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 불길한 균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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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 불길한 균열 (3)
2022.05.03.
테라가 과자를 가지고 돌아오자 그녀에게 심부름을 시킨 것이 만족스러웠는지 젠킨스는 평소보다도 더 수다스러워졌고, 실없는 웃음이 늘었다.
하지만 테라도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젠킨스의 뒷자리에 앉아 조용히 말했다.
“물 먼저요.”
“주스를 달라니까? 물은 맛없어서 못 마시겠어!”
“주스는 이야기 다 끝나면 드릴게요. 아까 우리 합의에서 물은 마시는 거였어요. 자, 보이시죠. 주스 두 팩은 여기 이 비닐 안에 들어 있어요. 저랑 헤어지고 혼자 계실 때 마시면 되잖아요.”
끄응~ 젠킨스는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물부터 두어 모금 들이켰다. 그러자 테라가 조그만 감자 칩 한 봉지를 놓아 주었다.
“음, 걸어갔다 오면서 생각을 해 봤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 봤던 암호와 그…… 부메랑이라는 게 연관이 있다는 거잖아요. 그리고 젠킨스 씨가 마지막으로 주신 단서가 뭐였냐면, 부메랑의 한계는 소리를 감지할 수 있는 거리가 짧다는 거였고요. 그래서 제 나름대로 추리를 해 보니까 이런 결론이 나왔어요. JL은 젠킨스 씨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장치를 가지고 있어요. 그 방법은 젠킨스 씨만이 낼 수 있는 어떤 소리를 감지하는 거고요. 아마 목소리일까요? 그런데 그 특별한 장치에서 너무 멀리 있으면 소리를 감지하지 못해요. 여기까지 제가 한 말이 맞았나요?”
호오~ 젠킨스는 가벼운 감탄사를 흘리면서 부지런히 감자 칩을 입에 넣었다.
아름다운 소녀가 이렇게 영리하다니……. 그리고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혈관 속에는 외모나 지혜보다도 훨씬 더 소중한 것이 흐르고 있단 말인가? 대체 신은 이 아이를 얼마나 편애할 셈이지?
후후후, 어서 발가락을 직접 보고 확인해야 해. 아물지 않는 상처……. 널 키드의 특징. 그것만 확인되면 이 아이를 내 생명 다음으로 소중하게 다뤄야지. 후후후…….
젠킨스는 저절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대체적으로 보자면 맞았어. 몇 군데 사소하게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사실 디테일의 문제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지. 훌륭해, 테라 양. 어디 계속해 봐. 좀 더 듣고 싶구만.”
“음, 그리고 오늘 우리가 봤던 암호는…… 숫자 1, 그다음이…… 에, RM, KF, FD였어요. 그런데 젠킨스 씨는 아까 힌트라면서 자기 이름과 약자가 다르다는 말도 했죠. TJ여야 하는데 MJ라고 쓴다고 했던 걸 기억했어요. 매드 사이언티스 젠킨스, 혹은 마스터 젠킨스.”
“좋아, 정말 잘하고 있어. 그건 아주 중요한 단서지. 히히히, 내가 그때 너무 많이 알려준 게 맞았군. 자, 그래서 그 MJ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도 말해 주겠나?”
젠킨스는 보고를 듣는 상사처럼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며 두 손을 깍지 낀 채 다리 위에 올렸다.
후~ 테라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고 생각을 정리한 다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RM, KF, FD도 어떤 위치나 건물 이름을 나타내는 약자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요. 약자이긴 한데 원래 이름 그대로의 약자는 아니고, 변형된 거죠. TJ여야 하는데 MJ인 것처럼, JL에서만 통용되는 그런 별명 같은 지명. 왜 그런 생각을 했냐면…… 젠킨스 씨가 그랬잖아요, 오늘 암호는 지금 젠킨스 씨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여서 답을 할 필요가 없는 거라고. 그 말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너무 멀리 있어서 답을 할 수가 없다는 의미도 되는 거거든요. 하지만 젠킨스 씨는 조급해하지 않았어요. 숫자가 1이었으니까 이제 시작이라는 거고, 곧 2도 등장하겠죠. 그러면 거기에는 또 다른 새로운 암호가 적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위치를 나타내는 암호 말이에요.”
테라가 이야기를 마치자 젠킨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좀 전의 것이 A라면 이번 답안은 B 정도야. 그것도 심지어 열심히 하려는 마음에 가산점을 줬기 때문에 겨우 받은 B랄까…….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그런데 그 틀린 절반이 전제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큰 감점 대상이야. 뭐가 틀린 걸까, 테라 양?”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알았다면 애초부터 틀리지 않았겠죠.”
테라가 순진한 표정으로 웃는 바람에 젠킨스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여전히 예리해. 공부를 잘했나?”
“전혀요. 그냥 제니랑 어울려서 노래만 했어요. 함께 거울을 보면서 춤 연습을 하거나, 아이돌들 VOD를 보고 수다 떨고…….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우리가 더 잘할 수 있지 않냐? 난 원곡 부른 가수보다 네 목소리가 더 예쁜 것 같은데? 내가 너 머리 땋아 줄게……. 십 대 여자애들이 친구끼리 흔히 하는 짓.”
“제이미? 제니?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친구와 굉장히 가까웠나 보군. 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늘 냉정한 테라 양의 얼굴에 벌써 그리움이 드러나.”
테라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자 그 이유를 모르는 젠킨스는 눈만 껌뻑거렸다.
“응? 뭐지? 그리운 친구가 아닌가?”
“아뇨. 후후후, 그게 아니라……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제가 누구인지는 아는데 제니는 모르겠다는 사람이랑 이야기해 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랬다고 해야 하나? 뭐, 그런 거예요. 말하는 저도 당연히 듣는 사람이 제니를 알고 있다고만 생각하고 있거든요, 늘. 그래서…… 그냥 그게 웃겼어요. 젠킨스 씨가 외국인이라는 게 확 실감이 돼서……. 저기 큰 광고 보이시잖아요. 제 옆에 있는 저 예쁜이. 후우, 쟤가 제니예요.”
테라는 전광판 옆에 붙은 광고 그림을 가리키다가 갑자기 울컥하는지 손가락으로 얼른 눈가를 찍었다. 두 미소녀의 모습을 음미하듯 바라보던 젠킨스는 능글맞게 물었다.
“그래, 저 섹시 스타는 지금 어디 계신가? 한 번도 못 만나 본 걸 보면 이 스타디움 안에는 없는 것 같은데 말이야.”
“……잘 지내고 있기를 바라요. 그리고 너무 오래 지나지 않아서 또 만났으면 좋겠어요.”
대답을 마친 테라는 크게 숨을 내쉬어서 감정을 정리하고는 다시 젠킨스를 향해 물었다.
“자, 이제 제가 뭘 틀렸는지 알려 주세요. 어떤 전제가 잘못된 거였나요?”
“내가 했던 말 중에 하나 흘려들은 게 있는 모양이더군. 암호를 보고 테라 양이 가장 처음 질문을 던졌을 때, 내가 되물었지. ‘설마 저걸 무슨 약자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이렇게 물었어. 기억나나?”
“음, 그랬나요?”
테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은 모양이다. 젠킨스는 과자 봉지를 탈탈 털어 부스러기와 소금을 입에 넣고 씹으면서 말했다.
“분명히 말했어. 그러니까 RM, KF, FD는 약자가 아닌 거지. 선택지에서 지워 버려야 한다고.”
“하지만 만약 그렇다고 하면 TJ니, MJ니 하는 약자 이야기들은 왜 해 주신 거예요? 말로는 힌트라고 하시지만, 그것 때문에 저는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지기만 한 셈인데.”
“테라 양…….”
젠킨스가 손바닥으로 입 주위의 기름기와 과자 부스러기들을 슥슥, 닦으면서 근엄하고 잘난 척할 때의 목소리를 냈다.
“……한 개의 단서나 규칙으로 모든 걸 꿰뚫을 수 있다면 그건 제대로 만든 암호가 아니지. 나 정도 되는 사람이 설마 그런 식의 일차원적인 암호를 만들었겠나? 그건 나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단서가 두 개 있어. 내 약자는 원래 TJ여야 하지만, 회사 내부에서는 MJ로 사용해. 이게 하나지. 두 번째, 오늘 우리가 봤던 암호들은 약자가 아니야. 하지만 장소를 나타낼 거라는 귀하의 추측은 맞았어. 자, 이렇게 두 개의 단서를 줬으니까 이제 추리는 테라 양의 몫이야. 생각해 봐. 왜 젠킨스라는 사람은 굳이 T를 M으로 바꿨을까? M은 되고 T는 안 되는 이유는 뭘까? 그 차이를 알 수 있다면 퍼즐을 절반 이상 풀어낸 거라고 봐도 돼.”
“차이가 뭔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까지 해도 겨우 절반인가요? 어렵네요.”
테라는 힘들다는 듯 한 손으로 턱을 괴고 투덜거렸다. 젠킨스가 좌석 손잡이를 두드리면서 중얼거렸다.
“좌절하지 마. 테라 양의 머리는 분명 나만큼 좋지 않아. 하지만 이미 테라 양에게는 충분한 축복이 있었잖아. 누구나 부러워할 미모에 그 고운 목소리, 그리고 한 번 좀비에 물리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특별한 체질까지 갖췄지.”
“다른 건 모르겠지만, 그 특별한 체질이라는 건 젠킨스 씨 회사에서 좀비들을 풀어 놓지 않았으면 존재하는지도 몰랐을 거였잖아요. 평생 모르고 살 수도 있었다고요. 그편이 훨씬 좋았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테라는 또 과자 한 봉지를 올려 주었다. 젠킨스는 뻔뻔한 얼굴로 대꾸했다.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려운 주장이군, 테라 양. 이번에 좀비들이 풀려난 것이 JL의 관리 소홀에서 비롯된 비극이라는 걸 부정하자는 건 아니야. 하지만 만약 JL이 프로젝트를 진행하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아니, 난 거기에 동의할 수 없어. 어딘가의 어떤 기업이 JL이 했던 것과 거의 똑같은 일을 했을 거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네. 좀비 박테리아가 한번 그 존재를 드러낸 이후에는 단지 시기의 문제였을 뿐이야. 생각해 보라고. 자본이 엄청난 크기로 규모를 불릴 수 있는 기회를 만났는데, 거기에 부수되는 소소한 비극을 신경 쓸까? 절대 아니지.”
“자기들 욕심을 채울 수만 있으면 몇 명이 죽어도 상관하지 않을 거고, 그게 오히려 당연하다는 건가요? 그래서야 좀비들이랑 별로 다를 것도 없잖아요.”
테라는 징그러운 것을 대할 때처럼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에서 서늘함을 느낀 젠킨스는 두 팔을 살짝 벌리면서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게 태생적인 특성인 거야, 테라 양. 어쩔 수 없는 본질. 귀하는 동정심이 많고, 나는 지적인 능력이 뛰어난 것처럼 자본은 무한 증식을 욕망한다고. JL이 이상한 게 아니야. 이 나라의 타이양 그룹이 그 좀비들을 손에 넣었어도 똑같은 꿈을 꿨을 거야. 단언할 수 있는 건, 만일 타이양이 뭔가 하려 했다면, 그 결과는 훨씬 더 끔찍하고 통제 불가능한 수준이었을 거라는 점이야. 그들보다 JL이 훨씬 유능했기 때문에 그래도 이만큼의 대비책이나마 존재한다는 거지.”
“됐어요, 그런 이야기는. 그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젠킨스 씨가 망쳐 놓은 수많은 사람들의 행복이 떠오르니까. 어차피 반성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런 것보다, 아까 제가 처음에 했던 대답 중에서 어떤 게 틀렸나요?”
음, 새 과자 봉지를 뜯은 젠킨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장비가 나만이 낼 수 있는 소리를 감지할 거라는 추측은 맞았어. 하지만 목소리는 아니야. 육성을 수단으로 사용하기에는 현실적인 제약들이 너무 많거든.”
“그럼 어떤 소리인 거죠?”
“후후후, 거기까지. 그다음으로 넘어가자면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거야. 테라 양, 귀하에게는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놀이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목숨이 달린 일이라고. 그렇게 호락호락 모든 걸 다 알려 줄 수는 없지. 목소리가 아니라고 일러 주는 것도 우리 사이 정도나 되니까 가능한 일이야. 영리한 테라 양이니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고 믿어. 알고 싶다면 더 추리를 해봐. 정답을 말했을 때에는 나도 인정을 할 테니까. 아니면…… 우리가 운명 공동체로서 하나가 되었을 때에는 또 이야기가 다르긴 하지. 테라 양이 나와 함께 JL의 연구소로 갈 거라는 확신이 생기면 더 자세한 방법을 차차 알려 줄 수도 있어.”
“가지 않을 거예요.”
테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젠킨스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럼 대체 왜 이런 것들을 궁금해하는 거지? 이 과자, 이게 지금 이 스타디움 안에서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것들인데도 그것까지 투자해 가면서 내 이야기를 듣고 있잖아. 남자로서의 내가 좋아서도 아니고, 나를 무슨 홀로코스트 범죄자처럼 취급하고 있으니 인간적인 동정도 아닐 거야. 그럼 대체 뭐가 남지? 응? 난 궁금해, 테라 양. 대체 귀하가 대화를 통해 기대하고 있는 바는 뭔가?”
“제가 뭘 기대하고 있는지가 중요한가요? JL에서 가장 힘이 센 열세 명 중 한 사람이었을 때, 젠킨스 씨는 그런 걸 궁금해하는 사람이 아니었잖아요.”
테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 젠킨스는 자조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물론 그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고, 지금 이 과자와 이야기 거래는 테라 양보다 내게 있어 훨씬 절실한 것이긴 하지. 그러니까 사실 이유 같은 건 물어볼 필요도 없어. 난 그냥 듣고 싶다는 이야기를 해 주면서 배만 불리면 되는 거야. 그런데…… 그래도 말이야, 어떤 인간들은 자신이 이해 못 할 어떤 것을 만났을 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존재거든. 나도 그 부류에 속하고……. 초기에 면역자에 대해 물었을 때만 해도 난 우리의 대화가 귀하에게 왜 절실한지 알 수 있었어. 그게 테라 양 본인의 이야기였으니까, 저주가 아니라 축복인 걸 확인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이 구조 플랜 같은 건 완전히 다른 주제잖아. 따라나서지도 않을 거면서 왜 듣고 있지?”
젠킨스가 격정적으로 열변을 토하고 나자 테라는 그의 주머니에 끼워진 물병을 가리키며 마시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고는 가만히 기다렸다.
일단 물을 마셔야 답을 해 주겠다는 의미인 걸 깨달은 젠킨스는 억지로 또 두어 모금을 들이켰다. 원래부터도 물을 잘 마시지 않았지만, 이 정수된 물은 정말 맛이 형편없었다.
“제가 바라는 거요…….”
테라가 젠킨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저는 젠킨스 씨의 과장 섞인 장담들이 모두 사실이기를 바라요. 이 끔찍한 좀비 세상이 언젠가 가까운 미래에 의학의 힘으로 좀 진정되었으면 좋겠고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좀비에 물리면 끝장이라는 두려움에 떨지 않고 마음껏 거리를 걷고 누군가를 만나면 좋겠어요. 이렇게 한 군데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요. 하지만 눈을 뜨고 현실을 보고 있으면 그 바람은 너무 덧없어서 아주 허망한 꿈 같아요. 그러니까 자꾸 젠킨스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거기에서 뭔가 믿을 만한 근거를 찾고 싶은 거예요. 내 이성이 이 사람의 계획을 믿어도 되겠다고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 오늘은 처음으로 증거가 나온 날이었어요. 그 비행기요.”
“비행기가 아니야. 드론이지.”
“하하하, 드론. 그러네요. 하마터면 엄청 중요하고 본질적인 걸 틀릴 뻔했군요. 하지만 그 드론을 보고 나서도 도무지 걱정은 잠재워지지를 않았어요. 과연 젠킨스 씨는 어떻게 구조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이분은 100미터도 완주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인데. 그래서 계속 묻고 있는 거예요. 당신이 자신을 위한 완벽한 구조 계획을 갖추고 있는 건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답이 됐나요?”
큭큭큭, 젠킨스도 실없이 웃기 시작했다. 테라가 100미터 완주 이야기를 했을 때부터다. 한참이나 둥그런 배를 두드리며 웃던 젠킨스가 말했다.
“그래서 나를 걷게 한 건가? 구조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 잘 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운동을 시킨 거야?”
“그것도 이유의 하나지만, 갑자기 심장마비로 잘못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더 컸어요. 백신 개발이 완료되지 않았으니까 아직 젠킨스 씨는 천벌을 받으면 안 되거든요.”
“오, 테라 양. 착한 마음이 감동적이군. 그게 위선인지, 아니면 귀하의 그 아름다운 몸 안에 정말로 천사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인류의 평화를 바랐다는 거잖아.”
젠킨스가 조롱조로 도발했지만, 테라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은 채 가만히 듣고 있었다.
“테라 양,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일단 범위 내에 교신 장치가 배치되기만 하면 타일러 젠킨스는 걸을 필요가 없어. 당연한 거지. 지난 25년 동안 난 조깅은커녕 한 번에 200미터 이상을 걸어 본 적도 없는 사람이야. 이 무릎이 그런 가혹한 운동을 견뎌낼 만큼 튼튼하지 않거든. 그런데 좀비 세상이 왔을 때를 위한 대비책을 만들면서 자신이 이동한다는 선택지를 뒀겠나? 어림없는 이야기잖아. 난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돼. 기다리고 때를 보다가 부메랑이 충분히 가까운 곳에 배치되었다는 걸 확인하면, 그때 신호를 보낼 거야. 그러면 부메랑은 내 소리를 역추적해서 기록할 거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구조 헬기가 소리의 발원지로 올 거야. 자, 이제 안심했지?”
젠킨스는 뮤지컬 배우처럼 손을 흔들면서 과장된 톤으로 떠벌렸다. 말이 되는 건지 잠시 머릿속으로 앞뒤를 맞춰보고 난 뒤, 테라가 물었다.
“그냥 그 신호를 드론이 감지하도록 하는 편이 더 나았던 거 아닌가요? 만약 그랬으면 오늘 당장 구조될 수도 있던 거잖아요.”
“그건 안 돼. 내가 아까 부메랑의 두 가지 한계를 말했지? 거리와 속도. 테라 양의 아이디어는 속도가 문제야. 부메랑은 시속 60킬로미터 이상으로 이동 중인 차량에서조차 제 기능을 못 해. 하물며 하늘 높이 떠서 비행 중인 드론에서는 말할 것도 없지.”
젠킨스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막힘없이 지껄여 댔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거짓말을 꾸며 댄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테라는 납득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알겠어요. 그럼 부메랑이라는 게 얼마나 가까운 곳에 설치되어야 젠킨스 씨가 보내는 신호를 받을 수 있을까요?”
음……. 젠킨스는 잠시 계산을 해본 후에 대답했다.
“애초에 JL이 의뢰한 규격에서 최대치는 1마일로 되어 있지만, 그건 탁 트인 대평원이나 야트막한 건물들이 많은 시골에서나 해당되는 이야기고…… 서울처럼 이렇게 고층 빌딩이 빽빽한 대도시 환경에서는 그보다 수신 범위가 축소된다고 가정하는 게 타당할 거야. 아마도…… 0.6마일 정도. 그 정도면 안정적인 거리라고 믿고 있어. 미터 단위로 환산하자면 1킬로미터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