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3. 불길한 균열 (1) (243/449)


243. 불길한 균열 (1)
2022.05.01.


16554475573607.png

“그 육 회장이라는 사람이 어지간히 무서운 사람인가 보네요. 혹시 부하가 많은가? 초희 씨는 공주님 같은 외모하고 달리 강단이 있어서 어지간한 일로는 그리 겁먹을 것 같지 않아 보이는데.”

고 하사는 은근히 캐물어 봤다. 칭찬을 받은 게 기분 좋았는지 초희는 배시시 웃으며 고 하사의 어깨를 툭, 쳤다.

“아우, 이 오빠 진짜, 완전 사람 볼 줄 아는구나. 맞아요, 나 그런 말 많이 들어요. 곱게만 자랐다고 생각했더니 장군감이라고.”

기분을 맞춰 줘서 입을 열게 한 건 좋았는데, 주제가 벗어나 버렸다.

초희는 자신이 얼마나 외모가 뛰어난지, 그러면서도 대범하고 깡이 좋은지 등을 자랑하느라 육 회장에 대한 걱정은 아예 잊은 사람처럼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래 가지구 그때 감독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이거 웬만한 배짱으로는 못 한다. 그러니까 못 뛸 거 같으면 지금 이야기를 해라. 그럼 내가 대역 배우 불러 준다. 그래서 내가 그랬죠. 감독님, 그 대역한테 같은 옷 입힌다고 해서 표가 안 날까요? 제 몸매 따라올 대역 없을 텐데요? 그랬더니 감독님도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라고요. 결국 직접 뛰었어요. 그랬더니 영화관에서 막 난리가 난 거 있죠? 저 배우 누구냐고. 연기도 진짜 짱이고, 몸매도 끝내준다. 진짜 죽은 거 아니냐. 후후후, 뭐 그래요. 의사 군인 오빠도 그 영화 봤죠? 그 장면만 머리에 콱 박혔죠?”

고 하사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줬다.

제목을 들어본 적이 없는 걸로 봐서 아마 개봉하자마자 VOD 서비스로 직행한 영화인가 본데, 지금의 초희가 이렇게 열을 내고 있는 상황에서 안 봤다는 말을 할 용기는 없었다.

그 긍정에 초희는 더 기분이 좋아져서 까르르 웃었다.

“그렇다니까요. 사람들이 그래요. 이상하게 그 영화 내용이고, 여자 주연이고 뭐고 하나도 기억 안 난다고. 왜 그런지 나는 알지. 내가 압도했거든. 완전 신 스틸러인 거지. 호호호…… 에휴, 그런 훌륭한 배우가 강 실장 오빠 때문에 지금 이게 무슨 꼴이야……. 그러면 군인 의사 오빠도 자세한 건 모르겠네요? 그냥 잠실 간 거 같다는 것밖에.”

“아, 네. 뭐, 그쪽 군인 애들이 제 허락받고 이동하는 건 아니니까…… 저는 그날 얼굴도 못 봤어요.”

고 하사는 자칭 대배우 초희 앞에서 철저히 모르는 사람 연기를 했다. 그렇게 속여 둬야 기동이라는 놈도, 육 회장이라는 놈도 자신을 귀찮게 굴지 않을 거다.

조금이라도 내막을 아는 낌새를 보여 봤자 공연히 놈들의 경계심만 북돋을 뿐, 좋을 게 별로 없다. 초희는 아쉬운 듯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고 하사에게 제안을 했다.

“그럼요, 군인 의사 오빠, 이렇게 해요. 지금 나는 강 실장 오빠 관리 제대로 안 했다고 엄청 깨지게 생겼거든요, 그러니까 육 회장님한테 살짝만 구라를 칠게요. 내가 간호 진짜 열심히 했는데, 강 실장 오빠 상태가 갑자기 너무 안 좋아서 어쩔 수 없이 수술하려고 잠실 쪽 군인들이 자기네 집에 데려간 거라고. 네? 그렇게 얘기를 맞춰 놔요, 우리.”

“에…… 저보고 그런 말을 하라고요? 나는 그 강 실장이라는 분도 몇 번 못 봤고, 육 회장이 누군지도 모르는데요. 나는 앞에 나서서 책임지고 이러는 거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인데.”

“아니, 아니. 그런 거 아니고요. 지금 말은 내가 할 건데, 그냥 나중에 아~주 만약에라도 초희가 거짓말하는 거 아니냐고 누가 오빠 찾아와서 물어보면 꼭 기억했다가 그렇게 얘기해 주라고요. 나를 도와주는 의미에서……. 팬이니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요.”

고 하사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짚어 보면 어차피 변화랄 것도 거의 없다. 민구가 자발적으로 갔느냐, 아니면 잠실 군인들이 억지로 데리고 갔느냐 정도의 차이뿐이니까.

불안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꼬고 있는 초희에게 고 하사가 역제안을 했다.

“그러세요. 제가 돌팔이여서 민구라는 분이 싫어했고, 그래서 초희 씨가 간호를 거의 다 도맡아 했던 걸로 해요.”

“그거 좋다! 그럴게요! 의사 군인 오빠, 짱! 짱! 고마워요.”

약속을 받고 돌아가려는 초희에게 고 하사는 한마디를 더 보탰다.

“건성으로 치료했던 돌팔이 군인이 누구냐고 그러면 하사라고 하세요. 그래야 그 사람들이 확인하려고 할 때 나한테 물어보러 오지. 아니면 엉뚱한 군인들한테서 딴 이야기 들을 수도 있잖아요.”

“푸훕, 알았어요. 그럴 수도 있었겠네. 음, 기억했어요. 하사, 하사…… 후훗.”

변명거리를 얻어낸 초희는 뒷걸음질을 쳐서 멀어지는 내내 연달아 손 키스를 날렸고, 만족한 웃음과 함께 돌아갔다.

“와, 어지간히 부산스럽구만…….”

멀어져 가는 초희의 뒷모습을 보면서 고 하사가 중얼거렸다.

그가 굳이 자신의 신분을 밝힌 것은 혹시라도 저 말썽꾸러기 새끼들이 다른 의무대 병사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자신의 행동 때문에 순진한 애들에게까지 피해가 가면 안 된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감히 군인을 건드리는 미친놈은 거의 없겠지만…….

“기동이, 육 회장……. 젠장, 이야기는 한참 했는데 알맹이가 없네. 생각해 보니까 한 놈은 성을 모르고, 또 한 놈은 이름을 모르잖아. 뭐, 대충 그 정도면 될 것 같기도 하고. 육 씨가 몇 명이나 되겠어. 이 새끼들, 아주 싹 다 입영을 시켜 버려야지.”

아직 공문 하달이 지연되고 있지만, 징집은 곧 닥친다. 고 하사는 기동이라는 놈의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그 징집을 노리고 있었다.

서류 업무를 담당하는 장교에게 부탁해서 육 회장, 기동이 전부 다 집어넣어 버리면 꼼짝없이 끌려가는 수밖에 없다. 강 소위는 그 정도 융통성을 언제든 발휘해 줄 수 있는 장교다.

이미 징집 동의서에 사인은 다 했겠다, 총을 든 군인이 바로 곁에서 지키고 있다가 다른 줄로 밀어 넣어버리면 끝이다.

폭력이니 조직이니 좋아서 껍죽거리는 놈들이니까, 두 가지 특성 모두의 최고 전문가 집단인 군에 넣어주면 아주 좋아서 죽겠지. 흥, 불법에서 합법으로 넘어가는 게 좀 빡세겠지만.

“시간 날 때마다 저 여자한테 이름 좀 몇 개 더 들어 놔야겠는걸. 어째 두 놈만 숨어 있는 것 같지가 않아.”

머리를 긁적이며 의무대로 돌아가려던 고 하사는 체육관 앞마당에 서 있는 임수정을 보았다. 그녀는 잠시 기지개를 켜다가 다시 목을 갸웃갸웃하며 머리를 짚는다.

두통이 있는 사람이 흔히 취하는 자세다. 그냥 지나쳐야지, 하는 생각과 달리 고 하사의 발길은 어느새 임수정 쪽으로 돌려졌다.

참……. 사람에게 끌린다는 건 정말 숨기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머리가 계속 아프세요? 진통제 안 드셨습니까?”

고 하사는 임수정의 두통을 주제로 대화를 열었다. 임수정도 고 하사를 알아보고 멋쩍게 웃는다.

“아……. 안녕하세요. 네, 먹기는 했는데, 좀 이쪽이 묵직하달까…… 그러네요. 약 기운이 아직 퍼지질 않았는지.”

“뒤통수를 바닥에 부딪치신 지 얼마 안 됐다고 하셨죠? 거기가 아직도 아파요? 혹이 있습니까?”

전에 의무대에서 그녀는 13일 밤늦게 머리를 다쳤다고 했다. 워낙 심하게 부딪쳐서 이틀인가 사흘인가를 계속 의식을 잃고 있었다고…….

말이 사흘이지, 수십 시간 동안 의식 없이 누워 있었다는 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나 다름없다. 임수정은 자기 뒤통수를 살살 눌러 보더니, 걱정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제가 좀 자세히 봐도 될까요? 이제 시간도 꽤 지난 것 같은데…….”

고 하사는 은근슬쩍 뒤로 가서 그녀의 머리에 손을 댔다. 임수정도 목을 살짝 움츠리기는 했지만, 그다지 거부하는 의사는 없어 보인다.

손으로 촉진을 해 보니 혹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MRI도 CT도 다 불가능한 현 상황에서는 이게 가장 첨단의 의료 행위다.

“이 손가락 따라 눈만 움직여 보시겠습니까?”

고 하사는 임수정의 눈앞에서 검지를 세워 천천히 좌우로 움직여도 보고, 구토나 메스꺼움 증상이 있는지도 물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질문들…… 다 소용없다.

큰 병원 가 보라는 말도 못 하는 이런 상황에서 만약 그녀가 ‘네’라고 해버리면 후속으로 해 줄 수 있는 조처는 전무하다. 하다못해 얼음주머니를 대라고도 할 수 없다. 얼음 같은 건 구할 수도 없으니까.

“아뇨. 구토나 메스꺼움 같은 건……. 그냥 이따금씩 한쪽 머리가 좀 욱신거리는 정도예요. 아…… 며칠 전에 좀비들이 쳐들어왔던 날 밤, 그때에는 좀 토할 것 같기는 했어요. 그 외에는 달리…….”

“그때야 뭐, 병사 애들도 긴장해서 다 게워 올리고 그랬으니까 특별한 게 아니고요. 내부 출혈이 걱정돼서 여쭤봤던 건데, 그 정도시라면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대신에 통증이 있을 때 억지로 참지 마시고 진통제라도 드세요. 거기에 소염 성분도 있으니까요. 제 기억이 맞나 모르겠는데, 에…… 이부프로펜 성분 들어간 약이 더 잘 듣는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맞나요?”

“와아, 놀랐어요. 약 성분까지도 일일이 다 기억하시네요. 수용자들이 몇백 명이나 되는데.”

임수정이 감탄한 표정을 짓는다. ‘뭐, 일이니까요…….’라고 대꾸했지만, 그런 걸 다 기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자신에게 특별한 사람이라 저절로 각인된 것뿐이다. 그녀가 더 마음에 든다는 약을 미리 쟁여 놓기 위해서.

아, 이쯤에서 저녁때 뭐하냐고 물어볼까? 그때 나도 근무 교대하는데…….

고 하사는 잠시 망설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이내 포기했다.

그런 말을 했다가는 조금 전에 머리를 만졌던 것도 다 음흉한 의도를 가진 행동처럼 보일 것이다. 고 하사는 결국 중간 정도 지점에서 타협을 했다.

“지금 이부프로펜 진통제가 좀 귀해서요. 외부로 징발 나가는 애들한테 말을 해놓기는 했지만, 언제 들어올지 장담을 못 합니다. 그리고 들어와도 금방 다 나가고. 사람들이 워낙 약을 엄청나게 복용하거든요. 그러니까 시간 나실 때마다 자주 의무대에 들르셔서 약이 있나 확인을 해 주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오늘 오후에도 들어올 겁니다.”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사람들이 약을 과용하고 있다는 건 사실이다. 수용자, 병사 가리지 않고 다들 뭔가 트라우마를 치료하듯 약을 먹어 댔다.

조금의 통증도 못 견뎌 하고, 또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항상 몸의 컨디션을 좋게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긴 듯싶다.

하지만 임수정에게 줄 약은 서랍 안에 잔뜩 쌓아 놨다.

언제라도 그녀가 오면 줄 수 있다. 다른 의무병들이 건드리지 않도록, 약을 모아둔 비닐봉지에 <특수 관리 품목>이라고 표기까지 해뒀다.

“네, 그럴게요. 저야말로 이렇게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임수정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 하사의 입안에서는 사심 가득한 말이 맴맴 돈다.

고마우면 같이 달 보면서 캔커피라도 한잔 기울여 주세요. 마음에 빚을 쌓아 둬 봤자 소화도 잘 안 될 텐데…….

하지만 끝내 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선 고 하사가 몇 걸음을 뗐을 때, 뒤쪽에서 누군가가 목을 콱 끌어안는다.

“야아~ 우리 고 하사, 아주 인생의 봄날이 왔구나. 내가 지켜본 게 몇 분 안 되는 것 같은데, 그 짧은 사이에 여자를 둘이나 바꿔 가며 만나네? 너무 잘나가시는 거 아닙니까? 응? 어떻게 하면 그렇게 카사노바가 될 수 있는지 나도 좀 배우자. 담배 한 갑 주면 가르쳐 주나?”

강 소위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서 담배를 피우러 가는 길이었는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 고 하사는 피식 웃었다.

“아이 참, 강 소위님……. 오해십니다. 수용자들 의료 상담해 주는 거 아닙니까. 그걸 왜 그렇게 불온하게만 보십니까?”

“뭔 놈의 의무 상담을 담배를 마주 피우고 실실 웃으면서 하냐? 응? 후후후후, 그리고 좀 전의 그 여자분 머리 만질 때, 어떤 표정이었는지 고 하사 본인은 모르지? 참내, 배짱도 좋아. 중대장님이 이런 걸 아시면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아침부터 공개적으로 열애를 하시나.”

강 소위가 빙글거리며 억지로 흡연 구역에 끌고 간다. 불편한 제약이지만, 일면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다. 사랑을 하면 아무래도 공정해지지 못한다.

당장 고 하사 자신만 해도 임수정이 좋아하는 진통제는 따로 서랍에 쟁여 두고 있으니까…….

장교들이 여자에 홀려 누군가만 특별 대우를 하면 분위기가 개판 되는 건 아마 금방일 거다. 고 하사는 능글거리며 받아쳤다.

“강 소위님, 대한민국 군대에서 하면 안 되는 게 어디 있습니까? 요는 안 걸리면 되는 거 아닙니까.”

“지금 나한테 걸렸잖아.”

“강 소위님은 그런 걸 거시는 분이 아니잖습니까. 그 정도는 압니다. 아, 그리고 솔직히 부사관 자원이 부족해서 저 안 쫓겨납니다. 이 원사님 보시면 알지 말입니다. 오죽 행정이 꼬였으면 중대 단독 주둔하고 있는 부대에 상사도 아니고, 원사를 다 배정하겠습니까.”

“후후후, 야, 너 뻔뻔하다, 고 하사. 근데 그렇게 잘 나불거리시는 분이 좀 전에 저 여자분 앞에서는 왜 어버버거리며 앓기만 하셨어요? 응? 아, 눼에~ 의무대에 약 받으러 오세요오~ 큭큭큭, 그게 데이트 신청이라고 하는 거냐? ‘라면 먹고 갈래~’도 들어봤고 ‘커피 마시고 갈래~’도 들어봤지만, ‘진통제 먹고 갈래~’는 너한테 처음 듣는다, 새끼야.”

“아, 그게 말입니다…….”

고 하사는 강 소위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면서 계면쩍어 했다.

“……참 우습습니다. 긴장하지 말고 잘하자고 마음먹는데도 영 안 됩니다. 자꾸 말이 입안에서만 빙빙 돌지, 밖으로 나오질 않으니까…….”

“그럼 이야기 잘되는 사람하고 어떻게 해봐. 너랑 맞담배 피우던 연예인은 네가 무슨 말만 하면 아주 깔깔 넘어가더라. 수다도 엄청 떨고.”

초희의 이야기가 나오자 고 하사는 천만의 말씀이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아니, 그건 진짜 오해십니다, 강 소위님. 그분은 다른 일이 있어서 오신 거지 말입니다. 그리고 암만 예쁘면 뭐합니까, 제 타입이 아닌데. 뭐, 물론 그분도 저한테 마음이 있는 건 아닐 테지만 말입니다.”

“그래? 의왼데? 그 연예인보다 조금 전 그 여자분이 더 좋다는 거잖아. 근데…… 저분은 너보다 좀 연상처럼 보이는데, 아니야? 어쨌거나 티 나지 않게 잘 추진해 봐. 정말로 걸리지 말라고. 요즘 안 그래도 분위기 영 안 좋으니까.”

강 소위의 말속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고 하사가 눈치를 보다가 물었다.

“그…… 박 소위님 소문 때문에 그러십니까?”

“음, 다들 아나 보네. 뭐, 파다하게 퍼진 모양이니까 숨길 것도 없나? 그제인가 중대장님도 불러서 물어보시더라고. 난 그냥 잘 모르겠다고 했어. 내가 알아서 먼저 박 소위에게 브레이크 걸어 줬으면 하시는 눈치던데, 그게 연애 문제가 남이 잔소리한다고 되겠어? 완전히 눈이 멀었는데. 그 성깔에 괜히 성질이나 부리지.”

그렇게 두 군인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앞쪽 건물 옥상에서 확성기 소리가 울려왔다.

치익―

“5번 사대! 사격합니다!”

그러자 게이트를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도 큰 소리로 복창을 했다.

“5번 사대! 사격합니다!”

마당과 주차장에 서 있던 수용자들은 이제 별다른 동요도 보이지 않는다. 이게 예고의 힘이다. 예전에는 좀비가 철책에 너무 근접하면 예고 없이 그냥 쏘고 봤다.

그럴 때마다 수용자들이 패닉을 일으키는 바람에 뭔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낸 게 이 사격 예고다. 총소리가 날 거라는 걸 몇 초 일찍 아는 것만으로도 민간인들의 동요는 훨씬 적어졌다.

탕― 탕― 탕탕탕― 탕탕― 탕― 탕― 탕탕― 탕―!

몇 초 후, 5번 사대에서는 총성이 요란스럽게 울려 댔다.

아마 그들이 담당하고 있는 북동쪽 철책 쪽으로 좀비들이 너무 근접하고 있는 모양이다. 사격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담배 연기를 내뿜던 고 하사가 이마를 찡그리며 물었다.

“엄청 쏴 댑니다. 쟤들 맞추기는 잘 맞추면서 저렇게 쏩니까?”

“사격 훈련 때도 20발 만발 꽂는 애들이 드문데, 뭐, 얼마나 잘 쏘겠어. 게다가 이건 가만히 서 있는 표적이 아니고, 자꾸 움직이잖아. 존나 어렵지. 그냥 제 돈 내고 산 총알 아니니까 맞을 때까지 갈기는 거야. 뭐, 그러다 보면 눈먼 좀비 몇 마리는 잡는 거고.”

강 소위는 글렀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어림없다는 표정이다.

“그러면 실탄 소비도 어마어마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중대 전체에서 하루 실탄 얼마나 사용합니까?”

“글세……. 건물 옥상에 배치해 놓은 사대가 여섯 개에다가 외부로 사제 물건 징발하러 나가는 트럭까지 더하면, 대충…… 600발? 700발? 평소에는 그 정도면 넉넉한 것 같고, 며칠 전 밤처럼 떼로 몰려오면 그때는 그런 거 셀 여유도 없는 거고. 애들이 멀리 있는 거 쏠 때는 좀 나은데, 좀비들이 접근해 버리면 머리가 아주 하얗게 되나 봐. 그냥 자동으로 놓고 꽉 누르는 거야. 왜? 총알 떨어질까 봐 걱정돼? 설마 대한민국 국군이 빈총으로 싸우는 수준까지야 떨어지겠어?”

강 소위는 길게 연기를 내뿜으며 여유롭게 말했다. 그건 고 하사의 생각에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이야기로 들렸다.

16554475573614.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