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1. 무지개 (1) (211/449)


211. 무지개 (1)
2022.03.30.


16554472842297.png

“우리 올라왔다, 얘들아!”

옥상 문을 연 삼식이가 두 팔을 쫙 펴며 방긋 웃어준다. 신입과 함께 망을 보고 있던 규영은 남자들을 시큰둥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뒤이어 나오는 제니와 태권소녀를 향해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물 좀 마시자. 우와, 여기는 더 더운 것 같네. 태양이랑 가까워서 그런 걸까?”

삼식이는 싱거운 소리를 하며 배낭을 뒤적거려 물병을 꺼냈다. 신입도 거기에 동조했다.

“내 말이……. 여기에서 망보는 게 표는 안 나도 은근 고되다니까. 한순간도 집중력을 놓을 수 없잖아. 후우~ 씨발, 이 땀 좀 봐라. 수건이 푹 젖었다, 아주.”

그러면서 신입은 머리에 쓰고 있던 수건을 펴 얼굴과 목을 닦고 그걸 규영의 휠체어 등받이에 걸쳤다.

“여기다가 좀 말리자. 땀이…… 뭐야, 새끼야.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건데?”

규영은 어지간히 열 받는다는 듯 숨을 몰아쉬며 이를 악물고 신입에게 말했다.

“내가, 후우~ 나도 몸이 편치가 않으니까 웬만한 남의 허물은 굳이 말을 안 하려고 애를 쓰는 중이야. 그래서 같이 밥을 먹는 것도 뭐라고 하지 않았고, 옆에 가까이 올 때도 싫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어. 근데…… 근데 이건 아니잖아.”

“뭐가, 인마? 수건 걸쳐 놓은 거? 물기 마르라고 그런 건데 뭘? 더러운 것도 아니고, 이 엉아 땀이야. 노동의 신성한 결과라고.”

신입은 수건을 다시 들어 허공에 팡팡, 털었다.

이익! 규영은 또 질색을 한다.

“에이씨~ 튄다고! 너무하잖아! 피부병이 있는 사람이면 자기가 좀 알아서 조심을 할 것이지! 내가 이런 말까지 해야 돼? 옮으면 어쩔 거야! 아으, 더러워. 막 가려워지는 것 같아!”

“무슨 피부병? 야, 인마! 엉아 그런 거 안 키운다! 깔끔한 사람이야.”

“우길 걸 우겨! 거울도 안 보냐? 보아하니까 눈썹도 다 빠지고 이제 속눈썹으로까지 옮아간 것 같은데! 얼굴에 여기저기 붉은 반점도 보이고! 무슨 병이야? 매독이지?”

“뭐? 뭐라는 거야, 이 미친 새끼가! 이, 이건 좀비들이랑 싸우다가 다친 거야! 천 마리도 넘게 죽이다가 화상 입은 영광의 상처인데, 누가 피부병이래! 저 새끼들 목숨을 내가 구한 거라고! 야! 너희가 뭐라고 말 좀 해줘!”

신입은 자신의 눈썹이 불타 없어진 거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규영의 눈에 바짝 들이대고, 규영은 진저리를 친다.

태권소녀를 제외한 나머지들은 그걸 보고 또 한참 웃고 있다. 이런 상황에 참 웃을 일도 더럽게 많은 놈들끼리 잘도 만났다.

태권소녀는 신입을 냉담한 시선으로 노려보며 생각했다.

이놈은 정말로 독특하다. 이놈만은 아무리 좋은 면을 찾아보려 해도 어떻게 살아남은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 잘하는 것도 없고, 열심히 하겠다는 의욕도 없는 데다가, 미안해하는 마음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밤에 밖에 나가서 보초라도 서라고 하면 자긴 무서워서 어두울 때는 못 움직인다고 하고, 조금이라도 위험한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거라면서 오히려 당당하게 큰소리를 친다.

여자가 두 명이나 있는데, 그 앞에서……. 이쯤 되면 그 뻔뻔함이 이놈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하고 유일한 무기인 건가 싶다.

“너, 이 새끼야. 내가 진짜 마음이 넓어서 그냥 봐주는 거다. 그거는 알아라, 응?”

툴툴거리는 신입과 삐죽거리는 규영을 좀 조용히 하도록 만들고 일행은 옥상 난간에 붙어 서서 아래쪽 도로로 진입해 오는 좀비들의 무리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많기는 정말 많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째 날이 갈수록 더 불어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룹을 분간할 수가 없으니, 시간 간격도 미리 계산이 안 되어서, 한두 무리가 사이사이에 새로 끼어 들어온대도 그걸 알 재간이 없다.

대체 어디에서 이렇게 많은 좀비들이 모여든 걸까 하는 의문이 들다가도, 근처에 높고도 빽빽하게 솟아 있는 초고층 아파트들을 보면 단박에 수긍하게 된다.

하긴 저렇게 많은 아파트가 있으니 한 집에서 한 마리씩만 튀어나왔다고 해도 수천 마리쯤은 금방이다.

“으아, 냄새. 정말 지독하다. 근데 정말 용하네, 쟤들. 아무 생각 없을 것 같은데, 계단에서 떨어져 죽지도 않고 신기하게 평지로만 걸어 다녀.”

삼식이가 한 손으로 코를 움켜쥐고 대로와 인도를 가득 메운 좀비들을 가리킨다. 유빈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응? 그건 또 뭔 소리야? 계단이 어디 있어?”

“계단이야 많지. 페인트 가지러 가던 길에도 지하철역이 있더구만. 근데 저기 저놈들처럼 인도 가운데로 걸어가는 놈들은 딱 계단이랑 만나는 각인데도 거기로 굴러떨어지지 않고 잘만 피해 다닌다는 뜻이야. 너도 지하철역 계단 아래에 좀비들 서 있는 거 못 봤잖아. 계단에 모가지 부러져 죽어 있는 놈도 없었고. 어라? 그러고 보니 경전철역이랑 번화가 사이의 지하 통로도 한산했어……. 쟤네, 지하 별로 안 좋아하는 건가?”

그런가…….

듣고 보니 그럴듯해서 유빈과 보안관도 기억을 되짚어봤다. 정말로 행진하다가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거나 걸어 내려가 있던 놈을 별로 본 경험이 없다.

놈들이 지하로 뛰어드는 걸 본 적은 7월 14일, 좀비가 퍼진 첫날, 번화가에서 눈이 마주친 뒤 자신들을 쫓아 달려오던 그놈들뿐이었다. 그 이후에는 대부분, 거의 언제나 지하 통로는 비워져 있었다.

분위기상으로는 좀비들이 나타나기에 오히려 딱 좋은 최적의 장소인데…….

“그러네. 삼식이 말이 좀 일리가 있는 것 같은데? 혜주, 네 생각은 어때? 좀비들이 계단 내려가는 거 본 적 있어? 사람 쫓아갈 때 빼고.”

잠시 고민에 잠겼던 태권소녀가 고개를 저었다.

“난, 모르겠어. 지하에는 별로 내려가 본 적도 없고, 저기 상봉역 지하 2층 정도로 들어가면 좀비들 엄청 많거든. 정말 바글바글해. 그러니 굳이 위험한 데를 갈 이유가 있겠어? 뭐 대단한 거 있다고 거기를 꾸역꾸역 들어가겠냐고. 그리고 저 멀대가 하는 말은 별로 귀담아듣고 싶지 않아. 쟤 입에서 나온 말 중에 싱거운 소리가 아닌 걸 들어본 적이 없어.”

태권소녀는 삼식이의 면전에서 대놓고 그렇게 말했다. 물론 삼식이도 그 정도에 상처받을 인간은 아니다.

‘하하, 그런 걸 유머 감각이 풍부하다고 하는 건데……. 그치, 제니야?’ 하고 마주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공격을 받아넘긴다.

비록 태권소녀의 동의는 얻어내지 못했지만, 유빈은 삼식이의 좀비 지하 회피설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확률적으로 보아도 저만큼 빼곡하게 인도를 메운 채 걸어가는 놈들이라면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놈들이 20퍼센트 이상은 되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번화가에서 코너를 돌아 나가던 좀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단순한 우연이 아닌 것 같았다. 분명 뭔가 법칙이 있다.

그럼 만약에…… 좀비들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결합된다면? 그러면 그때 좀비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예를 들어 지하 2층에서 담배 연기가 올라온다거나 한다면…… 그래, 그거 꽤나 흥미로운데?

“야, 무슨 생각 해? 내려가자. 좀비들 다 갔다. 빨리빨리 페인트랑 신나 섞어서 붓고, 함정 만들어 놓자. 시간 별로 없어. 이 새끼들, 금방 또 올 테니까.”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유빈의 어깨를 보안관이 두드린다.

응? 어, 그래.

유빈은 장비가 든 배낭을 집어 들고 보안관을 따라 뛰었다. 태권소녀도 제니와 함께 계단 쪽으로 이동했다.

“어휴, 얘 땀 좀 봐라. 너 아직 발목 온전하지 않잖아. 좀 쉬어. 욕조들 다 올려 놨겠다, 페인트 분류해 놨겠다. 이제 힘쓸 일도 거의 없어.”

진땀을 흘리는 태권소녀에게 보안관이 말했다. 옥상까지 계단을 계속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시큰거리는 발목에 좋을 턱이 없다. 하지만 혜주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냥 신세 지는 짓은 못 해. 걱정하지 마.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으니까.”

“어휴, 왜 이해를 못 하냐? 지금은 그렇게 참아가면서 제 몫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거야. 아프면 쉬고, 몸이 다 나을 때까지는 조심을 해야지.”

그렇게 말하는 보안관의 팔뚝에는 아직도 다 낫지 않은 베인 상처들이 잔뜩 있고, 물집과 굳은살로 덮인 손바닥은 나무껍질 같았다.

이 고릴라……. 정작 자신의 몸은 죽는지 사는지 모르고 혹사하는 주제에…….

훗, 태권소녀는 녀석이 사내답다는 생각이 들어 가볍게 웃었다.

“제니야, 얘랑 같이 옥상에 있어. 안 그래도 쟤들 둘한테만 망보라고 하는 게 영 불안했으니까. 내려오면 화낼 거야!”

보안관은 제니에게 태권소녀를 맡기고 빠르게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러고는 잠시 후, 숨을 헐떡거리며 뛰어 올라와 손을 벌린다.

“열쇠!”

아, 내 정신 좀 봐. 열쇠를 내가 가지고 있었으면서…….

태권소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셔터 열쇠를 꺼내 주었다. 보안관은 이렇다 저렇다 말없이 후다닥 다시 계단을 뛰어 내려간다.

“하……. 정말 이상한 놈들이야.”

순식간에 거리로 내려가 다시 작업을 시작한 세 친구를 내려다보며 태권소녀가 중얼거렸다. 절대 손해 보는 사람이 없도록 공평하게 모든 일을 분배해야만 했던 예전 동료들과 너무 다르다.

심지어 마음이 안 맞는 인철이네 무리를 몰아내고 난 후에도 끊임없이 큰 소리가 나고, 크고 작은 다툼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작은, 콩알 한쪽만 한 치사한 문제로 서로 얼굴을 붉히고 고성이 오갔었다.

만약 자신이나 경순이 같은 군기 반장이 없었다면 훨씬 더 잦게 시비가 일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놈들은…… 저 신입이라는 놈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그냥 내버려 둔다.

“제가 말했잖아요. 멋있는 오빠들이라니까요.”

세 녀석이 비정상적이기까지 한 놈들이란 가장 강력한 증거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다. 태권소녀는 제니의 얼굴과 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떻게…… 대체 어떻게 이렇게 예쁜 애가 바로 곁에서 생글거리고 있는데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참는 거지? 다들 소림사의 제자여서 동자공을 연마하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자요, 언니. 물 좀 마셔요. 오늘도 엄청 덥네요.”

제니가 배낭에서 생수병을 꺼내 건넸다. 날씨는 정말 말 그대로 푹푹 쪄 댄다.

내리쬐는 햇살의 온도도 견디기 어렵지만, 배수가 제대로 되지 않아 고인 물이 증발하면서 습도가 올라가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다.

물병을 건네받던 태권소녀는 제니의 배낭에 달랑달랑 걸려 있는 긴 밧줄과 돌멩이들에 눈길을 주었다.

“아, 이거요? 이거 유빈 오빠가 만들어준 거예요. 제가 힘이 약하니까 혹시 좀비 한 마리랑 마주하게 되면 이거라도 쓰라고. 전에 만들어준 1호는 불타 버렸거든요. 이건 완성도를 높인 2호 볼라. 후훗, 이렇게 돌리다가 던지면 발목을 묶어서 넘어뜨리는 거예요. 물론 쓸 일이 없으면 젤 좋겠죠.”

오~ 제니가 볼라를 돌리는 시늉을 하자, 흔들리는 가슴을 보던 신입과 규영이 동시에 탄성을 터뜨렸다. 여자 둘이 올라온 이후, 두 놈 다 도로 쪽보다 옥상 위를 더 오래, 자주 보고 있다.

“야! 너희 똑바로 망 안 보고 뭐하는 거야? 저 아래 애들은 너희한테 목숨을 맡긴 거란 말이야. 안 되겠어. 망원경 내놔.”

태권소녀는 신입과 규영에게서 망원경을 압수했다. 신입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려 했지만, 태권소녀가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꽉 쥐어 보이자 이내 포기하고 망원경을 넘긴다.

엄한 규율은 필요하다. 적어도 이 철없는 두 녀석에게는 그렇다.

30여 분 뒤, 호각 소리를 듣고 뛰어 올라온 세 친구는 땀을 닦고 수분을 보충하며 난간에 기대 숨을 헐떡였다.

킁킁, 보안관이 자꾸 자신의 몸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본다. 비록 잠깐이지만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신나를 만졌더니, 그 독한 냄새가 아주 몸에 밴 것 같다.

“이 앞에 지나가요. 페인트 통 근처에 다 왔어.”

규영이 다시 찾은 망원경을 눈에 대고 도로 쪽을 주시하고 있다. 삼식이가 일어나 규영의 머리를 쓸면서 미소를 지었다.

“트랩이라고 해야 더 있어 보이지.”

규영이 질색을 하며 다시 머리단장을 하는 동안 보안관과 유빈도 일어나서 난간에 기댔다. 잠시 후, 버스 아래를 지나는 좀비들의 발목이 로프를 당긴다.

툭.

팽팽하게 당겨진 로프가 도르래에 의해 수직으로 방향이 바뀌면서 욕조 배수구에 끼워뒀던 고무마개를 잡아 뺐다.

그러자 갑자기 저항을 잃은 좀비 서너 마리가 나자빠지는 것과 동시에 짙은 파란색 페인트가 쏟아져 내렸다.

배수구에 연결해 둔 50센티 길이의 구멍 뚫린 파이프는 샤워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서 그 아래를 지나는 좀비들 전체에게 골고루 충분히 페인트 세례를 퍼부어주는 중이다.

“랄라라, 랄랄라, 랄랄랄라라! 랄라라, 랄랄라, 랄랄랄라라~”

온통 파란색으로 뒤덮인 좀비들이 버스 아래를 빠져나오자 삼식이가 스머프 주제가를 흥얼댔다. 정말이지 흰 모자만 쓰지 않은 스머프들 수십 마리가 생겨났다.

스머프 좀비들이 걸어가는 자리에는 파란색 페인트가 뚝뚝 떨어진다. 한동안은 마르지 않고 흐를 테니까 저 파란 발자국만 쫓으면 놈들이 어디로 가는지도 파악할 수 있다.

“저기도 지나간다.”

반대편 차선, 두 번째 욕조를 설치해 둔 트럭 아래의 좀비들도 트랩을 건드렸다.

쫘악.

파이프에서 또 파란 페인트가 쏟아져 내린다. 세 번째 욕조까지도 모두 성공적으로 색깔 입히기에 돌입했다.

이제 이 무리의 녀석들은 파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이고, 다른 놈들과 헛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욕조 가득 들었던 페인트는 10분 정도 계속해서 흘러내리며 충실히 임무를 수행했다.

“너무 순조로워서 이상할 지경이네. 그다음은 무슨 일을 해야 하나요, 유빈 반장니~임?”

도로를 파란색으로 물들이며 멀어져 가는 스머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삼식이가 물었다. 유빈은 도로를 흥건하게 적시며 흐르는 페인트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다음은…… 귀찮은 게 남았어. 욕조에 남아 있는 페인트, 신나로 닦아서 흘려 버리고 그다음에 또 트랩 원위치시켜서 막아두고, 새로운 색깔 페인트 붓고…… 뭐, 그런 거지. 아, 그나저나 저 바닥에 흐른 페인트는 아깝기도 하고 귀찮네. 다음에 오는 새끼들이 저거 밟고 다니면 발자국이 헛갈릴 텐데. 젠장, 다음에는 저 아래에 비닐을 깔아둬야겠다. 그거만 치우면 되도록.”

“아, 신나 냄새 머리 아픈데! 마스크를 써도 존나 독해.”

세 친구는 투덜거리면서도 훌훌 털고 일어나서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나도 도울게’라고 나서려는 태권소녀에게 보안관이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고개를 저었다.

“다리 다 나을 때까지 힘쓰지 말라니까. 그리고 우린 이런 일에 익숙해서 초짜가 없는 편이 더 편해. 손발도 잘 맞고.”

“그래, 좀 쉬어. 대신 이따가 밤에 보초 서면 되잖아.”

유빈도 마음의 짐을 덜도록 거든다. 응석받이라는 게 이런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지는 건가 싶어 찜찜하면서도 태권소녀의 내심은 그런 배려가 싫지 않았다.

“너희가 정 그렇다면 뭐…….”

태권소녀가 쭈뼛거리며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세 친구는 또 후다닥 계단을 뛰어 내려간다.

도로로 나선 유빈과 보안관, 삼식이는 고글과 마스크, 장갑으로 무장을 단단히 하고 신나를 흘려 욕조를 대강 닦아내고, 페인트 범벅이 된 도로에 대걸레질을 했다.

욕조 아래에 두꺼운 비닐을 깐 뒤, 테이프로 단단히 고정시킬 때쯤 다시 호각이 울렸다.

“하아~ 하아~ 옘병, 계단 오르내리기가 제일 힘들었어요. 하아~”

삼식이가 숨을 몰아쉬고, 유빈도 다리를 주무른다. 보안관은 땀을 뚝뚝 떨어뜨린다. 가만히 그 꼴을 구경하고 있던 규영이 근원을 뒤흔드는 질문을 던졌다.

“근데…… 왜 이렇게 기를 쓰고 여기까지 올라와? 6층이나 되는 계단을 다 꾸역꾸역. 그냥 건물 안에 들어와서 아무 데나 피해 있으면 되는 거 아니야? 2층 구석방이나 그런 데에. 다른 건물에 숨어도 되고.”

띠잉~ 문화 충격을 받은 세 친구는 서로 멍하니 얼굴을 마주 봤다.

이렇게나 단순한 문제였는데, 그렇게나 힘든 방법으로 풀어나갔다니…….

고등학교 수학 시험 때 어차피 남는 시간에 확률 주관식 문제 하나 맞아보겠다고 검은 공, 흰 공을 100개씩 빼곡하게 그려놓고 하나하나 직접 대입해 봤던 이래 가장 멍청한 짓을 한 게 아닐까…….

“끄응~ 그러네. 다음부터는 2층에 숨어 있다가 내려가야겠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좀비가 지나간 다음에도 호각을 불어줘. 삑삑― 짧게 두 번이면 되겠다.”

삼식이가 수긍을 하며 아래로 내려가려 할 때, 보안관이 단호하게 반대를 표명했다.

“아니! 난 계속 여기로 올라올 거야!”

“왜? 종아리 더 굵어지고 싶어서 그래, 보안관? 지금도 무지하게 굵은데.”

“바보냐? 그야 당연히 제니가 여기 있으니까 그렇지. 잠깐씩 얼굴 한 번 보고 가는 게 얼마나 소중하고 힘이 나는데. 저기를 봐. 저 예쁜 얼굴, 저 미소.”

어후~ 보안관 오빠는 진짜…… 어떻게 그런 말을 대놓고…….

제니가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동안 유빈과 삼식이, 태권소녀의 시선이 서로 교차한다.

어처구니가 없다. 누가 누구더러 바보라는 거지? 정말 완전한 백 퍼센트 바보 천치 주제에…….

하지만 규영이만은 진지하게 보안관에게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건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단테도 말했어. 아름다움이 영혼을 깨워 움직이게 만든다. 나도 다리만 멀쩡했으면 이까짓 6층쯤 계속 오르락내리락했을 거야. 라푼젤이 기다리고 있는 탑처럼.”

아니…… 지금 뭔 소리야? 언제부터 계단을 오르는 게 사랑의 척도가 됐는데?

유빈은 이야기가 더 한심해지기 전에 상황을 정리했다.

“그래그래, 보안관은 기운이 좋으니까 여기로 와. 허약한 우리는 2층 구석에 짱 박혀 있을게. 호각이고 뭐고 불어줄 필요도 없네. 보안관이 내려오는 길에 우리 부르면 되잖아. 이걸로 끝! 됐지?”

“끝 좋아하네. 그냥 얘를 데리고 가서 같이 움직여. 저렇게 좋아서 미치려고 하는구만.”

태권소녀가 웃고 있는 제니를 가리키며 한 겹의 지혜를 더 보탠다.

16554472842303.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