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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혼돈 (1) (226/449)


226. 혼돈 (1)
2022.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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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으응…….”

민구가 눈을 떴다. 간간이 의식이 돌아왔다가 약에 취해 까무룩 넘어가길 벌써 나흘째. 이 정도로 멀쩡하게 정신이 든 건 총을 맞은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후우우~ 가슴이 답답해 한숨을 내쉬려는데, 갈비뼈 전체가 부서져 내리는 듯 아프다. 그리고 그 고통에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온몸으로 거대한 통증이 밀려왔다.

으윽! 민구는 이를 꽉 깨물었다.

방 안은 지독하게 더웠다. 상처 입은 부위뿐 아니라 온몸이 불이라도 붙은 듯 뜨거운 민구에게는 그 열기가 더욱 괴롭게 느껴졌다. 등에 닿는 침대 시트는 축축하고 끈적거린다.

열린 창문으로는 바람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에 공사하는 소리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트럭 엔진 소리 따위가 햇빛과 한데 섞여 들렸다.

무겁고 눅눅한 공기 때문에 숨을 쉬기가 불편한데, 동시에 입안은 바짝 말라 톱밥이라도 한 움큼 물고 있는 것 같다. 한마디로 괴롭다.

젠장, 내 몸이…… 이게 완전히 내 몸이 아닌 것 같군…….

부상당한 곳의 상태를 알아보고 싶어 손을 뻗으려다 따끔한 통증 때문에 멈칫했다. 꽂혀 있던 수액 주삿바늘이 당겨진 것이다. 민구는 줄이 당겨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움직였다.

먼저 옆구리부터 짚어 봤다. 그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지독하게 아팠던 곳.

총알에 맞아 잘리고, 불에 달군 대검으로 다시 지진 자리에는 두툼한 패드가 덧대어져 있고, 그 위로 또 붕대가 탄탄하게 감겨 있다.

감각이 살아 있는지 궁금해진 민구는 손가락으로 패드 위를 꾸욱 눌러봤다.

이내 이마에 식은땀이 솟을 만큼 둔중한 통증이 옆구리 전체에 걸쳐 느껴진다. 그 와중에도 다리가 움찔한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하체에도 감각이 있다.

후우~ 숨을 모아 쉰 민구는 철제 침대의 양쪽 난간을 잡고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보려 애썼다.

오른쪽 옆구리와 왼쪽 갈비뼈에서 동시에 아픔을 주며 움직이지 말라는 경고를 보냈지만, 민구는 멈추지 않았다.

침대 난간과 볼품없는 씨름을 몇 분 정도나 반복한 후에야 민구는 겨우 상체를 온전히 세워 앉을 수 있었다.

온몸에서 땀이 뚝뚝 떨어진다. 하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간만에 공기에 노출된 등의 피부가 특히 개운하다.

물론 그 상쾌함과 비례해서 양쪽 상처 부위의 욱신거림은 늘어났다. 몸을 똑바로 펴기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민구는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히고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이상하군.”

민구는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넓은 방 전체에는 그 혼자뿐이다. 그리고 복도 쪽에서도 별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 점이 이상했다.

비록 꿈속에서 본 것 같은, 어렴풋한 기억만 남았지만, 지난 며칠 동안 이 방에 분명히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그가 너무나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 그리고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단 한마디의 불평이나 타박도 없이 그를 도와주었던 사람이.

“읏차.”

침대 옆, 벽에 달린 거울을 보고 있던 민구는 바닥에 내려섰다.

으윽! 그 정도의 충격만 전해져도 몸통과 내장이 다 흔들리는 것 같다. 머리통 속을 빠르게 휘돌아 나가는 현기증으로 인해 저절로 두 눈이 찌푸려진다.

민구는 조심조심 한 발씩을 떼며 구부정한 자세로 걸어가서 거울 앞에 섰다. 꼴이 말이 아니다.

퀭해진 눈, 홀쭉해진 볼, 붕대만 감겨 있는 상체나 푸르스름한 파자마만 걸치고 있는 하체나…… 가릴 것 없이 여위었다.

금세 이렇게나 살이 빠지기도 하는군…….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몸을 기울이던 민구는 또다시 손등을 찌르는 수액 바늘 때문에 주춤 물러섰다.

팽팽하게 당겨진 줄이 더 이상은 늘어나지 않는다. 결국 민구의 산책은 침대 주변, 줄이 미치는 범위 내로 한정이 되었다.

물론 그런 줄이 없더라도 더 멀리 움직이는 것은 힘들다. 민구는 맨발로 천천히 바닥을 밟으며 침대 주변을 서성였다.

달칵―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민구는 고개를 돌렸다. 입구에는 의무대 고 하사가 뭔가를 들고 서 있었다.

“어, 일어나셨네요? 어떻습니까? 좀 걸을 만해요? 오, 근데 확실히 건강하시네. 의식 돌아오자마자 자기 발로 벌떡 일어날 줄은 몰랐습니다. 아직 나흘도 채 안 됐는데…….”

고 하사는 들고 온 물건을 스테인리스 트레이에 올려 놓은 후, 닫혀 있던 쪽 벽의 창문을 열었다.

휘이잉―

맞바람이 치자 찜통 같던 실내의 공기가 한결 숨쉬기 편한 것으로 바뀐다. 계속 등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리던 땀도 조금은 식었다.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창문을 닫아 놨던 거지?

민구가 의문을 가지고 바라보자 고 하사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자리를 비울 때에는 창문을 일부러 한쪽만 열어 둡니다. 맞바람이 치면 시원한 거는 좋은데 뭐가 막 날아다니고, 가끔 정말 바람이 심할 때는 이 링거 주머니 같은 것도 뚝 떨어지거든요. 그럼 위험하니까……. 많이 더우셨습니까?”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민구가 말했다.

“……당신이었군.”

“네? 뭐가 저였다고 하시는 건지? 혹시 허리 빵구 낸 거 말씀하시는 거면…… 그거 다른 놈입니다. 하하하, 저 아니에요.”

“내 똥오줌 다 받아내 주고 살려낸 은인이 당신이었어.”

“아니, 뭐, 그렇게까지……. 하하, 아휴, 이거…… 엄청 쑥스럽네. 마주 보고 그런 말을 하시니까. 사실 고마워하실 대상은 우리 중대장님이신데……. 그분이 미리 주변 병원 털어서 비싼 사제 약을 구해오시지 않았다면 저도 손쓸 방법이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잊지 않겠소, 의사 양반.”

“예? 의사 아니고, 하사입니다요, 하사. 요기 계급장 보이시죠? 어이구, 의사였으면 우리 어머니도 어깨 좀 펴고 다니셨을 텐데…… 응? 하긴 좀비 세상 끝나고 나면 나 정도 야매라도 의사로 쳐줄지 모르겠는데? 의사들도 어지간히 죽었을 테니까. 아, 그런 것보다 잠깐만 앉아 보세요. 이거, 새걸로 갈아드릴게요.”

고 하사는 줄이 연결된 길쭉한 플라스틱 통을 들고 와 민구를 앉혔다. 민구는 고 하사가 수액 커넥터에 줄을 연결하는 동안 명찰에 적힌 그의 이름을 읽었다.

‘고, 창, 명.’

고창명, 고창명……. 민구는 입속으로 자기 앞에 선 군인 의사의 이름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단순한 치료만 해준 게 아니다.

민구는 이 지독한 더위 속에서 진땀을 쏟아내며 나흘 동안 누워 있었는데도 등의 피부가 짓무르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만큼 부지런히 정성스럽게 뒤치다꺼리를 해줬다는 뜻이다.

일면식도 없고, 돈 한 푼 받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이렇게까지 큰 도움을 받았는데, 그걸 잊으면 금수만도 못한 거다.

당연히 받은 만큼 자신도 뭔가를 해 줘야 한다. 예전 같았으면 돈으로 은혜를 갚았겠지만, 돈이 휴지와 다를 바 없어진 지금은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자, 연결했습니다. 30분인가에 한 번씩 자동으로 약이 들어가기는 할 텐데요, 그사이에라도 만약에 너무 아프다, 아파서 돌아버릴 것 같다, 그러시면 이 단추를 한 번 꾹 누르면 됩니다.”

줄에서 약이 제대로 도는지 확인한 고 하사는 민구의 손에 작은 플라스틱 스위치를 쥐여 주었다.

지금 그가 커넥터와 연결한 통에 달려 있는 것이다. 민구는 스위치와 투명한 액체가 들어 있는 길쭉한 통을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그럼 이 통에 든 게 진통제요?”

“네, 무통 주사라고 하는 겁니다. 비싼 거. 물론 이것도 사제 물건을 털어온 것 중 하나예요. 환자분 보니까 효과는 정말 확실하네요. 아, 그리고 참고로 말씀드리면, 지금 이게 두 병짼데 보통 병원에서는 중독 때문에 두 병까지만 허용을 하거든요. 저는 그런 거 없습니다. 중독이고 뭐고, 일단 사람이 살고 봐야지. 그러니까 이거 맞고도 더 필요하면 말씀하십쇼.”

고 하사의 말을 들은 민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입으로는 다른 소리를 했다.

“고맙긴 한데, 이거…… 잠시 약이 안 나오게 할 수 있소? 정신이 몽롱해지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그래요? 훗, 핑― 도나 보죠? 자요, 이거를, 요 십자가같이 생긴 걸 왼쪽으로 돌리면 약이 안 들어갑니다. 보셨죠? 근데 저 같으면 그냥 맞을 텐데요. 지금 아직 약 기운이 남은 상태라서 그런 말씀 하시는 것 같은데, 이제 곧바로 엄청 아파질 겁니다. 꽤나 크게 부상당하신 거거든요. 하긴 몸 보니까 아픈 것 잘 참으실 것 같기도 하긴 했어요. 뭐~ 흉터가 어마무시하더구만요. 등, 배, 옆구리, 어깨, 팔, 허벅지에 찔리고 베이고 찢기고…….”

고 하사가 민구의 몸에 나 있는 여러 흉터들의 위치와 모양을 묘사하며 웃었고, 민구도 미소를 지었다.

보통은 자신 같은 사람을 보면 혐오하거나 두려워하기 마련인데, 이 군인 의사는 그런 게 없다. 심지어 문신에 대한 언급조차 않는다. 그런 건 부상과 무관한 것처럼.

‘일어나신 김에……’라고 말하며 고 하사는 땀에 젖은 침대 시트를 들어내 한쪽 종이 상자에 넣고, 캐비닛에서 새 시트를 꺼내 깔아 주었다. 물병도 주며 천천히 마시라고 했다.

“이렇게 넓은 방을 나 혼자 써도 되는 건지 모르겠소.”

민구의 말에 고 하사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저언~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기는 쉘터가 아니고, 길을 터서 쓰는 옆 건물이거든요. 원래대로라면 선생님을 의무실로 옮겨야 맞는 것이긴 한데, 감염 위험도 큰 데다 워낙 안정을 요하는 상태고 해서 그냥 여기 계속 계시도록 했습니다. 아픈 사람들 들락거리고, 그 사람들한테 구경거리가 되는 것보다는 폐건물 나 혼자 쓰는 편이 나으니까요. 옥상에 배치된 병력들도 있고, 또 지금 당장은 다른 애들도 몇 명 여기서 살고 있으니까 귀신 같은 거 안 나옵니다. 저도 이렇게 하루에 몇 번씩 왔다 갔다 하고요. 그래도 영 귀신 나올까 봐 무섭다, 그러시면 옮겨 드리고요.”

“여기가 좋소.”

민구가 대답했다. 약해진 상태에서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다.

사방에 원한을 잔뜩 깔아 둔 민구로서는 더욱 그렇다. 고 하사는 침대 머리맡에서 수액 봉지를 거는 막대기를 잡아 빼 민구에게 건넸다.

“한번 받아 보세요. 들으실 만한가. 그 링거 줄이 팔보다 낮게 가면 안 되는 거니까 그거 항상 신경 쓰시고, 걸어 다닐 수 있다 싶으시면 무리가 안 되는 범위 내에서 자꾸 운동을 하세요. 그래야 회복이 빨리 된다고들 하더라고요. 에, 또…… 뭐 필요하신 거 있습니까? 아참, 그 초희 씨라는 연예인분도 엄청 안타까워하기는 했어요. 강 실장 오빠 죽으면 자기도 죽은 목숨이라고, 꼭 좀 살려 달라고 어찌나 애타 하시는지……. 지금은 규정 때문에 저쪽 쉘터 건물로 옮겨가셨지만…….”

“그…… 내 옷에 담배가 있었는데…….”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말을 꺼낸 민구는 말끝을 흐렸다. 무슨 답이 돌아올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고 하사는 당장 코웃음을 쳤다.

“어이쿠, 세게 나오시네. 일어나시자마자 담배부터 찾깁니까? 후후후, 옆구리로 술술 연기가 새어 나올 것 같은데…… 후후후.”

안 되는 건가…….

민구는 입맛을 다셨다. 의사들은 늘 이렇게 조금만 아프면 술, 담배를 멀리하라고 한다. 고 하사는 민구를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담배 피우시면 기침이 날 텐데, 그러면 아마 갈비뼈가 무지하게 울릴 겁니다. 그러면 또 열이 오를 거고……. 사실 저보다도 따로 허락을 받으셔야 할 놈이 하나 있습니다. 어찌나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는지 열녀가 따로 없다니까요.”

그때, 밖에서 급한 발소리와 누군가 고 하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 하사는 ‘어이구, 이거, 양반은 아니네’라고 중얼거리며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인데? 누구 아픈 병사 있어? 들어와.”

“고 하사님, 아픈 게 아니라 말입니다, 지금 엄청 신기한 구경거리가 생겼지 말입니다. 엇, 일어나셨네요! 괜찮으십니까, 형님?”

밤톨이다. 방글거리며 웃고 들어오던 밤톨은 일어나 있는 민구를 보며 아주 반색을 했다.

그래, 맞아. 이놈에게도 어지간히 신세를 졌지. 지혈한다고 서투른 솜씨로 그 고생을 하고, 나를 업고 뛰기도 하고…….

하여간 붙임성 하나는 어지간히 좋아서 어느새 이 군인 의사와도 아주 친숙해졌나 보다. 민구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음……. 뭐, 여러 사람이 도와준 덕분에.”

“와아~ 다행입니다, 저는 형님 일어나시는 거 못 보고 복귀할까 봐 걱정 엄청 했습니다. 근데…… 이렇게 무리하시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무리는커녕 이제 다 나으신 것 같다. 담배 찾으시는 것 보니까 말이야.”

고 하사가 민구의 요청을 고자질해 버리자 밤톨은 어처구니없어 하며 웃었다.

“지금 이 상태에서 담배랑 술은 암만 형님이라도 안 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하여튼 다행입니다. 저는 형님 큰일 나는 줄 알고…….”

“야, 근데 뭘 봤냐고 물어보는 거였어? 엄청 신기한 구경거리라며?”

고 하사가 말을 끊고 묻자 밤톨은 자기 허벅지를 탁, 치며 위를 가리켰다.

“아, 맞다! 지금 옥상하고 마당에는 엄청 시끌벅적합니다. 지금 하늘에 굉장히 신기한 게 떠 있지 말입니다. 혹시 여기에서도 보이려나?”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좌우로 돌리던 밤톨은 이내 포기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바깥이 웅성웅성 시끄러운 것도 같다. 밤톨은 고 하사에게 옥상으로 가자고 권유했다.

“좀 귀찮으시겠지만, 와 보시지 말입니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지만, 볼 만합니다.”

“뭐, 그럴까? 어차피 담배도 한 대 피우려고 했고…….”

거기까지 말하던 고 하사는 민구를 슬쩍 돌아보고 웃으며 제안을 했다.

“옥상까지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계단으로 세 층을 올라가야 하는데, 거기까지 따라오시면 담배 한 대 드리겠습니다. 그 정도면 정말로 몸이 꽤 나아진 거니까요,”

‘무리겠지?’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담배는 없다.

민구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 밑에서 슬리퍼를 가져와 바닥에 놓아 준 고 하사는 민구의 손에서 수액 봉지 걸이를 빼앗아 들며 말했다.

“그래도 첫 나들이니까 이건 제가 잡아 드리죠. 앞장서서 천천히 가 보세요.”

민구는 며칠 만에 처음으로 방문을 나섰다. 버려진 건물 특유의 황량한 복도가 그를 맞았다.

지익, 지익, 슬리퍼 끄는 소리와 그 뒤를 따르는 군인들의 전투화 소리가 엇박자로 울린다. 처음 몇 발짝을 떼는 동안에는 그래도 견딜 만했다.

하지만 복도를 반쯤 가로질렀을 때부터 온몸에서 비 오듯 땀이 솟고, 숨이 거칠어진다. 숨이 거칠어지는 만큼 가슴의 압박은 커져서 이내 고통은 끔찍한 수준으로 증폭되었다.

슬쩍 허벅지를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도 총을 맞은 옆구리가 찢어지는 것처럼 당겨온다. 마침내 계단 앞까지 도달했을 때, 뒤따르던 고 하사가 민구를 불렀다.

“선생님, 잠시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음? 후우~ 후우~ 아직…… 걸을 만한데……. 끄응, 갈 수 있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민구 역시 죽을 맛이어서 벽을 짚고서야 겨우 버티고 설 수 있었다. 눈앞이 노랗다.

한 걸음씩 디딜 때마다 권투 선수가 복부를 가격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오기로 버티고 있다. 하사가 군복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민구의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제 장난이 경솔했습니다. 그냥 농담 삼아 했던 말이었거든요. 아프신 분한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자, 이 담배 드릴게요. 피울 수 있다 싶으시면 아무 때나 피우세요. 뭐, 어차피 누구랑 같이 쓰는 병실도 아니고, 층 전체를 선생님 혼자 쓰시는 중이니까. 오늘 산책은 이만하면 충분하고도 넘치게 하신 것 같습니다. 돌아갑시다. 가서 좀 누우셔야겠어요. 제가 힘이 들어서 더는 못 보겠습니다.”

민구는 자신의 손에 올려진 담배와 라이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의사 군인도 그렇고, 저 밤톨도 그렇고, 자신이 부딪치며 살던 세계의 인간들과 너무 다르다.

상처 입은 사람은 오히려 타깃이 되고, 약한 놈은 도태되던 세상에서 살던 그에게 타인들이 베푸는 이런 식의 배려는, 그것 도 갚아줄 수 없는 은혜는 낯설고 부담스럽다.

“아, 저 사람 또 기웃거리네. 옌장, 도대체 여기에 뭐 볼 게 있다고 저렇게 자꾸 기웃기웃 난리를 치지? 벌써 며칠째야? 생각해 보니까 저번 날 밤에 철책 넘으려던 놈도 저 사람 같아. 그치 않냐, 조 병장? 실루엣이 비슷하지?”

복도 창문을 보며 고 하사가 투덜거렸다. 밤톨과 민구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옮아갔다.

기동이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하늘에만 쏠려 있는 동안 기동이는 철책 앞에서 병실 쪽을 보며 서성이고 있었다. 기동이를 알아본 민구는 놈과 눈이 마주치기 전에 얼른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후우우~ 민구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지은 죄가 있는 놈이니만큼 반가워서 저러는 건 분명 아닐 테니까…… 몸을 못 가누는 동안에 제끼려고?

하긴 지금의 나라면 연장질당하기에는 아주 좋은 조건이다.

약에 취해 잠이 들면 그때는 더 무방비일 테고……. 밤톨과 하사가 며칠 전에 본 놈이 맞다, 아니다, 투닥대는 동안 민구는 티 나지 않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큭큭큭, 그렇지. 이게 내가 살던 세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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