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무지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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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무지개 (3)
2022.04.01.
태권소녀는 몸서리를 치며 중얼거렸다.
“좀비보다 사람이 더 무서울 때도 있어. 더 잔인하고…… 더 징그러워.”
그녀의 말에 일행들은 길에 매달려 있는, 그 사타구니가 날아간 남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한 사람을 그렇게 모질게 죽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보란 듯이 길거리에 걸어 전시를 하는 상황.
분명 잔인한 일이다. 도대체 그는 어떤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런 신세가 돼버린 걸까? 처음 만나 시비가 붙었을 때 화두가 되었던 이름이 떠오른 유빈이 물었다.
“그…… 민철이인지…… 인철인지 하는 놈? 걔네가 그렇게 무서워?”
“뭐, 걔네뿐만은 아니야. 언제든지 사람들이 기어 들어올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매일 나가서 망을 보는 거잖아.”
보안관이 주섬주섬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한다.
“오늘은 내가 먼저 나갔다 올게. 좀 쉬고 있어.”
며칠 동안 늘 유빈이 제일 먼저 보초로 나가서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버텼고, 덕분에 가장 잠자는 시간이 적었다. 계속 그렇게 하도록 놔둘 수는 없다.
“괜찮겠어? 피곤할 텐데.”
유빈의 말에 보안관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피곤한 거야 다 똑같지. 만날 너만 무슨 죄로 그 고생을 하냐? 오늘은 내가 총대 멜 테니까 한잠 푹 자고 일어나서 나와.”
“그럼 같이 가자. 그리고 이제부터는 나도 보초 보는 멤버에 끼워줘.”
태권소녀도 자리에서 일어나자, 보안관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친한 사이도 아니고, 워낙 틱틱거리는 성격이라 아직까지 단둘이만 있는 건 좀 불편하다.
하지만 그걸 또 대놓고 말하기도 어려운 사이라서 그저 쭈뼛거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건 꽤나 의미 있는 사건이기는 했다. 늘 규영이만 싸고돌던 태권소녀가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 애를 맡기고 밤에 밖으로 나가는 거니까. 이제 아주 작게나마 신뢰가 쌓였다는 증거다.
“잠깐, 이거. 둘 다 이 배낭 메고 가.”
유빈이 표준 장비가 든 배낭을 두 사람에게 건넨다. 언제 어디를 얼마나 가 있을 계획이든 간에 무기와는 별도로 기초 생존 장비는 꼭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
예전에 제니와 함께 경전철역을 오를 때, 라이터를 가져가지 않아 그 어둠의 긴장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아주 절감을 했던 바다.
“그, 그럼 가, 갈까?”
태권소녀와 단둘이서 몇 시간 동안 보초를 설 생각에 눈앞이 깜깜해진 보안관이 로봇처럼 뻣뻣한 말투로 물었다.
보초를 함께 설 짝꿍이 제니였다면 더 바랄 게 없었을 테고, 하다못해 신입만 됐어도 눈치는 보지 않을 수 있었는데…….
보안관과 태권소녀는 파라다이스 모텔의 뒤쪽, 비밀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길을 걸어갈 때에도, 가발 가게 건물 옥상에 설치해 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도 둘 다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큼, 어흠, 큼, 큼…… 어색하게 헛기침만 계속 나온다.
잠시 후, 코가 뻥 뚫리는 악취를 앞세우고 좀비들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쥐 죽은 듯 가만히 앉아서 좀비들의 행렬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어쩌면 페인트가 묻은 놈들인지도 모른다. 물론 밤이어서 분간이 되지는 않지만.
“야.”
어둠 속에 잠긴 도로를 거의 30분 동안 잠자코 노려보던 두 사람 사이에서 처음으로 의미를 가진 목소리가 울렸다.
응? 왜?
보안관은 태권소녀 쪽을 돌아봤다.
“한잔 더 할래?”
태권소녀가 배낭에서 맥주 캔을 꺼내 흔든다. 뭐, 목이 칼칼하기도 하고, 이걸 마셔도 아직 두 병째니까 정해놓은 규칙을 어기는 건 아니라서 보안관은 흔쾌히 받았다. 몇 모금을 들이켜다가 보안관이 물었다.
“근데 너희 분위기 희한하다? 굉장히 엄한 것 같으면서도 술 마시는 것에는 의외로 너그럽네?”
“우리 분위기라는 게 무슨 소리야? 나랑 규영이밖에 없구만.”
태권소녀도 의자에 기대앉아 맥주 캔을 기울이며 대답한다.
“아니, 그래도…… 최소한 맥주랑 소주 같은 걸 다 챙겨놨잖아. 반주로도 마시고. 전에 길에서 만났을 때 이야기해 보고 완전…… 그 뭐냐, 수도원처럼 빡빡할 거라고 상상했는데.”
훗, 태권소녀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죽음이 가까이 있다고 느끼는, 좌절한 청춘 남녀들 20명이 넘게 모여 살았는데 술과 이성 교제가 통제되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자기 당번 업무에 지장을 주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정도만 아니면 다들 적당히 취한 채로 살았다.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녀에게는 이 새로 만난 집단의 문화가, 이해가 안 갈 만큼 순수한 척하는 그 도덕적인 태도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수도원 운운한다면 오히려 얘네들 쪽이다. 따라서 분명 그들이 아직 가면을 쓰고 있는 거라는 의심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 그녀가 보안관을 따라 나와 맥주를 권한 것은 다 따로 꿍꿍이가 있는 행동이다. 이 녀석들의 선량한 얼굴 뒤에 감춰진 바닥을 보고 싶었다.
“……너, 제니 좋아하지?”
태권소녀가 대화의 맥락에서 벗어난 질문을 던졌다. 그걸 물어보는 표정이 진지해서, 그게 오히려 더 웃음이 난다. 보안관은 질문자를 힐끗 돌아보고 대답했다.
“허, 굳이 그렇게 물어봐야 알 수 있을 만큼 내가 티를 안 내는 줄은 몰랐네. 며칠이지만 같이 지내는 동안 봤으니까 알잖아.”
“그런데 어떻게 참아?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옆방에 잠들어 있잖아. 그게 가능하냐고?”
우와, 이게 지금 무슨…….
보안관은 태권소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달빛에 비쳐 보는 거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리 술기운이 오른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야, 너 취했냐? 난 있지, 제니 처음에 TV에 나올 때부터 왕팬이었지만, 올해 7월 14일 이전까지는 그저 먼 하늘에 떠 있는 별이었어. 그래도 나는 잘살았고. 그런데 이제 와서 굳이 못 참을 이유가 뭐야? 무슨 질문이 그러냐?”
“하지만 지금은 바로 옆에서 보잖아. 상황이 달라졌다고. 손만 뻗으면 만질 수 있는데?”
듣기에 기분 좋은 질문은 아니지만, 보안관은 태권소녀가 진지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마 오늘 밤 대화를 통해 뭔가 확실히 해두려는 모양이다.
아니…… 세상에 말만 번지르르하고 실상은 좃같은 새끼들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그걸 말로 물어보겠다는 생각을 한 거지?
야, 인마. 평소 행동을 보라고, 행동을!
보안관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 혜주라는 사람……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직선적이라고 해야 할지 알쏭달쏭한 성격이다.
“너, 있지……. 할 수 있는 일과 해도 되는 일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 있어?”
“뭐?”
보안관이 갑자기 진지해지자 태권소녀가 당황스러워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보안관은 자기 할 말을 계속했다.
“나도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그 두 가지를 구분 못 했어. 어린 마음에 그냥 ‘내가 이런 걸 할 수 있구나’라든가, ‘이런 게 되는구나’ 싶어서 감탄하고 오버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지. 뭐, 그래봐야 대부분 투닥거리고 싸움박질하는 거였지만……. 하여간 그러다가 어느 날 내가 할 수 있는……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어떤 일을 했는데…… 그 결과를 보자마자 갑자기 후회가 존나게 밀려오더라고. 그때는 왜 그런 기분이 드는 건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어. 그냥 ‘이게 뭐지? 기분이 왜 이렇게 더럽지?’ 하는 정도였지. 하여간 사람들 얼굴을 볼 기분이 아니어서 밤늦도록 집에도 안 들어가고 동네 구석에 짱 박혀서 고개만 푹 수그리고 있었지. 그때, 삼식이가 나를 찾아오더라고.”
“삼식이? 멀대 말하는 거야? 머리카락 찰랑거리는 걔?”
“그래.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고 했잖아. 한참 아무 말 없이 옆에 앉아 있다가, 삼식이가 지금 내가 너한테 물어봤던 거랑 똑같은 걸 물어봤어. ‘보안관, 할 수 있는 일과 해도 되는 일의 차이를 알아?’ 뭐, 이러면서. 그래서 나는 ‘몰라, 개새끼야. 뭔 개소리야?’라고 대답했고. 기분이 더러웠거든. 그랬더니 삼식이는 그냥 하하하, 하고 웃었지. 한 20분 정도 지난 다음에 내가 궁금증을 못 이기고 먼저 물어봤어. ‘그게 뭔 차이가 있는데? 뭔 말을 하고 싶었어?’ 이렇게.”
“걔가 하는 조언을 진지하게 들었다고?”
태권소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안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 삼식이 새끼 싱겁지. 근데 가끔 도인 같은 소리도 곧잘 하거든. 하여간 그날 삼식이가 한 말은 이랬어. ‘할 수 있는 걸 다 하는 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다. 그런 사람이 가진 힘이 클수록 세상은 좃같아진다. 예를 들어 원숭이한테 총을 쥐여 줬다고 생각해 봐라. 어떤 꼴이 나겠냐’라고. 그래서 내가 ‘그럼 해도 되는 일만 하라는 의미야?’라고 물어봤더니, 그건 또 온전한 사람이 아니라 노예래.”
“뭘 어쩌라는 거야? 둘 다 별로잖아.”
태권소녀가 짜증을 내자 보안관이 맞장구를 쳤다.
“나도 똑같이 말했어. 그랬더니 삼식이가 씩 웃으면서 그러는 거야. ‘그래, 맞아. 둘 다 별로야. 그러니까 우리 스스로 그 중간을 찾아야 돼. 행동을 하기 전에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뭘 해도 되고, 뭘 하면 안 되는 건지를 미리 생각해 둬야 한다고. 남들이 해도 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에서 해도 된다고 허락받은 일만 하면 된다고. 그게 사람답게 사는 거라는 거고. 그러다 보면 사람으로서의 내 가치가 정해지는 거야’라고 하더라고.”
“참내……. 그게 뭐야? 다들 그렇게 하면서 살고 있지 않나?”
“뭐, 정말 그렇다면야 내가 더 할 말은 없지만, 좌우간 나한테는 그게 꽤 충격적인 말이었어. 너는 자꾸 삼식이를 싱겁니, 멀대니, 바보 취급하는 것 같은데, 내 친구들이라서가 아니라 유빈이도 그렇고, 엄청 괜찮은 놈들이야. 삼식이 새끼도…… 어쩌면 마음씨가 얼굴보다 더 잘생겼을걸? 그래서 그날 이후 할 수 있는 일과 해도 되는 일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지. 복잡한 것 같았는데, 의외로 단순한 걸 수도 있더라고. 하고 싶은 일에는 좀 더 엄격해지면 돼.”
현자처럼 중얼거리는 보안관을 보며 태권소녀는 속으로 ‘그렇게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 결과가 이렇게 성질이 지랄 맞아진 거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말싸움을 하려는 게 아니니까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대신에 다른 걸 물었다.
“그래서? 밤에 제니 방에 들어가는 건 할 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해도 되는 일이 아니니까 안 한다, 그 이야기인 거네?”
보안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는 기관총을 든 원숭이이고 싶지는 않거든. 그런 게 될 바에는 차라리 평범한 제니 광팬의 하나로 남는 편이 천 배는 더 좋다고 생각해.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마는…….”
“아, 얘 짜증 나는 스타일이네. 너 말이지, 여자랑은 어떻게 사귀어? 늘 이런 식이었어? 혼자 막 좋아하다가 제풀에 지쳐서 포기하고 그러는……. 아니, 설마 여자 한 번도 사귀어본 적 없냐?”
“뭐래? 야! 나 여자들한테 인기 많…… 후우우~ 인기가…… 없지는 않았어.”
“그럼 간단하잖아. 바로 옆에 있겠다, 정식으로 물어보면 되는 거 아니야? ‘야, 제니야. 우리 사귈래?’ 만약에 제니가 그러자고 하면 그때부터는 눈치 볼 것 없잖아? 이도 저도 아니고, 지금 뭘 하자는 거야?”
쯧쯧, 보안관이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태권소녀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바로 그게 하면 안 되는 일이야, 인마. 야, 생각을 해봐. 지금 제니는 나보다 약한 상태야. 그리고 걔 마음속에는 나한테 신세를 지고 있다는 생각이 있다고. 그런데 내가 ‘우리 사귈래?’라고 해봐. 걔는 그냥 보답하는 의미로 그러자고 할 거 아냐. 어쩌면 그냥 거절하기가 무서워서일 수도 있고……. 그런데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연인들끼리 하는 행동을 하려고 들면…… 어우, 젠장. 그 생각만 하는데도 좋기는 하네……. 하지만 안 돼! 그런 짓이 바로 안 되는 거라고! 절벽에 매달려서 살려 달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한테 ‘나를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어보는 거랑 뭐가 다르냔 말이야. 당연히 좋은 소리 하겠지. 하지만 그게 정말 진심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
뭐지, 이 고릴라? 인생을 왜 이렇게 복잡하게 살지?
태권소녀는 열변을 토하는 보안관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럼, 너는 평생 제니를 못 사귀겠네? 언제 고백을 할 건데?”
“그야 간단하지. 내 도움이 없어도 제니가 아주 편안하게 살 수 있을 때, 예를 들어 좀비 세상이 끝나고 우리가 다 원래 살던 동네로 돌아가서 자기 하던 일을 할 때, 그럴 때 고백할 거야. 그것도 곧바로 고백을 하면 꼭 본전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안 되고, 적당히 시간이 지난 다음에.”
태권소녀는 고개를 저으며 보안관에게 내뱉었다.
“도 닦고 앉아 있네. 내가 볼 때, 너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가는 평생 제니 못 사귀어. 이제 네 친구 새끼들이 중간에 홱 낚아채서 재미 실컷 다 보고 ‘헤헤, 미안. 난 네가 관심 없는 줄 알았어’ 이딴 소리나 듣게 될 거다. 등신.”
열이 확 오르는 소리였다. 남자가 이딴 식으로 지껄였으면 곧바로 죽통을 돌려 버렸겠지만, 여자니까 그보다는 지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보안관은 꽉 쥐어지는 주먹을 억지로 펴면서 침착함을 가장하고 웃었다.
“하…… 하하, 내 친구들…… 그런 애들이 아니라니까? 걔들…… 아니다, 걔들까지 갈 것도 없어. 삼식이랑 제니는 이미 궁합이 안 맞으니까 제외하고, 유빈이 걔는 나보다 더 ‘해도 되는 일’에 관심이 많은 애라고. 그러니까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관둬.”
억지로 웃어 보려는데 눈이 자꾸 치켜 올라가려고 하고. 가짜 미소를 짓는 입꼬리는 경련이 나는 것 같다. 그래도 보안관은 꾹 참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이 정도로 민감한 문제를 물어보는 걸 보니, 우리…… 그래도 꽤 친해진 거 맞지?”
“뭔 소리를 하고 싶어서 그렇게 징그러운 표정을 짓고 있냐? 뭐, 그래.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친해졌지.”
태권소녀는 맥주의 마지막 한 모금을 들이켠다. 그러자 보안관은 길거리의 매달린 남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아저씨가 왜 저 꼴 났는지 물어봐도 될 만큼 친해졌냐?”
흠, 태권소녀는 거시기가 날아간 남자의 시체를 잠시 바라보다가 되물었다.
“너, 사람 죽여봤어?”
그러고는 곧바로 덧붙였다.
“아니다, 아니다. 그랬을 리가 없지. 해도 되는 일이니, 할 수 있는 일이니 따지고 있는 놈이 그런 일을 해봤을 리가 없지. 다시 물어볼게. 잘 생각하고 대답해. 너, 사람 죽일 수 있어?”
“반쯤 죽여놓은 적은 여러 번 있긴 한데…….”
“그런 거는 안 돼. 정말로 숨을 끊는 거야.”
태권소녀의 말에 보안관은 잠시 고민해 봤다. 그러고는 물었다.
“……얼마나 나쁜 새낀데?”
“뭐, 아주 나쁜 새끼라고 해도 상관없어. 네가 제일 싫어하는 어떤 일을 한 새끼라고 하면 상상하는 데 도움이 될까? 예를 들어 제니를…….”
“됐어, 거기까지. 더 말하지 마. 당연히 죽일 거야.”
보안관은 태권소녀의 말을 막고 대답했다. 태권소녀는 쓸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일어나 난간에 몸을 기댔다.
“그렇지? 죽일 수 있을 것 같지? 하지만 말이야, 아주 반 죽여놓는 것까지는 그렇게 어려운 게 없거든? 화가 나서 턱을 돌리고, 옆구리를 차고…… 근데 나머지 절반이 정말 어려워. 완전히 뻗어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대가 질질 짜고 막 빈단 말이야. 살려 달라고, 제발 살려 달라고……. 그러다가 이런 말을 하는 거야. ‘너 이거 오해야. 난 그런 적 없어. 나를 죽인 다음에 네 생각이 틀린 걸 알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때 후회해 봐야 돌이킬 수 없단 말이야!’ 그런 소리를 듣잖아? 그러면 정말로 무서워진다? 그런데 옆에서는 약한 애들이 막 또 편이 갈려서 소리를 질러대. ‘죽여! 죽여! 죽여야 돼!’ 이러는 게 반이고, ‘안 돼, 혜주야! 그냥 놔둬! 그럴 가치도 없어!’ 이러는 게 반이야. 저기 저 개새끼는…….”
태권소녀는 돌아서서 보안관을 보며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한숨과 함께 이야기를 이었다.
“후우~ 그렇게 우유부단하던 내가 만든 비극이야. 내 손으로 죽여 버렸어야 할 놈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 처리하면 그때는 잠시 편하고 좋지만, 그 뒤에 치러야 할 대가가 만만치 않더라고. 그러니까 너도 미리부터 준비를 해둬. 우리는 이제 뭐든지 스스로 해야 하는 상황이야. 사람을 죽이는 것도…… 그걸 못하는 사람은 결국 손해를 보게 되는 거라고. 너희들이 아무리 똑똑한 척을 해도 그러지 못하면 반푼이일 뿐이야.”
태권소녀의 차가운 조언을 들으면서 보안관은 생각했다. 사람 모양을 한 좀비들은 정말 무지하게 많이 죽였다.
하지만 말을 하고 숨을 쉬는 사람을 죽이는 일은 좀비의 대갈통을 부수는 것하고는 또 꽤나 다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보안관은 유빈의 일이 떠올랐다.
약국 옥상에 삼식이와 둘이 고립되어 있을 때, 제니와 함께 자신들을 구하러 왔던 유빈. 녀석은 그날 두 명을 죽였다고 했다.
그때에는 그걸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차피 그 며칠 동안 사람 모양의 좀비들을 어지간히 박살 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두 가지는 꽤나 큰 차이가 있는 일인가 보다. 태권소녀는 거꾸로 매달린 남자의 시체를 향해 경멸 어린 시선을 던지면서 말했다.
“저 새끼는 저 건너편에 있는 스마일 마트 본사에서 파견 온 간부 직원이었어. 그리고 초기 우리 생존자 중에는 스마일 마트에서 일하던 애들이 꽤 많았고. 웃기는 게 뭐냐면, 걔들이 대부분 저 새끼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하늘처럼 받들더라는 거야. 차장님, 차장님, 이러면서……. 걔들도 아마 이 좀비 세상이 금방 끝날 거라고 믿었던 거겠지. 그러니까 이럴 때 점수를 따두면 나중에 혹시 저 거지 같은 새끼가 무슨 줄이라도 되어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고. 참…… 역겨운 이야기지. 하여간 그래서 저 새끼 주변에 파벌 같은 게 생겼고, 저놈은 아무것도 안 하는 주제에 이래라저래라 명령을 하더란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