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 Rush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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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Rush (1)
2022.04.09.
8월의 첫 아침은 쾌적하게 시작되었다. 멀쩡한 방의 침대 위에서.
“아, 개운하다…….”
햇살을 받으며 깨어난 진우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이렇게 개운하게 아침을 맞아본 것이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낯선 곳에서 잠이 들었다가 지금 막 눈을 떴지만, 방금 전 이 방에 들어왔던 것처럼 모든 게 다 기억난다.
여기는 둔내 터널의 관리 사무소에 붙은 관사 2층이고, 어제 자신은 터널에서 100마리가 넘는 좀비들을 쏴 죽이고, 태워 죽이고, 폭파시켜 죽였다.
그리고 어젯밤, 아주 달달하고 쌉쌀한 와인을 세 병째 마시다가 잠이 들었었다.
“역시 술의 힘인가……. 하긴, 그동안 오래 참았지.”
진우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중얼거렸다. 시계가 표시하는 시간은 오전 일곱 시. 요즘은 늘 선잠이 든 채로 꿈속에서조차 시달리기가 일쑤였는데, 오늘은 정말 푹 잤다.
바닥에는 어제 마시다가 놓쳐 버린 와인 병이 자줏빛 와인을 눈물처럼 쏟아낸 뒤 뒹굴고 있다.
쯧쯧, 아까운 술을…….
진우는 아쉬운 마음에 끌탕을 했다.
입대하기 전, 진우는 대단한 애주가였다. 그 괴물 같은 삼식이에게는 못 이기지만, 보안관이나 유빈이보다는 확실히 셌다.
같이 일하던 아저씨들보다도 잘 마셨다. 주량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외삼촌이다.
주민등록증을 받은 이래 평생 아침을 냉면 사발에 채운 소주와 날달걀 한 개로 때웠다는 전설적인 외삼촌의 이야기를 감안해 볼 때, 진우의 주량은 외가 쪽에서 물려받은 재능인지도 모른다.
물론 요즘은 혹시라도 생존의 끈을 놓치게 될까 봐 자제하는 중이다.
“앞으로 종종 마시고 자 줘야겠는데?”
기지개를 켠 뒤, 배낭을 메고 하이바와 두 자루의 총을 챙기면서 진우가 중얼거렸다. 배낭을 놓고 나왔다가 실탄을 모두 화재로 잃어버렸던 이래, 진우는 어디를 가든 버릇처럼 모든 짐을 챙겨 다닌다.
어찌나 만족스러운 휴식이었는지, 마음 같아서는 저 머루 와인을 몇 병 넣어 가고 싶다.
하지만 그가 개운한 아침을 맞을 수 있던 진짜 이유는 정말 오랜만에 침대에서 큰대자로 뻗어 잤기 때문이다. 발전소를 나와 지금까지 그가 누렸던 가장 편하고 푹신한 잠자리였다.
쪼르르르르―
2층의 공용 화장실로 간 진우는 소변기에 오줌을 누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헛웃음을 지었다.
보는 사람도 없겠다, 찾아올 사람도 없겠다, 그냥 아무 데나 갈겨도 되는 거였는데, 버젓한 건물에 들어와 있자니 버릇처럼 화장실의 소변기를 찾았다.
몸에 밴 버릇이란 무서운 거구나…….
진우는 새삼 깨달았다. 며칠 정도의 야생 생활 정도로는 금방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꾸르르륵―
물을 마시자 위장까지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지며 뱃속에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어젯밤 제대로 먹지도 않은 채 술병만 껴안고 뒹굴다가 잠이 드는 바람에, 속에 든 거라고는 육포 몇 조각이 전부다.
그래그래, 뭐 좀 먹자…….
진우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1층으로 내려왔다. 어젯밤 희미한 플래시 불빛에 의존해 정찰했을 때, 주방을 봐뒀다.
회의실 옆에 위치한 주방은 그리 크다고 할 수 없지만, 개수대와 조리 도구, 냉장고와 찬장, 밥솥 따위를 모두 갖추고 있다. 그게 어딘가.
딸칵―
가스레인지의 스위치를 돌리자 파란 불꽃이 올라온다. 진우는 신기하다는 듯 그 불꽃을 바라보았다.
LPG 가스를 쓰는 곳이니 불이 들어오는 게 당연한데도, 아직 작동하고 있는 문명의 이기를 만나는 일은 낯설고 반갑다.
“불은 들어오니까 해 먹을 수 있는 게 뭐가 있나 좀 볼까?”
찬장 문을 열자마자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검은 생물들이 사방으로 후다닥 흩어진다. 바퀴벌레다. 어지간히도 많다.
어우, 진우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얼른 손을 뗐다. 좀비들을 만났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소름이 돋아 올랐다.
툭, 찬장 앞쪽으로 기어 나오다가 바닥으로 떨어진 놈이 얼른 싱크대 아래로 몸을 숨긴다. 저 개새끼들이 꼬물거리는 걸 봤으니 개봉되어 있던 건 손도 대지 말아야겠다.
“라면…… 참치, 꽁치, 스팸, 즉석밥……. 다들 비슷하게 먹고 살았구나.”
그 외에도 다른 것들이 몇 가지 더 있지만, 밀봉된 상태가 아니어서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정식으로 끓인 라면에 밥을 먹어볼까 하고 걸려 있던 냄비를 집었다.
흠흠흠,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면서 정수기 옆에 줄줄이 놓여 있던 새 생수통 하나를 뜯었다.
깨끗이 씻은 냄비에 물을 끓이는 동안, 진우는 어제 잤던 방 냉장고에서 고추장 통을 꺼내 왔다. 주방의 냉장고는 열 생각도 없다. 근처만 지나가도 풍기는 구리구리한 냄새가 절대 그러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윽고 식사 준비가 다 됐다. 메뉴는 참치 라면과 밥, 고추장을 찍어 먹는 스팸.
김치를 곁들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기는 해도 이 정도면 성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뽀글이가 아니라 정식으로 끓인 라면이라니!
바깥 풍경이 보이는 사무실의 탁자로 먹을 것들을 옮긴 진우는 소파에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흐으음~ 참치 기름이 듬뿍 밴 라면 국물 냄새가 콧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온다. 좋은 냄새다. 그리고 맛있다. 진우는 간만에 맛보는 문명인적인 식사를 아주 제대로 만끽했다.
“산밖에 없네.”
식사를 마치고 사무소 밖으로 나온 진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터널 방향을 포함해 사방 어느 쪽을 향하여 서 있든 간에 야트막한 산이 그를 맞는다. 민가도 없고, 마을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그러니 이렇게 한산하게 자고, 평화로운 식사를 할 수 있었겠지…….
진우는 캐비닛에서 꺼내 온 열쇠 꾸러미들을 들고 창고 쪽으로 걸어갔다. 이것만 있으면 주변의 건물 네 개가 다 그의 것이나 다름없다.
비상용 발전기가 들어 있는 건물을 지나자 SUV 한 대, 승용차 한 대, 이렇게 두 대의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다. 물론 진우는 이놈들의 열쇠도 가지고 나왔다.
철컥, SUV의 문을 연 진우는 운전석에 앉아 키를 넣고 돌려봤다.
키리리릭― 위위잉―
2주 이상 방치되어 있던 터라 배터리가 좀 시원찮았지만, 약간의 지연이 있은 후에 결국은 시동이 걸렸다.
화아악―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 나오는 송풍구를 꺼버리고, 진우는 차창 너머 도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릉― 부릉― 빵빵! 빵빵! 우우우웅~”
두 손으로 핸들을 잡고 가볍게 흔들며 어린애처럼 입으로 차를 몰아봤다.
이렇게 달릴 수만 있다면…… 그러면 화천이든 서울이든 몇 시간 만에 도착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것은 이뤄질 수 없는 꿈이다. 그의 눈앞에 길게 펼쳐진 도로는 양방향 모두 자동차들로 꽉 막혀 있다. 이걸 몰고 달릴 수 있는 곳은 이 주차장에서부터 20여 미터 앞의 진입로까지가 전부다.
“젠장, 더럽게 아쉽네. 군인들이 뚫어놓은 도로까지만 가면 되는데…….”
자동차 문을 열 때부터 이걸 타고 달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막상 운전대를 잡고 바라보니 그 상실감은 몇 배나 더 커졌다.
당장에라도 관리 사무소 2층으로 뛰어 올라가서 어제 마신 머루 와인을 또 두어 병 비워 버리고 싶은 기분이다.
그의 앞에 끝없이 펼쳐진 것 같은 직선 도로를 계속 걷고, 또 걷고…… 그래 봐야 목적지 부근에도 못 미친다. 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다.
딸깍, 진우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라디오를 켰다. 아무리 주파수를 위아래로 바꿔봐도 들리는 것이라고는 치이이익― 하는 잡음뿐이다.
“적어도 피난소가 어디 있는지 정도는 계속 알려줘야 하는 것 아닌가?”
진우는 원망 가득한 눈으로 아무 죄도 없는 라디오를 빤히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혹시 시디가 있을까 싶어 글러브 박스를 열었다. 있다. 좀 긁히긴 했지만, 세 장이나 들어 있다.
그런데 영 그의 취향이 아니다. 구리다. 핑크 펀치는 기대도 안 했지만, 세 장 모두 트로트 메들리만 고집할 필요까지는 없었을 텐데.
포기하려던 진우의 눈에 운전석 도어 포켓에 있는 한 장의 CD가 들어왔다. 지하철 행상들이 들고 다니며 파는, 아주 구닥다리 컴필레이션 앨범이다.
만 원만 내면 몇 장이나 주는, 그런 싸구려. 아니면 무단 복사해서 파는 불법 음반이든가.
그래도 진우는 그 CD를 오디오에 넣었다. 음악이 듣고 싶다.
어느 날 갑자기 지옥이 되어버린 공간에서 끊임없이 들어야 했던 괴물들의 기괴한 울부짖음, 비명과 총소리, 무너지고 터지면서 고막을 쉬지 않고 진동시킨 전장의 소음들, 그리고 바로 몇 시간 전에도 자신을 미쳐 버리기 직전까지 몰아붙이던 터널 안의 굉음까지…….
신경을 긁어 대는, 수많은 일그러진 그 음파에 지친 채로 진우의 자아는 너무나 간절히 문명의 소리를 원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노래를 마지막으로 들었던 게 대체 언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게 될지 몰라 늘 귀를 활짝 열어두고 살아야 하는 좀비 세상에서 음악을 듣는다는 건 대단히 사치스러운 일이 돼버렸다.
아니, 거의 살아남길 포기한 행동과 다름없다. 평화롭던 시절처럼 이어폰을 낀 채 걸어 다녔다가는 아마 한나절을 못 넘기고 뒤쪽에서 덮치는 좀비의 밥이 되고 말 것이므로.
“첫 번째는 넘기자.”
1번 곡이 ‘마이 웨이’여서 진우는 CD를 넣자마자 다음 곡으로 옮겨가려 했다.
정말 간만에 듣는, 그리고 언제 또 듣게 될지 모르는 노래인데, 느끼한 아저씨 목소리로 서막을 장식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낯선 남의 차라 그 간단한 조작이 빨리빨리 되지 않았다.
진우가 버튼을 찾는 동안 CD는 재생을 시작했다. 그가 아는 것과 다른 마이 웨이였다. 음색으로 봐서는 나이가 꽤 든 여자가 부르는, 그것도 일본어로 부르는 마이 웨이다.
FF 버튼을 찾아내서 누르려던 진우가 손가락을 멈칫했다. 그런 후, 자동차 문을 잠그고 볼륨을 높였다.
누구인지도 모르고, 음질도 꽤나 후진 데다, 가사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다. 아마 영어 가사를 일본어로 바꿔 부르는 것일 테지만…….
그런데 이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오케스트라 반주를 압도하는 이 기교가 좋아서 진우는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몇천 번이나 생채기를 입은 청각이 모처럼 치유받는 듯하다. 지속적으로 자신을 괴롭히던 이명마저도 잦아드는 기분이다.
전체 음악이 끝났을 때, 진우는 처음의 그 노래를 다시 재생시켰다. 이번에는 눈을 뜬 채 핸들에 얼굴을 기대고 삭막한 도로를 바라보며 들었다.
“좋다. 아줌마, 노래 잘하네.”
똑같은 노래를 여러 번 반복해서 들은 후, 진우는 CD를 꺼내 아무 케이스에나 담고 배낭에 챙겨 넣었다.
이건 가지고 있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언젠가 그가 알던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함께 이 노래를 들으며 말해 주리라. 정말 다 귀찮아져서 주저앉고 싶었을 때, 내게 큰 힘을 준 노래라고.
오오~ 그거 꽤 있어 보이잖아?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상황이 멋진 것 같아서,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진우의 입가에는 슬쩍 미소가 번졌다.
“야! 그러고 싶으면 움직여! 가만히 여기 앉아 있어 봐야 너 아는 사람 절대 이리로 안 온다.”
스스로에게 동기를 부여한 진우는 SUV 밖으로 나와서 창고 쪽으로 걸어갔다.
달리지도 못하는 자동차보다는 뭔가 좀 더 쓸모가 있는 게 있기를 기대하면서. 한참 열쇠 더미와 씨름을 하다가 결국 제1창고라는 태그가 붙어 있는 열쇠를 찾아냈다.
끼이익―
창고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청소 도구와 몇 가지 장비가 실려 있는 리어카다.
플래시를 켠 K―2를 앞세우고 들어가기는 했지만, 위쪽으로 뚫린 창문을 통해 워낙 빛이 환하게 비쳐 들어서 보조 조명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핸드 드릴부터 소형 진동 롤러까지, 주로 도로 공사용 장비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모두 다 지금의 그에게는 별 필요 없는 것들이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창고를 한 바퀴 돈 진우는 이제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구석에 물체를 덮은 방수포를 열어젖혔다. 그러고는 곧 눈을 반짝였다.
자전거다, 자전거!
딱 봐도 뭐 그리 대단한 고급품 같지는 않아 보이지만, 그래도 나름 있을 건 다 있다. 램프에, 물통에, 핸드 펌프에, 안장 뒤쪽에는 조그만 가방도 붙여놨다.
이거라면 차가 꽉 막힌 도로라도 쌩쌩 지나다닐 수 있다. 지금까지보다 몇 배나 더 빠르게…….
새로운 장비를 발견하자마자 진우의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동안 계속 산속만 헤매고 다니느라 꿈도 꾸지 못했던 자전거 투어링이다.
진우는 자전거를 꺼내 주차장에 세워 놓고 필요한 것들을 챙기기 위해 사무실로 뛰어 들어갔다.
여분의 배터리, 여분의 플래시, 물을 보충하고 한 컵 시원하게 들이켰다. 작업용 장갑과 라면도 배낭에 쑤셔 넣었다.
가져가고 싶은 것은 잔뜩 있지만 짊어질 수 있는 무게에 한계가 있으니까 스팸과 참치 캔은 딱 한 개씩만 챙겼다. 이렇게 용기가 쇠로 된 것들과 수분을 함유하고 있는 것들은 아무래도 무겁기 마련이라 부담스럽다.
“가만있어 봐……. 뭐 안 가져가는 것 없나?”
문을 나서면서 진우는 아쉽다는 듯 사무소를 한 번 돌아보았다.
젠장, 저 가스레인지, 냄비, 생수통에 가득가득 들어 있는 물, 머루 와인, 그리고 침대……. 여기서 나가 길바닥을 헤매다 보면 또 얼마나 생각이 날까?
진우는 하루쯤 더 푹 쉬고 싶다는 유혹을 애써 뿌리치고 주차장으로 뛰어나왔다.
하루를 쉬고 나면 이틀을, 이틀을 쉬고 나면 일주일을 쉬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그리고 그렇게 무의미한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나아질 건 하나도 없다.
화천을 찍고 탄약을 찾아 서울로 가기로 했으니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다. 그래서 아끼던 사람들을, 전부 다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한두 명쯤은 만나고 싶다. 꼭…… 만나고 싶다.
개머리판을 접어 둔 채 한 자루는 허리 뒤로, 한 자루는 대각선으로 비껴 멘 진우는 자전거 안장에 앉은 채로 익숙해질 때까지 몇 차례나 그걸 빠르게 잡으며 사격 자세를 취하는 연습을 하고 멜빵끈의 길이를 조절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가 갑자기 자동차 사이로 튀어나오는 놈들이나, 언덕 위에서 뛰어내리는 놈들을 만나게 됐을 경우를 대비해서다. 괜히 어정쩡한 자세로 방아쇠를 당겼다가 갈비뼈를 다치거나 하고 싶지는 않다.
“좋아, 이쯤 하면 된 것 같다.”
총 잡기가 익숙해졌으니 이제 주행 연습이다.
사락― 촤락― 촤라락― 촤라락―
페달을 밟아 보니 꽤나 부드럽게 바퀴가 돈다. 처음에는 등에 지고 있는 배낭과 두 자루의 총 무게 때문에 중심을 잡는 게 어색했지만, 주차장을 한 바퀴 돌다 보니 이내 익숙해진다.
하이바 끈을 고정시킨 진우는 힘차게 페달을 밟아 진입로를 따라 내려갔다.
도로로 진입해 방향을 꺾으면서 멈춰 서 있는 고급 승용차를 자전거로 슬쩍 긁고 말았지만…… 그런 따위, 이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터였다.
싸아아아―
귓가를 울리는 바람 소리가 그에게 빨라진 속도를 일러준다. 기분이 좋다. 도로가 약간 내리막이어서 별로 힘을 들이지 않아도 자전거는 주변의 풍경들을 슥슥, 지나쳐 버린다.
멀리 보인다고 생각했던 표지판이 어느새 머리 위로 와 있다가 저 뒤로 사라지고,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수십 대의 자동차를 제쳤다. 정말 간만에 느껴 보는 속도감에 진우는 소년처럼 크게 입을 벌리고 웃었다.
“하하하하하― 하하하―!”
주욱 늘어서 있는 축사 부근을 지날 때, 죽은 소들이 썩어가는 냄새인지, 똥 냄새인지 모를 악취를 들이켜면서도 진우의 웃음은 그치지 않았다.
이까짓 거, 제아무리 구려도 좀비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냄새에 비하면 참고 맡아 줄 만하다.
그리고 금방 지나쳐 버리면 그만이다. 진우는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폐 속 가득 똥 냄새를 들이마시며 신나게 페달을 밟았다.
그렇게 열심히 빠르게 자동차들 사이를 질주하는 동안에도 인가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럼 대체 이 많은 자동차들은 어디에서부터 여기까지 온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번호판에 지역명이 적혀 있지 않으니 전혀 알 길이 없지만, 아주 멀리에서부터 여기까지 도망을 온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마침내 꽉 막힌 정체를 만나고 결국은 차를 버린 채 뛰어서라도 달아났을 테지.
그리고 지금 진우는 그 많은 사람들이 도망쳐 온 곳을 향해 풀 스피드로 달려가고 있다. 좀비와, 죽음과, 폐허 같은 끔찍한 이미지들이 덧칠해진 곳으로.
“금방 간다! 기다려!”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진우는 페달을 밟는 다리에 더 힘을 주었다. 맞부딪쳐 오는 바람이 온몸을 시원하게 식혀준다.
하 중위가 감아 준 그대로의 붕대 안쪽까지도 스며들 만큼 시원한 바람이었다. 들어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지만, 속도를 높이며 진우는 자전거 손잡이에 부착된 벨까지 울렸다.
띠리링― 띠리링― 띠리링―
씨이잉―
금속 벨의 가냘픈 울림만을 남기고 진우를 태운 자전거는 빠르게 멀어져 갔다.
***
띠리링― 띠리링―
삼식이가 재미를 들렸는지 계속 자전거 벨을 눌러 댄다. 설명을 하던 유빈이 잠시 말을 멈추고 쳐다보면 씨익 웃으며 멈췄다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면 또 손가락으로 벨 손잡이를 튕긴다. 유빈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야, 너…… 긴장하지 않는 건 좋은데…… 이러다가 실수할까 봐 겁난다, 나는.”
“아니, 뭐, 복잡한 임무라야 열심히 듣고 기억하려고 애를 쓰지. 엄청 간단한 일이잖아. 나는 신입이랑 저 멀리 사거리 밖으로 자전거 타고 나가서 우측으로 또 두 블록 더 간 다음, 거기에서 담배를 열라 피운다. 통에도 좀 피워 놓고. 그러면 그동안 너희는 여기에서 간단한 공사를 한다. 그거잖아. 뭐, 더 있어?”
삼식이가 생글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복잡하다. 자전거를 타고 간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위험한 곳으로 더 멀리 나가는 거고, 게다가 담배 연기를 계속 피워서 미끼가 되는 일이다.
그런데도 이놈은 여유만만이다. 물론 바로 옆에 서 있는 신입처럼 죽상을 하고 있는 것보다는 낫지만.
지금까지 얻은 정보와 계산에 따르면, 그렇게까지 아슬아슬한 상황은 없을 거긴 하다.
다음 좀비 무리들인 분홍이들이 삼식이가 담배를 피울 곳까지 오려면 앞으로도 20분 이상 걸려야 할 거고, 그때 놈들이 오는 걸 보자마자 삼식이와 신입은 자전거를 타고 이리로 도망 오면 되니까.
“후우~ 진짜 담배 한 대 편하게 피우고 오는 게 이렇게까지 위험하고 힘든 일이어야 하냐? 내가 진짜…… 후우, 나니까 참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활. 매일매일 지옥이 따로 없다. 하루도 편하게 지나는 날이 없어.”
신입은 고급 자전거의 손잡이를 꽉 쥔 채 한숨을 푹푹 쉬었다. 태권소녀는 같잖다는 표정으로 한소리 한다.
“네가 대체 힘든 일을 한 게 뭐가 있다고 지옥이니, 편한 날이 없느니 떠들어?”
“뭐? 뙤약볕에서 매일 망보는 게 쉬운 줄 알아?”
지지 않으려 대들면서도 신입은 얼른 자전거에 올라탔다.
태권소녀는 별로 자비가 없어서 여차하면 엉덩이로 킥이 들어온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며칠 동안 대여섯 번 걷어차이면서 얻은, 값진 교훈이다.
“담배 충분히 챙겼지?”
유빈의 질문에 삼식이와 신입은 배낭을 툭툭, 두들겨 보인다.
그래, 유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서 실컷 피우고 와. 아주 너구리 굴을 만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