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Rush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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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Rush (4)
2022.04.12.
한 무더기의 놈들이 뻔뻔한 표정으로 오지 말아 달라는 유빈의 부탁을 거부하고 골목 안 깊숙이 들어왔다.
총 열한 마리. 모텔 건물 아래를 지나는 놈들의 대갈통이 빤히 내려다보인다. 난감하다. 이렇게 되면 이제 이 골목은 더 이상 안전 지역이 아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뛰어 내려가 놈들을 저지하고 싶지만, 지금 셔터를 올린다는 건 도로에서 대기하고 있는 천 마리 이상의 좀비들을 향해 어서 오시라고 호객 행위를 하는 거나 다름없다.
“으아, 어떡하나. 젠장……. 그만 들어가. 거기 좀 서라고, 이 개새끼들아.”
이탈자 좀비들의 동선을 따라 옥상 위에서 이동하며 유빈이 안타까운 애원을 한다.
보안관이라는 아군의 막강한 전력을 생각할 때, 열한 마리라는 숫자는 사실 그리 무섭지 않다. 조금 후달리고 애를 먹겠지만, 얼마든지 해치울 수 있는 양이다.
문제는 저놈들이 대체 어디로 숨어버릴지 모른다는 데에 있었다.
열한 마리의 좀비는 아주 태연하게 자기 동네 마실 나온 놈들처럼 계속 어슬렁대며 멀어져 간다. 이대로라면 곧 시야 밖으로 사라져 버릴 것이다.
우지직― 뿌드득―
앞쪽 도로에서는 아직도 다 깨지지 않은 트랩이 문짝과 그것을 밀고 있는 좀비의 갈비뼈를 함께 부수며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다.
아까는 그렇게 흥미롭고 재미있는 구경이었는데, 이제 다 귀찮다. 더 이상 말썽 피우지 말고 그깟 빨랫줄 몇 겹 빨리 끊고 꺼져 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다. 두 번째 트랩은 너무 튼튼하게 만들었나 보다.
“어디로 갔냐……. 어디……. 좀 나와봐라. 숨지 말고, 이 새끼들아…….”
다들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좀비들이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고 서 있다. 혹시라도 다시 모습을 드러내 주기를 기대하면서. 그중 심정적으로 가장 괴로운 건 물론 유빈이다.
지금 서 있는, 그리고 오늘 밤 돌아가서 잠을 청할 건물이 있는 골목 안으로 좀비들이 들어가 버렸다. 모두 자신의 계획이 가진 허술함 때문에 이 사달을 냈다는 자책이 가슴을 짓누른다.
길이 막혔을 때 모든 좀비들이 무작정 뚫고만 갈 것이라 가정했던 게 문제였다. 이렇게 많은 놈들을 상대할 거였으니, 당연히 본진에서 떨어져 나오는 무리들에 대해서 대비해야 했다.
“오빠.”
제니가 곁으로 와서 유빈의 손끝을 살짝 잡고 흔들었다.
응? 멍해져 있는 유빈에게 제니가 말했다.
“오빠는 그냥 도로 쪽 계속 봐요. 좀비들 어떻게 빠져나가는지 알고 싶어 했잖아요. 골목 살피는 건 내가 할게요. 그건 내가 대신할 수 있는 일이니까……. 걱정하지 마요. 좀비들 다시 보이기 시작하면 부를게요.”
그녀의 말이 맞다. 그게 현명한 대처다. 길을 막아놓으면 좀 비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알고 싶어 몇 시간에 걸쳐 물건들을 준비하고 작업을 했던 결과가 지금 도로 위에서 펼쳐지고 있다. 지금 이 순간밖에는 못 본다.
그러니까 기회가 주어졌을 때, 놈들의 반응과 움직임 같은 걸 최대한 많이 살펴봐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는 더 효과적으로 놈들을 상대할 수 있다. 젠장, 논리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냉철해지기가 어디 쉬운가.
하여간 제니에게 등을 떠밀린 유빈은 다시 도로 쪽 난간으로 위치를 옮겨 트랩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문과 좀비 떼 사이에 끼어 있는 놈들의 몸통은 뒤에서 밀어 대는 압박 때문에 아주 박살이 나 있다. 부러진 갈비뼈가 가죽을 뚫고 나와 그 사이로 녹색의 체액이 주르륵 흐른다.
눈으로는 그 징그럽고 기괴한 꼴을 쫓고 있지만, 유빈의 머릿속에는 온통 사라져 버린 열한 마리의 이탈자 좀비 생각뿐이다.
아까 그 새끼들……. 대체 어디로 숨었지? 지금쯤 어디를 돌아다니고 있을까? 그걸 어떻게 끌어내야 하는 거지?
빠지직―
마지막까지 버티던 트랩마저 부서지고, 좀비들의 대열은 앞쪽부터 천천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휴우~ 다행이다. 그래, 꺼져 줘라.
유빈은 놈들의 행진이 재개된 것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슬슬 다음 좀비 무리인 빨갱이들이 올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서 두려워지던 참이다. 지금도 어지간히 많은데 만약 저기에 빨갱이들까지 합쳐지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건 사는 곳 근처에서 벌이기에는 너무 큰 모험이었다.
유빈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생각했다. 다음번에 좀비들을 합칠 때에는 좀 더 멀리 진출해서 거기에 트랩을 설치해야겠다고…….
“야! 조금만 기다리면 되는데, 왜? 앞줄 지금 움직이고 있구만!”
삼식이와 규영이가 난간을 두드리며 함께 안타까워한다. 두 번째 이탈자 좀비들이다. 계속 제자리에 서 있어야 했던 뒷줄의 몇 마리가 더 이상은 못 참겠는지 대열을 벗어나 걷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 둘, 셋, 넷……. 규영은 조금 전 유빈이 했던 걸 그대로 따라서 좀비들의 수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모두를 곤경에 빠뜨린 미안함 때문에 유빈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몇 마리가 더 들어올지 예측할 수도 없고, 그렇게 들어오는 놈들을 제지할 방법도 없다.
그저 더 이상은 오지 말라고 마음속으로 빌 뿐이다. 이번에는 처음보다도 더 많은 놈들이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다행히 더 많은 놈들이 빠져나오기 전에 도로 위에 정체되어 있던 좀비들 무리는 전진을 시작했다.
열네 마리. 그 자체로도 적지 않지만, 이놈들이 먼저 이탈한 좀비들과 합류하면 스물다섯 마리나 된다. 이제는 제아무리 보안관이 있다고 해도 한 번에 맞대결로 제압하기는 어려운 숫자가 되어버렸다.
일행은 초조한 심정으로 도로 저 멀리 사라져 가는 좀비들의 대행렬과 골목 안의 이탈자 좀비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내려가서 저 새끼들 잡을까? 몇 마리 아직 여기서 보이는데?”
작업용 장갑의 팔목 부분을 조이며 해머를 집어 드는 보안관을 유빈이 잡았다.
“안 돼, 나가지 마. 빨갱이들, 이 앞으로 지날 시간이야. 3분도 안 남았어.”
후우~ 보안관이 한숨을 쉬며 성질을 꾹 누른다. 답답하다.
없애야만 하는 위험한 놈들이 시야 밖으로 도망가고 있는데, 여기에 갇혀서 꼼짝도 못 한다. 신입은 벌써 전부터 유빈의 탓을 하며 혼잣말을 웅얼거리고 있다.
“전부 몇 마리였어?”
보안관이 묻는다. 유빈이 대답했다.
“처음에 열한 마리, 두 번째가 열네 마리. 총 스물다섯.”
“스물다섯? 스물다섯? 으아, 씨발. 갑자기 좀비 동네가 돼버렸네. 야! 너 이제 어떻게 할래? 이거 어떻게 책임질 거야? 저 새끼들 언제 다 잡느냐고? 아니, 씨발. 감당하지도 못하는 계획은 왜 자꾸 짜고 지랄인데?”
구체적인 숫자를 듣자 신입은 더 흥분해서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딱히 틀린 말이 아니어서 유빈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고만 있었다. 보안관이 나서려는 것도 만류했다. 이럴 때 서로 목소리 높여 봐야 감정만 상한다.
“목소리 낮춰. 빨갱이들 왔어.”
망을 보고 있던 삼식이가 주의를 준 다음에야 신입의 성토는 조금 진정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니는 아직도 골목 안쪽을 향해 서서 혹시 모습을 드러내는 놈이 있나 살피는 중이었다. 땀을 훔치는 유빈의 어깨를 두드리며 보안관이 말했다.
“괜찮아, 유빈아. 그렇게 우울한 얼굴 하지 마. 스물다섯 마리라 해 봐야 별거 아니야. 한 번 나갈 때마다 다섯 마리씩 잡는다고 치면 댓 번이면 다 죽일 수 있다고.”
“뭐, 죽일 수 있는 건 둘째 치고…… 미안해서 그러지. 신입 말도 맞는 게, 이게 지금 벌써 몇 번째야. 내가 아이디어랍시고 내기만 하면 다 재앙으로 돌아오는 것 같아서……. 지금도 그래. 나 때문에 이제 골목 안쪽도 마음 놓고 못 다니게 되어버렸잖아. 그리고 스물다섯 마리나 되는 좀비를 잡는 것도 꽤나 큰일이지. 그 새끼들이 어디에 있는 줄 알고 그걸 다 찾아.”
“스물다섯 마리보다 더 돼. 길 건너에서도 일곱 마리 빠져나갔어.”
태권소녀가 끼어들어서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일러준다. 유빈과 보안관이 눈을 똥그랗게 뜨며 물었다.
“일곱 놈이나? 그건 또 언제? 어디로?”
“너희가 바보 같은 표정으로 하나둘 하면서 좀비들 머릿수 세고 있을 때, 저쪽 길 건너에 있던 놈들이 슬쩍 빠져나와서 저기로 가더라. 저기 보여? 토끼 굴 있는 데. 그리로 갔어.”
우와,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훑던 유빈의 등은 또 땀으로 흠뻑 젖었다.
자신들이 숨어 있는 골목 쪽만 신경 쓰느라 그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전혀 몰랐다.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 태권소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손사래를 쳤다.
“아, 고맙다느니, 미안하다느니…… 뭐, 그런 말 할 거면 관둬. 나도 너만 믿고 이쪽으로 좀비들 몇 마리 들어오는지는 안 세었으니까. 그냥 자연스러운 임무 분담인 거야, 이런 거는. 이쪽 보는 사람 있으면, 저쪽 보는 사람도 있어야지. 제니처럼 골목만 지키는 사람도 있는 거고…… 저 신입이라는 자식처럼 징징대는 역할도 있는 거고. 뭐, 그런 것보다도 이제 어떻게 할 건지나 이야기해 보자.”
“그걸 뭐 이야기하고 말고 할 게 있나? 간단한 건데. 다 잡아야지. 때려죽이면 돼.”
보안관이 장갑 낀 손바닥을 주먹으로 치며 자신 있게 뻥뻥 내뱉었지만, 태권소녀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유빈을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응? 나? 싸움은 보안관이 훨씬…….”
유빈이 웅얼거리자 태권소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쟤는 세.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 져 본 적도 거의 없을 거야. 그러니까 저런 애가 싸우는 방식은 다른 평범한 사람들한테 아무 도움도 안 돼. 혼자 다 잡을 수 있을 숫자면 그냥 쟤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면 되겠지만, 스무 마리가 넘으면 그러기에 너무 많아. 나도 발목이 아직 온전히 낫지 않았고. 그러니까 이럴 때는 너 같은 애 의견이 더 필요해. 힘보다 잔머리로 싸우는 타입. 자기는 가능한 한 덜 다치고 상대를 이기는 방식을 궁리하는, 너 같은 애.”
이게 지금…… 칭찬이야, 아니면 비꼬는 거야?
유빈은 혼란스러워하면서 태권소녀의 입술을 멍하니 바라봤다.
야, 네가 묘사하는 나라는 인간은 완전히 비열한 쥐새끼에, 뒤에서 칼 박을 것 같은 얍삽이잖아. 똑같은 말이라도 좀 더 듣기 좋게 포장해 줄 수 있을 텐데…….
어쨌든 본질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어서 유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역할은 계획을 짜는 거다. 비록 완벽하지 않아서 바라지 않던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나마 그게 내가 제일 잘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의욕이 솟아나는 것 같다. 모두를 모이게 한 유빈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에, 일단…… 미안해.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좀비들이 더 들어오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 나는 지금까지 저놈들이 그냥 일직선으로 쭉 간다고만 생각했어. 며칠 동안 그런 꼴만 봤고. 그래서 우리들이 있는 골목으로 빠져나온다거나 하는 생각은 일절 하지 않고 아예 선택지에서도 빼놨어. 물론 그건 내가 경솔한 거였지만…….”
“또 이야기 늘어진다. 작전만 딱 말하라고. 너는 이거! 또 너는 이거! 구체적으로 사람이랑 일이랑 딱딱 찍어서! 그리고 한 가지만 일러주자면, 네가 경솔한 게 아니야. 나도 도로로 지나가던 좀비들이 저기로 들어오는 건 처음 봤어.”
태권소녀의 말에 유빈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요점만 간단히.
“좋아. 짧게 말하자면, 조를 세 개로 나눈다. 감시조, 설치조, 전투조. 먼저 감시조. 얘네는 원래대로 이 자리에서 감시하다가 좀비 행렬이 오면 호각을 부는 거야. 그다음이 설치조. 이 팀은 내려가서 여기 골목 안쪽부터 네 블록의 입구마다 돌며 줄을 쳐 놓고 깡통도 달아 놔. 만약에 좀비들이 거기를 지나간다면 건드려서 소리가 나도록. 그리고 전투조. 전투조는 설치조가 일하는 동안 옆에서 지켜 줘. 그리고 좀비들 나오거나 깡통이 울리면 쫓아가서 싸워야 하고.”
“왜 네 블록이야? 너무 좁잖아. 좀비들 분명 거기보다 더 멀리까지 갔을 것 같은데.”
“이 건물이랑 우리 모텔까지 이어지는 곳부터 일단 먼저 정리를 해야 이동을 하지. 그 동선 내에 없으면 한 방향씩 넓혀가면서 차츰 찾고. 아예 이 동네 밖으로 저희들이 알아서 나가 주면 더 좋고. 네가 그랬잖아, 가능한 한 덜 다치고 상대를 이기는 방식이어야 한다면서? 이게 그마나 제일 안전해.”
음, 다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태권소녀가 신입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물었다.
“너 혹시 이거보다 더 나은 작전 있어? 아까 보니까 불만이 많더라?”
“아니……. 뭐, 작전이야 생각을 하다 보면 나오는 거지, 무슨 이렇게 서두른다고…….”
신입이 눈을 피하면서 중얼거린다. 태권소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일어나서 자신의 무기인 야구 배트를 집어 들었다.
신입과 규영, 제니를 감시조에 넣었고, 유빈과 삼식이로 설치조, 보안관과 태권소녀로 전투조가 짜여졌다.
어차피 설치하는 도중에 좀비들을 만나게 되면 결국 설치조도 싸워야 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전투력이 센 두 사람이 항상 준비를 갖춘 채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 작업하는 데는 이 모텔이랑 저기 저…… 붉은 벽돌 건물 사이야. 일단 오늘은 줄을 쳐서 저 안쪽, 좁은 여관 골목으로 들어가거나 나가지 못하게 막아놓을 거고, 내일 철물점으로 다시 가서 철조망이나 뭐 적당한 걸 찾아오면 다시 한 번 일해야 돼. 작업을 하는 도중이든 뭐든, 만약에 너무 많은 좀비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면 무조건 다시 안으로 피하는 거야. 알았지?”
유빈은 안전제일이라는 걸 다시 강조했다. 놈들이 모두 한데 몰려 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척하면 착, 눈치로 서로의 맘을 헤아릴 수 있는 보안관과 삼식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태권소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너무 많이라는 게 도대체 몇 마리야? 확실하게 해야지. 야, 너. 몇 마리 잡을 수 있어? 무리하지 않는 범위라고 하면.”
“아홉 마리, 아니면 열?”
보안관의 허풍은 그새 더 발전을 했다. 일곱 마리를 운운하더니, 이제는 열 마리를 한 번에 잡는단다. 태권소녀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삼식이도, 유빈도 믿지 않았다. 유빈이 정확한 숫자를 제시했다.
“다섯 마리까지는 싸우자. 보안관 셋, 혜주 하나, 우리 둘이 하나. 거기까지는 그렇게 무리 없을 것 같으니까. 여섯부터는 너무 많은 거야. 됐지?”
“그럼 여섯까지 싸우는 걸로 해. 나도 두 마리 정도쯤은 문제없으니까.”
태권소녀가 말했다.
얘도 참……. 싸우는 걸로 자존심 세우는 일에는 보안관 못지않다.
그래, 알았어. 그럼 일곱부터 피하자.
그래 봐야 어차피 세 명이 세 마리를 상대하는 셈이어서 유빈은 그녀에게 동의해 주고, 장갑과 대형 스패너, 커터, 빨랫줄을 챙겼다. 이놈의 빨랫줄, 이제는 보기도 싫다.
“빨갱이들 다 갔어. 그다음 놈들 올 때까지 25분 여유 있어.”
도로 쪽을 담당하고 있는 규영이 시간표를 확인하고 일러준다.
25분이라고 적어 놓기는 했지만, 워낙 부족한 데이터로 만든 허술한 시간표라 앞뒤로 7분 정도는 언제든 변경될 수 있다. 그러니까 17분 내에 돌아오는 걸로 생각하고 일을 시작해야 한다.
“조심해야 돼요. 정말 조심해요.”
“하하, 네가 망봐줄 거잖아. 걱정할 거 없어.”
간절하게 당부하는 제니에게 웃음으로 인사를 해주고, 네 명은 빠르게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촤르륵―
자물쇠를 풀고 셔터 문을 들어 올린 보안관이 열쇠를 태권소녀에게 넘긴다.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열쇠를 낯선 물건 보듯 하며 태권소녀가 물었다.
“이거 뭐야? 왜 나한테 이걸 줘?”
“뭐긴! 너 버리고 안 갈 테니까 안심하라는 의미지. 오케이?”
보안관은 찡긋 윙크를 하며 엄지까지 들어 보인다.
오케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촌스럽기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태권소녀도 안다. 좀비들이 돌아다니는 이 골목에 내려선 네 명 중 자신을 제외한 셋은 원래부터 일행이었다. 그런 상황이니 외톨이 이방인을 심리적으로 안정시키기 위함이라는 걸.
원래대로라면 ‘됐어, 너 믿으니까’라고 하며 다시 돌려줘야 멋진 상황의 완성이겠지만, 태권소녀는 못 이기는 척하고 열쇠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정말 치사한 변명처럼 들릴지 몰라도, 그녀에게는 규영이를 책임지고 돌봐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니 쿨하지 않더라도 일단은 열쇠를 챙기는 편이 확실하다.
그리고…… 이제 그만 잊고 싶지만, 한 팀이라고 꾹 믿었던 일행들에게 버림받았던 기억이 여전히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와, 이거, 꽤 오랜만에 휘둘러 보네. 흐앗! 으랴압!”
골목의 안팎을 휙 둘러본 다음, 보안관은 한쪽으로 들어서서 해머로 연습 스윙을 해 보았다.
부웅― 붕―
묵직한 쇳덩어리가 바람을 가르며 엄청난 소리가 난다. 며칠 연습을 쉬었다고 해서 녹이 슬 정도의 근육이 아닌가 보다.
반대쪽에서도 태권소녀가 야구 배트를 돌린다. 둘이 마음껏 힘자랑을 하게 두고, 삼식이와 유빈은 빨랫줄을 가로질러 돌려서 골목을 막는 데 집중했다.
어차피 근처로 좀비가 다가오면 위에서 내려다보는 제니가 뭔가 신호를 보낼 테니까.
코스트코로 들어오는 진입로와 달리 이쪽 여관 골목으로 들어오는 길은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큼 좁아서, 허술한 그물 모양을 만드는 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여기에 뭘 달아서 소리를 낼 거야?”
빨랫줄 매듭을 기둥에 묶으면서 삼식이가 물었다.
“이걸로.”
마지막 두 가닥을 길게 빼서 셔터와 팽팽하게 연결하며 유빈이 말했다.
누군가 저 골목으로 들어가고 싶어서, 혹은 저기에서 나오고 싶어서 이 허술한 빨랫줄 그물에 무게를 실어 흔들면 셔터가 출렁거리며 소리를 내는 방식이다.
묶은 줄을 시험 삼아 당겨 보자 차르릉― 차르릉― 셔터의 쇠파이프들이 특유의 소음을 만들어냈다. 살짝 당기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니, 매달리고 발광을 하면 더 뚜렷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호오~ 삼식이가 꽤 만족스러워한다.
“야, 저거, 저 새끼들…….”
지치지도 않고 해머를 돌리던 보안관이 멈칫하며 골목 안쪽을 가리켰다. 태권소녀도 비슷한 타이밍에 스윙 연습을 멈추고 배트를 단단히 그러쥐었다.
여관 골목 안쪽, 20여 미터 떨어진 좁은 사거리에 좀비들이 지나고 있다. 하나, 둘…… 모두 다섯 마리다.
다섯 마리의 좀비는 <최신 DVD, 커플 PC 완비>라고 적힌 여관 주차장의 포렴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서 오라고 유혹하는 것처럼 푸른색 포렴이 흔들거린다.
눈빛을 교환한 네 사람은 일제히 무기를 빼 들고 달려갔다. 다들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다섯 마리! 저만큼 작은 규모로 따로 떨어져 있을 때 죽여 놔야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