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0. 칠월의 마지막 날 (6) (220/449)


220. 칠월의 마지막 날 (6)
2022.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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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옆과 뒤쪽의 모든 유리창이 일시에 박살 나고, 주홍색 불꽃 구름이 피어나 주변을 삼켰다.

콰장창―!

버스의 옆면을 따라 달리던 좀비들이 그 충격에 휘말려 날아가며 멈춰 서 있던 자동차나 정비로의 콘크리트를 들이받고 나뒹굴었다.

물론 크레모아가 아니니까 이미 꽤 멀리 달려온 진우까지 다 날려 버릴 만큼의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박살 나며 날아온 작은 파편과 유리 조각들이 주변을 때리고 떨어질 정도는 되었다.

“우와앗!”

확― 하고 등을 덮쳐 온 열기에 진우는 얼른 몸을 낮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수십 마리에 달하는 좀비들이 뼈가 부러진 채 옆 차 위로 날아가 얹혀 있거나 불길에 집어삼켜졌다. 그리고 정말로 엄청난 크기의 검은 연기가 버스 내부에서부터 피어나오고 있다.

그 난리통에 용케 휘말리지 않고 아직 멀쩡하게 살아남은 좀비들의 수는 열댓 마리.

그중 절반은 커진 불꽃에 끌리는지 멍하니 멈춰 섰고, 나머지 절반은 뒤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관심도 없다는 듯 일직선으로 덤벼댄다.

“허!”

갑자기 일어난 전세의 변화에 진우의 입에서는 탄성이 터졌다. 그러고는 곧바로 몸을 돌려 사격 자세를 취했다.

칠십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드니까 무서운 거지, 일곱 마리 정도쯤은 장난이다. 게다가 이놈들은 밖에서 보아왔던 여느 좀비들보다는 좀 느리기까지 하다.

탕― 탕― 탕― 탕탕탕― 탕탕― 탕탕―

진우가 방아쇠를 당기며 차례로 총구를 돌리자 순식간에 일곱 마리 좀비의 머리에서 뇌수가 뿜어져 나왔다.

자동차 지붕을 타 넘으려던 일곱 번째 놈의 목이 뒤로 꺾인 채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걸 확인한 진우는 참아왔던 숨을 내쉬었다. 이제 한결 여유로워졌다. 더 이상 뒷덜미를 낚일까 봐 마음 졸이며 달리지 않아도 된다.

물론 그렇다고 이 아슬아슬한 서바이벌 게임이 끝난 것 역시 아니다.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폭발에 휘말려 내동댕이쳐졌던 좀비들이 삐거덕거리며 슬슬 다시 일어서고 있다.

불이 붙어도, 뼈가 부러져도, 심지어 얼굴이 반 이상 날아가도 여전히 덤벼든다. 정말 한결같은 놈들이다. 오른쪽 도로와 자동차 보닛 위에는 기묘하게 뼈가 꺾인 채 불타고 있는 좀비들의 시체가 널렸다.

“하아~ 대가리가…… 하아~ 터지지 않아도…… 불이 오래…… 붙어 있으면…… 하아~ 죽나 보네…….”

머리가 멀쩡하게 달려 있는 좀비의 시체를 보며 진우가 중얼거렸다. 지금껏 그 많은 좀비들을 죽여왔지만 잘 모르던 사실이다.

그의 특기는 주로 마주하자마자 이마에 구멍을 내주는 거였으니까, 불붙은 좀비를 이렇게 오래 움직이도록 내버려 둔 적이 없었다.

이제 진우는 급기와 배기가 짝을 이루는 말인 것에 대해 생각했던 지점을 지나, 배기 환기실까지 왔다. 지금 그의 뒤를 쫓는 좀비들이 뛰어나온 근원지였던 곳.

불타는 자동차는 세 대로 늘어났다. 버스에서 총격전에 몰두해 있는 동안 이쪽에서는 아무도 봐주지 않는 화재가 계속 번졌던 모양이다. 그 덕에 공기는 정말 탁하게 오염되어 있고, 연기는 시꺼멓게 터널 전체를 채웠다.

물론 좋은 점도 있다. 이 타오르는 불꽃 덕에 플래시에 의존하지 않고도 모든 것이 훤히 보인다.

그림자가 과장되게 어른거리는 터널 속을 얼마나 더 내달렸을까, 진우는 이미 본 적이 있는 형태의 둥근 연결로를 만났다.

건너편 터널 차선과 이어진, 또 다른 피난 연락갱이다. 처음 그가 지나온 것과 똑같이 생겼다. 다른 점이라면 이 연락갱 주변에는 그리로 빠져나가 보려던 자동차들이 코를 박은 채 멈춰 서 있다는 것 정도다.

촤악―

진우는 액션 영화의 주인공처럼 몸을 날려 보닛 위를 미끄러지며 자동차 바리케이드를 가로질렀다.

동시에 K―2에 붙여둔 플래시를 켰다. 터널과 직각으로 뚫려 있는 연락갱 안쪽에는 불타오르는 자동차에서 뿜어져 나온 불빛이 미치지 않는다.

“아, 젠장. 이걸 계속 켜놨었네…….”

주야 조준경의 녹색 화면에 연락갱의 내부가 비치는 걸 보며 진우는 혀를 찼다.

버스 안에서 불붙은 좀비들 덕에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시점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귀중한 배터리를 소모해 왔던 것이다. 물론 그것에 관해 신경을 쓸 만큼 상황이 한가하지는 않았다.

셔터가 내려진 것과 수동 개폐 장치의 위치를 확인한 진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화염 좀비들은 이제 버스에 흥미를 잃었는지 30여 미터 뒤에서 그를 쫓아 달려오고 있다.

탕― 탕탕― 탕―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될 만큼 가까워진 놈들 셋을 제압한 뒤, 진우는 곧바로 연락갱 안으로 들어가 손잡이를 돌렸다.

키리리릭― 키리리릭― 키리리릭―

체인이 걸려 돌아가는 소리는 나는데, 셔터가 올라가는 속도는 너무나 느리다.

10센티미터, 20센티, 30센티…… 마음이 바빠진다.

탁탁탁탁탁탁―

와아아아―

좀비들의 발소리와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마침내 사람 하나가 겨우 빠져나갈 정도로 셔터가 올라갔을 때, 진우는 수동 개폐 장치에서 손을 떼고 총을 잡았다. 등 뒤쪽이 훤하게 밝아지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그롸아악―

어느새 연락갱 입구까지 도달한, 불타는 좀비가 포효한다.

투두둑―

세 발을 날려 놈의 얼굴과 가슴을 모두 박살 내버리고 곧바로 셔터 사이로 몸을 던졌다. 더 시간을 끌어봐야 후속 좀비들과 대치하는 시간만 늘어날 뿐이다.

콰창―!

그롸아악― 그르르―!

진우가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셔터가 흔들리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쫓아온 좀비들이 셔터에 몸을 부딪쳐 온 것이다.

진우가 셔터를 밟아 내려 버리려고 할 때, 크롸아아― 요란한 울음소리와 함께 좀비의 머리와 팔이 틈을 비집고 들었다.

투투둑―

겨냥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총구만 놈들 쪽으로 돌린 채 방아쇠를 당겼다.

핑―

좀비의 머리통이 터지는 순간, 바닥을 때린 탄환 하나가 진우의 얼굴 근처로 튕겨 날아온다.

“으아!”

유탄에 치명상을 입을 뻔한 아찔한 순간이지만, 놀라고 있을 여유도 없다.

5미터 길이의 셔터 전체에 걸쳐 밑으로 비집고 들어오려는 놈들의 연기 나는 머리통과 새까맣게 탄 손이 마구 뻗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놈들은 무지막지한 기세로 어깨와 머리를 움직여 가며 셔터를 들어 올리고 있다.

뇌가 없는 놈들이라 미는 힘도 비슷하게 작용하고 있어서 실제로 셔터가 올라가는 폭은 그다지 크지 않지만, 박력만은 정말 대단했다.

콰장창― 우지직―

요란한 소리를 내며 파도처럼 출렁거리는 셔터와 그 아래에서 발광을 하는 좀비들의 불탄 얼굴, 갈퀴 같은 손을 보고 있으면 혼이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그롸아아―!

진우의 발목을 보고 흥분한 좀비가 팔을 쭉 뻗는다. 진우는 얼른 뒷걸음질을 쳐서 물러나며 탄창을 갈아 끼웠다.

내가 맛이 있어봐야 대체 얼마나 맛이 있다고 이렇게나 많은 놈들이 저 뒈지는 줄도 모르고 달려든단 말인가. 그냥 좀 내버려둬 주면 서로 편할 텐데…….

진우는 좀비들의 광기 어린 얼굴을 향해 총구를 겨누며 생각했다. 물론 그런 합의가 통할 것 같으면 그가 상대하는 게 좀비들이 아닐 테지만.

툭― 투둑― 툭― 툭― 투둑― 툭―

상체가 거의 다 빠져나와 일어서려는 놈부터 차례로 총알을 박아 넣었다. 좀비들은 악귀처럼 발버둥을 치다가 뒤통수가 터져 나간 후에야 얌전히 고꾸라졌다. 사격은 금방 끝났다.

셔터 사이에 끼어 있겠다, 불에 타고 있으니 자체 발광으로 시야 양호하겠다, 거리도 10여 미터 내외니…… 이건 빗나갈 리가 없다. 하도 격렬하게 대가리를 흔드는 바람에 두 방씩을 쏘게 만든 놈들은 두엇 된다.

“하아아~ 하아아~”

연기가 피어오르는 개폐문을 보면서 진우는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개폐문 너머, 저편 터널에 남은 좀비들은 아직까지도 그의 뒤를 쫓아오지 못할 만큼 심하게 몸이 망가져 버린 놈들뿐일 것이다.

게다가 불이 붙어 있기도 하고, 그 주변에는 폭발할 수 있는 자동차들이 잔뜩 늘어서 있다. 그놈들에 대한 걱정은 접어둬도 괜찮을 듯하다.

이제 이 지랄 맞은 추격전이 대충 끝나가는 것 같기는 한데, 자신의 현 위치가 대체 터널의 어디쯤인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아까 보았던 그 터널이 막힌 사고의 현장은 돌아서 지나오긴 한 걸까?

연기와 열기, 탁한 공기, 그리고 긴장 때문에 목은 칼칼하고 눈은 따끔거린다. 산속을 헤매는 게 지긋지긋하다고 했는데, 터널 속도 만만치 않게 고되다.

뭐, 이번 터널에서는 그놈의 호기심 때문에 일을 더 키운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헛된 일만은 아니었다.

가장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다음에 누군가 자신이 걸었던 길을 똑같이 걸어 터널을 지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했던 고생을 반복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미 좀비들을 다 죽이거나 공격력을 아주 약하게 만들어 버렸으니까.

“이쪽이 나가는 길인가? 아니, 잠깐만 내가 들어올 때 차들이 어느 방향이었지?”

터널을 가로질러 정비로로 올라간 진우는 잠깐 방향을 잡지 못했다. 그만큼 전후좌우를 가리지 않고 정신없이 움직였고, 이 암흑 속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냈다.

자신이 자동차의 진행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걸 기억해 낸 진우는 다시 소화전을 세며 걷기 시작했다.

플래시의 밝기와 비추는 거리가 꽤나 약해졌다. 하긴 어지간히 오랫동안 켜고 뛰어다녔으니 당연한 일이다.

중간에 꺼져 버리지 않은 것만 해도 정말 고맙다. 다섯 개의 소화기를 지났을 때, 불어오는 바람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뭔가가 느껴졌다.

이건…… 신선하다.

“흐으으음~”

진우는 가슴을 쭉 펴고, 그 적당히 시원하고 무엇보다도 싱싱한 풀 냄새가 섞인 공기를 온몸으로 들이마셨다.

출구가 멀지 않다는 걸 미리 와서 전해 주는 반가운 바람이다. 진우는 환기탑 주변에 모여서 반짝이는 햇빛을 향해 몸을 날리던 좀비들의 행동을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 내가 이 공기를 갈구하는 것처럼 그놈들한테는 태양이 필요했던 걸까?

“다 왔다.”

몇 분 지나지 않아 터널의 끝에 도착한 진우는 힘겹게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존나게 빡센 3.3킬로미터였다. 물론 중간에 막힌 곳이 있어 돌아갔으니까 실제 그가 걸은 거리는 그보다 조금 더 길 테지만.

정비로가 끝나는 지점, 노란색과 까만색으로 칠해진 경계에서 도로로 뛰어내리자, 자유의 땅에 닿았다는 안도감이 밀려온다. 이제 전후좌우 어디든 갈 수 있다.

“완전히 깜깜해졌네…….”

터널 입구에서 진우는 어둠이 내려앉은 도로를 둘러보았다. 당장에라도 주저앉고 싶지만, 이제 밤을 보낼 곳을 찾아야 한다.

플래시의 배터리도 갈아야 하고, 따끔거리는 눈도, 칼칼한 목도 조금이나마 휴식을 취해줘야 내일 또 걷고 싸울 수 있다.

하 중위를 그렇게 허망하게 보내고 줄곧 혹사해 왔던 몸이 이제 슬슬 한계에 도달했나 보다.

“저기는 마을인가?”

좌측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야트막한 건물 몇 개가 있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지붕의 모서리를 보면서 진우는 잠시 고민했다.

마을…… 마을에 들어갔다가 별로 좋았던 기억이 없다. 음, 하긴 그렇게 따지면 산에서도 별로 좋았던 적이 없고, 터널에서도 그랬는데? 큭큭큭, 좋았던 기억은…… 없네, 씨발. 그러니까 좀비 세상이지.

진우는 혼자서 대화를 주고받으며 키득거렸다. 하여튼 마을 안에 발을 들여놓기가 조심스러운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람이 살고 있었으니까 좀비가 나올 확률도 높아질 터였다.

하지만 거기에는 생존에 요긴한 물건도 있으리라. 먹을 것과 마실 것. 그 유혹은 크다.

게다가 슬슬 식량이 떨어져 가고 있으니 보충을 해야 한다. 마을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내일은 하루 종일 자동차의 트렁크만 부수고 다녀야 할 판이었다.

진우는 중앙분리대를 넘고 잔디밭을 지나 다시 건너편 도로로 올라섰다. 거리가 줄어들자 더 많은 정보가 들어왔다.

그가 마을이라고 착각했던 것은 터널의 관리 사무소와 기자재 창고 건물들이었다. 어쨌든 그래도 찬 이슬을 피하게 해줄 지붕과 좀비의 이빨로부터 막아줄 벽이 있다.

진입로를 따라 올라간 진우는 창고처럼 생긴 높다란 건물들을 지나쳐 터널 관리 사무소 앞에 도착했다. 좀비들의 움직임이나 울음소리 같은 건 없다. 그저 버림받은 건물 네 개가 아주 한산하게 서 있을 뿐이다.

그가 선택한 것은 새로 지은 냄새가 물씬 나는 2층 벽돌 건물이다. 여기라면 하룻밤을 안전하게 보내는 데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끼이익―

유리로 된 문을 밀고 들어간 진우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1층 사무실과 회의실들을 수색하고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랐다.

몇 개의 2층 방에는 역시 아무도 없다. 구석에 있는 방 하나를 골라 들어간 진우는 문을 닫고 자물쇠를 돌렸다. 달칵, 하는 소리가 ‘이제 좀 쉬어’라고 말하는 것 같다.

“후우우…….”

그제야 완전히 마음을 놓은 진우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배낭에서 물병을 꺼내 마시고, 아깝지만 눈에도 조금 뿌렸다. 아까부터 따가워서 견디기가 힘들다.

팽, 근처에 놓여 있던 티슈를 빼서 코도 풀었다. 시꺼먼 코가 나온다. 전술 조끼에서 초를 꺼냈다.

아주 여러 동강이 나 있지만, 아직 심지가 붙어 있으니 불은 켤 수 있다. 그리고 촛불에 의지해 플래시의 배터리를 갈아 끼웠다.

확― 스위치를 켜자 새 배터리의 위력이 여실히 발휘된다. 지금까지 뿌옇게만 보이던 실내가 이제 겨우 훤하다.

“관사 같은 거였나?”

침대와 작은 책상, 서랍장, 냉장고와 TV 따위가 배치된 방의 구조를 보면서 진우가 중얼거렸다.

냉장고…… 먹을 것,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위장도 활동을 개시하겠다는 신호를 보내온다. 진우는 다시 몸을 일으켜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냉장고 문을 열자 퀴퀴한 냄새가 난다. 별로 든 건 없었다. 물과 곰팡이가 핀 주스, 고추장 통과 밑반찬 정도다.

“에이, 맥주 정도는 좀 넣어두지.”

육포만 꺼낸 후, 냉장고 문을 닫고 진우는 당장 봉지를 뜯어 한 조각을 우물거리며 서랍장을 하나씩 열어젖혔다. 남이 입던 속옷과 양말 따위, 허접한 것들이 몇 개 나온다.

별 소득을 거두지 못하던 진우의 눈이 일순 번뜩였다. 의외의 곳에 보물이 있었다. 서랍장 옆, 선물용 나무 상자가 몇 개나 쌓여 있다.

“……삼척 명품 머루 와인, 끌로너와? 와인? 이거 술?”

적혀 있는 글자를 읽던 진우는 이상한 이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상자를 열었다.

한잔 시원하게 들이켜서 칼칼해진 목을 좀 달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상자에 들어 있는 오프너로 마개를 따고 킁킁, 냄새를 맡은 다음, 크게 한 모금을 삼켰다.

카아―

“이베리아 반도의 춤추는 여인이 보이는구나. 이런 거였어.”

눈을 감은 채 실없는 농담을 던진 진우는 아직 혀끝에 남아 있는 단맛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다시 병을 입에 대고 기울였다.

달달하고 적당히 씁쓸하고…… 좋다. 살아 있으니까 느낄 수 있는 온갖 기분 좋은 자극이 입과 코를 채운다.

육포를 씹다가 와인을 마시고, 와인을 마시다가 다시 육포를 씹었다.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이따금씩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방에서, 배낭을 벗고 침대에 누워 와인을 마시고 있다. 불과 한 시간 전에 터널 안에서 이를 악물고 방아쇠를 당기던 순간에는 상상도 못 했던 호사다.

“아, 이거 달달한 줄만 알았더니…… 은근히 취하는데?”

세 병째 마개를 따면서 진우가 중얼거렸다. 지역 특산물 활성화를 위해 도로공사에서 구입해 뒀던 머루 와인이 오늘 아주 제대로 임자를 만났다.

진우의 눈은 슬슬 감겨온다. 세 병째의 와인을 반쯤 비웠을 때, 진우의 손에서 힘이 빠지고, 굴러 나온 와인 병은 또르르 구르며 바닥을 적셨다.

푸우우― 푸우우―

조금 벌어진 진우의 입술 사이로 술 취해 잠든 사람 특유의 숨소리가 뿜어져 나온다.

주인이 깊고 달콤하게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그의 왼손 팔목에 채워진 손목시계만은 성실하게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1초, 1초가 흐르다 이윽고 07:31―23:59였던 전자시계의 화면이 08:01―00:00으로 바뀌었다.

이제 8월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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