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무지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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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무지개 (4)
2022.04.02.
“그런 놈들 있지. 갑질 좋아하는 새끼들. 사실 그냥 있는 정도가 아니라 존나 발에 차일 정도로 많아. 그런데 그것도 다 옛날이야기지. 이 지경이 된 다음에는 왜 휘둘려? 월급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참 답답하네.”
보안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징그러운 걸 본 듯한 표정을 짓는다. 태권소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너같이 말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했는데, 몇 명 안 됐어. 다들…… 저 망할 놈이 많이 배웠고, 사회적으로 지위도 조금 있었으니까 뭔가 남들보다 나을 거라고 기대를 했던 것 같아. 훗, 한심한 이야기지. 그 새끼, 점점 더 나쁜 일을 많이 했어. 멍청한 짓거리로 사람들 사지로 몰아넣은 적도 여러 번이고, 나중엔 여자애들 꾀고 협박해서 반강제로 못된 짓도 했지. 그걸 알게 된 나랑 경순이 언니가 끌어내 족쳤어…….”
쨍그렁― 텅― 텅―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바람에 이야기가 끊겼다. 보도 안쪽이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플래시를 켜 소리가 난 방향을 쫓았다. 플래시를 비춘 자리에는 후다닥 뛰어가는 개들의 모습이 스쳐 지난다.
무리 지어 다니는 개들이 빈 페인트 통을 자빠뜨리고 지나간 모양이다.
으르르르, 덩치 큰 놈 한 마리가 보안관과 태권소녀를 향해 돌아서서 잇몸이 보일 만큼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다가 어디론가 도망가 버렸다.
들개 무리는 몸집이 꽤 크고 기세도 사나워서, 저쯤 되면 애완용이라는 말이 무색해질 지경이다. 아무리 무기를 들고 있다 해도 서너 마리 정도만 한꺼번에 덤벼든다면 엄청난 위협이 될 것이다.
음식 쓰레기를 신경 써서 버린다고 나름 애는 쓰지만, 동네 전체의 모든 냉장고와 찬장 청소를 다 하지 않는 이상 개들은 계속 주변을 배회할 수밖에 없다.
물론 저 많은 걸 거둬 키우는 건 더 안 된다. 사람 마실 물도 부족한 판국이니까.
“우와, 삼식이 새끼, 담배 피우러 갈 때 조심하라고 해야겠네. 저것들 요새 더 바짝 마른 것 같은데……. 게거품도 좀 문 것 같고……. 그랬지?”
개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마음을 놓은 보안관과 달리 태권소녀는 아직도 야구 배트를 꽉 움켜쥔 채 숨을 씩씩거리고 있다.
외부인에 대한 두려움이 굉장히 큰 모습이다. 보안관은 플래시를 끄면서 말했다.
“근데 너한테 또 검은 헬리콥터 이야기 꺼내서 미안하지만, 생각해 보면 인철이인지 뭔지를 포함해서 이 근처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전부 그놈들한테 끌려가지 않았을까? 여기만 콕 찍어서 내리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야. 그러니 이렇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아, 맞다. 그리고 그날, 저기 아래쪽 중화동에서 총소리랑 비명이랑 같이 울렸었구나. 그놈의 휴대폰 영상에만 정신이 팔려서 그건 까맣게 잊고 있었네…….”
“총소리에 비명? 그게 무슨 일이었는데?”
태권소녀가 갑자기 큰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헬리콥터가 어떤 건물 위에 떠 있고, 거기 옥상에서 그 두 가지 소리가 같이 들렸거든. 우리한테 핸드폰 준 아저씨는 피를 질질 흘리면서 도망 나오고…… 와, 생각해 보니까 그냥 전쟁터였네. 젠장, 소름 끼쳐.”
“그래서? 그 위에서는 무슨 일이 났던 건데? 올라가 봤어?”
“아니…… 이런 상황에서 누가 총소리 난 데를 굳이 쫓아가서 보겠냐? 뭔 일이 있을 줄 알고 그런 데를……. 그랬다가 괜히 눈먼 총알이나 맞지.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 까지만 아는 거지. 게다가 좀비들이 쫓아오는데 한가하게 그 옥상을 오르락내리락할 시간도 없었고. 왜? 인철이라는 애들이 그 근방에서 살았어?”
“아니……. 걔들 어디에 숨어 있는지 전혀 몰라. 그 정도만 알았어도 이렇게까지 불안하지는 않을 거야.”
태권소녀는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내며 중얼거린다. 그 기세를 보아서는 얘가 며칠 내로 그 동네에 다시 한 번 가보자고 할 분위기다.
아, 귀찮은데……. 거기 좀비들 사는 아파트도 있고…….
그 아파트 단지를 지나고, 길거리의 좀비들을 다 처리한 다음에 건물 옥상까지 올라가고, 거기에 분명히 있을 피바다와 시체들을 눈으로 볼 생각에 보안관은 벌써부터 골이 지끈거리는 것 같다.
하지만 새로 얻은 동료가 부탁을 한다면 거절할 만큼 모질지도 못하니까…… 결국 가게 될 것이다.
후우~ 보안관은 제풀에 지쳐서 한숨을 쉬었다.
“왜, 너도 불안해?”
태권소녀는 그 한숨을 엉뚱하게 받아들인 모양이다. 보안관은 도리질을 했다.
“아니, 불안하기는. 그까짓 놈들 떼로 덤벼봐야 탁, 하고 팍! 해서 주먹 몇 방 날리면 그냥 끝이야. 껌이지. 그보다 저기…… 아까 저놈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는데…….”
보안관이 거꾸로 매달린 남자를 가리키자 태권소녀는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뭐, 한심한 이야기야. 저놈 붙잡아서 한참 두드려 팰 때까지는 좋았는데, 그다음이 막막하더라고. 후후, 경찰에 넘길 수 없다는 게 그렇게 곤란한 일인 줄 몰랐어. 내 손으로 체포도 하고, 판결도 하고, 사형 집행까지 다 해야 하더란 말이지. 당사자인 저 새끼는 막 울부짖지, 옆에 편드는 놈들은 이제 그만하라고 하지, 쌓인 게 있는 사람들은 빨리 죽이라고 하지……. 머릿속이 전부 하얗게 지워지는 느낌이었어. 그때, 갑자기 인철이가 나서더니 들고 있던 칼로 저놈 배를 사정없이 찔렀어. 몇 차례나……. 바닥이 피범벅이 되는데도 인철이 놈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나를 보면서 ‘야, 너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까짓 걸 못 해? 네가 대장 하면 안 되겠다. 그렇게 물러 터져서 뭘 하겠냐?’라고 하는 거야. 그러고는 씨익 웃었지. 그 순간에 서열이 바뀌었고, 인철이가 리더가 된 거지.”
“거참, 짜증나는 새끼네. 근데 이미 죽은 놈 거시…… 사타구니에 총은 왜 쏜 거야?”
“인철이는 경고를 해줘야 한다고 하면서 죽은 남자를 거꾸로 매달아놓고 온갖 짓을 다했어. 칼로 찌르고, 총으로 쏘고, 오줌도 갈겼지. 웃기는 건 뭐냐면, 인철이 그놈도 스마일 마트에서 일하던 패거리 중 하나였다는 거야. 처음에는 그 차장한테 잘 보이려고 온갖 아부를 다 하던 놈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고 그따위 짓을 하면서 우리를 통솔하려 들었다는 거지.”
대강 알 만했다. 교활한 새끼들은 원래 요리조리 옮겨 붙기를 잘한다. 어쩌면 그게 그들이 타고난 생존 기술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잔인하기까지 하면…… 그런 놈들은 꽤 귀찮다. 사람의 마음이 약해지도록 만들어서 그 틈을 파고드는 것이다.
그때 일들을 생각하는지 태권소녀는 간간이 한숨을 섞어가며 말을 이었다.
“시간이 지난 뒤에 인철이 일행을 결국 다 쫓아내기는 했어. 제일 신경 쓰이던 게 총이었는데, 그걸 가진 애를 설득해서 결국은 우리 편으로 끌어들였거든. 하지만 그렇게 될 때까지 안 당했어도 될 피해를 본 애들이 많았어. 사람들도 편이 갈려 나뉘었고.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게 다 내가 그 차장 놈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야. 그때, 망설이지 않고 내 손으로 어떻게든 결말을 내야 했던 건데…… 쯧.”
태권소녀는 못내 아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사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어차피 헬기에 끌려갔을 테니까 그때 죽고 안 죽고는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혜주의 머릿속에서는 엄청나게 중요한가 보다. 물론 그사이에도 계속 자책을 했을 터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인철이라는 괴물이 힘을 얻은 거라고…….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보안관은 등을 긁적거리면서 말했다.
“문제는 네가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새끼들한테 있는 거야. 생각해 봐. 다들 기가 죽어서 좃같은 일을 당하고도 아무 말을 못 하고 있는데 너는 용기 있게 나섰고, 결국에는 그 개똥 같은 새끼를 족쳐서 모두들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렸어. 잘못된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는 말이야. 그럼 그다음은 저희들이 알아서 했어야지, 뭘 누구더러 죽여라 마라야? 안 그래? 그렇게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으면 자기들이 했으면 되는 거였잖아? 몽둥이 있겠다, 그 새끼 힘도 없이 자빠져 있는데……. 그놈들은 그냥 자기 손은 더럽히고 싶지 않고, 자기 머리로 생각하기 싫으니까 너보고 다 알아서 하라고 한 거야. ‘혜주야, 네가 알아서 해줘! 우리가 아무 생각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도록…….’ 그게 씨발, 어떻게 가능해? 그게 되면 슈퍼맨이지. 네가 그렇게 망설이지 않았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거야. 그렇게 궂은일에 남을 앞세워 놓고 입으로만 나불대는 새끼들은 언젠가 또 다른 일이 있었을 때 인철이 편으로 쪼르르 갔을 놈들이라고. 또 말이야, 네가 만약 그 차장 새끼 죽였지? 그랬으면 당장 다음 날부터 뭐든지 다 네 책임 되는 거야. 전에 차장 있을 때는 안 그랬는데…… 혜주, 저게 대장 되고 나서는 영 불편하다는 둥…… 어휴, 생각만 해도 빡 도네. 씨발, 누가 누구를 탓해? 혜주, 너는 잘못 없어. 아니, 잘못이 없는 게 아니라 훌륭해. 찍어 누를 때는 아무것도 못 하고 있다가 뒤에 숨어서 이래라저래라만 했던 놈들보다 네가 몇 배나 훌륭하다고!”
보안관의 예상치 못한 열변에 태권소녀는 잠시 멍해져서 미동도 하지 못했다. 간간이 욕설이 섞여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그 어떤 멜로드라마의 대사보다도 달콤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그동안 그녀가 정말로 듣고 싶던 말이었다. 게다가 이 고릴라, 그 이유도 제법 그럴듯하고 똑 부러지게 일러준다.
하지만…… 혜주는 아직 자신이 지고 있는 굴레에서 벗어날 준비가 온전히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그냥 평범하고 무력한…… 그냥 양 떼 같은 사람들이었어. 나는 줄곧 운동을 했고,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더 센 내가 양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어야 하는 거였다고…….”
“야, 뇌에는 근육이 없어. 마음도 마찬가지고! 이, 이 팔뚝처럼 운동으로 단련이 되는 데가 아니란 말이야. 그래, 좃같은 새끼를 두드려 패서 제압하는 건 운동한 사람이 더 잘할 수 있겠지. 그런데 한 새끼 인생을 끝내는 일이, 부담스러운 건, 누구나 다 똑같아. 그런 짓을 잘하는 건 또 다른 종류의 새끼들이겠지. 양 떼? 너 그거 알아야 돼. 동물들은 남 탓 같은 거 안 한다. 도와준 사람을 비난하지는 더더욱 않고.”
말투만 들으면 꼭 다그치는 것 같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다 치유의 말들이어서 태권소녀의 눈에는 살짝 눈물이 맺혔다.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태권소녀는 얼른 한 발 뒤의 어둠으로 물러나 표가 나지 않도록 눈을 깜빡거렸다. 그동안 줄곧 쌓이기만 했던 자책과 후회가…… 긴장이 풀리자 그 틈을 타고 빠져나오려 했던 모양이다.
휘이잉―
불어오는 바람에 또다시 지독한 악취가 섞여 들어온다. 좀비들의 행진이 곧 이어질 거라는 의미다.
그롸아아아―
목적 없는 좀비들의 포효가 밤하늘을 흔든다.
두 사람은 구역질나는 냄새를 꾹 참고 다시 침묵 속에서 대기했다.
30도에 가까운 열대야지만 태권소녀는 바로 곁, 보안관의 커다란 몸에서 피어오르는 후끈한 열기와 숨결이 싫지 않았다. 그건 그녀가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 때문이었다.
자기가 지켜주지 않아도 되는, 자신보다 무력이 뛰어난 사람과 함께 있다는 그 묘한 안정감이 좋았다.
게다가 바로 그 강자가 자신의 무죄를 논리적으로 증명하고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게 이렇게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걸 아주 잊고 살았었다.
‘리더’라는 두 글자가 어깨를 짓누르고 있을 때에는 느껴 보지 못한 안정감이었다.
***
“좀 어떻습니까? 나아지는 기미가 보입니까?”
의무대 하사가 병실 문을 나서자마자 어두운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밤톨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하사는 대답하지 않고 밤톨의 등짝을 밀어 계단 쪽으로 걸어 나왔다. 복도 끝에 다다른 밤톨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아, 병실 앞에서 정숙해야 해서 그러시는 겁니까?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병실이라니까 병실인 거지, 사실은 그냥 사무실이잖아. 그리고 나도 그냥 치료하라고 하니까 흉내를 내는 거지만, 그냥 의무병일 뿐이고.”
옥상을 향해 올라가며 의무대 하사가 중얼거리자 밤톨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상태가 안 좋아졌습니까? 걱정이 되지 말입니다.”
“아니, 그런 거 없어. 어제랑 똑같아. 항생제 맞으니까 썩지는 않을 거고, 통증이랑 진통제 때문에 몽롱한 상태야. 그냥 내가 워낙 아는 게 없으니까 답답한 거지. 사실 진짜 의사가 있었어도 총 맞고 칼 박힌 환자를 하루 만에 이것보다 더 많이 치료할 수는 없지 않았을까? 음, 모르겠네…….”
하사는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은 이렇게 해도 그는 잠실 군인들을 도왔다는 환자에게 꽤나 지극정성을 다하고 있다.
수액이 떨어지지 않도록 관리해 주고, 붕대도 자주 갈아주고, 병원에서 가져왔다는 무통 주사까지도 달아놓았다.
그걸 알면서도 밤톨은 자꾸 또 캐묻게 된다. 언제 도로 공사가 마무리돼서 잠실 쉘터로 복귀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전에 다시 민구가 운신을 하고 말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대화는…… 아직 어렵겠죠?”
옥상에 올라 담배에 불을 붙이며 밤톨이 물었다.
후우우~ 하사는 연기를 길게 뿜으며 고개를 저었다.
“야, 말이 쉽지, 총알이 살을 이만큼 뚝 떼어내고 지나갔는데……. 지금 내장이 온전하겠냐? 아마 다 한 번 뒤집어졌을 테니까 자기 속이 아닐 거다. 그리고…… 칼에 맞아서 나간 갈비뼈, 시퍼렇게 부었어. 그 정도만 해도 대부분 아파서 죽는다고 난리를 칠걸? 숨 쉴 때마다 뒈지는 기분일 거라고. 저 정도로 얌전히 앓는 것만 해도 어지간히 독한 인간이야, 저 환자.”
그렇군요…….
음, 그런 거야…….
밤톨과 하사가 사이좋게 담배 연기를 뿜으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곳으로부터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는 또 한 무리의 병사들이 있다.
서치라이트를 도로 쪽으로 비추고, 필요한 경우 저격도 하기 위해 대기하는 병력들이다. 그중 하나가 소리쳤다.
“저거 봐, 또 왔어! 와…… 진짜 저거 뭐지?”
“응? 뭔데 호들갑이야?”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병사들을 향해 하사가 묻자 저격병들이 대로 너머를 가리킨다.
“아, 고 하사님. 잘 오셨습니다. 굉장히 신기한 구경거리지 말입니다.”
며칠 전, 작업반장이 죽었던 위치에서 100여 미터 북쪽쯤이다. 새로 쳐둔 철책 뒤쪽으로 좀비들이 다가온다. 그런데…… 그중 몇 마리의 모습이 범상치가 않다.
“야, 저거 뭐냐? 피를 뒤집어쓴 건가? 아닌데…… 피는 저렇게 빨갛지가 않아…….”
서치라이트의 불빛을 받은 좀비는 머리끝부터 허리께까지가 온통 시뻘겋다. 그놈 하나만 그런 게 아니라 그 뒤로도 몇 놈이나 비슷한 꼴을 하고 있다.
지난 보름 동안 좀비 구경은 정말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또 처음 보는 유형이다. 하사와 밤톨은 담뱃재가 길게 늘어질 만큼 그 빨간 좀비들에 몰두했다.
“뭐지, 저거? 온몸에서 뭔가 빨간 물이 줄줄 흘러나오나? 옷까지 다 시뻘게. 어휴, 존나게 흉측하네. 야, 조 병장. 너 잠실에서 저런 거 본 적 있어?”
밤톨도 고개를 저었다. 빨간 물이 땀처럼 솟아나오는 좀비라니……. 이건 그로테스크함의 새로운 장을 연 기분이다. 빨간 좀비들은 일반 좀비들에 섞여 철책 부근을 천천히 배회한다.
허, 하사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병사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저거 처음 본 게 아닌가 보네?”
“예. 오늘 벌써 두 번째지 말입니다. 오후 늦게 한 번, 그리고 지금 또 보는 겁니다. 저 새끼들, 정말 기분 나쁘지 말입니다.”
“그래, 기분 안 좋지. 뻘건 게 피도 아니고…… 저게 뭐야, 대체?”
“저희도 처음에는 무슨 이상한 액 같은 걸 분출하는 건 줄 알고 바짝 긴장 탔는데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 페인트랍니다. 낮에 저런 놈들이 스치고 지나간 나뭇가지에 보니까 빨간 페인트가 묻어 있어서 그제야 알았답니다.”
병사들의 대답에 하사가 반문했다.
“페인트? 야이, 씨발. 그것도 이상하잖아? 페인트가 왜 저렇게 묻어 있어? 아니, 저 새끼들이 페인트 통에 가서 뒹굴지는 않을 거 아니야? 그런데도 대가리부터 들이민 것처럼 아주 골고루 묻었는데?”
“큭큭큭, 그래서 낮부터 말이 많았습니다. 다들 추리도 많이 하고.”
허어, 기분 안 좋아. 저게 뭐지? 무슨 징조도 아니고…….
낮게 중얼거리던 하사가 갑자기 난간에 몸을 기대며 건물 아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어이, 아저씨! 뭐요! 거기 왜 기웃거려요?”
그가 소리를 지른 대상은 덩치가 큰, 젊은 남자였다. 철조망을 타고 쉘터에서 이쪽 별관 건물로 몰래 넘어오려던 사내가 황급히 다시 되돌아간다.
“뭐야, 저런 새끼들? 야, 여기는 경계 관리 확실히 안 하냐?”
“그게 말입니다……. 고 하사님, 사실 이쪽으로 쉘터 사람들이 많이 넘어옵니다. 그…… 남녀가 짝을 이뤄서 새벽에 몰래……. 아시잖습니까. 조용한 데 찾고 싶으니까 말입니다. 또 잠실에서 온 사람들 격리해 둔 다음에는 그 사람들 만나러 오는 사람들도 간간이 있지 말입니다.”
하긴, 누가 뭐 훔쳐 갈 게 있다고 경계를 하겠어…….
의무대 하사도 납득할 만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저 덩치 큰 남자는 뭔가 좀 찜찜한 구석이 있다. 특히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후다닥 도망가는 꼴이, 어딘가 불순한 냄새가 난다.
“또 넘어오면 그땐 그냥 안 보내줍니다! 체포할 겁니다!”
주차장 건물 뒤로 숨는 사내의 그림자를 향해 하사는 엄포를 놓았다. 그러고는 동료 병사들과 함께 킥킥거리며 다시 빨간 좀비들에게 관심을 돌렸다.
***
“하아~ 하아~ 씨발, 존나게 놀랐네. 니미.”
주차장 건물에 몸을 숨긴 덩치 큰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욕설을 내뱉는다. 기동이였다. 땀을 훔치는 기동이의 뒤춤에는 주방에서 몰래 훔쳐 온 식칼이 꽂혀 있다.
“저 등신 같은 새끼들, 저희들이 지금 누구 병수발을 들고 있는 줄이나 알고 있냐? 멍청한 새끼들……. 뒈지는 줄도 모르고.”
기동이는 원망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옥상의 병사들을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세상에……. 살다 보니 나랏밥 먹는 놈들이 민구를 치료하는 꼴을 다 본다. 그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함정에 빠진 호랑이를 구해주는 것도 아니고…….
기동이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비록 지금은 실패했지만, 민구가 더 기운을 차리기 전에 힘줄 한두 개쯤은 반드시 끊어놔야 한다. 안 그러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