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 청춘, 아름다움, 그렇게 생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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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 청춘, 아름다움, 그렇게 생존 (1)
2022.04.27.
길가의 모텔 옥상에서는 늦은 오후의 따가운 햇살을 받으면서 유빈과 규영, 그리고 신입이 ‘덫’과 ‘딸깍이’를 만들고 있다.
신입과 규영이 ‘덫’을, 유빈이 ‘딸깍이’를 담당한다. ‘딸깍이’는 못을 두어 개씩 박은 각목 조각을 바닥에 한 무더기 뿌려 놓는 장치다.
이것 역시 좀비의 발을 묶어 두기 위한 용도로 복지 센터 때부터 꾸준히 써먹던 것이다.
만약 쫓아오는 좀비가 있을 때 놈이 ‘딸깍이’를 밟고 그것 때문에 중심을 잃고 쓰러져 주면 제일 좋고, 두 다리의 균형이 깨져서 스피드만 조금 줄어도 감사하다.
대신에 혹시라도 사람이 넘어지면 그야말로 큰 비극이므로, 평소 잘 다니지 않는 외곽에만 설치해 두는 게 낫다.
위력이 좀 약하더라도 트랩은 간단한 것이어야 했다. 동네 전체를 빙 둘러쳐야 하는 거라서 너무 복잡하면 만드는 데도, 설치하는 데도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놈들만 잡으면 세상 모든 고민이 끝나는 게 아니므로 그렇게까지 긴 시간을 투자할 수는 없다.
옥상 노동 현장의 분위기는 우중충하달까, 하여간 막 신이 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단순 작업의 반복이라 일하는 재미가 없어서’라는 문제만은 아니었다.
규영과 신입, 둘 다 유빈 대신 제니가 여기에 있으면 좋겠다는 표시를 노골적으로 해 댔기 때문이다.
“씨발, 몸이 힘들면 눈이라도 좀 호강을 해야지. 이게 일을 할 맛이 나나?”
송곳으로 캔에 구멍을 뚫으며 신입이 툴툴거린다. 여간해서는 신입에게 동조하는 법이 없는 규영도 이 사안에 대해서만은 한목소리를 냈다.
“여자가 없다면 남자는 무엇이 되는 걸까? 그것은 결핍, 강력한 결핍이라네. 마크 트웨인. 이 자리에 땀 냄새에 찌든 누군가 대신에 제니 누나가 있다면 능률은 얼마나 오를까? 아마도 열 배, 잘하면 백 배라네. 김규영. 뭐, 그렇다는 이야기야.”
“캬! 그 새끼, 쪼그만 놈이 옳은 말도 잘하네! 옳소! 그렇지!”
그런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두 놈의 시선은 유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뭐라고 칭얼대든 간에 유빈은 못 들은 척 뭉개고 묵묵히 못질만 했다.
어지간하면 이놈들 소원을 들어주겠지만, 옥상까지 여섯 층을 몇 번이고 오르내리는 건 여간 진이 빠지는 일이 아니다. 당장 자신이 빨랫줄 묶는 걸 하면 각목을 자르고 못을 박을 사람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전투병이자 망보는 사람인 보안관에게 이런 일까지 맡길 순 없다. 이래저래 녀석들의 요구는 무시하는 게 상책이다.
“앗, 아야! 씨발! 졸려서 손이 자꾸 헛나가네. 낮에 이 지랄을 하면 밤에는 좀 쉬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왜 밤에까지 편히 잠도 못 자게 계속 들락거리면서 망을 봐야 하는 건데? 이런 상황인데 다른 놈들이 몰래 들어오는 게 뭐가 무서워? 어차피 좀비들이 있어서 마음 편히 돌아다니지도 못하는데.”
송곳이 미끄러져 손바닥을 찔린 신입의 짜증이 괜한 것을 빌미로 폭발했다. 보호용으로 두툼한 장갑을 끼고는 있지만, 그래도 아프긴 할 거다. 아프니까 또 성질이 나서 결국 밤에 보초 서는 일까지 불만을 삼는다.
유빈은 작게 한숨을 쉬며 두 녀석이 만들어둔 ‘덫’과 자신이 만든 ‘딸깍이’를 가방에 담아 가지고 일어섰다. 가방 밖으로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는 못이 위험해 보였다.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 가면서 해. 내려갔다 금방 올게. 규영이, 틈틈이 망보는 거 잊지 말고.”
지긋지긋한 계단을 뛰어 내려가면서 유빈은 창문을 통해 골목 안쪽을 힐끗 내다봤다.
무수한 빨랫줄이며 전깃줄 트랩, 깡통들, 그리고 각목들…….
모두 어떻게든 좀 더 안전해 보려는 안간힘이었다.
위험한 좀비들이 돌아다니니까 자칫 외부 타인들의 침입으로부터는 안전한 거 아닌가 하는 오해를 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좀비는 맹수도, 경비견도 아니고, 그저 좀비일 뿐.
다른 사람들이 몰래 이 동네로 들어왔다가 좀비한테 물리면 그냥 다치거나 죽어버리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그놈들도 좀비가 돼버릴 터라 자신들 일행이 모르는 동안에 머릿수가 늘어나 버리는 거다.
남아 있는 좀비의 수가 여섯이라고만 기억하고 있다가 그걸 다 잡고 나서 마음을 턱 놓고 있을 때, 계산에 없던 놈들이 갑자기 튀어나오면 정말 아찔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목숨이 위협받을 수도 있다. 그런 일이 없으려고 보초도 서고, 다들 밤잠도 설치는 중이다. 어쩔 수 없다.
“오빠, 여기로 지나가요. 림보 하는 것처럼. 이렇게…….”
유빈을 보자 제니가 환하게 웃으며 허리 높이의 빨랫줄 아래로 다리만을 굽혀서 지나는 시범을 보인다. 중간에 멈춰 서서 보안관의 박수를 유도하는 여유도 부렸다.
처음엔 어처구니가 없는 눈으로 보던 유빈의 입에서도 어느새 바보같이 헤벌쭉한 미소가 생겨난다. 격리되어 있는 옥상 위의 놈들이 열 받을 만도 하다고 유빈은 생각했다.
얘를 만나지 않았다면 대체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제니가 보안관의 갈채를 받으며 깔끔하게 림보를 성공하자 태권소녀도 곧바로 그걸 따라 해 보려 들기에 유빈이 얼른 말렸다.
아직 발목도 다 안 나았으면서 얘는 대체 왜 이렇게 승부 근성이 강한지…….
“자, 이것만 뿌려 두고 나서 밥 먹어야 할 것 같다. 옥상 애들도 많이 지쳤고, 내 다리도 그렇고……. 슬슬 해도 지니까.”
삼식이에게 트랩들이 든 가방을 넘기며 유빈이 말했다. 오늘 오전, 예정해 뒀던 좀비 무리 합체 계획은 거의 다 성공했다.
이제 좀비는 딱 두 무리로 뭉쳐졌다. 빨간 좀비들과 나머지 전부, 그리고 며칠 내로 그것들마저 하나로 묶으면 이론적으로는 이 앞 도로에서 작업을 하고 돌아다니기가 한결 편해질 예정이다.
30분이 멀다 하고 한 번씩 호각 소리만 들리면 안으로 뛰어 들어와야만 했던 암울하던 시절은 끝났다.
단, 둘 다 어지간히 긴 간격으로 오기 때문에 궤도가 다른 그 두 무리가 간발의 차이로 겹치는 타이밍을 잘 잡아서 합체시켜야 한다.
안 그랬다가는 공연히 진땀만 빼거나 또 새로운 이탈 좀비들이 골목 안으로까지 들어오게 될 테니까.
“그럼 나머지는 유빈이가 뿌려줘. 나는 신입이랑 자전거 타고 나가서 담배 피우고 올게.”
장갑을 벗은 삼식이가 땀으로 축축한 손을 엉덩이에 닦으면서 말한다. 유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다음 좀비 무리가 올 때까지는 몇 시간이나 여유가 있다.
기린처럼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달리던 삼식이가, 제니가 아래로 지났던 빨랫줄을 훌쩍 뛰어넘는다. 저놈도 아까부터 참전하고 싶었나 보다.
“신입! 담배 피우러 가자!”
삼식이가 옥상에 올라와 기분 좋게 불렀을 때, 신입과 규영은 아예 손에서 일감을 놔버리고 난간에 바짝 달라붙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로 쪽이 아니라 제니와 태권소녀가 있는 골목 쪽을…….
“하하하, 너희들은 진짜 감시하는 사람이 없으면 손을 딱 놓는 타입이구나. 내일부터는 유빈이한테 맴매 때찌를 좀 하라고 해야겠는걸. 뭘 보는 거냐, 근데?”
삼식이 신입과 규영의 가운데에 끼어들며 물었다.
찌이잉― 지지잉―
규영은 열심히 디지털카메라의 줌을 조절해 가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놈 방에는 배터리가 박스째로 쌓여 있다.
찰칵, 제니의 옆얼굴이 비스듬히 찍힌다.
또 찰칵, 이번에는 태권소녀와 제니가 함께 마주 보고 있는 사진이다.
작품이 마음에 들었는지 규영은 씨익 웃었다.
“너, 사진 열심히 찍더라. 뭐하려고 그래?”
삼식이는 또 무심한 척 규영이의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그럴 때마다 이놈이 생난리를 쳐 대고 질색하는 게 꽤 재미가 있어서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규영은 당장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나중에 좀비 세상 끝날 때까지 살아남으면 블로그에 올릴 거야. 제목도 정했어. ‘십오 세 여름, 아름다움, 그렇게 생존’ 캬~ 어때, 죽이지?”
듣기만 해도 닭살이 돋는 제목이었다. 삼식이가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하하하, 미치겠다. 아니, 아니, 그거 말고 ‘중2병, 허세, 10년 뒤 이불 킥’으로 정해. 그거 좋다.”
“쳇, 뭐야……. 블로그를 아주 졸로 아네. 그런 제목으로 퍽이나 사람들 모으겠다.”
규영과 삼식이가 그렇게 투닥대고 있을 때, 신입의 눈은 태권소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 계집애, 성질머리가 사납고 아무 때나 발이 휙휙 올라와서 가까이에 있으면 영 껄끄럽지만, 이렇게 거리를 두고 보니까 나름 괜찮다. 게다가 오늘은 평소의 트레이닝복 대신 아주 타이트한 5부 레깅스만 입고 있어서 그게 또…….
신입의 마음을 다 읽었다는 듯 규영이 씨익 웃으면서 옆구리를 툭, 친다.
“몸매 죽이지, 응? 알아. 크크크, 다 이해해. 그래도 남자라 이거지? 크크크, 제니 누나가 워낙 독보적이라 그렇지, 혜주 누나도 어디 가서 꿀리는 외모 아니야. 키 크지, 팔다리 길쭉길쭉하지, 운동해서 군살도 없고 탱탱하지.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렌즈를 통해 담아내고 있는 거잖아. 아름다움!”
신입과 삼식이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규영을 돌아보았다. 잠시 어버버 하고 있던 신입이 입을 열었다.
“우와~ 이놈, 자기 가족 몸매를 이렇게 징그러운 눈으로 웃으면서 말하는 놈은 처음 보네. 일본 만화에 나오는 변태 중딩도 아니고……. 뭐지? 야, 삼식아. 나 이 새끼 좀 무서운데?”
“누가 우리 가족이야? 하여간에 바보 같다니까. 아무렇게나 자기 마음대로 상상하고. 이러니 도통 존댓말이 나오지가 않는 거야. 존경하려야 할 수가 없다고!”
규영이 발끈 대든다.
엑?
삼식이와 신입의 입이 또 바보처럼 벌어졌다.
그렇게나 아끼고 보듬고 챙기는데 친누나가 아니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삼식이가 물었다.
“……둘 다 김씨잖아? 그러면 사촌?”
“참내, 한국에 있는 성씨 중에 김씨가 이십 프로라고. 그 김씨들이 다 가족이겠어? 수준이 뭐 이러냐?”
규영은 밉살맞게 대꾸하고는 또 카메라를 들어 제니를 찍어 댔다. 삼식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항, 알겠다. 애인이구나. 금단의 연하. 하긴 나도 일곱 살 차이 정도랑은 많이……. 가만있어 봐, 오렌지 호프 누나는 그것보다 차이가 더 났겠는데? 열셋? 열다섯? 아우, 숫자로 계산하니까 또 이상하네.”
“아……. 진짜 수준 떨어지게 왜 이러지? 좀 그만하고 둘이 손 꼭 잡고 잘난 담배나 피우러 사라지셔.”
자꾸 계속된 선문답에 신입이 인내심의 한계를 드러냈다.
“그럼 대체 뭔데? 애새끼가 똑바로 말을 안 하고 어른 앞에서 버르장머리 없이 자꾸 빙빙 돌리기만 하네. 네 말대로라면 그냥 생판 남이라고? 근데 그렇게 잘해주고 끔찍이 챙겨주고 한 방에서 같이 자기까지 했다고? 뭐야, 이 새끼야! 잘해주는 무슨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아……. 진짜 왜 그렇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아? 잘해주는 이유? 뭐, 내가 워낙에 귀여우니까 그런 거겠지. 됐어?”
규영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티를 확확 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긴 사생활이니까 꼭 답을 해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아무래도 좀 이해가 안 가는 관계인 것만은 확실하다. 뭔가 말하지 않고 있는 다른 사연이 있어 보인다.
뭐…… 삼식이는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앞으로 같이 시간을 보내다 보면 결국은 다 알게 될 이야기들이니까.
“오케이, 오케이. 알았어. 네 말이 맞아. 귀엽기는 하지. 에, 그건 그렇고…… 어떤 게 내 거지?”
그러면서 삼식이는 옥상 구석,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에 놓아둔 1.8리터 페트병을 이것저것 살펴본다. 자기 것을 찾아낸 삼식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지퍼를 내리자 규영이는 또 진저리를 쳤다.
“아니! 진짜! 왜 그래? 왜 오줌을……. 야만인이야?”
“응? 그럼 어디다가 싸? 여기다 싸고 가방에 담아서 버리고 오는 게 더 낫지. 그럼 오줌 쌀 때마다 길 건너 하수구까지 달려가야 돼? 하하하!”
삼식이는 당연한 걸 왜 따지냐는 표정이었다. 규영은 이런 게 싫었다.
아……. 정말 존경할 사람, 하나도 없다. 키가 커다란 이것도 생긴 것만 기생오라비지, 완전 허당이다. 아무리 남자들 사이라고 해도 지켜야 할 매너라는 게 있는데, 무례해도 너무 무례하다.
하지만 규영이가 지랄을 하든, 신입이 손으로 눈을 가리든 삼식이는 의연하게 하던 일을 계속했다.
“아니! 여기가 무슨 목욕탕이야? 한쪽 구석으로 가서 벽 보고 누라고! 좀 부끄러워하란 말이…… 헐!”
덜렁.
삼식이가 꺼내놓은 것을 보게 된 규영이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이 남자는…… 한국인의 한계를 넘었다. 아니, 동양인의 한계를 넘었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할지도……. 오오, 대단하다. 삼식이 형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었던 거다.
“땅꼬마, 그럼 잘 지키고 있어. 엉아들 금방 담배 피우고 올게. 아마 제니나 누가 좀 있다가 올라올 거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오줌을 다 눈 삼식이가 규영이의 머리통을 한 번 더 쓰다듬고 지나간다.
평소였다면 오줌 묻은 손으로 어딜 만지냐고 길길이 뛰었겠지만, 규영이는 이미 완전히 압도되어 있었다. 그래서 멍청한 대답밖에 안 나왔다.
“……네.”
그리고 몇 시간 후, 약속처럼 어둠이 또 찾아왔다. 야간의 첫 번째 경비조를 맡은 보안관은 2층 가발 가게에서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캄캄한 도로를 노려보고 있다.
보안관은 손에 해머를 계속 꽉 움켜쥐고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심리적 안정감을 얻기 위해 애를 썼다.
좀비나 또 다른 침입자가 무서워서 그러는 건 아니었다. 불편하다. 보안관을 불편하게 만드는 건, 그의 바로 곁에 있는 경비조 파트너, 태권소녀였다.
저놈의 쫙 달라붙는 5부 레깅스, 어지간히 신경이 쓰인다. 발목의 압박붕대를 자주 고쳐 감으려면 트레이닝 바지보다 레깅스가 편하다는 게 태권소녀의 주장이다.
낮에처럼 길게 내려오는 박스 티라도 입으면 좀 낫겠는데, 오늘 밤 걸치고 나온 트레이닝복 상의는 슬림 핏이라 허리에 딱 걸려 있다.
TV에서 본 요가 강사를 제외하고는 국내에서 저렇게만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을 목도했던 기억이 보안관에겐 없다.
쟤가 있던 태릉선수촌에서는 저게 일상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촌 동네에서 주로 서식하던 보안관으로서는 눈 둘 바를 모르겠다.
눈빛이 기분 나빴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보안관은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도로 위만 계속 노려보느라 애를 써야 했다.
태권소녀도 그리 말이 많은 편은 아니어서 둘 다 화난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문 채 한참을 보냈다.
“이거 원래 7부 바진데, 내가 입으니까 5부가 된 거야. 왜 그런지 알아?”
긴 침묵을 깨고 태권소녀는 갑자기 아무 의미도 없는 질문을 던졌다. 보안관은 그녀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다리가 길어서?”
“맞았어.”
그걸로 대화는 끝. 또다시 침묵이 이어진다. 그녀와 짝을 이뤄 경비를 보는 게 좀비를 발견했을 때 가장 잘 싸울 수 있는 조합이기는 하지만, 이건 정말 보안관에게 고역이었다.
차라리 이럴 때 좀비나 한 두어 마리 튀어나와 주면 우당탕탕!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아예 경비를 안 볼 수도 없다.
“아, 발목 아파서 붕대 다시 감아야겠다.”
또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 태권소녀는 벽에 기대앉으며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보안관은 자기도 모르게 돌아다봤다.
달빛을 받은 태권소녀가 한쪽 다리는 쭉 펴고 한쪽 다리는 굽혀서 가슴에 붙인 채 붕대를 풀어 다시 감고 있다. 감는 솜씨도 아주 능숙하다.
확실히 운동을 하던 애는 다르구나…….
빤히 쳐다보고 있던 보안관은 태권소녀가 고개를 드는 바람에 눈이 마주쳤다.
“아니! 나…… 보려고 했던 게 아니라…… 그, 부, 붕대 감는 법이 신기해서! 진짜야, 안 봤어!”
잘못한 것도 없는데 변명이 터져 나온다. 보안관의 눈을 가만히 보고 있던 태권소녀는 다시 고개를 숙여 붕대에 시선을 두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봐도 돼.”
응? 보안관의 등에서 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가뜩이나 더운데 이건 무슨 당황스런 반응인가.
야, 나…… 진짜야. 네 다리랑 몸매라든가…… 훔쳐본 거 아니야…….
아, 젠장 변명을 하는 게 더 쪽팔린 것 같다. 차라리 삼식이처럼 대놓고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걸렸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너도 어제 좀 다쳤지?”
붕대를 다 감고 일어난 태권소녀가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보안관이 괜찮다고 대답하기도 전에 태권소녀의 손은 보안관의 뒤통수를 꽉 움켜쥐고 자신의 눈앞으로 얼굴을 끌어당겼다.
힘도 존나게 세다.
“이거 봐. 너도 얼굴 베였어, 유리 파편에. 얼굴만 그런 거 아니지? 또 베인 데 어디, 어디야?”
그러면서 태권소녀는 바닥의 배낭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소독용 알코올과 소독 솜, 피부 재생 연고 등이다.
아, 저기, 나 어저께 제니가 다 치료해 줬는데…….
보안관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눈만 껌뻑였다.
“앉아, 약 바르게. 이렇게 방치하면 염증 생긴다고. 좀 위생에도 신경 써라.”
보안관을 반강제로 눌러 앉힌 태권소녀는 손가락으로 더듬거려 얼굴의 상처를 찾는다.
야이, 계집애야! 위생에 신경 안 쓰는 건 너지! 좀 전에 네 발이랑 붕대 주무르던 손으로 왜 남의 상처를…….
보안관으로서는 할 말이 정말 많았지만,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 확 내뱉지도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권소녀는 알코올에 적신 솜으로 우악스럽게 보안관의 상처를 누르고 쑤셔 댔다.
“아! 아야! 왜, 왜 이래!”
“시끄럿! 참아. 이래야 낫지. 따가우면 좀 불어 줄 테니까.”
그러더니 후우우~ 입김까지 분다.
이건 뭐, 곤욕도 이런 곤욕이 없다.
“후아~ 밤인데도 되게 덥네.”
강제 치료를 하다 말고 태권소녀는 벌떡 일어나더니 트레이닝복의 지퍼를 내렸다. 이런 젠장! 안에는 딱 달라붙는 탱크톱만 입고 있다.
아…… 불편해, 불편해.
보안관은 얼른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야! 면 티 정도는 좀 입어 주라고, 제발!
하지만 태권소녀는 막무가내로 다시 가까이 와 보안관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린 뒤, 소독을 하기 시작했다.
손길은 또 어찌나 거칠고 섬세하지 않은지, 이건 소독을 하는 건지, 딱지를 떼어내고 상처를 다시 벌리는 건지 분간이 안 된다. 주먹을 꽉 쥐는 장갑 속 보안관의 손은 진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다.
이건…… 이건 정말 못 참아. 내일은 다른 놈이랑 조를 짜든지, 아니면 삼식이 새끼를 데리고 올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