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 서바이벌의 숲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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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 서바이벌의 숲 (5)
2022.04.25.
말을 마치자마자 진우는 강 일병 클론의 총을 들어 좀비가 왔던 숲 쪽으로 힘껏 던졌다.
그러고는 그와 직각인 봉우리 방향을 향해 탄창 하나를 집어 던졌다. 조금 전, 클론이 계속 제대로 끼우지 못하고 떨어뜨리던 그 탄창이다.
어, 어……. 자신의 총과 탄창이 분리된 채 각기 다른 두 방향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며 강 일병 클론은 당황한 신음을 흘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우는 녀석을 내버려 두고 뒤돌아 달렸다. 발소리에 놀라 고개를 한 번 움츠렸던 클론은, 진우가 멀어져 가는 것을 확인하고 황급히 일어나 총이 날아간 언덕 아래를 향해 뛰어갔다.
‘총을 먼저 집는구나. 이제 탄창을 찾아 그 방향 그대로 너희 편 찾아가라.’
클론이 네 발로 기다시피 하며 총이 날아간 언덕 아래로 뛰어 내려가는 걸 보며 진우는 생각했다.
진우는 놈이 도망가 주기를 바랐고, 그래서 의도적으로 탄창을 봉우리 쪽으로 던져 버렸다. 거기까지 도달했으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봉우리 너머로 자신의 동료들을 찾아가면 된다.
“너는 너고, 내 문제가 어쩌면 더 크니까…….”
진우는 봉우리 반대 방향의 숲속으로 들어가 수풀을 헤치며 계속 빠르게 걸었다. 몇 개의 꼬불꼬불한 작은 비탈을 넘고 언덕 위에 올라선 진우는 나무 사이에 숨어 슬쩍 뒤를 돌아봤다.
클론은 아직도 탄창을 찾지 못했는지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힌 채 풀숲 위를 서성거리는 중이었다.
진우는 혀를 찼다. 이렇게 전쟁에 휘말려 버렸으니 저놈도 저 정도 감이나 실력으로 오래 살아남기는 텄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주변에 별다른 위험이 없으니 저대로 내버려 둬도 될 것 같다. 이제 더는 강 일병 클론에게 관심을 두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진우는 다시 나무 사이로 내달렸다.
“하아~ 하아~ 큭, 컥! 컥!”
그렇게 험한 산속으로 점점 더 깊숙이 들어가며 언덕을 오르고, 다시 바위를 타 넘고, 나무 사이로 뛰어오르던 진우가 큰 바위 뒤에 주저앉았다.
목이…… 갈증이 너무 심하다. 이젠 껌을 씹는 정도로는 어떻게 해결될 것 같지가 않은 수준까지 왔다. 계속 기침이 나온다. 하지만 물은 없다.
줄줄 흘러내리는 땀이라도 핥아 볼까 싶어서 바짝 말라 갈라지기 직전인 혀를 날름거렸다.
진우는 손을 뻗어 주변의 이름 모를 꽃들을 훑었다. 그러고는 그 연한 이파리들을 입에 넣고 씹었다. 혹시라도 단물이 좀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그냥 쓰기만 존나게 쓰다.
윽, 진우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그 쓰고 떫은맛 덕에 침이 돌 때까지 꽃잎을 계속 질겅거렸다. 그러고는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더 쉬고 싶지만, 아직은 안전하지 않다.
조금 높은 곳에 올라 후방의 시야가 확보될 때마다 진우는 뒤를 돌아보며 혹시 후발 추격대가 도착하지는 않았는지 확인했다. 여전히 봉우리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하는 척만 하라던 조언을 그 클론이 알아먹은 걸까?
적어도 동료들을 불러오지 않은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깊숙하게 들어오면서 산세는 급격하게 험해졌다. 봉우리 지나서 나타났던 그 완만한 평지가 거짓말인 것만 같다.
끄응~ 나무를 잡고 비탈을 오르는 진우의 입에서 저절로 앓는 소리가 터진다. 그리고 이 깊은 산속에 왜 그리 올무는 많은지, 그 가느다란 철사를 피해 다니는 것도 꽤나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시야를 가리는 게 없는 평지였다면 휙휙 넘어가 버릴 수 있겠지만, 온갖 풀들이 가슴 높이까지 자라 있고 낙엽도 발목을 덮는 이런 깊은 산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밀렵꾼 개새끼들…….”
진우는 길게 쳐진 철사를 넘어가며 욕설을 내뱉었다. 뭔가가 발목에 걸린다 싶었을 때, ‘풀이겠지’ 하고 그대로 다리를 뻗으면 콱 당겨지는 구조다.
일단 올무가 조여지면 총 말고는 아무 이렇다 할 도구가 없는 진우로서는 정말 큰 고생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몇 번 위험한 상황을 직접 겪어 보고 나니 어느 정도 요령이 생겼다. 나무 사이의 간격이 노루 정도가 지날 수 없을 만큼 좁은 곳에는 올무도 없다.
그리고 다니기 더 편한 길목에 올무가 숨겨져 있다.
올무 주변에는 꺾인 나무가 보인다. 그리고 이런 모든 요령이니 식별보다 지팡이로 먼저 짚고 훑어가며 지나는 게 제일 효과적이라는 걸 배웠다.
“후우…….”
긴 나뭇가지를 꺾어 지팡이로 삼고 수풀을 흩어가며 걷던 끝에 드디어 능선에 도착한 진우는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그는 꽤나 멀리까지 왔다. 등 뒤로 보이는 봉우리는 이제 250사로보다 훨씬 더 멀게 보인다.
능선 너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길게 이어진 좁은 협곡이었다.
자동차 한 대나 겨우 지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폭이 좁고 완만한 내리막길인데, 그마저도 드문드문 솟아 올라와 있는 바위 때문에 훤히 뚫려 있지는 않다. 양쪽으로 높게 솟은 언덕은 쉽게 기어오를 수 없을 만큼 가파르다.
그런 형태의 협곡이 아주 완만한 내리막 경사와 곡선을 이루며 길게 뻗어 있다. 다시 말해 일단 저기로 들어가기만 하면 이 길고 짜증스런 추격전도 끝이다.
100명이 쫓아온대도 저 협곡 안에 들어선 순간, 4열 종대로 스물다섯 줄을 만들어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군가 언덕 위쪽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수류탄이라도 한 발 던지고 난사하면 순식간에 절반 이상이 궤멸되기 딱 좋은 구조였다.
그러니 저런 곳에까지 추격대를 내려보내는 미친놈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일반 병사 알기를 우습게 여기는 지휘관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설사 보낸다고 해 봤자 포위당하는 게 아니니 별로 두려워할 이유도 없고.
후우~ 진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젠 다 끝났다.
최고로 좋은 하루도 아니었고, 계획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흘러간 한나절이지만, 그래도 아직 살아 있어……. 싸울 수 있는 실탄도 손에 넣었고…….
가슴에 꽉 차 터질 것 같은 불만과 답답함을 달래기 위해 진우는 최대한 긍정적인 생각들을 하려 노력했다.
능선 아래로 내려가기 전에 진우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자신이 왔던 길을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걸 보고 말았다.
봉우리 안쪽에 병사들 한 무리가 도열해 있고, 그 맨 앞으로 사제 방탄조끼를 입고 긴 소총을 멘 놈이 나선다.
놈들을 보자마자 진우는 얼른 몸부터 숨겼다. 저격수다. 꽤 먼 거리에서도 확연히 구분될 만큼 놈의 사제 조끼 색깔과 긴 총열이 튄다.
너, 너…… 이 새끼!
진우는 눈에서 불꽃이 확 이는 듯했다.
진우는 수풀 뒤에 몸을 숨긴 채 계속 놈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사실 자신은 그냥 이 고개 아래로 내려가 산속으로 사라져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면 저놈들이 쫓아오든 말든 더 부딪칠 일도 없고, 위험할 일도 없다.
이만큼의 거리를 확보했으니 이 넓은 산속에서 그를 다시 찾아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정말 만약에 소수 병력이 협곡까지 따라온대도 두려워해야 하는 건 오히려 저놈들 쪽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만히 여기 엎드려서 저놈들을 노려보고 있는지 묻는다면,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하여간 뭔가가 진우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어 발을 뗄 수 없게 했다.
‘두 개 분대는 넘어 보이는데…… 그럼 지원 병력이 추가로 온 건가…….’
병사들의 머릿수를 헤아려 보며 진우는 생각했다. 아까 도로 위에서 시체들을 확인하던 병력보다 지금이 더 많다.
놈들은 그 자리에 서서 좌우를 둘러보고 있다. 아마 ‘골치 아픈 패잔병 한 놈’이 어디로 도망갔을지 그 방향을 찾는 모양이다.
잠시 후, 추격대는 세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졌다. 제1대는 아까 여섯 마리 좀비가 걸어왔던 언덕 방향으로, 제2대는 그 반대쪽으로 봉우리를 끼고 위쪽으로 이동한다.
마지막으로 제3대는 진우가 왔던 길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우가 눈독을 들이고 있던 저격수가 공교롭게도 이 제3대에 끼어 있다.
놈이 댓 명의 병사와 함께 숲 안쪽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 진우는 자신이 왜 그냥 가버리지 않고 여기서 지켜보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 저격수가 다른 방향으로 가는 수색대에 끼었다면 그 역시 미련을 두지 않고 협곡을 향해 떠났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복수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기회가 왔다.
진우는 지팡이를 그 자리에 눕혀두고 힘들게 올라왔던 길을 조심조심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놈의 강점은 긴 사거리와 저 고배율 조준경이다. 그러니 미리 가서 전략적 우위에 있는 장소를 선점하고 조준경이 없는 자신이 육안으로 겨룰 수 있을 만큼의 거리까지 끌어들인 후, 저 밉살스러운 놈을 끝내 버리리라.
촤아아아―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내리막길을 미끄러질 때마다 낙엽과 풀들이 눕는다. 진우는 최대한 조용히, 그리고 기척을 죽인 채 산길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복수의 기회’라는 어휘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직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 무슨 복수 타령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해 주겠다.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공격하기만 했던, 이 기분 나쁜 하루를 그냥 이대로 흘려 버리기는 싫다.
이럴 때조차 화 한 번을 내지 못하고 무작정 도망만 쳐야 한다면, 그건 숨을 쉬고 있어도 이미 살아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그 분노를 쏟아부을 만한 대상으로는 저놈이 가장 적합하다. 아직 살아 있는 놈들 중에서는.
추격대와의 거리를 좁히며 진우는 어떻게 싸울 것인지를 정리했다. 수많은 사투를 헤쳐 나왔다고는 하지만, 자신은 사람 대 사람의 전투에 대해서 잘 모른다.
반면, 적은 전술 교범이랄지 암살, 저격 따위를 전문가 레벨로 숙지한 놈이다. 장비도 그렇고, 동료의 화력지원도 그렇고, 여러 면에서 이 싸움은 자신이 불리하다.
하지만 저격수는 지금 조급할 것이다. 착용한 장비가 말해 주듯 놈은 엘리트 군인이고, 오늘 진우는 놈의 총알을 피하며 그 엘리트의 단단한 자존심을 몇 번이나 상하게 만들었다.
그게 이 싸움에서 진우가 확보해 놓은 심리적 자산이자 중요한 이점이었다. 놈이 서두르는 마음, 약이 올라 평정이 흔들리는 그 상태를 파고들어야 한다.
10분여를 더 내려간 진우는 비교적 높고 가파른 언덕 위에 자리를 잡고 천연 참호 뒤에 몸을 숨겼다.
그 자리를 고른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추격대는 완만한 산길을 지그재그로 한 번 왕복해야만 그가 있는 곳까지 닿을 수 있다.
직선으로 오고 싶다면 급격한 경사로를 60미터 이상 뛰어 올라와야 하는데, 그건 그냥 죽여 달라고 도발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다. 여기는 좀비들도 돌아다니지 않을 만큼 가파른 언덕이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또 한 가지 장점을 꼽자면, 이 언덕은 저격수를 잡은 다음 빠져나가기 좋도록 뒤로 이어지는 길목이 튀어나온 바위와 나무로 잘 가려져 있다. 여차할 때 도망을 칠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강점이었다.
“후우~ 후우~”
진우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잡초들 사이에 숨어 아래쪽을 노려봤다. 슬슬 나타날 때가 되었다. 하이바가 없지만, 어차피 풀이 높이 자라 있어 가려 준다.
그리고 놈이 쏘는 7.62㎜탄은 하이바를 쓰고 안 쓰고에 상관없을 만큼의 관통력을 가지고 있다.
잠시 후, 억! 하는 소리가 작게 들려오고, 멀리 녹색 덤불이 흔들렸다. 왜 그런 소리가 나는지, 그 소리가 난 지점이 어디쯤인지 진우는 잘 안다.
누군가 올무에 걸린 거다. 몇십 분 전, 진우도 저기에서 아슬아슬하게 올무를 피했으니까.
‘좀 더 와. 무서워하지 말고.’
막연하나마 한 지점을 특정할 수 있게 된 진우는 가늠자를 천천히 그 방향으로 돌렸다.
머릿수 하나가 아쉬운 상황이니, 이제 놈들은 어떻게든 그 올무를 풀어낼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저기 보이는 나무 쪽으로 한 놈씩 엉거주춤 걸어 나오겠지.
여섯이나 되는 사람을 다 죽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 진우가 방아쇠를 당기는 건 그 저격수 놈의 머리가 이 가늠자 안에 들어오는 순간이다. 녀석을 잡은 다음에는 곧바로 돌아서서 고개를 넘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놈들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올무 하나를 푸는 데 너무 오래 걸리는 것 아닌가?
혹시 포위를 당하나 하는 생각에 가늠자에서 눈을 뗀 진우가 좌우를 둘러보려는 순간, 파아앙― 날카로운 총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진우의 바로 곁으로 총알이 스치고 지나갔다. 계속 조준하고 있는 상태였다면 그대로 머리가 날아갔을 터다.
“윽!”
진우는 황급히 머리를 숙이고 둔덕 아래로 엎드렸다. 바로 곁을 스치고 간 총알의 열기와 소리 때문에 귀가 찢겨 나간 것 같은 느낌이다. 귀 안쪽에서는 찌이이이이잉― 찌이잉― 엄청난 이명이 울려 댔다.
투투둑, 투투투, 투투둑.
계속 3점사가 이어지고 주변의 흙과 돌이 부서져 꺾인 풀들과 함께 날린다.
‘뭐지? 어떻게 알았지?’
두려움보다도 놀라움이 더 컸다. 분명 노리고 쏜 거다.
자신이 매복하고 있던 지점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단 말인가.
아니, 그랬다면 병력을 나눌 이유도 없고, 이렇게 가까이까지 접근해 올 이유도 없는데……. 그럼 대체 뭐지?
투투투, 투투두, 투투둑.
그렇게 고민을 하는 짧은 동안에도 놈들의 제압사격은 계속 이어졌다.
언덕이 있어 직격당할 위험은 없지만, 도무지 고개를 들 수 없다는 게 문제다. 그리고 계속 흙먼지가 날려 눈을 똑바로 뜨기가 어렵다.
“총은…… 총은 괜찮나?”
진우는 떨어지는 흙으로부터 총을 보호하기 위해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반짝, 총열 덮개의 검은 쇠가 여름 오후의 강렬한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아하, 진우는 그제야 저격수가 어떻게 자신의 위치를 알아냈는지 깨달았다.
놈은 수풀 사이로 삐져나온 총구가 빛을 반사하는 것을 본 거다.
놈에게 신통력이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은 다행이지만, 제압사격으로 이쪽이 잔뜩 움츠러들어 있는 동안 놈이 어디로 도망가서 자리를 잡을지 모른다는 점이 걱정된다.
투투둑, 투투둑, 투투둑.
잠시 저쪽의 총성이 뜸해진 틈을 타서 진우도 대응사격을 했다. 총구만 위로 올리고 보지도 않은 채 대충 갈기는 것이지만, 그래도 효과는 있었다.
핑― 핑―
돌이 튀는 소리가 울리면서 저쪽의 총소리가 일시에 확 줄었다. 저쪽이 여섯 명이라고는 해도 어차피 저격수 한 놈을 제외하면 다 일반 병사들.
강 일병 클론 일행들의 모습으로 미루어 볼 때, 전투 경험도 풍부하지 않다. 이렇게 총알이 날아다니면 병사들은 저절로 위축될 수밖에 없다.
투투, 탕탕, 투투둑.
다시 놈들의 사격이 시작되었을 때, 총소리가 사방으로 분산된다는 게 느껴졌다. 돌아서 빙 둘러 포위를 할 심산인가 보다.
그건 아직 괜찮다. 어차피 놈들이 이 산비탈을 다 올라서 근처까지 뛰어오려면 아직도 한세월은 있어야 한다. 그전에 저격수 놈만 잡으면 된다.
어차피 여기에 오래 있을 생각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총소리를 들었으니 양방향으로 분산되었던 병력들도 곧 여기로 합류할 것이다.
진우는 생각했다.
병사들을 분산시켜 놓은 시점에서 정작 놈은 어디로 갈까? 엉덩이가 무거운 저격수님께서는 어디로 이동할까?
자신은 안전하면서도 목표물의 총알은 잘 닿지 않을 만한 곳, 놈은 뒤돌아 내려가고 있다. 그리고 자세를 낮출 거다.
투투둑, 투투둑, 투투둑.
양방향으로 빠르게 한바탕 총알 세례를 퍼부어주며 올라오는 적 병력의 발을 묶으려던 진우는, 언덕 왼편 아래에서 힘차게 팔을 휘두르는 병사 한 놈을 보았다.
휘익―
수류탄. 전혀 예상치 못했다. 삼척에서 하도 폭발물과 멀리하고 싸워 왔기 때문에, 그게 전투의 한 도구로써 사용될 수 있다는 것조차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진 상태였다.
‘……좃 된 건가?’
일시적으로 머릿속이 하얗다. 당장 피해야 하지만, 지금 일어나거나 자세를 높였다가는 사방에서 조준하며 기다리던 놈들의 먹잇감이 될 뿐.
진우는 떨어지는 궤도에서 수류탄을 맞출 수 있을까 싶어 급하게 총구를 돌렸다. 그런데…… 놈이 투척한 수류탄은 중간 지점에서 잎이 무성하게 달린 나뭇가지에 맞고 아래로 뚝 떨어져 버렸다.
나무가 높이 솟아 있는 숲속에서 오르막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다니, 애초에 정신 나간 시도였다.
똑― 똑― 떼구루루―
잠시 총성마저 멎을 만큼 모두의 시선이 비탈을 타고 굴러 내려가는 수류탄에 집중됐다.
“미친!”
수류탄의 위치가 놈들 쪽으로 더 가까이 내려갔다는 걸 확인하면서도 진우는 얼른 머리를 감싸고 언덕 아래에 몸을 바짝 붙였다.
혼비백산하기는 아래의 추격대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우왕좌왕하며 당황한 목소리가 1초 정도 들려오는가 싶더니…….
콰아앙―!
그야말로 엄청난 굉음이 산을 흔든다. 몇십 미터나 떨어져 천연 참호 안에 몸을 숨기고 있는데도 텅 빈 위장이 흔들일 만큼 강한 진동이 몸 전체를 훑고 지나간다. 곧이어 돌과 나뭇조각, 흙더미들이 쏟아져 내렸다.
후드드득― 후드드득―
진우는 가능한 한 머리를 가슴속에 묻으려 애를 썼다.
탁, 날아온 돌조각이 팔과 허벅지, 머리를 때린다.
물론 더 큰 대미지를 받은 건 아래쪽에 산개해 있던 추격대 쪽이다.
한바탕의 흙더미 폭풍을 견뎌낸 진우가 혼란을 틈타 왼쪽으로 20미터쯤을 기어간 뒤 다시 시선을 언덕 아래로 돌렸을 때, 무참하게 박살 난 나무들과 움푹 팬 땅, 그리고 자욱한 화약 연기 너머로 신음하는 병사들이 기어 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놈들 중에 저격수는 없다.
‘어디냐……. 어디…….’
진우는 K―2를 가슴에 꼭 끌어안은 채 살짝 눈만 돌려 놈의 위치를 추적했다. 총구로 위치를 들키는 실수는 한 번이면 충분하다.
좀 전의 흙더미 폭풍 덕에 얼굴 전체가 흙과 낙엽에 덮여 있어서 위장 걱정은 따로 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총은 놈의 위치를 확인한 다음 빨리 꺼내서 당기면 된다. K―2 속사라면 누구랑 겨루더라도 해볼 만하다.
나와 봐, 이놈아. 총구를 내밀어. 내 총이 빛을 반사한다면, 네 총도 반짝이겠지……. 그리고 총열도 더 길고. 넌 전술 조끼도 검은색이잖아…….
진우는 최대한 기척을 숨긴 채 쑥대밭이 된 아래쪽 언덕을 훑었다.
원래 병사들이 있던 위치보다 먼 거리, 엄폐물이 있는 곳, 그리고 그중에서도 수풀이 무성하게 돋아 있는 지점들만을 골라 살폈다. 자신이 놈이라면 저런 곳 중 한 곳에 있을 테니까.
투투둑, 투투둑.
겨우 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원래 진우가 숨어 있던 곳 부근을 향해 3점사를 퍼부어 댄다. 놈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진우는 저격수를 찾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았다.
다른 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놈의 저격소총에 붙어 있는, 그 요란스런 광학 조준경 렌즈가 아주 일순간 햇빛을 반사해 부자연스러운 반짝임을 만들어냈다.
미세했지만 진우의 눈길을 사로잡기엔 충분했다. 거기 있다는 걸 알고 집중하니 풀숲에 가려져 완벽하게 은폐되어 있던 놈의 모습도 조금씩 구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거리는 80? 어쩌면 100?
나무 두 그루 사이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다. 어찌나 신중하게 움직이는지, 총구가 미세하게 돌 때조차도 풀이 흔들리지 않는다.
놈의 총구도 막연하게나마 진우가 몸을 숨기고 있는 방향을 겨누고 있다. 결국 박빙의 승부가 될 모양이다.
진우는 기다렸다. 놈의 총구가 자신의 엄폐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놈의 시점에서 보자면 왼쪽으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다.
조준경을 보고 있는 동안에는 오른쪽의 시야가 약점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아주 느릿느릿 돌던 저격수의 총구가 어느 정도 돌아갔다 싶었을 때, 진우는 재빠르게 몸을 돌리며 연사를 퍼부었다.
타, 탕! 타다다다당! 타타타타타탕! 탕탕탕!
파앙, 파앙!
저격수 역시 재빠르게 반응을 하며 연발 사격을 시도했지만, 진우가 미세하게 더 빨랐다. 머리와 어깨, 등, 그리고 온몸에 열댓 발의 총알을 맞은 저격수는 조준도 하지 못한 채 두 발을 당기고 총을 놓쳐 버렸다.
탕! 탕! 타탕!
놈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지고 근처의 잡초들이 새빨간 피로 뒤덮인 걸 확인한 후에도 잠시 동안 진우는 방아쇠를 계속 당겼다. 그러고는 곧바로 천연 참호 뒤에 몸을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