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 혼돈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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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혼돈 (4)
2022.04.17.
“예? 다정이가요? 걔, 걔는 왜? 다정이 어디 있어요?”
여동생도 이곳으로 끌려왔었다는 말에 AX20324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진다. 오 박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 다정이도 면역자였어. 엉덩이 한 번 살짝 물리고 이제 치료받으면서 편하게 쉬고 있다. 너도 이것만 끝나면 가서 만나게 될 거야. 자, 동생한테 지면 안 되겠지?
AX20324의 환자복 가랑이에서는 오줌이 줄줄 흘러나온다.
“어흐흐흑, 박사님,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저 이거 안 하고 싶어요. 너무 무서워요. 흑흑흑.”
― 대형아, 너는 안전해. 면역자니까. 그러니까 놀라서 심장마비만 일으키지 않으면 돼. 잠깐 따끔한 것만 참으면 그때부터는 엄마랑 동생이랑 같이 좋은 데에서 함께 살 수도 있어. 그리고 너는 진짜 한국 최고의 영웅이 되는 거야. 계속 이러면 나도 협조 못 해 줘. 내가 빠지면 이 사람들이 좀비를 통제 못 해서 너 그냥 물려 죽게 된다고. 그래도 괜찮아? 나 갈까?
“선생님, 제발 가지 마세요. 근데 저, 정말이에요? 제가 면역력이 있어요? 검사 결과가 그렇게 나왔어요? 확실한 거예요?”
― 훗, 그렇다니까. 자, 이제 마음이 좀 진정이 됐니?
오 박사는 아주 호기롭게 말했다. 네……. 소년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끄덕이며 용기를 쥐어짜 내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계속 울음이 터져 나온다.
― 자, 이제 좀비를 묶은 기계가 잠깐 들어갈 건데, 너무 무서우면 잠깐 다른 쪽을 봐도 돼. 하지만 겁먹을 필요는 없어. 물자마자 곧바로 기계를 뒤로 뺄 거니까. 알았지? 간다.
건너편 방의 강화유리 뒤에 서서 묶여 있는 대형을 보며 대화를 나누던 오 박사는 마이크를 끄고 중얼거렸다.
“아이, 진짜, 어지간히 찌질하게 굴어서 사람 귀찮게 만드네. 에미고, 동생 년이고, 저 새끼고…… 온 가족이 다 똑같구만, 똑같아. 그냥 얌전히 물리면 서로 편할걸.”
오 박사는 짜증스럽다는 듯이 마이크 헤드셋을 테이블 위에 집어 던졌다.
그가 이렇게 귀찮은 대화를 해야 하는 건, 사전 설명 없이 좀비를 넣은 경우에 꽤 많은 실험 대상들이 심장마비를 일으키거나 발작 증세를 보여서 항체가 제대로 작용해 보기도 전에 사망해 버리기 때문이다.
아까운 실험 대상을 그런 식으로 허무하게 잃을 수가 없던 오 박사는 궁여지책으로 이 안정 유도 대화를 도입했다.
‘너는 항체가 있는 면역자다’라고 의사가 말해 주는 것만으로도 실험 대상들은 한결 진정이 됐고, 별다른 발작 없이 얌전히 좀비에게 물어뜯겨 주었다.
물론 그중에 실제 면역력을 발휘한 실험체는 단 하나도 없어서 모조리 다 좀비로 변해 버렸다는 게 문제지만…….
초기에는 마취제를 사용하기도 했으나, 하도 실적이 좋지 않아 더 이상은 쓰지 않는다. 혹시라도 그 약품들이 항체의 활동을 방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다.
“어이, 들여보내. 쟤 슬슬 안정됐다.”
대형의 호흡을 살피던 오 박사가 명령했다.
곁에 서 있던 연구원이 단추를 누르자 대형이 누운 침대 맞은편에 있던 문이 열리고, 무선 자동차에 고정된 좀비가 등장했다. 자동차는 그냥 흔히 볼 수 있는 RC 자동차를 대형화한 것이다.
좀비는 불필요한 부분들을 절단해 버리고 머리와 몸통 정도만 남긴 채 자동차에 기둥을 박아 단단히 고정시켜 놓았다.
키이잉―
연구원이 리모컨의 레버를 조종하자 좀비를 싣고 무선 자동차가 전진한다.
- 으아! 엄마! 엄마!
좀비의 등장에 대형은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몸부림을 쳤다. 연구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방향을 틀어 좀비의 입이 대형의 발 쪽에 위치하도록 만들었다.
먹을 것을 눈앞에 둔 좀비는 쉬지 않고 아가리를 벌리며 이빨을 딱딱, 부딪친다. 대형은 계속해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워낙 꽉 묶여 있기 때문에 피한다는 게 불가능했다.
지이잉―
좀비의 몸통이 고정돼 있는 기둥이 앞으로 기울고 좀비의 아가리와 대형의 발 사이의 거리가 점점 줄어든다.
콱, 놈의 이빨이 대형의 엄지발가락과 두 번째 발가락을 한 번에 깨물었다.
으드득, 으득.
근육이 잘리고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비명과 함께 울리고, 좀비의 아가리 주변은 솟아오른 피로 범벅이 되었다. 뚝뚝뚝, 바닥에 떨어진 붉은 피는 철망 사이로 흘러 들어간다.
― 끄아아아! 으아악! 박사님! 살려 주세요! 씨발, 살려 줘! 끄으으으!
대형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처절한 애원을 했다. 칵, 칵, 그러는 동안 좀비는 대형의 발가락 두 개를 다 잘라 삼키고, 발등의 뼈를 깨물어 부수는 중이다. 스테인리스 침대 하단은 이제 피로 점철이 되었다.
“아하암~ 이만하면 실컷 물어뜯은 거지? 이제 뺄까?”
길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쭉 켜고 난 오 박사가 연구원에게 신호를 보냈다. 연구원은 RC 자동차를 후진시켜 좀비를 방으로 돌려보냈다.
그롸아아!
한창 식사를 하던 중에 방해를 받은 좀비는 분하다는 듯 포효하며 멀어져 갔고, 탁, 소리와 함께 자동문이 닫히자 방 안에는 대형의 비명 소리만이 남았다.
― 으으아아! 끄으으으! 으아아! 사, 살려 주세요! 박사님! 살려 주세요! 제발! 내 발이! 내, 내 발이! 으으흐흑!
그러자 아까 대형이 들어왔던 문이 열리며 의료반이 뛰어 들어온다. 몸 전체를 방진복으로 휘감고 마스크까지 뒤집어쓴 의료반의 외모를 보고 놀란 대형은 또다시 기겁하며 절규해 대기 시작했다.
“대형아! 진정해! 그분들도 의사야! 너 치료해 주시려고 하는 거니까 진정해. 이제 다 끝났어.”
오 박사는 다시 마이크를 들어 대형에게 말을 걸었다. 의료진들로부터 지혈 처치를 받는 대형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 끝났으면 저 여기서 내보내 주세요. 이, 이것부터 좀 풀어 주세요. 네? 박사님? 내 발이…… 발이 다 잘렸어요. 으아아아!
“그래, 알았어. 그러자, 대형아. 내가 금방 가서 너 풀어 달라고 부탁할게. 기다려. 금방 가니까.”
오 박사는 웃음기까지 곁들인, 아주 친절한 말투로 이야기하고는 마이크를 탁, 꺼버렸다. 사실 이건 심장마비 방지나 그런 것과는 무관한 그의 악취미였다.
약해져 있는 인간에게 기대를 주고, 그 기대가 배신당하는 동안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관찰하고 있으면 배꼽 부근이 간질간질해지는 것 같아 저절로 웃음이 난다.
강화유리의 위쪽에는 대형 디지털시계가 AX20324가 좀비에게 물린 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를 표시하고 있었다.
“그, 그, 그, 근데 왜 저, 저렇게 보, 보, 복잡한 기계를 사용해?”
지금껏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메이저가 오 박사에게 물었다.
응? 오 박사는 메이저를 돌아보며 되묻는다.
“그럼 어떻게 해? 그냥 좀비가 들어 있는 방에 던져 넣어? 그러면 꺼낼 때 난감하다고. 물리는 부위를 치명적이지 않은 곳으로 지정할 수도 없고.”
“그냥 거, 거, 거, 검사를 한다고 하면서 파, 파, 팔을 좀비가 있는 구멍에 너, 넣으라고 하면 되잖아.”
메이저의 이야기를 들은 오 박사는 ‘오호~!’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럴듯한데? 그럼 그 방안도 한번 추진해 보지, 뭐.”
지혈을 마친 의료반은 AX20324의 발에 두꺼운 붕대를 친친 감아 놓고, 좀비화되지 않고 죽은 사내 A708756에게서 추출한 혈청까지 주사한 뒤에야 방을 나섰다.
이제 필요한 조처는 다 취했으니 운이 따라 주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아니, 사실은 운까지도 필요 없다. 논리적으로 무조건 면역반응을 보이고 생존해야 말이 된다.
― 으으으, 으으…… 아프다, 아파. 아으, 내 발…… 흐흐흑.
대형은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계속 문가를 주시하며 오 박사가 나타나 주기만을 기다렸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누군가에게 부탁을 해야 풀어 줄 수 있다는 오 박사의 이야기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쉽게 알 수 있겠지만, 지금 피실험자의 뇌는 극심한 두려움과 고통으로 마비된 상태다.
그저 아직 세상을 모르는, 십 대의 어린 소년일 뿐이다.
“몇 분 지났어?”
오 박사가 볼펜 뒤쪽을 입에 문 채 초조하게 물었다.
“10분 27초 지났습니다.”
바로 곁에 선 연구원이 즉시 답을 해 준다. 방 안 전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요즘 오 박사의 분노 게이지는 거의 최대치까지 치솟아 있기 때문에 다들 조심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물론 그 이유는 새로운 면역자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스트레스가 큰 까닭이다. 지난 며칠간 A708756의 인체 조직과 혈액을 이식받은 실험 대상들 중 그 누구도 이렇다 할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조직을 이식한 후에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안정을 유지한다는 것은 피를 나눴다는 의미이고, 피가 나뉜 만큼 당연히 항체도 공유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좀비에게 물어뜯긴 이식자들은 모두 구토를 하고 괴로워하다가 결국 좀비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신 차장이 주도했던 열여섯 명의 실험 대상은 이미 다 소진되었고, 곧바로 2차 계획을 진행하는 중이다.
오늘의 AX20324는 2차 계획의 30번째 실험체다. 그러니까 총 5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 실험 때문에 희생됐다.
- 왜…… 왜 아무도 안 와? 으으으…… 아으, 머리야! 아우, 아파! 오 박사님! 살려 주세요! 흐흐흐흑…… 윽! 으! 으우우웁! 우웨에엑!
자신을 죽이는 진범이 오 박사라는 것을 끝까지 알아채지 못한 채 오히려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던 대형이 구역질을 시작한 것은 물린 지 28분이 지난 시점의 일이었다.
계속 고통을 호소하던 대형은 엄청난 양의 토사물을 뿜어내면서 몸 전체를 뒤틀어 댔다.
빠직, 빠직, 스테인리스 침대에 단단히 결박되어 있던 그의 팔과 다리, 허리에서 뼈에 금이 가는 소리가 울렸다.
“이런 씨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오 박사가 볼펜을 강화유리에 집어 던지며 욕설을 내뱉었다.
“뭐냐고, 이 씨발! 개새끼들이 왜 죄다 변해 버리고 이 지랄이냔 말이야! 으아아아!”
오 박사는 테이블 위의 물건들을 사방으로 밀치며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주변의 연구자와 직원들은 겁을 먹은 채 물러나 벽에 바짝 달라붙어 있다. 자칫하면 희생양으로 지목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게 맞잖아! 근데 왜 안 되냐고! 응? 왜! 이 씨발!”
혹시 무슨 착오가 있었나 싶어 AX20324의 차트를 넘겨 가며 확인하던 오 박사는 터져 오르는 분통을 참지 못하고 모니터를 들어 테이블에 내려찍었다.
혈액에 문제가 있을 리는 없다. 죽었던 상태에서 채취한 것이라고는 해도 몇 시간 흐르지 않았기에 얼마든지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상태다.
게다가 신중을 기하기 위해 최근의 실험에서는 항체가 있는 혈청까지 사후에 주입했다.
그런데도 이 멍청한 잡것들은 도무지 견디지를 못하고 그냥 뒈져 버린다. 수혈을 해 봐도, 장기 이식이나 신체 이식을 해 봐도 다 마찬가지다.
― 그롸아아아아!
좀비화를 완전히 마친 AX20324가 침대에 머리를 짓찧으며 포효한다.
우두둑, 우두둑, 빠직!
단단히 고정되어 있던 팔과 다리를 억지로 비틀고 끊어 빼낸 AX20324는 허리의 결박 장치를 해체하고 싶어 발버둥을 치며 울어 댔다. 벗겨진 살갗 사이로 아직도 뜨뜻한 피가 흘러나온다.
“AX20324, 실패. 접촉부터 변이까지의 소요 시간…… 야! 소요 시간 얼마야? 재깍재깍 답을 해 줘야 할 거 아냐?”
마이크를 들고 실험 결과를 녹음하던 오 박사가 다시 성질을 부렸다. 연구원들이 기죽은 목소리로 31분 28초라고 대답한다.
후우~ 한숨을 내쉬어 목소리를 가다듬은 오 박사는 다시 결과를 녹음한 뒤, 마이크를 집어 던지고 주변을 돌아봤다.
“실패 원인에 대해서 각자 생각해 보고 내일 점심 전 회의에서 개선책을 제시해 봐. 뭐, 아무거라도 좋아. 그거 가지고 책임을 묻지는 않을 테니까. 알았어?”
그런 후, 오 박사는 곧바로 방을 나섰다. 그의 뒤를 따라 움직이는 것은 메이저뿐이다.
“아우, 진짜!”
15층 정원으로 오르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오 박사는 또 한 번 벽을 차며 성질을 부렸다.
메이저는 생난리를 치는 오 박사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자신이 신 차장을 데리고 나갔다가 놓쳐 버린 이후, 미묘하게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부터 지랄 맞았던 오 박사의 성질이기는 하지만, 그날 이후 더 날카로워졌다. 요즘은 메이저를 제외하면 아무도 그와 눈을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
15층에 도착한 오 박사와 메이저는 오후의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는 산책로를 지나 난간에 도착했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난간을 짚고 서서 아래쪽 거리를 구경하던 오 박사가 입을 열었다.
“샘플이 모자라. 작은 회장 새끼 밥도 처먹여야지, 실험은 도무지 성공할 생각도 않지. 나 요새 아주 죽을 맛이야.”
“더 자, 자, 잡아 와 주지. 며칠만 기, 기다려.”
눈을 가늘게 뜬 채 현란하게 반짝거리는 지상의 대형 태양광 패널들을 바라보고 있던 메이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 박사가 반색을 하며 돌아본다.
“근데, 요새 사람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며? 전에 곽 소령, 자네 입으로 그랬잖아.”
“히, 힘든 건 사실이야. 그래도 아직 마, 마, 많아. 조, 좀비 세상이니 뭐니 해도 나가 보면 수, 수, 숨어 있는 것들이 드, 드글드글해. 아직도 어, 어, 엄청나게 많이 살아남아 있다고. 그리고 그런 놈들도 스, 스, 슬슬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어졌을 테니까 기어 나올 거야. 그러니까 거, 걱정하지 말고 팍팍 써. 내, 내가 계속 잡아 올 테니까. 그리고 자네도 구, 군에 더 요청을 해. 미, 미, 민간인 분산 수용해 준다고. 대, 대량으로 끌어올 수 있잖아.”
메이저의 말에 오 박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메이저가 아무리 열심히 헬기 연료를 팍팍 쓰고 돌아다녀 봐야 하루에 30명을 넘겨 잡아 오기 벅찬 게 현실이기는 하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기 마련이니까, 거짓말을 하는 입장에서는 몸을 사릴 필요가 있다.
“아니, 초장에 이미 받아들여서 서류상으로는 여기 수용된 인원이 얼마나 많은데, 또 데려오겠다고 했을 때 그 많은 사람을 다 어디에서 먹이고 재우냐고 물으면 어떻게 하려고? 만약에 실사라도 나와 보겠다고 하면 감당이 안 되잖아. 그건 너무 위험부담이 커.”
큭큭큭, 그 말을 들은 메이저는 긴장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크게 웃었다. 한참을 낄낄거린 메이저가 오 박사에게 말했다.
“오, 오, 오 박사는 며, 면제지? 구, 군에 대해서 몰라도 너, 너무 모르는군. 위, 위, 윗대가리들…… 대부분 자, 자기 주머니에 돈 들어오는 일이 아니면 과, 관심도 없어. 아, 아무 데나 수용소 시, 신축했다고 하고, 기, 기존 수용자들 다 거기로 옮겼다고 해. 그, 그러면 다들 그, 그런가 보다 하고 마, 말 거야. 시, 실사? 그런 거 없어. 자, 자기 일도 아닌데.”
그래? 나름 말이 되는 이야기 같아서 오 박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긴…… 민간인을 수용한다는 핑계로, 또 부상병들을 치료해 준다는 핑계로 초기에 이쪽으로 데려와 좀비를 만든 수만 해도 백 단위는 가볍게 넘는다.
그런데 보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그들의 안부를 묻거나 하는 연락은 없었다.
메이저의 말이 온전히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현 상황에서 군이 그런 사소한 문제에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어 보이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런가……. 그럼 또 한 100명 정도만 수용하겠다고 신청해 볼까…….’
오 박사는 빙긋 웃었다. 어차피 신 차장의 명의로 공문을 보내 일을 진행하면 책임질 사람도 없다. 각 쉘터에 다음번 보급품을 전달할 때에는 그 이야기도 함께 전하라고 해야겠다.
***
“네. 그거 하루 세 번 식후에 드시고요. 다음 분 들어오십쇼.”
고 하사는 통 밥맛이 없고 배가 아프다는 중년 남자에게 소화제 열두 알을 지급하고 다음 사람이 들어오기 전까지 수용자 이름과 날짜, 증상과 지급 품목을 적었다.
건대 쉘터 의무반을 맡은 단 두 명의 의무병은 정말 거의 쉬지 못하고 매일을 보내야 했다.
신체적으로 바쁘고 힘든 것은 물론, 각양각색의 하소연을 듣고 적당히 위로해 주어야 하는 일들이 그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다들 자신의 고통이 제일 크고 힘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새 너무 잠이 부족하다. 휴식 시간까지 멀었나, 하는 마음에 자꾸만 시계를 보게 된다.
오후 9시 45분.
젠장, 아직도 15분을 더 일해야 20분 쉴 수 있다. 아하암~
고 하사가 눈을 비비며 크게 하품을 할 때였다.
“아, 많이 피곤하신가 보네요. 죄송해요.”
새로 들어온 수용자가 수줍은 목소리로 부끄러워한다. 그녀를 기억하고 있던 고 하사는 얼른 자세를 바로 하고 표정을 바꿨다.
“엇! 피, 피곤하긴요. 괜찮습니다. 하하,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네, 역시 머리가 좀…….”
여자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이름은 임수정. 여기 가끔 약을 타러 오는 사람인데, 고 하사는 그녀가 좋았다.
나이도 자신보다 연상이고 대단한 미모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그녀의 차분함이나 어딘지 모르게 느껴지는 지적인 분위기가 좋다.
처음 이곳으로 와서 머리가 아프다며 진통제를 처방받아 갈 때부터 고 하사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녀와 마주칠 때마다 부담이 가지 않을 정도로 호감을 표현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렇죠? 확실히 골치 아픈 일들이 많으니까요. 저번에 드린 그 약은 잘 듣던가요? 에…… 어디 보자, 7월 28일 날인가? 아마 그때쯤 약을 타 가셨던 것 같은데…….”
고 하사는 장부를 앞뒤로 넘겨 보는 척을 했지만, 실은 정확히 날짜를 기억하고 있다. 7월 28일. 건대 쉘터 앞까지 좀비들이 밀려왔던 날이다.
그날 밤 그녀는 진통제를 받아 갔었다. 총성 때문에 두려웠던지 바르르 떨리던 그녀의 입술이 너무도 예뻐 보여서 한참 동안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그가 지금 장부를 뒤적이는 것은 임수정과 한 방에 함께 있는 이 시간을 좀 더 늘리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다.
“네. 그걸 먹으니까 한결 머리가 덜 아팠어요. 고 하사님도 힘들어 보이시네요. 요즘 많이 바쁘신 모양이에요.”
임수정이 말했다. 고 하사는 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아, 저 건너편 건물에 중환자가 하나 들어오는 바람에 요 며칠 좀 정신이 없습니다. 옆구리에 총을 맞아 가지고 이따만 한 빵…… 아, 부상! 부상이 심해서…… 그, 왜, 저…….”
젠장, 참 여자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 한다.
고 하사는 자기 주둥이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나름 말재주 좀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마음에 드는 여자 앞에서는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
“아…….”
고 하사는 놀라는 임수정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잠시 시간을 좀 내달라고 해 볼까? 아니면 캔커피라도 같이 마시자고 할까? 그러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군인과 민간인 여자들 간의 교제는 건대 쉘터에서 드문 일도 아니고, 비밀도 아니다.
서로 외롭고 두려운 사람들인지라 잠시만 틈이 나면 남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가서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안간힘들을 쓴다.
고 하사는 임수정과 그런 사이이고 싶었다. 아니, 최소한 친한 친구처럼 손을 꼭 잡고 서로에 대해 이야기라도 해 봤으면 좋겠다.
“그랬군요. 고생 많으셨겠네요. 그분은 그래서 많이 괜찮아지셨나요?”
“아, 예. 뭐, 워낙 강한 사람이더라고요. 또 제가 명의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고 하사가 임수정의 눈을 보고 빙글거리는 그 시각에 쉘터 밖 그늘에서는 철책을 넘는 커다란 그림자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