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혼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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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혼돈 (2)
2022.04.15.
“야, 너 근데 아까 말했던 그 신기한 구경이 뭐야?”
병실로 돌아와 민구를 눕히고 링거를 침대에 고정시키던 하사가 물었다. 밤톨이 북쪽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처음 보는 모양이라서 무인비행기인지 뭔지 모르겠는데 말입니다, 그런 게 날아다닙니다. 딱 봐도 색깔이며 모양이 군용은 아닌데, 꽤 큽니다.”
“개뿔. 신기한 것도 쌨네. 빨간 좀비도 본 마당에 그까짓 게 뭐가 그리 신기해? 난 또…….”
하사가 콧방귀를 뀌자 밤톨이 그게 다가 아니라며 침을 튀겼다.
“그 자체는 뭐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뒤에 이상한 글자가 달려 있습니다. 메시지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뭐, 그게 신기한 거지 말입니다.”
“메시지? 뭔데? ‘영숙아, 사랑해’ 이딴 거?”
“에이, 그런 게 아니고 말입니다. 영어로 딱 여섯 글자만 적혀 있었습니다. 앞에 숫자 1하고, 영어 여섯 글자. 그…… 뭐였지? 어라, 조금 전에 봐 놓고 기억이…….”
밤톨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고 하사는 녀석의 뒤통수를 가볍게 치며 웃었다.
“아이구, 똑똑해라. 이 새끼, 너 관등성명은 어떻게 외우냐?”
“아, 기억났습니다. RM, KF, FD, 이렇게 여섯 글자였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고 하사님?”
글쎄다…….
골똘히 생각해 보던 고 하사는 이내 도리질을 하며 포기해 버렸다.
“몰라. 근데 원소기호나 무슨 약호겠지 뭐.”
“그게 이상한 점 아닙니까? 전혀 모르겠는 걸 비행기까지 띄워서 광고하고 다니지 말입니다. 고 하사님, 간첩일까요?”
고 하사와 밤톨이 비행기와 메시지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는 동안 민구는 멀리 도로가 보이는 창밖을 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기동이 놈이 설치려 드는 걸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난감했다. 자신이 찾아내지 못하도록 숨겨 놓은 메모부터 이 습격 시도까지, 대체 왜 그놈이 그렇게 미친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긴 몸만 멀쩡하다면 그깟 놈 따위 무슨 딴마음을 먹고 있든 신경 쓸 필요도 없다.
버릇없이 이빨을 드러내면 거기에 합당한 벌을 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지금의 그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환자일 뿐이다.
나흘 동안 누워 있다가 겨우 설 수 있게 된 팔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고, 그나마 무리해서라도 움직이려 들면 상처 입은 부위들이 끔찍한 고통으로 발목을 잡는다.
육 회장에게 알려 보호를 요청하는 따위의 일은 생각지도 않았다.
민구에게도 나름의 규칙이 있다. 남의 등 뒤에 숨어서 목숨을 연명할 만큼 편리한 성격이 못 된다. 그러니 이 일도 그 혼자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게 문제였다.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데, 기동이 놈은 그걸 주고 싶지 않아서 저렇게 호시탐탐 이쪽 건물로 넘어오려 하는 것이다.
“제가 절대로 귀찮다거나 그래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오해하시지 말고 들어주세요.”
생각에 잠긴 민구에게 고 하사가 말을 걸었다. 민구는 고 하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조 병장네 분대 애들, 내일 잠실로 복귀한답니다. 선생님도 다 사연이 있고 일행이 있으니까 일부러 힘들게 여기까지 오셨겠지만, 제 생각 같아서는 일단 얘네들 갈 때 그 차편으로 잠실로 다시 가시는 게 어떨까 싶네요. 거기는 그래도 연대급 주둔지라 정식 군의관도 있고, 시설도 좀 나을 겁니다. 혹시 추가 감염이나 염증이 생겨도 여기서는 검사고 뭐고 그냥 소염제, 항생제 놓는 것밖에 없어요.”
그럼 도망치는 것 같아서 모양새가 너무 우스워지는데…….
위신이 상하는 것 같아 망설이던 민구는 고 하사의 안전에 생각이 미쳤다.
이 군인 의사, 하루에도 몇 번씩 이렇게 나를 돌봐주러 들락거리는데, 그러다가 혹시라도 기동이 놈이 들이닥쳤을 때 이 군인 의사가 이 방에 있다면…….
지금이야 밤톨네 군인들도 여기 묵는다니까 좀 낫지만, 내일 밤이라면…….
민구의 머릿속에 영상이 떠오른다.
깊은 밤, 약에 취해 잠든 민구를 군인 의사가 돌보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린다.
‘뭡니까?’라고 묻는 동안 기동이 놈은 방 안에 뛰어들 거다. 그러고는 소리를 지를 수 없도록 입을 막고 다짜고짜 연장질부터 하겠지…….
민구는 고 하사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생긴 건 껄렁껄렁하지만, 겉보다 속이 더 깊은 사람이다.
의식을 찾지 못하고 누워 있는 동안 군소리 없이 똥 기저귀를 갈아주고, 몸을 닦아주고…… 온갖 호의를 베풀어준 은인.
그런 사람까지 함께 위험에 빠뜨리느니 차라리 가오가 상하는 편이 낫다. 민구의 시선을 오해한 밤톨이 보충 설명을 하려고 했다.
“고 하사님이 계속 걱정 많이 하셨거든요. 잠실로 가서 제대로 치료받으면 좋은데, 저렇게 의식이 없으면 아마 차량 이동은 너무 힘들어서 무리일 거라고. 형님, 저랑 같이 가셨다가 나중에 다 낫고 다시 오시면 되죠. 물론 여기에 여자 친구분도 계시고 해서…….”
“그럽시다. 차가 언제 출발한다고 했소?”
민구가 너무 선뜻 대답을 하자 밤톨은 오히려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민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잠실 가서 나아 오겠소. 거기에도 선생처럼 좋은 사람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잘 생각하셨습니다. 가시는 동안 차에서 흔들리면 좀 고생스러우시겠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세요. 상태가 썩 좋지만은 않습니다. 내일 오전 열 시에서 열한 시 사이에 출발하는 걸로 되어 있으니까, 차에 타시기 전에 제가 붕대는 다시 꽉 잘 묶어 드리겠습니다.”
고 하사도 다행이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끄응~ 침대 난간을 잡고 겨우 몸을 일으킨 민구가 고 하사에게서 받은 담배를 입에 물고 두 병사에게도 권했다.
“헤어지기 전에 담배라도 한 대 같이 태웁시다. 내일까지 또 이렇게 만나기도 어려울 텐데.”
“뭐, 그렇게 하죠. 까짓것, 장교들한테 걸리면 환자의 치료를 위한 의료 행위였다고 하면 되려나? 큭큭.”
고 하사와 밤톨에게 불을 붙여준 뒤, 민구는 나흘 만의 담배를 빨았다.
후우우~ 쿨럭! 큭!
잔기침만으로도 갈비뼈가 부서지는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지금 달아나기로 결정하며 자존심에 입은 상처는 이보다 몇 배나 크고 깊다. 민구는 고통을 내색하지 않고 다시 담배 연기를 들이마셨다. 쓰고 아리다.
“조 병장님, 조 병장님! 내일 이동 건으로 지시 사항 전달받으시랍니다!”
담배가 1/3 정도로 짧아졌을 때, 복도에서 누군가 밤톨을 찾았다.
“에이 참, 쉬지도 못하게…….”
밤톨은 물병 안에 꽁초를 버리고 뛰어나가다 문가에 서서 민구를 돌아봤다.
“이따가 시간 나면 또 들르겠습니다. 아, 그리고 형님 옷이랑 가방은 저 맨 끝, 캐비닛 안에 있습니다. 놔두기를 잘했네요. 그냥 초희 씨한테 드릴까 하다가, 본인이 찾는 게 원칙이라 그렇게 했는데. 하긴 옷은 거의 걸레가 돼버려서 또 입으시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말입니다. 비싸 보이는 양복이었는데…….”
밤톨이 남기고 간 말을 듣고 민구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이 고마운 군인 의사에게 주고 갈 게 생각났다. 물론 그 정도로 답례를 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뭔가 하나쯤은 꼭 주고 싶던 터였다.
“저도 이제 쉘터로 가보겠습니다. 상병 애 혼자서 의무실 맡아보느라 아주 똥을 싸고 있을 겁니다. 사실 대단히 아픈 사람은 없는데, 그래도 계속 약들을 타 가거든요.”
“잠시만, 꼭 좀 받아 줬으면 하는 게 있소.”
‘아니, 저는 그런 거 영 성격에 안 맞는데……’라며 쑥스러워하는 고 하사를 억지로 만류하며 민구는 캐비닛에서 가방을 꺼냈다. 그러고는 따로 보관해 놨던 D.E.M. 두 개를 꺼냈다.
병원 옥상에서 검은 헬기를 타고 온 놈들 셋을 죽였을 때 훔쳐 둔 물건이다. 다행히 그 난리 통에서도 깨지거나 하지 않고 멀쩡했다.
“이게 뭡니까? 처음 보는 건데요?”
빨간색으로 된, 볼펜 절반 크기의 캡슐 두 개를 받아 들고 고 하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민구는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을 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이거 일부에서만 쓰는 물건인데…… 이 뚜껑을 젖히고 근육에 대고 누르면 침이 박히는 거요. 그러면 곧바로 심장이 멎게 되는 거고.”
“허! 심장이 멎으면 죽잖아요? 암살 무기 같은 거 필요 없는데…….”
“아니, 그랬다가 10분 뒤에 깨어나는 거요. 그러니까 특별한 거지.”
“네에? 아니, 그게 무슨…….”
고 하사가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민구를 바라봤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민구도 잘 안다. 그 역시 처음 총 맞은 놈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믿지 않았으니까.
“안 믿길 테지만, 확실한 거요.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믿어도 좋소.”
물론 자신이 태양 그룹 용병 세 놈을 죽였고, 그중에 한 놈이 기관총에 맞아 죽어가는 동안 실험을 했다는 말은 생략했다. 아직도 미심쩍은 눈으로 D.E.M.을 보고 있는 고 하사에게 민구가 말했다.
“이런 거밖에 줄 수 없어서 참 면목이 없소. 어쨌든 지금 내가 가진 것 중에는 그게 제일 요긴한 물건이라서. 모든 게 다 잘 풀릴 때야 그깟 거 쓸 일이 없겠지만, 혹시라도 밖에서 괴물들에게 막다른 곳까지 몰리거나 했을 때는 그걸로 한 번쯤 운에 기대 볼 수도 있지 않겠소? 괴물들은 심장이 멎은 사람은 물지 않는다더군. 그리고…….”
그 대목에서 민구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까부터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줄곧 고민을 해 봤는데, 참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다.
식구들 내부에서 일어난 일은 식구들끼리 해결해야 한다. 그게 철칙이다.
그리고 남에게 식구 험담을 하거나 고자질하는 놈은 배신자다. 하지만…… 하지만 식구 중에 못난 놈이 생명의 은인을 해코지할까 봐 두렵다. 그걸 미연에 방지할 힘이 없어서 괴롭다.
“아까 그 철책 앞에 서 있던 놈, 그놈 얼굴 기억하시오? 알아볼 수 있겠소?”
고 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잊어버리기가 더 어렵지 않겠습니까? 덩치도 그렇고, 더러운 인상도 그렇고.”
“그럼 그놈 조심하시오. 기동이라는 놈인데, 질이 별로 좋지 않소. 아무거나 대충 핑계를 대서 잡아 가둬 두면 더 좋고.”
그 말을 하는 민구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음, 고 하사는 눈 주변을 긁적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사내가 하는 말, 다 믿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저렇게 간절히 주려는 마음을 비웃어 넘기기는 어렵다.
“뭔가 사연이 많은 분이신가 보네요. 몸 보고 대강 짐작은 했지만……. 알겠습니다. 참고할게요. 가둬 두는 건 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눈여겨보도록 하겠습니다. 뭐, 제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어차피 며칠 있으면 저 정도 나이 남자들은 다 징집될 겁니다. 그리고 이것도 감사히 받을게요. 이렇게 해야 마음이 더 편하시겠죠?”
“그렇소.”
D.E.M. 두 개를 건빵 주머니에 넣은 고 하사가 방을 나가려다가 창밖을 보며 멈춰 섰다. 그러고는 민구를 향해 손짓을 했다.
“힘드시겠지만 와서 한번 보실래요? 이거는 진짜 재미있는 구경거리니까.”
민구는 그를 따라 창가로 걸어갔다. 아까처럼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저쪽입니다, 저기 멀리 도로 쪽에’, 고 하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을 돌려 보니 괴물들 사이로 희한한 놈들이 섞여 있다.
온몸이 빨간 괴물이다. 빨간 괴물들은 철책 근처까지 기웃기웃하다가 걸음을 돌려 멀어져 간다.
“볼만하죠? 이 동네 명물, 빨간 좀비입니다.”
“저게 뭐요? 돌연변이인가?”
“아뇨. 저희도 처음에는 무슨 새로운 병이 퍼지는가 싶어서 무지 놀랐는데, 알고 보니까 어디에서 페인트를 잔뜩 뒤집어쓰고 온 거더라고요. 떠나시기 전에 보셨네요. 다시 여기로 돌아오시더라도 그땐 저놈들 구경하시기 어려울 거거든요.”
“그건 또 왜 그렇소?”
“모레나 글피쯤에는 저놈들 오는 길목을 아예 폭파해서 차단해 버리고, 거기에 철책을 쌓을 예정입니다. 이 쉘터에서 한 300미터 전방에 말이죠. 그러면 저놈들도 여기까지 못 오고 다시 왔던 데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겠죠. 항상 이 앞으로 돌아 나가서 신경이 쓰였었거든요. 자, 그럼.”
말을 마친 고 하사는 고개를 까딱하고 웃으며 방을 나갔다. 혼자 남겨지자 민구의 감정은 더욱 복잡해졌다.
조직의 식구로부터 배신당하고, 또 민구 자신 역시 그놈을 배신해서 남에게 고자질을 하고…….
애초부터 그리 대단한 인간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자신은 철저하게 더럽혀져서 나락에까지 떨어진 기분이다.
복수, 응징, 본보기…… 다 좋은 이야기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당장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기는 것도 힘에 부치는 신세가 되었다.
캐비닛에서 걸레 쪼가리처럼 찢긴 양복을 꺼낸 민구는 안쪽의 나이프 홀더에 감춰둔 라그리프 나이프를 꺼냈다.
홀더는 찌그러져 있었지만, 다행히 칼은 빠진다. 손에 쏙 들어오는 손잡이와 엄지손가락 길이의 칼날, 이것이 그가 가진 유일한 무기였다.
***
테라는 젠킨스와 의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앞뒤로 앉은 채 또다시 거래를 하고 있었다.
과자와 비밀을 맞바꾸는 거래를. 다만, 어제부터 테라는 거래의 룰을 좀 바꿨다. 이제 젠킨스는 과자 한 봉지를 먹고 나면 물 200밀리리터를 마셔야만 그다음 과자를 얻을 수 있다.
“너무하는군. 내가 무슨 고래도 아니고…… 음식을 먹기 위해 물을 이렇게나 많이 마셔야 한다니.”
투덜거리면서도 젠킨스는 결국 테라의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아니면 그 누구도 자신에게 이렇게 많은 양의 과자를 제공해 주겠는가.
마찬가지의 이유로 테라 역시 인류의 반 이상을 살상시킨 주범 중 하나와 지근거리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다. 젠킨스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이런 이야기들을 해줄 수 없으니까.
물을 많이 마시도록 한 것은 과자의 양을 줄이면서도 공복감을 느끼지 않도록 만들려는 의도에서만은 아니었다.
말로 설명하자면 좀 복잡하지만, 테라가 생각할 때 자신은 그가 과자 몇 개에 영혼이라도 팔 기세로 탐욕을 부리는 것을 보고 있기가 괴로웠던 것 같다.
그래서 연민의 대상이 될 수도 없을 만큼 나쁜 인간이라는 걸 알면서도 반강제적으로 다이어트를 시키는 중이다.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젠킨스를 플로리다에서 살 때의 이웃이었다고 둘러대 뒀다. 테라의 부모님들과 친한 사이였으며, 그의 아이들과도 자주 같이 놀았다고…….
그 정도 허술한 변명으로도 대부분의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있었던 건, 젠킨스의 외모 덕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봐도 그는 여자를 끌어당길 만한 매력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이유가 컸다.
“그건 그렇고, 테라 양, 정말 발가락 상처 한 번 보여주지 않겠나? 대체 언제 다친 거야? 그 앙증맞고 흰 발가락이 훼손돼서 빨간 피를 흘렸다니, 우~ 그거, 상상만 해도 짜릿한 보들레르적인 아름다움 아닌가?”
젠킨스가 또다시 붕대에 싸둔 상처에 관심을 보인다. 테라는 얼른 발을 뒤로 빼서 반대쪽 발로 가렸다. 그러고는 최대한 냉담하게 말했다.
“제 발을 보여 드리고 싶어서 과자를 드리는 게 아니잖아요. 관심 갖지 마세요.”
“좋아, 좋아. 자, 나 물 다 마셨어. 이제 뭐든 씹을 수 있는 걸 줘.”
젠킨스는 금방 물러나면서 의자 손잡이를 두드렸다. 테라는 작은 과자 봉지를 올려놓으며 물었다.
“일전에 저에게 말했죠? 하늘에서 신호가 올 거라고.”
“응, 맞아. 그들은 내가 이 나라에 왔다는 것도, 떠나지 않았다는 것도 알아. 그러니 마지막 GPS 신호를 수신한 지점부터 시작해서 차츰 범위를 넓혀가며 신호를 보내올 거야.”
“그런데 정작 젠킨스 씨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왜죠? 정말 그 말이 사실이라면 매일 애타게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것 같은데. 혹시 신호가 왔는데 부주의해서 그걸 놓치기라도 하면 안 되잖아요?”
“그 이유는 간단해. 일단 신호가 오면 굳이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그걸 쳐다보면서 웅성거릴 거야. 난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자연스럽게 신호가 왔다는 걸 알게 될 거고.”
“신호가 어떤 방식일지 이야기를 안 해 주는 건 왜 그런데요?”
“어차피 보게 될 건데 뭐. 금방 올 거야. 그때의 즐거움을 위해 아껴 두는 거지.”
젠킨스는 감자 칩에 묻어 있는 소금 한 톨까지도 놓치지 않고 털어 넣으며 말했다.
“하지만 젠킨스 씨 말처럼 당신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면 신호가 너무 늦는 거 아닌가요? 벌써 보름이 넘게 지났잖아요. 이렇게 시간을 끌다가는 좀비들이 다 죽은 후에야 신호를 받아 볼지도 모르겠네요.”
테라가 야구장의 잔디를 보며 중얼거리자 젠킨스는 빙글거리며 되물었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니까 어쩔 수 없어. 그런 것보다, 조금 전에 뭐라고 했지? 좀비가 죽은 다음에? 사람들이 그러던가? 좀비들이 곧 죽을 거라고?”
“다들 이야기는 하죠. 아무것도 못 먹고 있으니 얼마 안 가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죽을 거라고. 언제가 될지는 정확히 모르지만요. 어쩌면 그게 사람들이 이렇게 버틸 수 있는 가장 큰 힘일지도 몰라요. 조금만 더 버티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 말이에요.”
테라의 이야기를 들으며 젠킨스는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찡그린 채 슬퍼하는 것 같기도 하다. ‘테라 양……. 휴슬리 기억나나?’ 젠킨스가 물었을 때, 테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남극 기지의 연구원인가 하는 사람 말씀하시는 거죠? 처음 좀비가 되었던.”
“그래, 맞아. 우리가 알고 있는 한 휴슬리는 좀비로 변한 첫 번째 인간이지. 알파 개체란 말이야. JL에서는 수많은 인간을 좀비로 만들었고, 또 수많은 좀비들을 파기하거나 이동시켰지만, 휴슬리만큼 특별하게 관리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어. 알파 개체니까 특별했지. 당연히 그의 상태는 중요한 보고 사항이었고. 테라 양, 휴슬리가 어떻게 되었을 것 같아?”
설마……. 테라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불길한 이야기를 듣게 될 것 같은 예감 때문이다.
그래, 맞아. 젠킨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는 휴슬리에게 별도로 식량을 공급하지 않았어. 경련을 하고 있다가 날아올라 물어뜯은 연구원들이 그가 섭취한 마지막 인간의 살이었지. 그건 2010년 겨울의 일이었고.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이런 거야. 휴슬리는 5년 이상 아무런 에너지를 섭취하지 않았어. 그저 실험실에 갇혀 있었지. 그런데 말이야, 세상이 이렇게 되기 직전까지도 나는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지 못했어. 약화되었다는 보고조차 없었지. 내가 아는 한 좀비들은 자연도태되거나 소멸하지 않아. 최소한 5년 이상은 버틴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