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 청춘, 아름다움, 그렇게 생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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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청춘, 아름다움, 그렇게 생존 (2)
2022.04.28.
제니는 파라다이스 모텔의 자기 방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아침 여섯 시부터 시작해서 하루 종일 바쁘게 일을 하고 계속 움직였으니 잠이 올 만도 한데, 눈이 말똥말똥하다.
이유 없이 불안하고 공연히 두렵다. 눈을 감으면 자꾸 추상적인 이미지의 공포가 확 덮쳐 오는 것 같아서 벌떡 몸을 일으키게 된다. 전등을 켜 놔도, 철 지난 잡지를 뒤적거려 봐도 여전히 마음은 심란하다.
벽이 없는 한 공간에서 다 같이 마주 보고 잠들었던 복지 센터에서는 이런 기분이 한결 적게 느껴졌다. 선로 자갈 위에서 박스를 깔고 잠을 청했던 때조차도 지금보다는 불안함이 작았다.
거기에서는 눈에 보이는 곳에 믿음직한 얼굴들이 있었고, 손만 뻗으면 언제라도 닿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벽과 문이 가로막고 있다.
침대라는 편안한 잠자리에 감동했던 것도, 마음 편히 옷을 벗고 물티슈로나마 몸을 씻으며 사생활이 보장되는 것에 기뻐했던 것도 모두 처음 이틀 정도뿐이다.
그 이후로는 석양이 지는 걸 보는 게 굉장히 무서워졌다. 다 같이 웃고 떠드는 낮의 고됨이, 밤의 휴식보다 훨씬 편안했다.
불과 몇 주 전, 좀비 세상이 도래하기 전까지 고급 빌라의 화려한 사적 공간에서 눈부신 조명과 열광적 환호를 잊고서 잠시라도 홀로이고 싶던 그 익숙한 일상이 무색할 만큼 혼자 남겨질까 봐 두렵고, 혼자 남겨 두고 온 테라에게 미안하다.
닫힌 창문 때문에 꽉 막힌 더운 공기 속에서 제니는 목이 조여 오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그래도 자야겠지…… 라고 생각하며 불을 끄려 할 때, 똑, 똑, 누군가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목욕할 때를 제외하면 제니는 방문을 잠그지 않았다. 그렇게 상대방을 신뢰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기본적인 예의라고 생각해서다.
다급한 노크 소리는 아니었다. 제니는 누구냐고 묻지 않고 ‘들어와요’라고 하며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가장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규영이다. 휠체어에 앉은 규영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제니를 바라봤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제니는 규영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물었다.
“저…… 무서워서…… 어제 그놈들이 이 골목 안으로 들어오는 걸 본 다음에는…… 계속 무서워서 잠을 못 자겠어요. 혜주 누나도 없고…… 혼자서는 도저히 못 자겠는데…… 깜빡 졸았다가도, 엄청 괴로운 악몽 때문에 자꾸 깨요……. 방문을 볼 때마다 소름이 끼쳐요. 갑자기 저 문이 열리면서 좀비가 들어오면 어쩌지…… 그런…….”
제니는 규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직 어린 소년이라는 걸 알리는 듯한 하늘색 줄무늬 파자마, 두려움을 달래려는 듯 꼭 끌어안고 있는 작은 토끼 인형.
규영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작은 어깨를 들썩거렸다.
“내가…… 다리만 건강했어도…… 이렇게 겁쟁이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누나를 지켜줄 텐데…… 너무 분해요……. 누나…… 미안한데요……. 나 여기에서 오늘…… 딱 하루만 재워주시면 안 돼요? 옆에 누워서 저 잠들 때까지 토닥거리면서 옛날이야기 해 주시면 안 돼요……? 네, 누나?”
그러더니 규영은 고개를 들어 눈물이 찔끔 배어 나온 눈으로 제니를 바라본다.
훗, 제니는 아주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규영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엄지와 검지로 규영의 코를 꽉 쥐었다. 규영의 입에서 엷은 미소가 막 번지려던 시점이었다.
“후후후, 아주 좋은 시도였어. 일부러 소품까지 갖추시고……. 후후후, 하지만 안 통해. 누나가 네 머리꼭대기에 있어요, 요놈.”
“아하하…….”
규영도 어색한 미소를 흘린다. 제니는 녀석의 머리를 한 차례 더 쓰다듬어 주면서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녀석의 방 쪽으로 밀고 갔다. 방문을 닫아 주려는데, 규영이 묻는다.
“근데 저 어디에서 걸린 거예요, 누나?”
“뭐, 전체적으로 다 조금씩 모자랐는데…… 특히 눈물 연기가 좀 어색했달까? 억지로 짜내는 게 보였어. 잘 자.”
제니가 손을 흔들어주자 규영은 파자마 품에서 얼른 카메라를 꺼낸다.
“누나, 누나. 잠깐만요. 지금 그 웃으면서 손 흔드는 거 한 번만 더요.”
제니는 기꺼이 그렇게 해줬다.
찰칵, 찰칵, 어두운 복도를 배경으로 두 번이나 플래시가 터졌다. 혜주 언니가 봤으면 기겁할 일이다.
후후, 카메라를 숨기고 있었다는 걸 감추려고도 하지 않는군. 발칙한 녀석일세…….
제니는 웃으면서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어쨌거나 아주 좋은 핑계를 배웠다. 즉각 써먹어도 될 만하다.
30분쯤 뒤.
똑, 똑.
이번에는 유빈의 방문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깜빡 잠에 빠져들어 있던 유빈은 깜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 뭐, 뭐야?”
비상사탠가? 무슨 일이 났나?
온갖 생각을 다 하며 황급히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비비고 있을 때, 끼이익, 문이 열린다. 그리고 제니의 얼굴이 보였다.
“들어가도 돼요, 오빠?”
“무, 무슨 일 있어? 들어와, 들어와.”
마음은 엄청 급한데 여전히 잠에서 덜 깬 혀는 자꾸 꼬인다.
제니가 방 안으로 들어와 살포시 문을 닫는 동안 유빈은 손바닥으로 몇 차례나 얼굴을 훑어 내렸다. 이제야 겨우 좀 정신이 차려진다. 눈에 힘을 주어 뜨며 유빈이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어엇, 너 옷이 왜…….”
상황이 좀 선명하게 인식되어 가자 제니의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한쪽 어깨가 반쯤 드러난 오버 사이즈 티셔츠 한 장만 입고 있는 것 같다.
그녀의 희고 쪽 뻗은 맨다리 때문에 유빈이 당황스러워하자 제니는 태연한 표정으로 티셔츠의 한쪽 끝을 들어 올렸다.
“어휴~ 오빠, 무슨 생각 하는 거람? 반바지, 입었어요. 혜주 언니가 준 거.”
그 반바지라는 게 올림픽 장거리 육상 선수들이 입는 경기복 수준이다. 유빈은 난감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우측 하향 고정이다.
“그, 그래, 그렇구나. 근데 이 시간에 무슨…….”
“무서워서 잠이 안 와요.”
“응?”
“좀비들이 이 골목 어딘가로 돌아다니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너무 무서워서 도저히 혼자서는 못 자겠어요……. 깜빡 졸았다가도 계속 악몽을 꾸고…… 금방이라도 닫힌 문을 열고 좀비가 들어올까 봐…… 흑…….”
제니는 비장의 눈물을 그렁거리는 연기를 시작했다.
규영아,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흔드는 거란다.
유빈이 손사래를 쳤다.
“아냐,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저기…… 아까 우리가 다 덫이며 줄이며 장치해 뒀잖아. 좀비들이 이 근처 두 블록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아마 땡그렁땡그렁 난리가 날 거야. 그럼 또 보안관이랑 혜주가 가만히 안 있을 거고.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말고 푹 자.”
유빈이 논리를 무기로 내세워 봤지만, 제니의 애절한 연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제니는 입술을 꽉 깨무는 척을 하면서 속삭였다.
“그렇게 차갑게 말하지 말고, 그냥 여기에 있어도 된다고 해 주면 안 돼요, 오빠? 조금 진정될 때까지 조용히 있다가 갈게요. 혹시 졸려지면 소파에서 잘게요.”
하아~ 유빈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순간, 제니는 약점을 잡은 맹수처럼 결정타를 날렸다.
“오빠는 제가 있는 게 싫어요? 그럼 나갈게요.”
“아냐, 싫은 게 아니라……. 왜 싫겠어. 그냥 네가 있으면 이번에는 내가 못 잘 것 같아서……. 하아…… 알았어. 여기에서 자. 네가 침대 써.”
헤헤헷, 유빈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제니는 혀를 날름하고 발레리나처럼 가볍게 도약해서 침대 위로 몸을 날렸다. 조금 전까지 유빈이 베고 자던 베개를 꼭 끌어안고 엎드린 제니가 빙글거리며 물었다.
“근데요, 오빠. 내가 있으면 왜 못 잔다고 했던 거예요?”
조금 전까지 그렁거리던 눈물은 어느새 쏙 들어갔고, 대신에 장난기가 데굴데굴하다. 두 다리를 번갈아 가며 달랑달랑 흔드는, 그 천진한 얼굴이 오히려 더 사악하게 느껴져서 유빈은 한숨을 쉬었다.
너랑 한 방에 있는데 편하게 잠들 수 있는 남자가 너희 아빠랑 삼식이 말고 더 있겠어?
“그럼 나도 좀 물어보자. 잠이 안 온다는 것까지는 이해했는데, 꼭 나를 꼭 찍어서 놀렸어야 했냐?”
“어머, 처음부터 오빠 방에 들어온 거 아니에요. 웬일이야? 저요, 삼식이 오빠 방부터 갔어요. 근데 문밖에서도 코 고는 소리랑 방귀 뀌는 소리가 다 들리잖아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여기로 왔다고요. 근데 오빠, 계속 서 있을 거예요? 여기로 와서 더 자요. 조금 전까지 잘 자고 있었잖아요. 코~ 자요.”
제니는 자신의 옆자리를 톡톡, 두드리더니 빙글 한 바퀴를 굴렀다.
으아……. 아찔하다 못해 찌릿하다.
그날 옥상에서 사투를 벌이고서 제니가 오줌 지린 바지를 갈아입던 순간이 오버랩된다.
유빈은 티 내지 않기 위해 애쓰며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서지 마라…… 서지 마라…… 제발 서지 마. 너, 쟤한테 들키면 그때는 정말 계속 놀림받는다. 이미 충분히 장난감 취급받고는 있지만…….
유빈은 애써 쿨한 척하며 소파에 기대앉았다. 시선은 일부러 커튼 쪽으로 돌렸다.
“오빠는 잠들기 전에 무슨 생각 했었어요?”
제니가 묻는다.
“그냥…… 이런저런…… 주로 걱정이었어. 제일 마지막으로 생각하다가 잠들었던 건 아마…… 겨울이 되면 엄청 추울 텐데, 불도 못 피우고 어떻게 견디지? 뭐, 그런 거였던 것 같아.”
“우하하하, 하여간 걱정왕이라니까. 겨울 걱정까지 미리 했어요? 그렇게 걱정이 많은데 잠이 와요?”
“뭐…… 평생 걱정만 했으니까 그게 그냥 일상이지. 돈 걱정, 월세 올려 달라고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아프면 큰일 나는데 하는 걱정, 나 군대 가면 할머니 용돈은 어쩌지 하는 걱정……. 걱정을 안 한다는 게 이제는 오히려 상상이 안 돼. 정말로 걱정을 안 하고 사는 사람도 있었을까? 좀비 세상이 오기 전에 말이야. 하긴 너 같은 사람은 별로 걱정 없었겠구나. 넌 완벽하니까.”
유빈은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는데, 제니는 꽤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까불까불 뒹굴던 제니가 침대에 걸터앉아서 조용히 말했다.
“……나도 걱정 있었어요.”
“진짜? 그렇게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처럼 보였는데……. 하긴 정상에 서 있다는 건 또 그 나름의 고충이 있는 거겠지. 누가 내 자리 빼앗으면 어쩌지, 뭐 그런 거?”
여전히 유빈은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 무심하게 지껄였다.
“아니요. 그런 건 별로 안 무서웠어요. 건방지게 들리겠지만, 자신이 있었거든요. ‘우리 둘은 절대 못 이길걸?’ 하는, 그런 마음. 근데 다른 게, 정말 큰 걱정이 하나 있었어요.”
제니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서 유빈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에 뭐라고 한 거야? 잘 안 들렸어.”
유빈의 베개를 꼭 끌어안고 앉아 있던 제니가 손짓을 한다.
“멀리 도망가 있으니까 그렇죠. 그런 아픈 얘기는 큰 소리로 말하기 싫다고요……. 소리 높이지 않도록 여기, 옆에서 들어주면 되잖아요.”
그녀의 다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해져서 쉽사리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유빈은 순순히 시키는 대로 그녀의 곁에 가 앉았다. 제니의 표정이 조금 전 방문을 두드렸을 때와는 다른 간절함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빈이 옆에 앉자 제니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달라고 한다.
유빈은 땀이 송골송골 맺힌 손바닥을 그녀에게 맡겼다. 깍지를 껴서 유빈의 손을 차지한 제니는 커튼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소곤거린다.
“나는요,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정말 기분 나쁜 거래를 했어요. 그 거래 자체를 후회하느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에요. 만약 지금 또다시 그런 상황이 되더라도 아마 똑같은 선택을 할 것 같아요.”
으아…… 큰일 났다…….
유빈의 가슴이 미친 듯이 콩닥거렸다. 아까 제니가 속옷 뺨치는 반바지를 보여 줬을 때보다도 훨씬 더 빠르고 강하게 심장이 펌프질을 하고 있다.
말을 딱 듣자마자 떠오르는 인물도 있다.
태양 그룹 작은 회장.
왜지? 왜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이거, 뭔가 나 따위가 들으면 안 되는 은밀한 이야기인 것 같은데…….
하지만 제니의 깍지 낀 손가락은 유빈의 손을 놔줄 기미가 없다. 제니가 팔을 당기는 바람에 유빈의 손등은 제니의 허벅지에 닿았다.
심리적으로는 불안하고, 육체적으로는 흥분하고, 이래저래 유빈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감촉을 인지하지 못하는지 제니는 평온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걱정되는 건…… 나중에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예전의 그 기분 나쁜 거래를 했던 당사자가 그,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서 나랑 자기가 했던 일을 이야기하며 비웃으면 어쩌지 하는 거였어요……. 나한테…… 정말 소중한 사람이 내가 했던 일 때문에 비참한 기분을 느끼게 될까 봐…… 그게 무서웠어요.”
제니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유빈은 당황스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이게 뭔 말이야,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무지……. 삼식이, 삼식이가 필요한데, 이럴 때는.
유빈이 그렇게 두꺼비처럼 눈만 껌뻑거리고 있는 동안 제니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얕은꾀를 낸 게, 내가 먼저 살짝살짝 눈치를 주다가 용서해 줄 것 같은 사람이면 고백을 해야지 하는 수준이었어요. 참 얕죠. 그 나쁜 놈의 입을 통해 밝혀지기 전에 내가 먼저 말하면 충격이 덜할 거라고…… 그렇게 나한테 거짓말을 하면서 불안을 좀 덜어내 보려고 했어요. 바보죠. 누구 입을 통해서 듣는다고 뭐가 달라져요. 어차피 있었던 사실은 변함이 없는 건데……. 그 사람이 비참해지는 건 똑같다고요.”
제니는 또다시 눈물을 한 줄기 쭉 짜낸다.
“그, 그거, 얕은 생각도 아니고 바보 같지도 않아. 나름 굉장히 현명하다고 생각해. 어떤 사람들은 과거 같은 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대……. 아, 아니, 그런 사람들도 있어. 그리고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그런 걸로 화내거나 비참해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그냥 같이 아픈 거지. 왜 그렇게 자꾸 울어? 누구한테 그런 말 했을 때 그 사람이 화냈어? 그럼 그 사람이 문제가 있는 거야.”
“아니요. 지금까지 한 번도 말한 적 없어요. 너무 창피해서…… 아무한테도……. 엄마도 몰라요.”
제니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유빈은 멍해져서 이 눈물 많은 소녀의 울음을 그치게 할 방법을 궁리했다. 또 걱정거리 하나가 늘었다.
“아까…… 어떤 사람들은 과거 같은 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옛날 일 때문에 화를 안 낼 거라고 했잖아요.”
하도 울어서 목소리가 갈라진 채로 제니가 속삭였다. 유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당연히 그렇지.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꽤 많아. 그러니까 그만 걱정해.”
잠시 뜸을 들이던 제니가 고개를 돌려 유빈을 보며 물었다.
“오빠는요? 오빠는 어떤 타입이에요?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옛날에 부끄러운 일을 했던 걸 알아도 그것 때문에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아……. 유빈의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아주 멀리 안드로메다까지 찍고 다시 돌아왔다.
차라리 얘가 섹시 코드로 자신을 장난감 취급하면서 놀렸을 때가 백배는 편하고 행복했다. 이건 완전히 늪에 빠져 버린 상황이다.
얘 지금 대체……. 술을 이빠이 마신 건가? 아닌데, 술 냄새는 나지 않는데…….
무슨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그냥 감정이 굉장히 과잉돼있는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0.5초가 흘렀다.
여기에서 긍정을 하면 그때부터는 더 듣기 힘든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 같다. 이미 지금까지 들은 것만으로도 가슴에 담고 살기 벅찰 정도인데…….
그렇다고 ‘아니, 나는 그런 성격이 아니야’라고 말해 버리는 건 얘한테 울라고 스위치를 눌러 버리는 거나 다름없어진다.
제니의 눈이 자신의 눈과 입술만 보고 있다.
거리는 불과 30센티나 될까? 내쉬는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또 0.5초가 흘렀다.
이제 더 딜레이는 두면 안 된다. 뭔가 말을 해줘야지, 그렇지 않고 시간만 보내면 그냥 ‘No’나 마찬가지다. 유빈은 입을 열었다.
“나…… 나는…….”
제니는 깍지 낀 손 위에 또 손을 포개서 자신의 품으로 끌고 갔다. 그 눈빛이 너무 간절하다. 그때…….
덜크럭, 덜크럭.
방문의 손잡이가 반쯤 도는 소리.
‘어, 뭐야? 유빈아’라고 문밖에서 부르는 삼식이의 목소리.
그때, 유빈은 처음 깨달았다. 제니가 들어오고 난 뒤 자신이 방문을 잠가 뒀다는 사실을…….
나라는 놈, 하여간에 속속들이 음흉하다.
느닷없는 삼식이의 개입으로 고조되었던 감정은 순식간에 가라앉고, 제니와 유빈은 당황한 얼굴로 마주 봤다.
쿵, 쿵, 쿵.
삼식이는 문을 두드리고 있다. 이 정도 답이 없으면 자나 보다 하고 좀 그냥 갈 것이지, 어지간한 녀석이다.
제니가 침대 옆으로 몸을 숨기는 걸 확인하고, 유빈은 얼른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삼식이는 맥주 두 캔을 들어 보이며 밝게 웃었다.
“하하하, 뭐야? 갑자기 문을 다 잠그고 그래? 유빈이 너도 신입 흉내 내냐? 맥주 한잔하고 자자. 더워서 영 잠이 안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