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7. 칠월의 마지막 날 (3) (217/449)


217. 칠월의 마지막 날 (3)
2022.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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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야 조준경의 초록색 화면에 건너편 통로가 비쳐진다. 그쪽에도 자신이 포복해 있는 것과 똑같은 넓이와 형태의 차선 하나가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그 너머는 직각으로 이어진 터널이다. 멀리 자동차 바퀴들이 보일 뿐, 움직이는 것은 눈에 띄지 않는다. 셔터를 여는 동안 예상은 했던 일이다.

뭔가가 기다리고 있었다면 당연히 셔터에 달려들어 치받거나 흔들어 대면서 생난리를 쳤을 테니까. 그렇다고 건너편에 아무것도 없다는 판단을 내리자니, 저놈의 굉음이 섭섭해할 것 같다.

쿠우우우― 쿠우우우―

막혔던 벽을 치우니 이제는 대놓고 시끄럽게 울려댄다.

“와봐라…… 이거냐?”

진우는 천천히 일어나 셔터 앞으로 다가갔다. 이미 30센티 높이까지 열었는데, 그보다 좀 더 올린다고 무슨 큰일이 날까 싶다. 두려운 마음을 꾹 억누르고 셔터를 허리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드르르륵―

그러고는 몸을 굽혀 건너편 터널로 넘어갔다.

흐으읍―

숨을 들이켜 봤다. 상행선 방향과 그리 다르지 않은 공기다.

경유 냄새, 썩은 음식물의 냄새, 먼지 냄새, 그리고 지긋지긋한 좀비 냄새는 더 강렬해졌다. 하지만 의외로 반대 차선보다 호흡하기가 한결 수월한 기분이 든다.

“어디에서 바람이 들어오나?”

진우는 주야 조준경에서 눈을 떼고 테이프로 고정시켜 둔 플래시의 스위치를 올렸다. 주야 조준경 배터리는 충전을 할 수 없으니 정말 필요한 순간을 위해 가능한 아껴둬야 한다.

그렇게 발발 떨어가며 사용해도 이제 앞으로 몇 시간 쓰기 어렵다. 진우는 일단 피난 연락갱 안에서 멈춰 선 채 직각으로 나 있는 터널의 양쪽 끝을 훑듯이 플래시를 돌렸다.

없어라, 없어라, 아무것도 없어라…… 만약에 올 거면 차라리 지금 와라…….

주문을 외우듯 작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전진했다. 그을음이 가득했던 건너편 연락갱과 달리 새로 들어선 하행선 벽은 깨끗하다. 폭발 사고가 일어날 때, 이미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는 의미이다.

진우가 이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는 데에는 여유가 생긴 실탄도 크게 한몫했다.

오두막의 탈영병들이 가지고 있던 탄창까지 전부 회수했기 때문에 전술 조끼가 두둑하다. 게다가 배낭에도 예비 탄창이 들어 있다.

진우는 차선 두 개를 가로질러 정비로로 올라섰다. 비록 1미터밖에 안 되지만, 지형적으로 우위에 서는 건 중요하다.

게다가 난간이 있어서 예상치 못한 습격으로부터도 비교적 안전하다. 쉬지 않고 울리며 메아리를 만들어 대는 굉음 때문에 소리로 미리 예측을 할 수 없으니, 가능한 한 안전을 위주로 움직여야 한다.

터널 내부는 이미 경험한 것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소화전, 반사판, 송풍기, 지시등…… 이런 것들이 차례로 등장하고 멈춰 서 있는 차들이 가득하다. 자동차들이 서 있는 방향이 바뀌어 앞쪽을 보며 걸어간다는 것 정도가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이다.

슷―

소화전 두 개 거리를 지났을 때, 10여 미터 앞 SUV 유리창 너머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사람의 그림자. 이 터널에 들어와 처음으로 보는 사람의 형태였다. 물론 99.9퍼센트 확률로 진짜 사람이 아니라 좀비겠지만……. 그림자의 바로 옆에도 또 검은 뭉치들이 붙어 있다.

헉, 진우는 짧은 탄성과 함께 벽에 바짝 붙어 섰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개새끼들…….

진우는 개머리판을 어깨에 대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대체 왜 이놈들은 포효조차 하지 않고 있던 것일까 하는 의문과 함께.

진우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검은 그림자가 SUV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일은 순식간에 일어날 거라고 예측했다.

지금까지 수없이 봐왔던 좀비들의 속도가 그랬으니까. 둘을 세기 전에 아마 SUV의 꽁무니를 돌아 나와 아가리를 벌리며 달려들 것이다. 그러면 곧바로 방아쇠를 당겨서 조수석을 지나기 전에 대가리를 날려야지.

하나, 두……우……울, 음? 뭐지?

셋을 세고 넷을 셌는데도 좀비가 나오지를 않는다. 진우는 예상을 벗어난 상황에 당황하면서 시야를 넓혔다. 좀비는 벌써 다른 방향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혹시 자신이 그 움직임을 놓친 것인가 싶어서다.

하지만 아니다. 여전히 SUV 뒤쪽으로 놈의, 아니, 놈들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 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그림자가 천천히 C필러를 돌아 나온다.

그으으~으.

30대 중반이나 후반, 폴로 티셔츠, 굵은 금목걸이, 고급 청바지에 갈색 보트 슈즈……. 아마 꽤나 여유롭게 살던 사람인가 보다.

물린 곳은 아마도 오른쪽 옆구리. 그곳에서부터 흘러나온 피가 주변을 온통 검게 물들여 놨다…… 따위의 정보를 모두 읽어낼 수 있을 만큼의 시간 동안 좀비가 한 일이라고는 맥없이 작게 그릉대면서 두 발짝을 내디딘 것뿐이다.

그것도 보폭이 30센티 정도나 겨우 될까 싶게 어그적거리며 걷는다.

그으으―

폴로 좀비가 또 한 걸음을 떼며 반대쪽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린다. 관절염을 앓는 100세 노인이라고 해도 그보다는 날렵하게 움직일 것 같다. 느리다. 너무 느리다.

“하아~ 하아~ 뭐지, 이 새끼들? 무슨 수작이지? 페이크인가……?”

뜻밖의 상황이 오히려 진우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폴로 좀비의 뒤를 이어 등장한 나이키 좀비와, 러닝셔츠 좀비, 반바지 좀비와 아줌마 좀비, 대머리 좀비까지…… 모두 다 한결같이 느린 움직임으로 좁은 자동차 사이를 걸어 나오고 있다.

거리는 10미터 정도밖에 안 되지만, 놈들이 여기까지 닿으려면 30초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물론 이쪽에서 서너 발짝만 뒤로 물러나면 그 시간은 또 늘어날 것이다.

여섯 마리나 되는 좀비와 마주쳤는데 이렇게 여유롭다니……. 믿을 수가 없다. 아무리 유심히 살펴봐도 지금까지 죽여왔던 수많은 좀비들과 별다른 차이도 없는데…….

혹시 이놈들을 미끼로 쓰는 이상한 전법인가 하는 의심이 든 진우는 사방으로 시선을 돌려봤다. 그래도 역시 움직이는 건 이놈들뿐이다.

그으으으―

반바지 좀비가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자빠진다. 놈은 한쪽 다리의 살이 너무 많이 뜯겨 나가 있어서 움직임이 영 불안정하다.

그 바람에 넘어지는 놈에게 걸린 러닝셔츠 좀비도 함께 뒹굴었다. 다들 도무지 매가리가 없다.

이쯤 되면 아주 저질 코미디를 0.2배속 정도로 보는 기분이 든다. 당연히 무섭지도 않다. 오히려 이놈들을 죽인다는 게 약자를 괴롭히는 일처럼까지 느껴진다. 예전의 진우였으면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왜 그렇게 약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너희들에게 물려도 죽는 거니까…….”

한동안 좀비들을 관찰하던 진우는 이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첫 발이 발사되자마자 터널 전체를 뒤흔들 만큼 커다란 메아리가 수십 번을 반복해서 만들어지며 귀를 울린다. 30세 중반의 옆구리를 물린 폴로 좀비는 이마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바닥에 쓰러졌다.

물론 선두의 놈이 그런 꼴을 당한 뒤에도 나머지 좀비들은 더 서두르거나 움직임이 빨라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어기적어기적, 천천히 걸음을 뗄 뿐이다. 총소리 때문에 먹먹해진 고막에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포효하면서…….

타앙― 타앙― 타앙―

진우는 더 시간 끌지 않고 잇달아 총알을 날렸다.

한 마리에 한 방씩, 순식간에 다섯 마리를 제거한 진우는 자동차 사이에 넘어져 있는 반바지 좀비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반바지 좀비는 도무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비틀, 쿵― 비틀, 쿵―

머리가 보일 만하면 넘어지고, 다시 또 일어나는가 싶으면 보닛 아래로 모습을 감춘다.

기다리다 지겨워진 진우가 아래로 내려갈까 고민을 시작했을 때쯤에야 겨우 반바지 좀비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 시선만은 진우에 고정되어 있다.

“근데 대체 너희들…… 그런 굉음은 어떻게 낸 거야? 그렇게 힘도 없는 놈들이.”

반바지 좀비가 아가리를 벌리려 할 때, 진우가 발사한 총알이 놈의 머리를 꿰뚫었다. 반바지 좀비의 두 다리가 힘없이 꺾이고, 뇌수가 쏟아지는 놈의 뒤통수가 바닥을 때린다.

하아~ 진우의 입에서 가벼운 한숨이 나온다. 별로 개운치 않다. 그래도 이제 그 지겨운 소리는 더 듣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아주 잠시.

쿠우우우우― 고오오오오― 위이이이잉―

총소리의 여운이 끝나기도 전에 진우를 비웃기라도 하듯 예의 그 굉음이 계속 이어졌다.

그럼 그렇지, 이렇게 쉬울 리가 없어…….

진우는 납득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끝없이 지속되는 힘찬 소리를 저런 놈들이 만들어냈다고 하면 그게 오히려 더 말이 안 된다. 저 앞에 분명 다른 놈들이 있다.

하지만 진우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렇게 총소리가 크게 울렸는데도 놈들이 계속 그 굉음을 만들어내는 데만 열중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대체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의미가 있는 일이기에…….

키이이이잉―

신경을 긁는 굉음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마치 그를 유혹하기라도 하는 듯. 진우도 홀린 사람처럼 멈추지 않고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그 소리는 더욱 크고 선명해졌다. 즉, 그 근원이 이 앞 어딘가에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다시 소화전 네 개를 더 지났을 때, 진우는 왼쪽 벽에 붙은 수상한 문을 발견했다.

“여긴가…….”

계단을 걸어 내려온 진우는 안쪽으로 미는 방식의 커다란 쇠문 한 쌍 앞에 멈춰 서서 중얼거렸다. 1/3쯤 열린 채 내려진, 도어 스토퍼 발굽으로 고정되어 있는 문은 생김새가 일반 문과 조금 달랐다.

재질은 쇠로 되어 있고 꽤나 두툼하지만, 10센티미터 정도 폭의 긴 구멍이 촘촘하게 나 있는, 두꺼운 철창 같은 모양이다.

“……급기 환기실.”

진우는 문의 상단에 붙은 글자를 읽었다. 문의 안쪽에서는 멋대로 증폭된 그 굉음이 악취와 뒤섞인 채 파도처럼 계속 밀려 나온다.

진우는 플래시로 안쪽을 비쳐 봤다. 급격한 곡선으로 된 복도다. 벽면은 터널 내부와 같은 거친 콘크리트 재질, 천장에 촘촘하게 붙어 있는 조명들은 물론 모두 꺼져 있다.

문에 분명하게 박혀 있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 여덟 글자에서 알 수 있듯 이 길은 터널의 뭔가를 관리하는 곳으로 이어진 통로임을 의미했다.

그 유혹하듯 삐죽 열린 문과 앞으로 쭉 뻗어 있는 정비로를 진우는 잠시 번갈아 바라봤다. 어차피 터널 밖으로 나가는 길은 정비로를 계속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눈앞에서 자신을 현혹하고 있는 이 통로가 아니다. 다시 말해 이 문 안으로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터널을 빠져나가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래, 뭐하러 굳이 무리해? 그냥 가자.”

굉음을 만들어내는 범인을 찾기만 하면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고 증오의 다짐을 했던 게 마음에 걸리지만, 별다른 소득은 보이지 않고 위험하게만 보이는 일에 뛰어들지 말자고 진우는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까짓 굉음, 지금은 이렇게 신경을 갉아먹는 것처럼 거슬리고 짜증이 나지만, 여기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이내 들리지 않게 될 소리니까.

오로지 이 터널 안에서만 위력을 발휘하는 소음일 뿐이다. 아무리 실탄을 확보했어도 그런 데에 낭비할 만큼 여유롭지는 않다. 눈감고 귀 막고 외면해 버리면 없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그냥 가자.

진우는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여 그 문제의 문 앞을 지나쳤다.

코오오오― 위이이잉―

멀어지는 진우의 등에 또다시 조롱하는 것처럼 굉음이 덮쳐온다.

슬쩍 뒤를 돌아보면서 진우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마음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는 용케 그 문에서 멀어졌다. 다시 소화기 하나 정도의 거리를 지날 때쯤, 굉음이 크게 들려온다.

“이건 또 뭐야?”

진우는 고개를 들어 소리의 진원지를 찾았다. 그의 머리에서 2미터쯤 위에 커다란 파이프들이 잇달아 돌출되어 있다. 끝부분에 필터가 달린 둥근 모양이나 크기를 보면 바람이 나오는 관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통풍관들에서 조금 전 문 앞에서 들었던, 예의 그 괴상한 소리가 울려 나온다. 마치 파이프 오르간을 연상시키게 하는, 그런 웅장한 울림이다.

이상한 터널이다. 통풍관에서는 나오라는 바람 대신 굉음이 쉬지 않고 뿜어져 나오고, 좀비들은 허약하기 짝이 없고, 뭔가 비정상적인 곳이다.

게다가 집요하다. 정말 어렵게 문 앞에서 유혹을 뿌리쳤는데, 통풍관들이 다시 발목을 잡는다.

고오오오오― 쿠우우우우― 위이이이이―

하도 지겨워서 이젠 소리가 날 때마다 저절로 이를 악물게 된다.

“젠장…… 계속 짜증나게 하는구나. 이러다가 미쳐 버리겠다. 뭔 놈의 소리가 사람의 기운을 이렇게 쪽 빼는…….”

그렇게 중얼거리던 진우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저 멀리서 또 좀비들이 비척거리며 걸어오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세 마리. 하지만 느려 터졌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뭐지? 얘들, 아까부터…… 내가 모르는 사이에 좀비들이 다 퍼져 버린 건가? 설마…… 이 소리가 좀비들을 약화시키는 기능을 하는 건가? 원리를 알 수는 없지만, 뭔가 이상한 주파수가 좀비들의 뇌를 자극해서 운동능력을 약화시키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진우는 일단 총구를 돌려 다가오는 좀비들부터 처리했다.

타앙― 타앙― 타앙―

세 마리의 좀비를 차례로 고꾸라뜨린 진우는 자신의 가설을 되짚어봤다. 말이 되는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대체 아까의 그 약한 좀비들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이 소리가, 이 기분 나쁜 굉음이 바로 좀비들의 약점이었던 거다! 그동안 아무도 몰랐던 좀비들의 아킬레스건!

자신의 생각이 새삼 그럴듯하게 느껴진 진우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만약에 그게 사실이기만 하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지능이 낮다는 점을 제외하면 약점이라고는 도무지 없어 보이던 그 강한 놈들이 만약 어떤 소리 하나에 이렇게 무력화된다면…….

- 아니, 아니, 잠깐만…….

또 다른 자아가 진우에게 말을 건다.

- 너 지금 그건 그냥 핑계잖아. 너는 단지 저 굉음이 나는 곳에 가보고 싶은 것뿐이야. 그래서 만약에 저 안에서 좀비들이 이상한 짓을 하고 있으면 속이 시원하게 쏴 죽여서 복수하고 싶은 거라고. 여기 좀비 새끼들 비실거리는 것도 봤겠다, 별로 겁낼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러면서 무슨…… 이상한 가설 같은 걸 억지로 만들어? 그런 거 다 핑계일 뿐이라는 걸 나도 알고, 너도 알아. 그러니까 잊어버려. 잊어버리고 그냥 앞만 보고 쭉 걸어가. 그게 남는 거고, 안전한 길이야.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핑계 아닌데……. 생각해 봐. 모든 좀비가 아까 그놈들처럼 약해지기만 하면…… 더 이상 아무도 피눈물 흘리지 않아도 돼. 그냥 저 소리를 녹음해서 엄청 큰 스피커로 틀어주다가 비틀거리는 좀비들을 천천히 정리하면 된다고.’

그리고 또 다른 자아가 다시 개입하기 전에 돌아서서 문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 비밀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어쩌면 지금의 좀비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어줄지도 모르는 어떤 것이 바로 근처에 있었는데, 단순히 무섭다는 이유로,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그냥 지나쳐 버리고 싶지는 않다.

- 내 생각에는 넌 그냥 스트레스를 풀고 싶은 것 같아. 알아, 하 중위를 못 지키고 그렇게 죽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던 게 어지간히 스트레스를 줬겠지. 그래, 그깟 두 놈 죽여봐야 아무 분도 안 풀려. 게다가 그렇게 열 받아 있는데 이상한 소리는 계속 귀를 울리지……. 이해해. 아무거라도 막 다 쏴 죽여 버리고 싶은 거겠지…….

“닥쳐! 그런 거 아니야! 세상을 바꿀 소중한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겁을 내다가 그걸 놓치고 싶지 않은 거라고!”

진우는 혼잣말로 또 다른 자아를 윽박지른 뒤, 문의 안쪽으로 들어섰다. 활 모양으로 휘어져 있는 복도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는 동안에도 굉음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은박으로 덮인 아름드리 파이프들이 꽉 찬, 넓은 통로가 나타났다. 그리고 바닥에 길게 이어져 있는 검은 얼룩들이 보인다. 아마 말라붙은 피일 것이다.

안쪽으로 더 깊숙하게 들어갈수록 얼룩의 수와 면적이 늘어난다. 벽면과 파이프에도 피 칠갑이 되어 있다. 한때 이곳에서 대대적인 살육이 일어났던 모양이다.

“응? 이건…….”

플래시의 광원 밖, 당연히 암흑이어야 할 부분에 뭔가가 희끗희끗 비친다. 빛이다.

뭔가에 반사된 빛이 벽면에 어른거리다가 사라지고, 다시 어른거린다. 빛의 등장과 더불어 공기의 흐름도, 냄새와 소리도 더 강해진다.

빛…… 빛과 그림자가 어지럽게 교차하는 걸 보면서 진우는 본능적으로 주야 조준경을 켜고 플래시를 껐다.

이제 뭔가가 일어나고 있는 곳에 아주 가까워졌다. 어른거리는 빛 덕분에 플래시를 껐는데도 주변이 어렴풋이 보인다. 이 깊은 지하에서…… 이상한 일이다.

쿠오오오― 위이이이― 고오오오오―

고막을 흔드는 소리의 폭력을 꾹 참고, 진우는 주야 조준경의 녹색 화면에 의지하며 휘어진 복도를 따라 조심스레 한 발짝씩을 내디뎠다.

그리고 마침내 이 굉음의 실체를 마주한 진우의 입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 이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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