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6. 던전 & 아이템즈 (1) (246/449)


246. 던전 & 아이템즈 (1)
2022.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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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와 젠킨스가 암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바로 그때, 상봉동 코스트코 앞에서는 막 하나로 합쳐진 모든 색깔의 좀비들이 행진 중이었다.

보안관 일행은 평소처럼 길가의 6층 모텔 옥상에서 놈들이 지나는 모습을 숨죽여 가며 지켜보고 있었다. 빨강, 파랑, 노랑, 분홍…… 모든 색이 다 모여 있다.

그르르르, 그르르…….

수천에 달하는 좀비들이 그릉거리며 천천히 대로 위를 걷는다.

워낙에 무리의 덩치가 커져 버린 터라 아무 짓도 않고 그저 천천히 7~800미터 정도의 구간을 다 지나가는 것만 해도 한 시간 가까이가 소요됐다.

행렬의 양 끝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질리는 모습이다. 어마어마하게 많다.

꿀꺽.

침 넘기는 소리조차 내기가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다들 긴장하고 있는 터라 계속 침을 삼키게 된다. 자꾸 오줌이 마렵다.

지금까지의 행동 패턴으로 보아 놈들이 6차선 대로를 따라 쭉 걸어가 버릴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마음 한구석에서는 두려움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수천…….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엄청난 수가 바로 몇십 미터 떨어진 곳을 지나고 있다.

놈들이 갑자기 변덕을 부리거나 해서 이대로 여기 주저앉아 버린다면…… 그 순간 모든 게 끝난다. 굶어 죽기 전에, 아마 두려움 때문에 피가 말라 죽을 것이다.

‘제발 그대로 가라. 제발 그대로 쭉 가 주세요. 부탁입니다…….’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일행들은 한 마음으로 빌었다.

무한에 가까운 압박을 주던 좀비의 행렬이 마침내 시야 밖으로 사라졌을 때, 모두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온다. 그러고는 다들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무섭기는 했지만 그래도 별탈 없이 모든 좀비들을 하나로 합쳐 냈다.

가장 멀리 돌았던 빨간 좀비들의 궤도를 따를 테니까, 이제 저 좀비 군단은 열네 시간에서 열다섯 시간을 주기로 한 번씩 이 앞 도로를 지날 것이다.

앞으로는 그것만 신경 쓰면 이제 예기치 못했던 좀비들 때문에 위험에 빠질 일은 없다. 물론 골목 안으로 숨어들어 왔던 여섯 마리는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다.

“와아~ 냄새! 좀 무서웠어. 그치?”

삼식이가 혀를 내두르며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공기 중에는 아직도 놈들이 풍기던 그 특유의 악취가 진하게 남아 있었다.

“좀 무섭다고? 완전 무서웠지. 보고 있는데 ‘우리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싶더라.”

유빈이 난간에 등을 기대며 얼굴의 땀을 훔쳤다. 주먹을 어찌나 꽉 쥐고 있었는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빨갛게 새겨져 있다.

물론 좀비들의 행진에만 집중하고 있었을 때에는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는 줄도 몰랐다.

“무슨 짓을 하긴요. 열네 시간을 벌었죠. 아무나 이런 수를 생각해 낼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규영이의 오른손을 잡아 주고 있던 제니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규영이의 왼손을 담당하고 있던 태권소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30분이 멀다 하고 이 앞으로 좀비들이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확실히 낫지.”

“저놈들 수가 얼마나 될까? 3천? 4천?”

유빈이 물었다. 보안관은 어림없다는 표정이다.

“훨씬 더 될 것 같은데? 적게 잡아도 5천은 넘을 기세야. 6천? 에이, 그걸 세고 앉아서 뭐해. 어차피 더 이상 싸운다거나 뭘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규모가 아닌데.”

그저 보기만 하는 것뿐인데, 언제나 자신만만하던 보안관조차도 꽤나 질려 있었다. 그만큼 수천이라는 규모는 위압적이었다.

아직도 심장이 벌렁벌렁 뛰고 있는데, 정작 지금까지의 모든 작업은 다 사전 준비 수준에 불과했다는 게 우습다. 진짜 작전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자, 이제 그 열네 시간을 소중하게 사용해야지? 코스트코 이야기를 해 보자.”

잠시 모두에게 숨을 돌릴 틈을 주고 나서 유빈이 말했다. 삼식이가 자신의 이마를 두드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러네. 젠장, 그냥 좀비들만 한 덩어리로 묶으면 다 끝나는 게 아니었구나.”

“응. 쟤들이 열 시간 넘게 자리를 비워 준 이 틈을 노려야지. 코스트코 안에 들어가 본 사람, 손.”

유빈의 말에 대부분 손을 들었다. 의외였다. 유빈이 물었다.

“삼식이, 너 저기 언제 가 봤어?”

“우리 의정부 코스트코 자주 갔었는데? 거기서 공사할 때, 그, 왜…… 작업반장님이 회원 카드가 있어서 맥주를 막…….”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바로 이 건물 말하는 거야. 여기 상봉 코스트코 내부를 본 사람 손 들어보라고.”

이번에는 대다수의 손이 내려갔다. 계속 손을 들고 있는 사람은 태권소녀와 규영뿐이다.

일전에 코스트코에 들어갔다가 좀비들의 습격으로 떼죽음을 당했다고 했으니, 적어도 그 둘은 가 봤을 거라고 기대했다. 유빈은 두 사람에게 물었다.

“저기가 주차장이지? 혹시 저기도 가봤어?”

유빈이 손가락을 천천히 위로 올리며 훑은 곳은 코스트코의 2층부터 옥상까지다. 대형 마트의 일반적인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권소녀가 대답했다.

“난 예전에도 자주 왔었어. 선수촌 선배 중에 저기 물만 마신다는 사람이 있어서 짐꾼 비슷하게……. 여튼 매장이고, 주차장이고 훤해. 뭐가 궁금한 건데?”

“주차장이랑 매장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어? 가능한 한 자세히 알려줘.”

“뭐, 저런 형태의 주차장은 대충 비슷하지 않나? 저기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저 문으로 차가 들어가고, 나선형으로 된 길을 따라 올라가면 2층 주차장이야. 거기에 차를 세우면 왼쪽 벽에 문이 있어. 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기에 그…… 계단 없는 에스컬레이터 같은 거 있지? 그…… 뭐라고 하나. 아, 무빙워크. 그래, 무빙워크가 있지. 그걸 타고 내려가면 저 정문 왼쪽이야. 그것과 마주 보는 식으로 올라가는 무빙워크가 있고. 대충 상상이 돼? 나머지 층들도 다 마찬가지야.”

태권소녀는 꽤나 성실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유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추측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근데, 저 안에 몇 마리 정도 있냐?”

보안관이 물었다.

음, 태권소녀와 규영이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한때 그들의 일행이었던 사람들도 지금은 ‘마리’로 헤아리는 좀비가 되었다는 게 마음 아픈 것이다.

눈을 아래로 깔고 셈을 해보던 태권소녀가 확실하지 않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꽤 많아. 70? 80? 어쩌면 그보다 더 많고.”

으아~ 몇몇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70……. 해머로 때려 죽여도 한세월이다. 물론 얌전히 죽여 달라고 기다려 줄 놈들도 아니고. 70마리가 달려들어 난리를 친다면…….

골치깨나 썩게 생겼다. 정문에서 보았던 놈들 외에도 매장 안쪽에 숨은 좀비들이 꽤나 많은 모양이다.

“뭐…… 그 정도야 되겠지. 쳐들어온 좀비들도 있고, 안에 갇혔던 사람들도 있으니까. 근데 이상하지 않아?”

그렇게 말한 유빈은 다시 옥상 주차장을 가리켰다.

“우리가 바로 이 앞 도로를 수도 없이 지나다녔고, 심지어는 바로 저 아래까지 갔던 적도 있는데, 단 한 놈도 저기서 뛰어내린 놈이 없었어. 단 한 마리도 말이야.”

모두의 시선이 코스트코 건물로 향했다. 유빈의 말을 듣고 보니 이상하다. 건물 옥상은 물론이고, 2층에서 4층 사이 주차장에도 개방되어 있는 부분이 많았다.

좀비들이 뛰어내리려면 언제든지 그럴 수 있는 구조다. 그리고 놈들은 몇 층에 있든 간에 사람을 보면 주저 없이 뛰어내린다.

그렇다면…….

“내 생각에 저 주차장에는 좀비들이 없어.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1층 매장이나 그 아래에만 잔뜩 모여 있다고. 아마 혜주가 말했던 그 무빙워크가 지금은 박살이 났거나,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지만 무슨 문제가 생겨서 좀비들이 고립돼 있는 것만은 분명해.”

유빈의 의견에 제일 먼저 의문을 제기한 건 삼식이였다.

“그냥 1층이 좋아서 있는 걸 수도 있잖아.”

“70마리가 전부 다 1층성애자라고?”

“걔들도 좀 전에 지나갔던 놈들처럼 코스트코 1층에서 크게 원을 그려 가며 뱅글뱅글 행진 놀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뭐, 이유가 그렇다 하더라도 2층부터 옥상까지 주차장에 좀비가 없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는 게 없네. 그렇지? 물론 조금 있다가 실험을 해 봐야 확실해지긴 하겠지만.”

유빈과 삼식이가 말장난 같은 토론을 벌이고 있자 태권소녀가 채근을 했다.

“너 또 말 늘어진다. 아직 요점은 나오지도 않았어. 그래서? 주차장에 좀비가 없으면 어떻게 한다고?”

“굉장히 크고 좋은 기회라는 거야. 네가 이야기해 줬잖아. 저 안에 주차장이랑 매장이 연결되는 곳이 무빙워크라고. 비탈길이지. 그것도 사람 두 명이나 겨우 나란히 설 수 있을 만큼 아주 좁은 비탈길. 위쪽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가 뛰어 올라오는 좀비들을 상대한다면 평지에서 싸우는 것보다 몇 배나 편해. 안전하기도 하고.”

“네가 무빙워크는 끊어졌을지도 모른다며?”

“그렇다면 더 좋지. 약하게 살짝만 고쳐 놓고 꾀면 좀비들이 뛰어오다가 무너져서 떨어져 죽을 테니까. 그런데 정말 끊어졌을까? 올라가는 거, 내려가는 거, 두 개가 동시에? 아닐 것 같아.”

유빈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하지만 태권소녀는 아직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근데 있지, 좁은 오르막길을 뛰어 올라온다고 해도 좀비들은 빨라서 금방이야. 나랑 쟤만 믿고 덤비면 안 돼. 일곱을 상대로 하는 거랑 칠십을 상대로 하는 거는 완전히 다른 싸움이야. 위험하다고.”

“응, 그것도 잘 알지. 나도 위험한 거 무지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아무도 안 다치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근데 좁은 비탈길이라서 쓸 수 있는 꼼수가 떠올랐거든. 자, 들어봐.”

모두의 머리를 모여들게 한 유빈은 자신이 지난 며칠 동안 궁리해 낸 계획을 종이와 펜까지 동원해 가며 설명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잠시 후, 유빈의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는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간단하고 쉬워 보인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또 말이 된다. 그게 재미있는 부분이다.

어지럽게 작전 계획도를 그려놓은 종이 위로 방점을 찍듯 유빈의 땀이 뚝 떨어졌다. 보안관과 태권소녀, 제니 심지어 삼식이까지도 진지한 눈빛으로 검토를 해 본다.

계속 배가 아프다고 찡찡거리던 신입은 규영과 함께 남겨진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엄살 부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삼식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정말 잘 미끄러지기는 할까? 안 미끄러지면 어떻게 하지?”

“그 홈을 메울 수 있을 만큼 넉넉하게 부으면 아마 거의 될 거야. 안 되면 그때는 다시 생각해 보자. 거기까지 갔더라도 철수하는 데는 아무 문제 없어. 매장과 주차장이 분리되어 있기만 하다면.”

다들 한번 해 보자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조금 전의 엄청난 좀비 행진을 보고 난 후여서 다들 초조해져 있었고, 서둘러 승부를 보고 싶어 했다.

열네 시간 혹은 열다섯 시간의 여유가 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한낮에 통째로 비어 있는 거리를 얻기 위해서는 또 2~3일 정도를 기다려야만 한다. 오늘이 기회다.

“그러면 우리 셋이 준비물 챙겨서 올게. 너희는 좀 쉬고 있어. 위험할 일은 없겠지만, 망도 봐주고.”

유빈과 보안관, 삼식이는 상점에서 필요한 장비들을 더 털어 오기 위해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셔터 문을 들어 올리던 보안관이 멍하니 코스트코 정문 앞의 거리와 시체들을 바라봤다. 며칠 전 정체가 발생했을 때, 몇몇 이탈자 좀비들이 걸어 들어온 방향이다.

그런 식의 유입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던,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걸 보고 난 후부터 보안관의 뇌리에는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고, 이후 줄곧 가라앉지 않고 있다.

답이 떠오를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정리해 보면 아주 막연하기만 하다. 고민은 200여 미터를 걸어 내려와 공구상을 뒤질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아까부터 무슨 생각 해, 보안관?”

무선 전동 드릴과 네일 건을 찾아내서 공구 가방에 담던 삼식이가 멍해 있는 보안관을 툭, 치며 물었다.

아……. 보안관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좀비 새끼들 있잖아. 아까 그 수천 마리가 여기를 지나가면서는 왜 흘리고 가는 놈이 한 마리도 없지? 우리 복지 센터 앞의 번화가에서는 안 그랬잖아. 지나갈 때마다 꼭 몇 마리씩을 남겨 놓고 가서 그것들을 찾아 죽이는 게 일이었는데……. 이상하지 않냐?”

“그러네, 생각해 보니. 오호, 그거 뭐지? 동네마다 유행이 있나? 아니면 이미 여기를 자기 구역이라고 해 놓은 새끼들이 있어서 터치하지 않는 게 좀비들 사이에서 기본 매너인 걸까? 그런 가설은 어때?”

“대로를 지나는 좀비들이 코스트코 안에 있는 놈들을 어떻게 알겠어? 보이는 각도도 아닌데.”

“에이, 꼭 봐야 아나.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 아니면 음…… 텔레파시?”

삼식이를 가만히 보고 있던 보안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미친놈이지, 너한테 무슨 답을 바라고……. 됐어, 새끼야. 좀비가 퍽이나 네 구역, 내 구역 따지고 있겠다. 걔들이 무슨 구청장 선거 하냐?”

“그거야 모르지. 낯선 놈들끼리 붙여 놓으면 서로 어색하고 불편할 수도 있는 거니까.”

‘불편함’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보안관의 머리를 스치는 또 하나의 생각이 있었다. 좀비들에게 홀려 까맣게 잊고 있었다. 보안관은 삼식이를 홱 돌아보며 말했다.

“야, 삼식아. 밤에 경비 보는 거 나랑 시간 바꾸자. 네가 혜주랑 같은 조 해라.”

“왜에? 나는 유빈이랑 같이 있는 게 더 편한데……. 그리고 그렇게 나누면 둘 다 전투력이 그저 그래지잖아. 차라리 지금처럼 너희 둘 조가 엄청 센 게 낫지 않아?”

“아……. 그, 그냥 좀 바꾸자고! 젠장, 이유가 있어. 내가 힘들어서 그래.”

보안관이 다짜고짜 졸라대자 삼식이는 그게 재미있는지 팔짱을 딱 끼고 거들먹거렸다. 비싸게 굴기로 한 모양이다.

“그을쎄~ 뭐,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 못 바꿔줄 것도 없기는 한데…… 이렇게 다짜고짜 맡긴 거 내놓으라는 식이면 곤란하지.”

“부탁합니다. 불편해서 그래요. 바꿔 주세요. 됐냐, 이 새끼야?”

“큭큭크, 부족해. 근데 우리 광훈 군이 무슨 잘못을 해 놓으셨기에 나한테 이렇게 애원을 하시는 걸까? 수상한데? 혜주 보고 있으면 자꾸 사랑에 빠질 것 같아? 제니를 향한 일편단심이 흔들려?”

“어휴~ 그런 게 아니라…….”

보안관은 한숨을 푹 쉬더니 갑자기 주변을 둘러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사람이라고는 두 명이 전부인 공간인데.

“그…… 걔가 자꾸 가, 갑바를 보여 줘서…….”

“진짜? 왜? 왜 보여 줬는데?”

“야! 이 새끼야, 목소리 좀 낮춰. 아니…… 무슨 노골적으로 보여 주는 것도 아니야. 이, 이렇게 목을 콱 잡아서 꼼짝도 못 하게 해 놓고 치료해 준다고……. 그러면 네 시선이 어디로 가? 여기지? 응?”

보안관은 삼식이의 목을 억지로 잡고 끌어당기면서 자신의 가슴 근육을 힘주어 모았다.

“하하하! 하지 마, 징그러.”

오뚝한 콧날이 보안관의 가슴에 닿을락 말락 해지자 삼식이의 웃음보는 완전히 폭발했다.

“웃지 마, 이 새끼야. 나는 심각해. 제 딴에는 잘해 준다고 약도 발라 주고 그러는 거라서 화도 못 내겠고, 아주 미칠 것 같아. 그러다가 갑자기 또 막 성희롱당했다고 성질내고 지랄할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워. 너도 걔 성질부리는 거 봤잖아.”

“야, 보안관. 걔가 너 좋아하나 보다.”

“좋아하는데 얼굴을 이 모양으로 만든다고? 장난하냐?”

보안관은 어제 태권소녀가 ‘치료’해 준 얼굴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겨우 붙었던 딱지가 다 뜯어져서 보기에도 따가워 보인다. 하지만 삼식이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데 좋아한다는 말은 먼저 하기 싫어서, 네가 자기를 좋아하게 만들려고 그러는 거야. 근데 영 서툴러. 그 분야는 내가 잘 알지.”

“난…… 제니밖에 없는데?”

“그런 게 어디 있어? 얘도 만나 보고, 제니도 만나 보고, 그러다가 더 마음이 끌리는 게 진짜 좋아하는 감정이지. 처음부터 나는 ‘누구 거다’라고 딱 정해 놓는 건 바보짓이야. 그거는 정말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니고, 그 사람만 좋아하는 자기의 모습에 우쭐하는 거라고. 아유, 말하다 보니까 복잡하다. 내가 지금 뭐라고 했는지도 잘 모르겠네. 하여간 다 만나 봐. 길지도 않은 인생인데……. 대신에 거짓말만 하지 말고.”

“이상한 바람둥이 개똥철학은 너나 많이 믿으시고, 그래서 결론이 뭐야? 야간 경비 시간 바꿔 줄 거야, 안 바꿔 줄 거야?”

보안관과 삼식이의 실랑이는 계속되었고, 결론은 스포츠 용품점에 들렀다 돌아온 유빈이 보안관과 시간을 교대해 주는 것으로 났다.

사실 야간 경비니 뭐니 떠들어 봤자 일단 오늘 코스트코 털기가 제대로 되고 난 후의 이야기다.

“이제 이거 자르자.”

공구상 한쪽에 쌓인 쇠파이프를 짚으며 유빈이 말했다.

“아주 날카로워야 해. 푹 박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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