 경악의 외마디가 터져 나왔다. 태어나서 그런 광경을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몇 초나 지나서 드르르르릇― 드르르릇― 하는 저음의 발사음이 들려왔다. 블랙 호크의 주변을 서너 번 훑으며 방향을 조금씩 틀던 불꽃 기둥은 마침내 꼬리 로터를 박살 냈다. 꼬리 부분에서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오자마자 블랙 호크는 중심을 잃은 채 빙글빙글 돌았고, 그러면서도 엄청난 속도로 산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드르릇― 드르릇― 몇 차례 더 불꽃 기둥이 치솟았지만, 흔들리며 낙하하는 블랙 호크에 추가 대미지를 입히지는 못했다. 사실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이미 자세를 통제할 수 있는 기능이 마비된 블랙 호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완만한 산의 중턱을 들이받았다. 곧바로 가느다란 연기가 솟아올랐다. 진우가 서 있는 곳을 기준으로 네 시 방향이다. “하아아~ 하아아~”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학살. 중위의 피를 뒤집어썼을 때와는 또 다른 충격에 진우의 숨이 가빠진다. 자신이 그렇게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던, 강인하고도 아름다운 비행 물체가…… 그 안에 탑승하고 있던 병사들이…… 순식간에 끝장나 버렸다. 그 이상한 소리를 내는 발칸포의 화망에 걸리자마자……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다, 달아나야 하나…….” 진우는 초식동물의 얼굴이 되어 어디로 도망쳐야 할지 퇴로를 모색했다. 자신과 같은 땅개 하나를 잡으려 할 때도 그 많은 병사들이 추격해 왔는데, 저렇게 커다란 전리품을 챙기기 위해서는 당연히 훨씬 더 대규모의 병력이 곧바로 투입될 것이다. 그러니 피하는 게 상책이다. 근처에서 어슬렁거려 봐야 공연한 싸움에나 말려들게 된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기기 어렵다. 그렇게 어디로 튈까를 고민하던 진우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가만……. 너 지금 대체 무엇 때문에 어디로 가려고 하는 거였어?” - 그거야 총알 가지러 화천 가는 거지……. 만 발. 알잖아……. “야! 바로 저기 네 시 쪽 산 중턱에 총알 있어. 아마 못해도 헬기 안에 수천 발은 들어 있을 거야. 거기에 더해서 총도 잔뜩 있을 거라고!” - 그러네……. 자신과 문답을 나눈 진우는 블랙 호크가 추락한 네 시 쪽의 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열한 시 방향에서 보낸 추격대가 네 시 쪽 추락 현장에 도착하는 것보다 자신이 훨씬 더 빨리 저기에 닿을 수 있다. 시야가 확보되어 있지는 않아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으니, 위치를 파악하는 데도 어려움이 없다. ‘그럼 대체 왜 망설이고 있는 거지? 뭐가 그렇게 무서워?’ 입술을 꽉 깨문 진우는 곧바로 오솔길을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요란한 소리에 겁을 먹고 걸음을 서두르는 황소 일가족을 추월한 진우는 망설임 없이 산비탈을 기어올랐다. 총! 총알! 광기에 가까운 설렘이 진우의 온몸에서 아드레날린을 샘솟게 만든다. 비탈을 미끄러지고 언덕을 뛰어넘는 동안 쿵쾅거리며 심장이 응원을 한다. 죽어버렸을 게 분명한 젊은 군인들에 대한 애도나 비통한 동정심 같은 것은 완전히 저 구석 어딘가로 숨어버렸다. 오로지 추격대보다 먼저 추락 현장으로 가서 무기와 실탄을 챙겨 달아나겠다는 일념뿐이다. “하아아~ 하아아~” 얼마나 더 내달렸을까. 진우는 그 자리에 엎어져 잠시 숨을 골라야 했다. 너무 열심히 뛰느라 과부하를 걸었던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것 같다. 마음이 급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산속의 원근감이라는 게 원래 그렇게 가까운 듯 막연하게 먼 것인지, 아무리 뛰고 달려도 연기가 솟는 지점과의 거리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저 멀리에서 달려오고 있을 추격대에게도 공평하게 적용되는 조건이니까, 얼마든지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괜찮아, 하아~ 내가 더 빨라. 빠를 거야.” 진우는 비와 땀으로 흠뻑 젖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훑어내고, 부들거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줬다. 여기서 조금만…… 조금만 더 힘을 내면 정말 꿈에 그리던 것들을 손에 넣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기운을 내자. 진우는 그런 말들로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시 이를 악물고 달리기 시작했다. 첨벙, 얕은 개울을 지나서 다시 언덕을 기어오르고, 비탈길에서는 구르듯이 몸을 던졌다. 나뭇가지에 얼굴을 긁히고, 힘이 풀린 다리 때문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가느다란 연기가 바로 저기에서 그를 유혹하듯 피어오르는 통에, 지금 당장이라도 등 뒤에서 버석거리며 추격대가 나타날까 봐 두려워서 멈출 수가 없었다. “끄으윽~ 으윽~ 하아아~” 사람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욕심을 부리다가 이렇게 죽는 거구나 싶을 만큼 숨이 차오른다. 눈앞의 풍경이 조금씩 일그러진다. ‘이거, 아무래도 잠깐 쉬었다가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유혹이 머릿속을 뒤흔들 때, 덤불 속을 빠져나온 진우의 눈에 커다란 쇳덩어리가 보였다. 헬기의 꼬리 부분이다. “허! 바로 여기에 있어. 다 왔어!” 진우는 그것이 무슨 신의 계시라도 되는 양 잘려 나간 헬기의 꼬리 부분을 손으로 쓸며 지났다. 거기에서부터는 쉬웠다. 뚝 부러져 나간 나무들과 움푹 팬 흙이 헬기가 어떻게 휩쓸고 지나갔는지를 아주 친절하게 일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블랙 호크는 20여 미터 이상을 더 돌진한 후, 언덕 아래로 떨어져서 계곡의 물속에 앞코를 박고 멈춰 서 있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기체 손상이 적어서 진우는 그게 놀라웠다. 떨어져 나간 오른쪽 문에는 피범벅이 된 사람의 상반신이 걸려 있다. “후우우~” 한 번 깊게 숨을 들이쉰 진우는 K―2의 안전장치를 해제한 후, 천천히 언덕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