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2. 무지개 (2) (212/449)


212. 무지개 (2)
2022.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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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분했던 의견은 결국 원래처럼 6층까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그것도 제니와 태권소녀까지 더해서. 제니는 팀에 도움이 되기 위해 기꺼이 따라가겠다고 했고, 태권소녀는 자기만 쉴 수는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발목이 좋지 않은 여자까지도 그런다고 하는데, 남자인 삼식이와 유빈이 쏙 빠진다고 하기가 또 좀 그래서 결국 모두 뭉텅이로 움직이게 됐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지만, 이건 도가 지나칠 만큼 이상하다…….

유빈은 뭔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문제를 인식하고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모두 모았는데, 결론적으로는 더 악화되었다. 하지만 본인들이 좋다는데 누가 뭐라고 해봐야 아무 소용 없는 일이다.

그리고 사실 여기에 신입과 규영이 둘만 계속 덩그러니 놔둔다는 것도 마음이 좀 쓰이기는 한다. 아직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니까 더 자주 얼굴을 마주하고 접촉해서 신뢰를 쌓을 필요가 있다…….

계단을 오르다가 허벅지와 무릎에서 비명이 터져 나올 때마다 유빈은 그런 생각을 하며 달랬다.

“자, 바짝 기합을 주고 일을 또 해볼까! 아냐, 아냐. 제니야, 제발 그거 만지지 마. 가시 박힐라. 손톱만큼이라도 다치면 오빠 화낼 거야!”

보안관은 듣는 제삼자조차 낯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는 이야기들을 술도 안 마신 맨 정신으로 잘도 지껄이면서 쉬지 않고 페인트 통을 나르고 마개를 끼운 욕조에 부어댄다.

두 번째 색깔은 보안관의 열정을 닮은 빨강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검정. 시간이 갈수록 도로 위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발자국들이 점점 더 어지럽게 늘어났다.

좀비들의 행진이 나타날 때마다 피하느라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하여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대가로 그들은 세 개의 좀비 무리에 컬러를 부여해 줄 수 있었다.

그 뒷정리를 마저 하고 욕조에 네 번째 색깔인 노란색 페인트를 채워놓은 뒤 조금 여유롭게 올라왔을 때는…… 정말이지, 온몸의 정기를 다 빨린 기분이 든다.

“으아……. 벌써 다섯 시가 다됐어. 참도 못 먹었네. 뭐랄까, 힘은 엄청 들고 일도 많이 한 것 같은데, 따지고 보면 효율은 별로 안 났어. 하루 종일 준비해서 겨우 세 개 한 거잖아. 그사이에 지나간 놈들이 몇인데…… 그 많은 걸 언제 다 하냐?”

페인트 색깔과 그 시간을 정리해 놓은 종이를 두드리며 삼식이가 한숨을 쉰다. 스포츠 음료 병나발을 불던 유빈이 달랬다.

“뭐, 기다리는 시간이 있으니까 그사이에 쉬엄쉬엄하는 거지. 너무 확 당겨서 바짝 일하다가 퍼지는 것보다는 이편이 나을지도 몰라.”

“하하하, 너 진짜로 작업반장님 말투랑 비슷해졌다? 야, 삼식아, 유빈아, 이거 얼마 안 되니까 후딱 끝내고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어. 반장님이 그렇게 말하면 이틀 꽉 찬 일거리였는데……. 쉬엄쉬엄? 세상에 뭔 소리야? 프로 야구 전지훈련을 와도 이것보다는 널널하겠다. 어휴, 오늘 계단을…… 가만 있어봐, 몇 번 오르내린 거야? 아침부터 한 열댓 번 왔다 갔다 한 거 같은데……. 6층, 아니지, 1층은 빼고, 5층 곱하기 열댓 번이면…… 이런 젠장! 63빌딩 걸어서 올라갔다가 내려온 거잖아!”

삼식이는 주머니에서 전자 담배를 꺼내 뻑뻑 빨아댄다. 고개를 숙인 채 니코틴을 증발시킨 수증기라도 마셔보겠다고 애쓰는 그 모습이 너무 폼이 안 나서 더 불쌍하게 보인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 간지 나게 연기를 흩날리던 과거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이건 그냥 촌 동네 노인네다.

“아, 63빌딩이라는 말 듣고 나니까 더 아득해지는걸? 삼식아, 우리 계산하지 말자. 그리고 오늘은 저 노란색으로 시마이하고 밥 잘 챙겨 먹자. 그나저나, 그거…… 피울 만해?”

“몰라, 그냥…… 담배를 피우기가 껄끄러워서 이거라도 입에 물고 있는 거야. 사실 담배처럼 구수한 맛은 없지 뭐.”

삼식이는 아직 낯선 전자 담배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냥 담배를 피우려면 선로로 올라가서 저 멀리 예전의 그 천막을 쳐뒀던 중랑천까지 한참을 걸어간 다음, 거기에서 피워야 마음이 편하다.

이 부근은 좀비들이 너무 자주 많이 다니니까, 혹시라도 다른 일행들에게 피해를 주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맞아, 씨발. 이거 아무리 빨아봐야 계속 아쉬워. 좃같아.”

덩달아 널브러진 신입도 전자 담배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았다.

“들어온다! 들어와요, 누나!”

망원경으로 저 멀리 사거리를 주시하고 있던 규영이 좀비들의 출현을 알렸다.

그래, 착하기도 하지. 이렇게나 더운데 성실하게…….

좀처럼 움직이려 들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끌어당겨 일어선 제니가 칭찬과 함께 규영의 볼을 쓸어주다가 깜짝 놀랐다.

너무 뜨끈뜨끈해서 삶은 계란 같다.

직사광선을 오래 쐬지 않으려 모자도 써보고 여러모로 애는 썼지만, 어쨌든 하루 종일 지붕도 없는 옥상에서 한여름의 뙤약볕을 고스란히 받고, 거기에 더해 옥상의 복사열까지 뒤집어썼으니…….

제니는 너무 안타까워 휠체어에 앉은 규영의 얼굴을 가만히 안아주었다. 이 어린 녀석도 그 누구 못지않게 몸을 혹사해 가며 최선을 다해 함께 싸운 것이다. 힘든 티도 내지 않고…….

“어, 어…… 어어~ 어!”

예상치 못했던 포옹에 규영의 얼굴은 더 빨갛게 달아올랐고, 벌어진 입술에서는 다양한 어조의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야, 그만해라. 저러다 애 너무 흥분해서 코피 쏟고 죽겠다.”

태권소녀가 만류하기까지 몇 초간 행복한 남자가 되었던 규영의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누나, 저…… 내일도 망 열심히 볼게요!

규영은 눈을 똘망똘망하게 빛내며 제니를 향해 미소지었다. 제니는 얼른 수건에 물을 적셔 규영의 얼굴과 머리를 식혀주었다.

“어디…… 해바라기반에는 어떤 친구들이 들어올 건가?”

좀비들이 노란색 페인트를 뒤집어쓰는 광경을 보기 위해 보안관도 난간까지 기다시피 하며 이동했다.

뱉어놓은 말이 있어서 끝까지 버티기는 했지만, 계단 오르기는 그에게도 정말 죽을 맛이었다. 특히 마지막 두 번의 왕복이 힘들었다.

“어? 근데…… 저거, 저거 저러면 안 되는데?”

제니 덕에 에너지를 채워 망원경을 들고 있던 규영이 중얼거린다.

응? 뭔 소리야, 이 꼬맹이가?

멀리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뜬 삼식이의 얼굴에도 당혹스러운 빛이 스쳤다.

“스머프들이잖아!”

“뭐?”

“스머프들이 또 왔어. 아까 파란 페인트 맞았던 새끼들……. 야, 이놈들아, 욕심 부리지 말고 사이좋게 한 색깔씩 나눠 맞아야지……. 이러면 헛고생한 게 되잖아.”

몽고 사람의 시력을 가진 삼식이가 안타깝게 중얼거린다.

하아~ 젠장.

작업해 놓은 게 다 물거품이 됐다는 걸 깨달은 유빈의 입에서도 욕설이 새어 나왔다.

기껏 선명한 노란색으로 다 세팅을 해놨는데, 이미 파란색 목욕을 한 놈들이 그걸 또 엎어버리면 한 그룹이 두 색을 가져가 버리는 거다.

단순히 한 번 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 외에도, 이제 파랑과 노랑은 변별력이 없어지니까 또 새로운 색을 만들어야 하는 게 성가시다.

옥상의 안타까운 마음과 달리 무심히 트랩 아래를 지나가던 좀비들이 또 줄을 잡아당기고, 도르래가 방향을 바꿔 마개를 뺀다.

툭, 쭈르르르륵― 쫘아아악―

청소, 대기, 세팅. 도합 한 시간 가까이 걸려서 준비해 둔 노란색 페인트가 작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번에 처음 페인트 세례를 받아 병아리처럼 노래진 좀비들도 있지만, 기존에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던 놈들 중 일부가 또 파이프 아래로 지나가자 파랑과 노랑이 어지럽게 섞인 이상한 놈들이 됐다. 그 꼴을 보며 삼식이가 탄식을 한다.

“으아! 예쁜 스머프들이 저렇게 얼룩덜룩이가 돼버렸어. 쯧쯧쯧.”

얼룩덜룩이…… 왜 그새를 못 참고 네놈들이 또 여기를 지나가 가지고 우리를 헛고생한 걸로 만들어 버리냐, 이 웬수같은 새끼들아…….

한숨을 쉬던 유빈이 갑자기 번쩍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아니다! 생각해 보니까 속상할 일이 아니었네! 오히려 기쁠 일이었어! 이제 처음으로 좀비 새끼들 색깔 칠해주느라 그 죽을 똥을 싼 효과를 보는 거잖아!”

“그건 또 뭔 소리래? 무슨 효과?”

팔짱을 끼고 있던 태권소녀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저 스머프들이 몇 시간 만에 다시 한 바퀴를 도는 건지 알게 됐잖아. 삼식아, 아까 파랑색으로 칠한 게 몇 시야? 써놨지?”

“응, 어디 보자……. 파란색은 두 시 육 분.”

“그래. 근데 지금 다섯 시 십삼 분이니까 대충…… 에, 그게, 세 시간 좀 넘게 만에 한 번씩 이리로 돌아오는 거잖아. 저놈들 걷는 속도 계산하고 거기에 시간 넣으면 쟤네가 반경 몇 킬로 정도 돌아서 여기로 오는지 대강은 알 수 있는 거라고. 그나저나 한 시간에 3킬로미터만 잡아도 세 시간이면 9킬로미터인데……. 와, 쟤들, 엄청나게 멀리까지 돌아다니는구나.”

그 말을 듣고 다른 멤버들도 새삼 깨달았다.

그래, 이 퀘스트는 각 좀비 그룹에게 선명한 색깔을 입히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었어. 대체 몇 개나 되는 그룹이 얼마나 자주 돌아다니는 건지 알 수 있도록 하는 거였지…….

거기에 생각이 미치고 나자 흉물스럽던 얼룩덜룩 무늬도 꽤 괜찮게 보였다. 기록 요원 삼식이도 기분이 긍정적으로 변해서 차분히 정리를 한다.

“음……. 파노 얼룩덜룩, 2시 6분에 이어서 5시 13분. 좋아, 그러면 좀 있다가 빨강이나 검정이 또 지나갈 수도 있다는 말이네. 아니면 우리가 준비하는 사이에 같은 놈들이 두세 번 돌았을 수도 있고. 그야 정말 모르는 거니까.”

“그러네. 내일은 저 새끼들 지난 다음부터 시작하면 이 짓 좀 덜해도 되나……. 아이구, 다리야. 다리에 알 배기겠다.”

긴장이 풀린 보안관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진심이 흘러나오자 태권소녀가 콧방귀를 뀌었다.

“뭐야? 남들이 다 2층까지만 간다고 했을 때 자기가 6층으로 오겠다고 고집을 피워놓고, 이제 와서 그런 약한 소리를 하다니. 흠, 허세였구만? 근데…… 한 바퀴 도는 시간이니, 몇 그룹이니, 그런 게 그렇게 중요해?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어차피 망을 보고 있으면 좀비들 멀리서 오는 거 알 수 있으니까 미리 시간을 정해두고 피하는 거랑 그렇게 다를 것도 없어 보이거든? 사람이 부족해서 망볼 인원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까짓 게 이렇게 다들 무리해 가면서까지 할 만한 일이야?”

음, 마지막 얼룩덜룩이들과 병아리들이 노란색 발자국을 남기며 사라져 가는 걸 구경하고 있던 유빈이 태권소녀를 돌아보며 말을 골랐다.

“물론 색깔만 칠해놔 봐야 아무 소용 없지. 만약에 내가 최종적으로 바라는 게 뭐냐고 물어보는 거라면, 나는 저놈들이 여기로 지나다니는 간격을 조정하고 싶거든. 그래야 코스트코를 털든 어디를 털든 뭔가 행동을 해보지. 지금처럼 30분이 멀다 하고 좀비들이 지나다녀서야 어디 뭘 해볼 엄두가 안 나잖아. 그래서…….”

“잠깐, 잠깐. 행진의 간격을 조정한다고? 그게 어떻게 가능해?”

“아, 뭐, 그거야…… 다음 그룹이 올 때까지 한 팀을 붙잡아놓으면 되는 건데. 그러면 뒤의 놈들이랑 앞의 놈들이랑 뭉쳐져서 하나가 될 테니까.”

태권소녀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유빈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하면 두 놈들끼리 안 떨어지고 서로 붙어 다녀? 그렇게 해본 적이 있어?”

“아니, 안 해봤어. 우린 계속 도망만 다녔는데 뭐. 나도 확실하게는 몰라. 근데 저 많은 놈들이 애초부터 서로 우리끼리 꼭 뭉쳐 다니자, 하고 시작한 건 아닐 거 아냐? 상상해 보자면 이 동네에서 몇 마리, 저쪽 골목에서 또 몇 마리, 큰길에서 또 몇십 마리, 이렇게 차근차근 불어서 저만큼 모여 다니는 걸 거잖아. 그러니까 시도해 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해서.”

유빈은 평안한 얼굴로 떠들고, 보안관과 삼식이, 제니는 ‘봤지?’ 하는 득의만면한 얼굴로 태권소녀를 마주 본다. 하지만 태권소녀는 아직 의문이 다 풀리지 않았다.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묶어놓는 것부터 하면 되는 거였잖아? 뭐 때문에 색을 입히느라고 이 고생을 이틀이나 걸려서 한 거냐고? 어떤 색을 어떤 색과 묶어야 할지 궁합 보느라고 그러는 건 아닐 테고.”

“누구와 누구를 묶는 게 좋을지는 중요한 문제이기는 해. 가능하면 자주 도는 놈들 위주로 붙여놔야겠지. 그래야 여차해도 별 손해를 보는 게 없으니까. 만약에 하루에 한 번 이 길로 지나던 놈들이 있었는데, 그놈들이랑 자주 도는 놈들을 붙여놨더니, 그 많은 것들이 두 시간에 한 번씩 여기로 지나간다고 생각해 봐. 지옥이지. 물론 내 생각에는 더 멀리 다니는 놈들한테 섞이면 그놈들을 따라서 같이 갈 것 같기는 한데, 확실하지는 않으니까. 그러니까 누가 누구인지 알아야 했고, 그걸로 주기를 파악하는 게 먼저였어. 또 그래야 제대로 합쳐졌는지 아닌지도 알아볼 수 있는 거고. 한 사나흘만 더 고생해. 그러면 대충 윤곽이 보일 거고, 8월에는 이 앞 도로도 좀 한산해져야지. 그 정도면 우리도 좀 숨통이 트일 거 아냐.”

탈진해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유빈은 기운 좋게 잘도 지껄인다. 태권소녀는 유빈과 그런 유빈을 믿고 아무 의심 없이 힘을 빌려주는 보안관의 넓고 단단한 등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정말 이 녀석들을 믿어봐도 좋은 걸까?

검은 헬리콥터가 떠나 버린 그날 이후 완전히 닫혀 버렸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마음이 조금씩 흔들린다. 오후 다섯 시 오십 분. 여전히 태양은 아주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파라다이스 모텔로 돌아와 다 함께 저녁을 먹는 동안에도 달아오른 피부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 물수건으로 볕에 탄 얼굴과 목을 식히고, 눈두덩에도 대고 있어야 했다.

그래도 여전히 괴롭고 화끈거린다. 냉장고에서 꺼낸 시원한 얼음과 차가운 맥주 한 잔이 너무도 간절하다. 고된 하루를 보냈으니 잘 먹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지친 몸은 음식보다 수분만 찾게 만든다.

삼식이가 맥주 식스 팩을 가져와 규영을 제외한 모두에게 한 개씩 나눠 줬다. 맥주 양은 하루에 두 캔을 넘지 않기로 정해두었다. 괜히 술독에 빠졌다가는 언제 죽는지도 모르는 채 저세상으로 갈 수도 있으니까.

“다들 고생했어. 쭉 들이켜고 내일도 힘내자.”

맥주 캔을 든 유빈이 지친 목소리로 건배사를 할 때, 규영이 입맛을 다시며 웅얼댔다.

“나도 한잔 마시고 싶다. 어차피 열다섯이면 다 큰 건데. 사실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지금 내 나이에 술 마셔봤잖아요.”

‘하긴 그러네. 미성년자고 뭐고 무슨 소용이야. 보호해 줄 안전망도 없는 세상에서……’라고 말하며 캔을 뜯으려던 삼식이가 먼저 태권소녀의 눈치를 본다. 잠시 고민을 하던 태권소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 괜찮겠지. 그래, 너도 한번 마셔봐. 많이는 안 되고, 딱 한 잔만.”

칙― 태권소녀는 직접 캔을 따서 규영이에게 쥐여 주었다.

킁킁, 캔의 입구에 대고 냄새를 맡던 규영이 과감하게 한 모금을 꿀꺽 삼킨다. 그러고는 곧 얼굴을 찌푸렸다.

“어우, 이거 괜찮은 거 맞아? 쓰기만 한 것 같은데…….”

“큭큭, 뭐, 그래. 원래 그런 맛이야. 차가웠더라면 좀 더 나았겠지만. 마시기 싫으면 그건 나 주고 어린이는 콜라 마셔. 억지로 다 먹지 않아도 돼.”

삼식이가 손을 내밀자 규영은 맥주를 감싸며 단호하게 도리질을 한다.

어렵게 얻은 음주의 기회를 그렇게 한입 만에 포기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어차피 몇 모금 더 마시다 보면 제풀에 그만둘 테니, 다들 그냥 내버려 두었다.

“오, 이거 꽤 맛있다. 파만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초고추장에 무친 통조림 골뱅이를 집어 먹으며 보안관이 입맛을 다신다.

삼식이가 대강 쏟아붓고 만든 건데, 제니가 했던 요리들과는 비교조차 안 될 만큼 꿀맛이다. 하긴 요리라고 하기에는 칼질 한 번 없이 휘리릭 섞어 대충 버무린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골뱅이 무침과 햄, 김과 통조림 피클을 반찬으로 삼고 미지근한 맥주를 반주로 하는 저녁은 꽤나 그럴듯했다.

좀비 세상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이 정도면 임금님의 밥상급이다. 다들 열심히 먹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잘 먹는 것도 다 경쟁력을 기르는 일이다.

“너, 좀 괜찮아졌니? 아까 얼굴 엄청 뜨거웠는데…….”

제니가 손등으로 규영이의 볼을 짚어본다. 후끈후끈한데 이게 열이 아직도 식지 않은 건지, 아니면 술기운이 오르는 건지를 모르겠다.

후후후…… 규영이가 배시시 웃었다.

“헐, 저 멀쩡해요. 근데 제니 누나, 안 더워요? 시원하게 반바지로 갈아입으세요. 반바지 입으면 오우~ 이히힛, 시워~언해져요. 후후후.”

아, 제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이 열기는 술기운 때문인가 보다. 몇 모금 마시지도 않았는데…….

“차에 가서 에어컨 쐬다 오고 싶다. 담배도 마음대로 피우고. 응? 야, 가자. 갔다 올까?”

신입이 꾀어봤지만 삼식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먼 데까지 걸어갔다 올 생각만으로도 탱탱 부은 다리가 아파오는 기분이다.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이제 진저리가 난다. 그리고 밤에는 가급적 움직이지 않는 편이 낫다.

아홉 시가 넘어가자 도시는 순식간에 어둠 속에 묻혔다. 조금 전까지 불그스름한 노을 속에서 자신의 윤곽을 드러내던 건물들도 이제는 캄캄한 그늘과 하나가 되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파라다이스 모텔 303호에서도 랜턴을 켜고 창문에 커튼을 쳤다.

앞뒤로 창문을 모두 열어놓고 바람을 맞아도 덥던 판에 문을 닫으니 순식간에 공기는 후끈해진다. 태권소녀가 빛이 새어 나가는 걸 워낙 질색하고 싫어했기 때문에 다들 따라주는 수밖에 없었다.

“근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돼? 며칠 동안 아무도 안 오더구만.”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삼식이가 찡얼거리자 태권소녀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네가 지금 사람 무서운 걸 안 겪어봐서 하는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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