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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혼돈 (5) (230/449)


230. 혼돈 (5)
2022.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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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우~ 후우우~ 씨발 놈들, 더럽게 높이도 만들어 놨네. 넘기 불편하게.”

철망이 울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느라 짜증이 난 기동이가 투덜거렸다. 그나마 이 위쪽에 철조망을 깔아 두지 않아서 다행이다.

철책 꼭대기에 올라서자마자 기동이는 재빨리 몸을 날려 건너편 건물 주차장 위로 뛰어내렸다. 몸무게나 덩치에 비해서는 꽤나 민첩한 움직임이지만, 그럼에도 땅이 울린다.

쿵!

그 정도 소리는 괜찮다. 어차피 24시간 이동식 발전기가 윙윙거리며 돌아가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소음은 묻히니까.

사사삿.

기동이는 빛이 닿지 않는 그늘 속에 몸을 숨긴 채 4층 건물의 입구까지 뛰어갔다.

그러고는 잠시 기둥 뒤에 기대서 숨을 골랐다.

후우~ 사실 운동량은 별로 대단치 않았는데 자꾸 가슴이 벅차다. 뭐, 지금부터 그가 제껴야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강민구. 구름 위의 존재인 것처럼 온갖 건방을 떨며 자신을 무시하던 개새끼가 지금 이 건물 2층에 얌전히 누워 있다. 그것도 아주 반송장이 된 채로. 정말 인생에 다시없을 기회였다.

기동이는 허리춤에서 식칼을 꺼내 날을 건드려 봤다. 제대로 갈려 있다. 이만하면……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병실이 2층 어디쯤에 붙어 있는지는 초희에게 들어 잘 알고 있다.

초희 말로는 꼼짝도 못 하고 누워서 오늘내일한다지만, 그건 그 멍청한 년이 강민구가 어떤 인간인지 잘 몰라서 씨불이는 개소리다.

어디가 어떻게 망가졌든 간에 칼 한 자루만 쥐여 주면 사람 한둘쯤은 순식간에 저세상으로 보낼 수 있는 게 자신이 아는 강민구다.

숨겨 놓았던 쪽지로 이미 두 마음 품고 있다는 것을 들켰으니, 운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 죽여 놓아야 후환이 없다.

“읏!”

인기척에 놀란 기동이는 벽 쪽으로 더 바짝 붙어 서서 어둠 속에 몸을 밀어 넣었다.

저벅저벅, 군화 소리가 계단을 타고 내려오더니, 플래시 불빛이 번쩍이고 댓 명의 군인이 그가 숨어 있는 곳을 지나쳐 걸어간다. 서치라이트 불빛이 닿는 경계선에 선 군인들은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찰칵.

“아, 내일 돌아가면 또 좃뺑이 시작이다. 그동안 손님 대접받아 가며 꿀 빨고 푹 쉬었는데…….”

“조 병장님, 그래도 거기서는 운 좋으면 가까이서 테라를 볼 수 있지 말입니다.”

“아, 맞다. 씨발, 같은 잠실에 있다는데 나는 걔 한 번도 가까이에서 못 봤네. 나만 피해 다니나? 야, 박 상병. 너 실제로 테라 본 적 있냐? 지근거리에서.”

“한 번 봤습니다, 조 병장님. 가까이에서 보면 말입니다, 우와, 이건 진짜 막 빛이 나는 것 같습니다. 얼굴이…… 거짓말 안 하고 제 주먹만 합니다. 게다가 다리가 막…… 하얗고 쪽 곧은 게 이렇게, 이렇게 움직이면…… 아후~ 막 미치는 것 같지 말입니다. 하여간 눈이 딱 마주쳤는데, 머릿속이 멍해지고 아무 생각이 안 났습니다. 뭐라도 있으면 그거 주는 척하고 다가갔을 텐데, 하필이면 그때 아무것도 없었지 말입니다. 그다음부터는 항상 건빵 주머니에 맛스타 넣고 다닙니다.”

“지랄 똥 싸고 자빠졌네. 이 새끼야, 어차피 똑같은 사람인데 그게 말이 돼? 네가 묘사하고 있는 건 사람이 아니라 엘프잖아. 김 이병, 네 생각은 어때? 이 새끼, 구라 까는 거 맞지?”

“구라 아니라 진짜 그렇게 예쁜데요.”

“요? 요? 아~ 김 이병님은 민간인이셨어요? 아나, 이 모자란 새끼! 짬밥을 대체 얼마나 먹어야 다나까를 쓸래? 너 같은 새끼도 테라를 봤는데, 난 왜 못 봤냐고! 응? 넌 이 새끼야, 테라 만나면 내가 다 이를 거야. 이 새끼가 좀비 보고 도망치다가 우에엑― 토한 새끼라고.”

조 병장이라 불린 놈이 냅다 헤드록을 걸자 머리통을 잡힌 놈은 곧바로 ‘잘 기억해서 잊지 않겠습니다’를 외친다. 다른 놈들은 낄낄거리며 웃고 있다.

바로 몇 미터 뒤에 숨어서 숨도 제대로 못 쉬며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는 기동이에게는 놈들의 이야기가 늘어지는 게 죽을 맛이었다.

‘개새끼들, 말 존나게 많네. 대강 피우고 빨리 들어가서 자빠져 자라.’

기동이는 입술을 꽉 깨물고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저 개새끼들이 자꾸 들락거리는 통에 지난 며칠 동안 번번이 민구 암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한두 놈만 되면 확 그냥 쑤셔 버릴 수도 있겠지만, 여러 놈들이 몰려다니니 그저 얌전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군인 놈들은 내일 돌아갈 길에 대한 걱정이나 죽은 동료에 대한 회상 따위를 한참 동안이나 더 떠들다가 올라갔다.

계단에서 놈들의 발소리와 플래시 불빛이 사라진 다음에도 기동이는 움직이지 않고 한동안 그대로 도사리고 있었다.

저렇게 왁자지껄 낄낄대던 놈들이 금방 잠이 들 리가 만무하다. 놈들이 모두 곯아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잠실에서 온 군인 놈들의 임시 숙소는 3층, 민구의 병실은 2층. 한 층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간 다음부터는 군인들과 마주치게 되면 곤란해진다.

왜 민간인 출입 금지 구역에 칼까지 소지하고 들어왔는지 납득시킬 만한 핑계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30분 이상을 더 기다린 뒤에야 기동이는 계단에 발을 올렸다.

“옘병, 더럽게 깜깜하네.”

오로지 희미한 달빛에만 의존한 채 계단을 오르자니 여간 까다롭지가 않다. 3층의 불침번에게 들킬까 봐 플래시를 켤 수가 없다. 2층에 올라선 기동이는 이마의 땀을 씻어내며 복도 끝 방을 노려보았다.

저기가 민구가 누워 있는 곳이다. 얼른 들어가서 슥슥, 몇 번 담근 다음에 빠져나와야 한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뒤꿈치를 든 채로 살금살금 걸어간 기동이는 문 앞에 멈춰 선 채 귀를 기울였다. 혹시라도 누가 같이 있다면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후후후, 개새끼. 초희 말이 맞나 보다. 약에 취해서 세상모르고 뻗어 있구만. 좋은 꿈 잘 꾸고 있어라. 내가 금방 편하게 해 주마, 영원히.

기동이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문손잡이를 잡고 살짝 돌렸다.

끼이이.

손잡이가 돌면서 아주 가늘고 작은 쇳소리가 울린다. 하지만 이 정도는 웅웅거리는 발전기 소리에 묻히는 정도이다. 아무도 못 들었을 거다.

기동이는 허리춤에서 식칼을 꺼내며 발끝으로 천천히 문을 밀었다. 혹시 몰라서 몸의 중심은 여전히 뒤쪽에 두었다. 아주 조금씩, 천천히, 경첩에서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살살 문을 밀었다.

문이 열리는 각도가 커질수록 보이는 풍경도 늘어났다. 이윽고 침대의 끝부분이 보인다. 침대 머리맡에 걸려 있는 링거 봉지가 달빛을 받아 반짝인다.

저기구나, 저기 자빠져 있어.

거기까지 확인한 기동이는 칼날을 앞세우고 한 발을 들이밀었다. 그때…….

“읏!”

갑자기 번뜩이는 날붙이가 눈앞에 보였다가 사라졌다. 기동이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볼을 스치는 날카로운 통증. 아픔보다도 놀라움이 더 컸다.

뭐지? 링거는 저기 걸려 있는데? 민구 새끼는 저 링거를 맞고 누워 있는 것 아닌가? 게다가 이 느낌은 분명 칼이다. 그 새끼는 칼이 없는데…….

베인 볼에서는 금방 뜨거운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후우~ 후우~ 기동이의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크큭큭, 기동아. 조용히 해야지, 새끼야. 군인 애들 깰라.”

민구의 목소리. 벽 뒤에서 민구가 속삭이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 사각인 지점이다. 기동이의 몸이 얼어붙었다.

아닌데……. 저녁때, 초희가 문병했을 때만 해도 분명 다 죽어가는 데다가 약에 취해서 사람도 잘 못 알아본다고 했는데…… 고 앙큼한 년이 거짓말을 한 건가?

“혀, 형님? 의, 의식 찾으셨습니까? 걱정 많이 했습니다.”

기동이도 소리를 죽인 채 말했다. 민구는 또 큭큭거리며 웃었다.

“응, 그랬을 거야. 형 일어나면 어쩌나 하고 걱정 많이 했겠지. 후후후, 새끼.”

낭패다. 이 새끼가 자신이 올 줄 알고 있었을 줄이야. 기동이는 칼을 쥔 자세를 바꾸고 조금씩 옆으로 걸음을 떼면서 속삭였다.

“아이구, 형님.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초희가 형님 정신 못 차리실 것 같다고 해서…….”

“응, 아까는 그랬어. 근데 네 쌍판 보니까 반가워서 벌떡 일어나진다. 큭큭큭.”

기동이는 난감했다. 그가 들었던 정보와 너무 다르다.

민구, 이 개새끼가 대체 얼마나 회복한 거지?

100퍼센트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그랬다면 이렇게 벽 뒤에 숨어 있지 않고 침대에 앉아서 온갖 여유를 부리며 이죽거렸을 테니까.

분명 이 악마 같은 새끼도 어지간히 약해져 있기는 하다. 문제는 얼마나 약해졌냐는 거다.

씨발 놈, 스텝을 밟을 정도는 되는 건가? 그럼 안 되는데……. 그리고 대체 이 칼은 또 어디서 주워 왔지?

살짝 열린 문과 벽을 사이에 두고 두 폭력배는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안 들어올 거야? 형 병문안을 왔으면 빨리 들어올 것이지, 새끼가 계속 문가에 서서 쭈뼛거리네? 왜? 깜깜해서 무서워? 괜찮아. 엉아가 여기 있잖아.”

민구는 계속 킥킥거리며 도발을 한다. 기동이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형님, 잠깐만 나와서 얼굴 좀 보여 주세요. 같이 담배라도 한 대 피웁시다.”

“큭크크, 이 새끼가 언제부터 형한테 오라 가라 할 만큼 컸지? 응? 기동아, 너 형이 없던 사이에 많이 컸냐?”

이제 좋은 말로 꾀는 것은 소용이 없다. 기동이는 좀 더 직설적으로 도발했다.

“형님, 갈 때 되면 가는 게 섭리요. 그러니까 조용히 갑시다, 예? 내가 그래도 옛정 생각해서 애들 안 풀고 직접 왔소. 내 칼 받는 게 나을 거요.”

“응, 그래. 우리 기동이 맘도 참 곱지. 형 지금 뒷짐 딱 지고 배 내밀고 있다. 그러니까 들어와. 맘껏 쑤셔 봐, 크크크.”

젠장, 이렇게 대치만 하고 있어서야 답이 안 나올 것 같다.

기동이는 안쪽을 살피며 눈치를 봤다. 칼을 앞세워 휘두르면서 휙 뛰어 들어가면 승산이 있을까, 아니면 내 모가지가 먼저 그어져서 바닥을 나뒹굴게 되는 걸까?

가오 빠지게 벽에 기대 있는 꼬라지를 보니까 이 새끼도 별거 없는 모양인데 말이야…….

민구라는 인간은 폼에 살고 폼에 죽는다.

지금 당장도 큰 소리 한 번만 내면 바로 위층에 있는 군인들이 뛰어 내려와 도와줄 텐데 저렇게 낮게 으르렁거릴 뿐, 자신이 찾아올 걸 알면서도 일부러 방문을 잠그지 않은 채 기다렸다.

그런 행동들이 다 체면을 죽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안 하는 거다. 오늘 밤, 민구는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일부러 비명을 지르거나 큰 소리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후우우~ 호흡을 고른 기동이는 왼손으로 칼을 옮겨 쥔 채 틈을 보다가 불시에 휙 내지르며 좌우로 휘둘렀다. 어차피 민구 새끼도 칼이 닿는 거리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슉― 슉―

날카롭게 벼려진 쇠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만 울린다. 그러다가 자신의 손등이 뜨끔해진다. 두 번이나!

끅! 기동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얼른 팔을 거둬들였다. 하마터면 칼을 떨어뜨릴 뻔했다.

씨발! 기동이는 얼른 오른손으로 칼을 옮겨 잡았다. 개새끼가 그어도 꼭 핏줄을 건드려서 왼손에는 피가 철철 흐른다. 응? 그런데 식칼 끝에 붉은 피가 묻었다. 기동이의 눈빛이 번뜩였다.

들어갔다! 내가 민구 개새끼의 배때기를 뚫었다!

흥분으로 가슴이 벅차 오른다.

“후후후, 형님. 피 나면 아프다고 하셔야지, 모르고 지나칠 뻔했수. 후후후, 형님 배때기도 철판은 안 깔렸네? 칼맛 좋습디까?”

“크크크, 요 새끼. 지금 많이 웃어 둬라. 형 피값 비싸다.”

민구는 옆구리를 움켜쥔 채 웃었다. 찢은 침대 시트를 두툼하게 감아서 나름 대비를 한다고 했는데, 기동이가 막 내지른 칼이 총상 입은 부위 바로 아래를 훑고 지나갔다.

수가 빤히 보이는데도 몸이 따라주지를 않아 피할 수가 없으니 그게 참 고역이다. 이제 상처 입은 걸 확인했으니 기동이는 더 과감해지리라. 그 순간이 놈에게도, 자신에게도 기회다.

민구는 기척을 숨기면서 아주 천천히 두 다리를 넓게 벌리고 자세를 낮췄다.

문밖에서는 기동이 놈이 계속 위치를 바꿔 가며 틈을 보고 있다. 옥상의 저격조가 비추는 서치라이트의 불빛이 잠시 지나면서 복도가 환해졌을 때, 휙― 기동이가 뛰어들었다.

슷― 자세를 낮추고 기다리고 있던 민구의 이마 위로 놈이 내지른 칼이 스쳐 간다. 민구는 왼손으로 놈의 팔을 밀어 올리며 오른손에 들린 짧은 나이프로 겨드랑이를 그었다.

좋은 전법이었지만, 문제는 그가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할 만큼 허약한 상태라는 데 있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만 한 칼날도 너무 짧았다.

“윽!”

기동이는 짧게 비명을 지르면서도 달려들던 기세를 늦추지 않고 민구를 덮쳤다.

퍽!

100킬로그램이 넘는 기동이의 무릎에 가슴을 차인 민구는 벽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민구의 칼날은 기동이의 종아리 뒤쪽을 쭉― 그어 내렸다.

“끄윽! 아으, 이 씨발 놈이!”

기동이는 욕설을 퍼부으며 나동그라졌고, 민구도 얼른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온종일 진통제를 맞지 않은 탓에 상처에서는 아까부터 미칠 것같이 쩌릿한 통증을 계속 보내 왔고, 지금의 충돌로 그 크기가 두 배는 커진 기분이다.

커억, 민구는 가슴을 움켜쥐고 겨우 숨을 내뱉었다. 깜깜한 방 안에서 두 남자가 고통에 겨운 숨을 헐떡인다.

“이…… 개새끼야, 그냥 좀 곱게 뒈질 것이지. 씨발…… 끄으으으.”

기동이는 벌어진 종아리의 상처를 만지며 민구를 노려보았다. 민구 역시 어지간히 괴로워서 벽을 지지대 삼아 몸을 웅크리고 있다.

윽! 한 발짝을 떼어보던 기동이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지금까지 그가 가지고 있던 가장 큰 무기, 이동의 속도가 현저히 떨어져 버렸다.

후우, 후우, 천천히 숨을 고르던 민구가 씨익 웃었다.

“새끼야, 형을 잡고 싶었으면 네 새끼들 있는 대로 다 끌고 왔어야지. 네깟 놈 혼자서 뭘 하겠다고.”

“닥쳐, 이 개새끼야!”

이성을 잃은 기동이가 쿵쿵거리며 뛰어든다. 아무렇게나 빠르게 찔러 대는 칼날.

민구는 한 번 정도는 찔릴 수밖에 없다는 각오로 몸을 틀고 놈의 목을 노려 그었다. 핏, 서로의 살갗을 얇게 가른 두 사람은 기묘한 자세의 대치를 시작했다.

민구는 옆구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기동이의 팔목을 누르고 있다. 벽을 교묘히 이용해서 어찌어찌 버티고는 있지만, 다친 갈비뼈가 금방이라도 부러져 버릴 것처럼 아프다.

가가각, 기동이의 칼날이 벽을 긁는 소리가 울린다. 이 팔을 놓치는 순간, 놈의 칼끝은 민구의 옆구리를 뚫고 들어올 것이다.

한편, 기동이는 어깨를 움츠려 민구의 칼날이 목에 더 깊이 박혀 들어오지 않도록 버팀과 동시에, 붙잡히지 않은 한쪽 팔을 아래로 뻗어 어떻게든 민구의 총상을 움켜쥐어 보려 애를 썼다.

하아~ 하아~ 대치가 길어지면서 민구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이렇게 장기전은 불리하다. 체력이 이제 정말로 바닥이 났다. 아까 놈이 뛰어들 때, 끝을 냈어야 하는데…….

끄으응~ 민구의 짧은 칼끝이 기동이의 목에 실 같은 붉은 금을 긋고 있고, 기동의 식칼도 민구의 왼쪽 옆구리에서 피가 솟게 한다. 이 상태가 몇 분만 더 계속되면 둘 다 피를 콸콸 쏟고 쓰러지게 될 것이다.

“기동아, 이 새끼야……. 모가지에는 비계가 별로 없나 보다? 쑥쑥 잘 들어가는데? 형이 금방 따 줄게.”

민구가 고통을 허세로 해소하면서 웃었다. 죽느냐 사느냐의 순간에서 불리했던 쪽도, 먼저 포기한 쪽도 기동이였다.

민구의 옆구리보다 자기 모가지의 동맥이 더 먼저 끊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놈은 있는 힘껏 민구를 밀쳐버리고 뒤로 훌쩍 물러났다.

쨍그렁, 놈이 떨어뜨린 식칼이 바닥에 뒹군다. 민구는 이를 악물고 그 칼을 집어 들었다.

순식간에 무기를 잃고 열세에 빠진 기동이는 손에 닿는 대로 아무거나 쥐고 닥치는 대로 집어 던졌다. 휴지통, 슬리퍼, 의자……. 그러고는 민구가 발이 묶인 틈을 타 창문 쪽으로 달아났다.

“설마 고자질 같은 거 하지는 않겠지? 그런 거는 형님 스타일이 아닙니다.”

그 말을 남긴 기동이는 민구가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창문 아래로 훌쩍 뛰어내려 버렸다. 푸스럭, 아래쪽의 화단이 엉망으로 으스러지는 소리가 난다. 그런 후에 탁탁탁탁, 급한 발소리가 멀어져 간다.

아까 담배 피우던 3층의 군인 놈들에게서 들었던 이야기. 내일이면 이 건물에 머물고 있는, 그 눈엣가시 같은 놈들이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는 사실도 기동이의 이런 결정에 한몫을 했다.

하루만 더 기다리면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데, 오늘 굳이 목숨을 걸 필요가 없다. 달아나면서 기동이는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애를 썼다.

“큭큭큭, 멍청한 새끼……. 끝까지 얕은수 쓰기는.”

놈이 사라져 버린 창문을 보며 민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옆구리를 움켜쥔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워낙 친친 감아 둔 덕에 찔린 상처는 얕다. 다만, 애초부터 부상을 당했던 갈비뼈와 총을 맞은 옆구리에서는 불이 나는 것 같다. 한동안 숨을 고르고 기운을 모은 민구는 침대로 걸어가 담배를 집어 들었다.

후우우우~ 길게 연기를 내뱉으며 민구는 엉망으로 어지럽혀져 있는 병실을 돌아보았다. 사방이 기동이의 핏자국으로 번들거린다.

‘이만하면 혼을 좀 내주기는 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던 민구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애초부터 그럴 만한 싸가지도, 대가리도 없는 놈이다.

그런 놈들이 하는 선택이라야 빤하다. 오늘 혼자서 못 당해냈으니 내일 밤은 아마 댓 놈쯤 몰고 나타날 것이다. 물론 그래 봐야 빈 병실이나 실컷 구경할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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