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3. 서바이벌의 숲 (1) (233/449)


233. 서바이벌의 숲 (1)
2022.04.21.


1655447477646.png

 
진우는 덤불숲 속에 큰대자로 누워 한동안 미친 사람처럼 웃다가 찡그리다가를 반복한 후에야 좀 진정할 수 있었다. 믿어지지 않는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그는 화천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걱정되는 바라면, 그저 만 발이 구령대 아래에 있을 것인가 아닌가 하는 정도…….

자전거는 잘 굴러갔고, 배낭에는 마실 물과 먹을 것이 들어 있었다. 하나만 챙겨 온 스팸은 아끼느라 아직 뜯지도 않았었다.

터널에서 잔뜩 소비하기는 했어도 탄약은 여유가 있고, 총은 두 자루에 장비도 필요한 만큼은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뭐람? 오르막길에서 그 트럭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서로 잠시만 엇갈려 지났더라면 이렇게 어딘지도 모르는 산속에 누워 있지 않아도 됐을 텐데.

젠장, 진우는 더듬더듬 손으로 짚어 전술 조끼에 끼워둔 탄창의 수를 확인했다.

30발짜리 탄창 두 개……. 아까 시체가 된 병사들에게서 빼낼 수 있는 만큼은 빼낸다고 했는데, 살아남으려고 싸우다 보니 이것만 남았다.

도망쳐 나오기 전에 더 보충을 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런 데 눈 돌릴 여유는 없었다.

사실 여기까지 도달한 것도 운이 70퍼센트는 도와준 거다. 자신의 바로 옆 바위를 때리던 총알, 그게 허벅지나 등을 꿰뚫었을 수도 있었다.

총에 장착되어 있던 클립에는 여섯 발이 남아 있다. 진우는 일단 그 여섯 발 남은 탄창을 탄창 집에 넣고, 꽉 차 있는 새 탄창을 끼웠다.

이거야 원, 그야말로 목숨만 살려 줬구나.

진우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삼척 발전소에서 벗어난 그 아침에 펜션의 화재로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하던 때보다도 오히려 살림이 더 쪼그라들었다.

그간 꽤나 요긴하게 써먹었던 대검도, 권총도, 플래시도, 주야 조준경이 달린 K―2도 이제 없다.

그럼 뭐가 남았지?

진우는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봤다. 묵직하게 느껴지던 것은 지포라이터다.

이거 기름을 마지막으로 넣었던 게 언제였지? 라이터 연료는 배낭 안에 있는데…….

윗옷 주머니에는 껌 반통이 들어 있다. 그리고 팔목에 찬 시계. 그게 그가 가진 장비의 전부다. 심지어 물병도 없다.

“아, 씨발. 나 존나 부자네.”

좃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껌부터 하나 까서 씹었다. 목이 바짝 말라 있어서 이렇게라도 입을 속이지 않으면 구역질이 날 것 같아서다.

일어나 앉은 진우는 질겅질겅 껌을 씹었다. 입술에 말라붙어 있던 피 때문에 과일 맛과 함께 비릿한 쇠 맛이 느껴진다. 그 중위의 피…….

자신에게 미끼 역할을 지시하던 중위의 가슴이 난데없이 뻥 뚫렸을 때, 그의 그 시뻘겋고 뜨거운 피를 뒤집어쓰며 받았던 충격이 생생하다.

적은 보이지도 않고, 인지되지도 않았다. 그냥 아주 멀리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경고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것은 진우에게 또 다른 경험이었다. 지금까지 그의 전투는 육박전을 위해 다가오는 좀비들을 원거리에서 저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야에 잡히지 않으면 적도 없고, 위협도 없는 거였다.

예외적으로 탈영병들과 상대한 적은 있지만, 그때도 놈들이 쏘리라는 것 정도는 미리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건…… 이건 완전히 다르다. 이건 정말로 영화에서 보았던 것 같은, 전통적인 전쟁이다.

오늘 나는 대체 왜, 누구와 싸운 거였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아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대체 왜 벌건 대낮에 국군들끼리 이런 교전을 벌여야 하는 거지?

두 미친 중대장의 개인적인 싸움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뭔가 서로 명령받은 작전을 수행한다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군이 반으로 갈렸나? 그래서 이제부터는 언제 어디서든 총알이 날아와 얼굴을 박살 낼 수도 있다는 건가…….

하아아~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이런 걸 알아버렸으니 앞으로 마음 편히 큰길로 다니기는 텄다. 언제라도 오해를 받고 저격의 표적이 될 수 있으니까.

“그건 그렇고…….”

진우는 몸을 일으켜 조금 전 자신이 미친 듯 내달려 왔던 길을 돌아보았다.

얼마나 달려온 걸까? 10분? 15분?

산길이었으니 넉넉히 잡아도 1킬로미터 남짓이나 겨우 될 것이다. 그리 멀리 도망 온 건 아니다.

타다아아아앙― 타아아앙―

아직도 저 멀리에서 울리는 총성이 아주 작게 들려올 만큼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

이제 여기에서 어떻게 할까?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66발의 실탄만 믿고 그냥 무작정 달아나? 아니면 돌아가서 교전 현장에서 쓸 만한 물건들을 좀 집어 올 수 있는지 살펴볼까?

선택의 문제라고는 하지만 둘 다 참 택하고 싶지 않은 길이다. 무작정 달아나면 미래가 없다.

당장 점심 끼니부터가 없으니 고생길은 훤하게 예비되어 있다. 게다가 예순 발 정도의 탄환만 가지고서는 이 산길을 통해 화천까지 가기에는 아무래도 무리다.

그렇다고 총격전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려니 발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아무래도 너무 위험하다.

좌측 산에 매복했던 병력 중에는 자신이 달아났다는 걸 본 놈들이 있다. 만약에 놈들이 추격대라도 꾸렸다면 그때는 이쪽에서 마중을 나가는 모양새가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우가 그곳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거기에는 실탄이 있다. 그것도 잔뜩.

진우를 태우고 여기 도달했던 게 100명이 넘는 병력이었으니, 병사 하나당 탄창 3개씩만 남아 있다고 해도 만 발이 훌쩍 넘는다.

기세등등하게 완전무장을 하고 왔지만, 대부분의 병사들은 탄창 하나를 다 비우기도 전에 전사해 버렸다. 탄창 하나는커녕 안전장치도 해제 못 한 채 죽어버린 녀석들도 허다할 것이다.

죽은 병사들의 전술 조끼에 장착되어 있던 탄창들이, 이제 그들에게는 아무 쓸모 없는 그 실탄들이 눈에 어른거리는 듯하다.

그것만 챙길 수 있다면 굳이 화천까지 갈 필요도 없다. 배낭 하나 가득 탄창만 채워서 메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울을 향해 가면 된다.

“아, 진짜 가벼운 발걸음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위험하다고, 이 미친놈아!”

진우는 욕심을 부리는 자신에게 짜증을 섞어 내뱉었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생각해 봐도 충분히 위험을 감수할 만큼의 이점이 거기에는 있다. 그렇게 많은 실탄이 방치되어 있는 상황을 언제 다시 또 만날 수 있다는 기약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던 진우는 결국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걷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을 정해준 원인 중에는 조금 전부터 더 이상 총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도 꽤나 크게 작용했다. 죽은 당사자들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병력 전체가 깨끗이 전멸했다는 의미이다.

막장드라마처럼 진우가 연달아 뺨을 맞을 때 거만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소령도, 빈총을 쥐여 주며 빙글거리던 중위도, 트럭 안에서 자신의 정강이를 걷어차던 그 이름도 모르는 병장도, 그 주변에서 두려움이 가득 찬 초점 없는 눈으로 바닥만 보고 있던 병사들도…… 모두 다 죽은 거다.

“하아아~ 다들 소모되어 버렸구나.”

수풀 속을 걸어가며 진우가 중얼거렸다. 다시는 군대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이 더 확고하게 굳는다.

단순히 군복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얼굴도 모르는 어떤 놈이 내린 명령을 수행하다가 영문도 알지 못한 채 닳아 없어진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이제 더 이상은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그의 복무는 삼척 발전소가 무너지던 밤에 끝났다.

발소리를 죽여가며 30분 이상을 걸어서 다시 문제의 그 교전 현장 부근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불탄 트럭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가 워낙 높고 진하게 솟아오르고 있어서 방향을 잡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제 충분히 가까워졌다 싶어졌을 때, 진우는 나무 그늘 안에 몸을 숨기고 귀를 곤두세웠다.

사람들의 말소리, 타닥거리며 뭔가가 불타는 소리…… 두 소리가 섞여 있다. 젠장, 개새끼들이 여기까지 와서 다 죽었는지 확인하는 모양이다. 매복에 성공했으면 시체 정도는 그냥 내버려 두고 돌아갈 것이지…….

진우는 조금 낙담하면서도 자세를 낮추고 천천히 전진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눈으로 확실하게 보고 판단을 하고 싶다.

부스럭― 부스럭― 와삭―

싱싱한 풀을 밟는 아주 작은 소리조차도 조심스럽다. 신중하게 한 발, 한 발을 내디디면서 도로가 보일 수 있는 위치까지 이동한 진우는 바위 뒤에 숨어 빼꼼 고개만 내밀었다.

20여 미터 아래에 줄줄이 서 있는 트럭들과 그보다 몇 배는 많은 병사들의 시체가 눈에 들어온다. 연한 회색 아스팔트는 양동이로 뿌려놓은 것처럼 흥건하게 붉은 피로 덮여 있다.

매복조였을 것으로 보이는 열댓 명의 병사들이 그 사이로 걸어 다니며 대검을 끼운 총으로 시체들을 한 번씩 건드리고 지나간다. 푹푹 찌르거나 확인 사살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외상이 두드러지지 않거나 엎어져 있는 시체들을 골라 대검을 사용해 뒤집어보는 정도다. 총구멍이 숭숭 뚫린 트럭 안으로 들어가 보는 병사들도 있었다.

진우로서는 좋은 소식이 아니다. 여기에 병사들이 서성거린다는 것도 문제지만, 그 수가 열댓 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그렇다는 말인즉, 아직도 저 산 중턱 어딘가에 대부분의 병력이 그대로 남은 채 여기에는 일부만 보냈다는 의미이므로. 이놈들이 가버린 뒤에도 한동안 저 도로 아래로 내려가기는 텄다.

‘밤이 돼서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진우는 생각했다. 젠장, 마실 물 한 모금이 없는데 그때까지 어떻게 버텨야 할지 막막하다.

그리고…… 막상 그가 바라는 그런 기회가 밤에 와 준다고 해도, 달빛에만 의존해서 100구가 넘는 저 시체들 사이를 헤집고 기어 다니며 주머니마다 더듬거려야 한다.

으…….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진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아는 가장 무서운 괴담의 주인공도 그 정도로 끔찍한 일은 경험하지 않았다.

아래에서는 여전히 시체 확인이 계속되고 있다. 승전의 주인공들이지만, 매복조 병사들의 표정도 그리 밝지는 않았다.

다들 얼굴을 찌푸린 채로 자신과 같은 모양, 같은 색깔의 군복을 입고 죽어 있는 시체들을 살펴보며 피를 밟고 지난다.

자신들도 얼마 못 가 이런 모습이 되어버릴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낄 터였다.

“우에에엑― 우웩!”

심하게 훼손된 시체의 곁을 지나던 병사 하나가 결국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길가로 뛰어가 허리를 굽혔다. 다른 놈들도 이따금씩 손으로 입을 가리며 헛구역질을 한다.

그래, 그럴 테지.

진우는 이해할 수 있다는 눈빛으로 토악질을 하고 있는 병사들을 바라봤다. 그 역시 삼척에 처음 배치되었을 때 좀비들의 시체를 보고 미치는 것 같았었다.

내장이 밖으로 다 터져 나오고 팔다리가 잘린 채 쓰러진 또래들의 시신을, 그것도 여기까지 비릿한 냄새가 느껴질 정도인 피범벅 위에서 보고 있는데 속이 뒤집히고 눈물이 나지 않으면 그게 비정상이다.

물론 진우 자신은 이제 꽤 무뎌지기는 했지만.

시체와 피에 대한 반응을 볼 때, 저 도로 위에서 시체들을 확인하고 있는 저 녀석들 역시 전투를 많이 해 본 놈들은 아니다. 그것이 좀비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든 말이다.

좀비 세상이 왔다고는 해도 배치되는 지역과 임무에 따라 시체 구경이 익숙해지지 않을 만큼 교전으로부터 멀리 있는 녀석들이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들 중 두 놈이 진우의 눈길을 끌었다. 잔뜩 움츠러들어 있는 다른 병사들에 비해 그 두 놈은 꽤나 적극적으로 돌아다니면서 이런저런 지시를 하고 있다.

단순히 간이 큰 놈들인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술 조끼의 색깔이나 재질이 다른 병사들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누가 봐도 사제 방탄조끼다.

무기도 달랐다. 놈들은 K―2보다 총신이 짧고 앞쪽에 소음기가 장착된 총을 들고 있다. 탄창도 폭이 좁고 길쭉한 K―7 기관단총이다. 둘 중 한 놈은 등에 길쭉한 저격 소총도 메고 있다.

뭐지? 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병 계급장이 증명해 주듯 진우가 군 생활을 오래 경험한 건 아니지만, 저런 장비와 무기를 들고 다니는 일반 병사는 본 적이 없다.

비슷한 걸 봤던 기억은 예전에 707특임대와 삼척 시내에서 함께 작전을 수행했던 때 정도뿐.

그렇다면 특수부대라는 건가…….

그 두 명의 K―7 소지자는 다른 병사들을 지휘해서 현장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아냐, 이 개새끼야. 꼰지르지 마. 그냥 너 혼자만 알고 있어.’

일반 병사 중 하나가 어떤 지점을 가리키며 K―7 소지자에게 뭔가 말하는 걸 본 진우는 하마터면 버릇처럼 몸에 밴 혼잣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그 병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놈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건 아까 자신이 탈출할 때 타고 올랐던 그 루트였다. 놈이 이곳저곳을 지목해 댄다. 아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이쪽으로 뛰어 도망가는 놈이 하나 있었지 말입니다.’

대화를 마친 K―7 소지자는 근엄한 표정으로 진우가 숨어 있는 산 쪽을 둘러본다.

어떻게 할까?

놈의 고민이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다.

총격전이 벌어진 지 이미 한 시간 가까이 지났으니 달아났다고 하는 그 시간부터 계속 뛰어갔다고 상정하면 적어도 4킬로미터는 멀어져 있다. 물론 방향도 모른다.

이 넓은 산속에서 반경 4킬로미터면 거의 무한정한 범위라고 봐야 한다. 게다가 목표물도 계속 움직일 테니, 그럼 더 찾아내기가 어렵다.

겨우 한 명의 병사 때문에 그 짓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혼자만의 힘으로 생존해 자기 부대까지 돌아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 텐데…….

놈의 얼굴은 대강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그래, 맞아. 도저히 생존할 수가 없어. 좀비들이 배회하는 산속이라고……. 하루도 못 버틸 거야. 그러니까 제발 이쪽 일은 잊어버리고 그냥 돌아가. 돌아가서 총기 정비나 해. 돌아간다…… 돌아간다…….’

진우는 그런 생각을 하며 놈에게 염력으로 주문을 걸려 애를 썼다. 그러는 사이에도 구토를 동반한 시체 확인 작업은 계속 진행되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이놈들이 시체를 뒤져서 무기를 꺼내 간다든지 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아마 아직 보급품이 넉넉하게 남아 있는 모양이다.

이놈들이 수색을 다 마치고 여기에서 벗어나 저 밭두렁인지 벌판인지를 한 300미터 이상 가로질러 걸어가서 산속으로 사라져 버린다고 해도 그걸로 끝나는 건 아니다.

밤의 어둠이 자신을 가려주기 전까지는 안심하고 산을 내려갈 수 없다. 장기전이 되어야 할 상황이라서 진우는 어두워질 때까지 일단 좀 더 물러나 있기로 했다.

바위 뒤, 나무 그늘 속에 숨어 있다고는 해도 놈들의 얼굴이 보일 만큼 가까운 데서 계속 시간을 보내는 건 가슴이 조마조마한 일이었다.

지금도 몇 분 동안이나 숨도 제대로 못 쉬어가며 기척을 죽이고 있는 중인데, 이게 꽤나 힘이 든다.

까딱 손을 잘못 짚어 돌이 굴러떨어지기라도 하면 곧바로 놈들의 주의가 이쪽으로 쏠리게 될 것이다.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조금 전부터 점심 식사를 거른 배가 아주 조그맣게 꼬르륵거리고 있다.

이 소리는 점점 더 커지면 커졌지, 작아지지는 않을 거다. 진우는 새를 노리며 다가가는 고양이처럼 조심조심 네 발로 뒷걸음질을 쳐서 물러났다.

“휴우~ 먹고살기가 힘드네.”

도로를 살피던 지점에서 300미터 이상 물러나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를 잡은 진우는 하이바를 벗고 땀을 식혔다. 덥다. 물이 마시고 싶다.

염탐하는 내내 어금니 사이에 꼭 끼워 뒀던 껌을 다시 씹어 갈증을 달래면서 진우는 도로와 이어진 방향의 산길을 노려보았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아직 한 시가 조금 넘었다. 캄캄해지려면 앞으로 댓 시간은 족히 이렇게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젠장,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지? 졸면 안 되는데…….

진우의 껌 씹는 속도가 빨라진다. 벌건 대낮에 아무것도 않고, 그저 시간을 죽여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어서 낯설기까지 하다.

입대하기 전에 친구들과 함께 보냈던 평범한 휴일 오후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삼식이 새끼가 여자 만나러 나가고 나면 다 큰 놈 셋이 방구석에 누워 있다가 서로의 방귀 냄새나 맡던, 그 평화로운 시절.

그놈들…… 다시 볼 수 있을까?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그때처럼 친구들 사이에 누워 하품을 하면서 ‘뭐 좀 재미있는 거 없냐?’를 다시 지껄이고 싶다.

낙담해서 고개를 숙인 채 하이바 안쪽에 붙여둔 핑크 펀치의 사진을 보고 있던 진우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거 지금…… 설마? 아주 작기는 하지만, 분명 들린 것 같다.

그 특유의 이상한 포효. 좀비다!

진우는 사방에서 메아리치는 작은 울림들 중에 소리의 진짜 근원을 찾기 위해 이마를 찌푸리며 하이바를 다시 썼다. 어째 한가하게 옛날 생각이나 할 때가 아닌 모양이다.

그롸아아아―!

진우가 몸을 일으켰을 때는 훨씬 또렷해진 소리가 들렸다. 이건 꽤나 가깝다. 방향도 다르다. 그러니까 방금 울음소리를 냈던 그놈과는 다른 놈이다.

“야, 얘들아. 오지 마. 다음에 와라. 나 지금 총 쏘면 안 된단 말이야. 저기 있는 새끼들이 듣는다고!”

울음소리의 크기나 빈도도 그렇고, 소름이 돋지 않는 걸 봐도 그다지 많은 수는 아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사격 솜씨는 봉인해 두는 편이 낫다.

진우는 좀비의 울음소리가 들려온 쪽의 반대 방향을 향해 급하게 걷기 시작했다. 일단 피하자. 피하면 놈들은 분명히 트럭 쪽으로 몰려갈 거다.

불만 나면 신이 나서 달려드는 놈들이니까. 그러면 저기서 수색하고 있던 놈들이 다 죽이든가 하겠지…….

진우의 계산은 그거였다.

하아아~ 하아아~

숨을 헐떡이며 구불구불한 비탈을 걷던 진우는 내리막길 앞에서 멈춰 섰다. 아, 씨발. 저절로 욕이 나온다. 꾸역꾸역 비탈길을 기어 올라오던 좀비 한 마리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녀석도 어지간히 오랫동안 돌아다녔는지 반팔 와이셔츠가 거의 넝마 수준으로 더럽혀진 채였다.

총은…… 총은 쓰면 안 되는데…….

진우의 관자놀이로 한 줄기 굵은 땀이 흘러내릴 때, 넝마셔츠 좀비가 꾸에엑! 소리를 지르며 비탈길을 뛰어 올라온다.

한쪽 다리가 발목뼈밖에 남지 않은 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스피드다. 달아나기는 다 글렀다.

빙글―

진우는 총을 돌려 두 손으로 총구를 꽉 잡았다.

16554474776466.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