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0. 걷히는 안개 (4) (210/449)


210. 걷히는 안개 (4)
2022.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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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에는 자기가 죽게 되는 명령인지도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성실하게 따랐던 사람들…….

멍해진 테라가 물었다.

“우리나라도…… 한국도 그렇게 당한 거예요? 먼 외국에서 좀비가 들어 있는 컨테이너를 가지고 와서 보관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 문을 열어버린 건가요?”

“음……. 한국이나 동아시아의 국가들 같은 경우에는 컨테이너보다 작은 배로 접근하는 편이 더 용이했을 거야. 컨테이너선이 공해상을 돌며 시간과 조류에 맞춰 동력을 끈 배를 띄우는 거지. 그러면 알아서 천천히 해안으로 접근하고, 거기에서 접촉이 이루어질 테니까. 트럭에 실어 이동시키는 건 유럽 내륙이나 미주에 최적화된 방식이었고.”

“왜 그렇게 많은 좀비들이 필요했어요? 아까 시나리오에서는 좁은 섬 같은 곳에 소수의 좀비만 풀 계획이었잖아요. 전 세계가 아니라.”

“그거야 뭐, 일종의 보험이었지. 백신의 판매가 부진할 경우에 대해서도 대비했어야 하니까. 언제 어디든 좀비를 투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백신의 판매가 예상만큼 활발히 이뤄지지 않는 지역에는 말이야. 또 백신의 판매가 활발한 곳에서도 좀비들을 가끔 풀어놓을 필요가 있었어. 좀비에게 팔다리를 잃은 사람의 수가 많아질수록 의수를 비롯한 의료 신체 산업은 호황을 누릴 테니까.”

젠킨스는 수학 공식을 설명하듯 별다른 죄의식이나 미안한 감정이 없이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아……. 테라는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라운드 쪽으로 시선을 돌린 테라는 작업을 하는 군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들 초췌한 표정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자신들을 이 지옥에 몰아넣은 주범 중에 하나가 바로 여기에 앉아 있다는 걸 알면 저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믿기지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다루던 한 여자가 난데없는 폭격에 사망을 했고, 그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고 그 여자의 연인은 전 세계에 사형선고를 내려 버렸다니…….

차라리 JL의 계획이 성공했더라면, 그렇게 됐더라면 그래도 이보다는 안전한 세상이 되지 않았을까?

옳지 않은 일이라는 건 알지만, 차라리 그렇게라도 되었더라면 하는 망상이 머릿속을 스친다. 고개를 푹 숙인 테라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왜…… 연구소를 좀 더…… 안전한 나라에 짓지 않았나요? 미국이나 북유럽이나 영국 같은 곳에……. 그런 곳이었다면 그렇게 사람들이 밀집한 도시로 미사일을 날리거나 하지는 않았을 텐데……. 왜 그렇게 몸서리쳐지게 무서운 일을 하면서 준비를 그렇게 허술하게 했나요?”

“안전한 나라는…… 곤란해. 법과 원칙이 철저히 지켜지는 곳에서는 여러 제약이 많거든. 그런 데에서 위험한 연구를 하다 보면 여러모로 귀찮아지고 아슬아슬해지는 경우가 생기니까, JL로서는 당연히 그렇지 않은 나라들을 찾아 좀비 연구소를 건설할 수밖에 없었지.”

법과 원칙을 피해 다닐 게 아니라 지켰어야지…….

테라는 눈물이 살짝 고인 커다란 눈으로 젠킨스를 노려보았다. 젠킨스는 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빈 비닐 봉투를 뒤적거리며 ‘과자를 더 가져오지 그랬어’ 따위의 말들을 지껄이고 있다.

이제는 이 사람이 뻔뻔한 건지, 아니면 정신이 이상해진 건지조차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하긴 세계를 정복할 거라고 믿고 있다가 그 직전에 이렇게 거지꼴이 되었으니 미쳐 버렸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

크래커 봉지에 남은 부스러기들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고 있는 젠킨스에게 테라가 물었다.

“계속 교묘하게 주어를 바꿔서 말했지만, 젠킨스 씨도 그 앤드루라는 사람처럼 대단한 열세 명 중 하나였죠?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계획을 세우던 사람들 말이에요. 비록 몇 시간인지, 한나절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될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지금 왜 여기에 있어요? 여기는 당신네 나라도 아니고, 좀비들로부터 지켜줄 안전한 벙커 같은 것도 없는데…….”

흠, 젠킨스가 초코파이 봉지를 혀로 핥으며 대답했다.

“그걸 뭐라고 부르는 게 더 적합한지 모르겠군. 희망이라고 하자니 너무 계산적이지 않은 것 같고, 기댓값이라고 하자니 그러기에는 지나치게 낮은 수치였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뛰어든 거니까 비합리적이고……. 어쨌든 남은 열두 명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뭔가를 통해 혹시라도 이 사태를 개선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걸 원점으로 돌리지는 못해도 적어도 앤드루가 기대했던 것보다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거지. 안간힘이라고 불러도 좋겠군. 그들은 그런 안간힘을 써보려고 했던 거야.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최대한 동원해 보려는 노력이라고나 할까? 같은 회사라고는 해도 다들 저마다 히든카드를 숨기고 있었으니, 그것이라도 어떻게 써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지.”

“또 빙 돌려서 애매모호한 말들로 진실을 감추시네요. 정확히 뭘 했다는 대답은 아니잖아요.”

“붕대 한 번을 안 풀어 보여주는 소녀에 비하면 이 정도는 정말 진실하고 최선을 다한 답변이었다고 생각해. 하지만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지. 왜냐면 나는 앞으로도 한동안 계속 너의 호감을 필요로 하니까. 그리고 나의 대답을 듣고 나면 너의 호감도가 올라갈 것이라고 확신해. 한국에도 JL의 연구소가 있어. 요새화시킬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는 연구소지. 지리적으로도 그렇고,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일정 기간 모든 것을 자급할 수 있는, 그런 조건 말이야. 다량은 아니지만, 널 키드의 혈청도 확보하고 있어. 쇼크 억제제도.”

테라의 가슴이 두근거린다.

백신…… 쇼크 억제제…… 정말 그런 것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좀비로 변할까 봐 두려워서 악몽 속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해방된다.

그리고…… 그걸 갖고 제니를 찾으러 갈 수만 있다면…….

하지만 너무 꿈같은 이야기다.

이 사람, 과자를 더 얻어내고 싶어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자기 입으로 나의 호감이 필요하다고 고백을 한 데다가 뼛속까지 장사꾼인 사람이니까 그 정도 속이는 건 대단한 일도 아닐 것 같다.

“거짓말…… 허풍이죠?”

“하하하, 허풍? JL은 이 종말 상황을 만들기로 하고 그 시나리오를 썼던 기업이야.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 버전 중에는 이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나 심각한 것도 있었고, 당연히 거기에 대처하는 매뉴얼도 존재했지. 그 개자식 앤드루가 다이얼 담당이었다면, 나는 그 매뉴얼을 책임지고 있었으니까. 여기에 있는 연구소는 만일의 돌발 상황을 위한 나의 히든카드였어. 사회의 대대적 혼란이라는 조건이 발동하는 것과 동시에 그곳도 외부와의 모든 관계를 끊고 자급에 들어갔을 테지. 물론 거기까지 도착하기 전에 좀비들이 너무 많아져서 그 매뉴얼 담당자마저 이 꼴이 되어버렸지만.”

그 말을 하면서도 젠킨스는 별로 기죽은 모습이 아니었다. 아직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자신감이 보인다.

테라는 그의 자신감이 광기가 아니라 논리적인 근거에 바탕을 둔 것이기를 바랐다.

이 지옥을 만든 범인 중의 한 사람에게 뭔가를 바라야 한다는 것이 굉장히 신경을 거슬리게 하지만, 그래도 그가 현재 이 나라 전체에서 좀비를 가장 오랫동안 연구해 온 사람인 것이다.

“그…… 연구소가 어디에 있는 거예요? 정말 있다면 알려주세요.”

“오, 하느님. 너무하는 거 아닌가, 테라 양? 그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히든카드를 홀랑 까라고 요구하는 거잖아. 안 돼, 알려줄 수 없어. 물론 앞으로 우리 대부분의 삶은 상당히 외로워질 테니까 테라 양처럼 아름다운 인연이 나와 함께하기를 원한다면 기꺼이 동행으로 삼아는 주겠지만. 그리고 위치를 안다고 해도 이쪽에서는 못 가. 요새화시킬 수 있는 독립적인 장소라니까? 서울 복판에 있는 우리가 자력으로 거기까지 도달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럼 뭐예요? 그저 배나 채우면서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겠다는 건가요? 안간힘을 써보겠다고 투쟁심을 불사르던 때와는 너무 다른 태도잖아요.”

테라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을 때, 젠킨스는 근처를 지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과 그들이 향하는 방향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런 젠장, 지금 저 사람들 식당 가는 거지? 점심시간이 시작됐나 봐! 빨리 가서 앞줄에 서야 조금이라도 밥을 더 받을 수 있는데! 테라 양, 지금 몇 시야? 시계를 건빵이랑 바꿔 버렸더니 이럴 때 영 불편하다니까. 이거…… 돼지고기 냄새 아닌가? 오!”

임수정이 건대 쉘터로 떠날 때 선물로 줬기 때문에 테라에게도 시계는 없다.

그리고 점심시간 같은 건 중요하지도 않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 한국 어딘가에 있을 구원의 땅, 백신이 있는 연구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젠킨스의 영혼은 이미 급식소에 가 있었다. 전광판 상단의 디지털시계를 보고 12시가 넘은 것을 확인한 젠킨스는 식당을 향해 잰걸음으로 걸어가며 말을 남겼다.

“이따가 아까 거기에서 또 만나. 그땐 과자를 좀 넉넉하게 가져와 주면 좋겠어. 아, 그리고 연구소에서도 내가 이 나라에 와 있다는 걸 알아. 그러니까 나를 데려갈 준비가 되면 저 하늘을 통해 신호를 보내올 거야. 누구라도 놓칠 수 없는 확실한 신호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하늘에서 신호가? 그게 무슨…….”

테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자신이 대화를 나눈 게 제정신인 사람이었는지조차도 의심스러워지는 말이었다.

이 사람, 미친 건가? 마음이 약해져서 미치광이가 아무렇게나 지껄인 소리에 홀렸던 걸까?

하지만 젠킨스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하늘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같은 말을 한 번 더 반복했다.

“하늘을 봐! 거기에서 신호가 올 거라고! 나를 부르는 신호가!”

***

“준비됐어? 당긴다?”

삼식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보안관은 양손에 힘을 꽉 주고 굵은 로프를 당겼다. 도로 표지판 파이프를 도르래 삼아 걸린 로프가 당겨지자 커다란 욕조가 머리 위로 쭉쭉 올라간다.

자동차 지붕 위에 올라서 있던 삼식이와 유빈은 욕조가 한쪽으로 기울어 자빠지지 않도록 양쪽에서 중심을 잡았다.

보안관이 한 번씩 줄을 잡아당길 때마다 땀에 젖어 밀착된 티셔츠를 통해 그의 팽팽한 역삼각형 등 근육이 드러난다.

“얘, 저것 좀 봐. 저 자식, 저거…….”

뒤쪽에서 페인트와 희석제 통을 끌어 나르던 태권소녀가 제니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제니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보안관 오빠, 근육 진짜 장난 아니죠. 하하, 언니……. 저런 취향이었네요? 우락부락, 울퉁불퉁.”

“……갖고 싶다.”

보안관의 등에 시선을 고정시킨 태권소녀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중얼거린다. 너무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제니가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하! 지금 그거, 설마 보안관 오빠한테 공개 구애하는 거예요? 제가 다리 놔드릴까요? 그렇지만 의외인데요? 매일 쏘아붙이기만 하던 언니가 며칠 만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변할 줄은…….”

“아, 아니야!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바보! 저 근육 말한 거야. 저런 광배근, 나도 정말 갖고 싶었어. 저게 다 펀치력이거든. 그런데 저만큼 큰 근육은 쉽게 못 얻어. 자, 봐봐. 나도 나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이게 한계야.”

태권소녀는 양팔과 등에 힘을 준 채 몸을 돌리며 제니에게 만져 보라고 한다.

하하, 제니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선의를 거절하기 어려워 태권소녀의 등을 살짝살짝 눌렀다. 꽤나 탄탄하면서도 동시에 탄력이 있다. 과연 운동을 오래 한 사람의 몸이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등이었다.

“너희 뭐해? 그 페인트 파란색만 골라둔 거 맞아?”

첫 번째 욕조를 버스 위에 고정시키고, 거기에 채울 내용물을 가지러 온 유빈이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태권소녀와 제니를 번갈아 본다. 제니가 밝게 웃으며 대답해 줬다.

“하하, 혜주 언니가요, 오빠를 한 방에 눕힐 수 있었던 강한 펀치력의 원천이 자기 등 근육이었다고 자랑했어요. 그래서 만져 봤더니, 정말 고무공 같은 거 있죠?”

네, 네, 그렇겠지요. 하하, 저도 맞을 때 고무망치에 맞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유빈은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페인트 통과 희석제를 양손에 들었다.

“이게 정말 효과가 있을까? 이렇게 고생을 해가며 페인트를 가져오고, 또 저렇게 욕조까지 끌어 올려가며 힘을 쏟을 만한 가치가 있는 건지 모르겠어.”

태권소녀도 페인트를 들고 따라오면서 유빈에게 물었다. 희석제 깡통 하나만 들어도 낑낑거리는 제니와는 완력이 다르다. 다쳤던 발목도 이제 꽤나 나았는지 힘쓰는 일에 자꾸 참여하려고 한다.

“뭐, 워낙 많아서 좀비들을 얼굴로 구분할 수 없으니, 일단 색칠을 해둬야 구분하기가 편하지. 대체 몇 무리가 얼마나 자주 다니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 우리도 그다음 수를 생각할 수 있을 테니까. 페인트를 뚝뚝 떨어뜨리면서 걸어갈 테니까 나중에 어디로 갔는지도 확인해 볼 수 있고. 자, 삼식아, 받아.”

유빈은 페인트 통을 들어 버스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삼식이에게 건넸다.

태권소녀도 똑같이 따라 한다. 페인트 두 통과 희석제 두 통을 받아 올려둔 삼식이가 하지 않아도 될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왜 그렇지? 혜주가 줄 때가 받기에 더 편하네.”

쿵!

그거야말로 가슴에 꽂히는 비수.

허허허, 유빈은 또 헛웃음을 흘려야 했다.

당연하지, 삼식이, 이 개새끼야! 얘가 나보다 아주 약간이기는 하지만 키도…… 젠장, 키도 더 크고 팔다리도 더 기니까…….

“삼식아, 쓸데없는 소리 실실거리지 말고 욕조 좀 잡아봐! 지금 이쪽에서 고정시킬 거야! 잡았어?”

버스 안쪽으로 들어가 창문 사이로 욕조에 연결해 둔 빨랫줄을 잡아당기면서 보안관이 외쳤다.

욕조에 페인트를 부어놓고 기다리다가 행진하던 좀비들이 간단한 트랩을 건드리면 머리 위로 페인트가 쏟아지게 하는 장치를 만드는 중이다.

이것이 바로 유빈이 고안해 낸 좀비 무리 구별법. 빨강, 파랑, 초록, 노랑, 검정, 흰색…… 가지각색의 페인트로 각 무리마다 색깔을 입혀놓으면, 그다음부터는 구분하는 데 어려움이 없어질 것이다.

물론 여관 욕실에서 욕조들을 몇 개나 떼어내서 그걸 여기까지 끌고 와야 했고, 200여 미터 아래쪽의 공구상에서 페인트를 털어 올 때에는 근처를 배회하던 좀비들을 다 처치해야 해서 땀도 꽤 뺐지만, 그래도 이만큼 명확하고 간단한 분류 방법은 없다.

이건 좀비들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면 쓸 수 없는 방법이다. 좀비들은 외부의 자극에 거의 반응을 하지 않으니까, 머리 위로 페인트가 쏟아져 내려도 그걸 피하거나 멈춰 서지 않고 기꺼이 맞아줄 놈들이다.

“좀비들이 여기 자동차들 사이로 지나가는 것까지는 알겠어. 그런데 페인트는 어떻게 해서 딱 타이밍을 맞춰서 쏟아지게 할 건데?”

머리 위로 삐죽 나와 있는 욕조의 배수구를 올려다보며 태권소녀가 물었다. 유빈은 비닐 더미를 올리며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한다.

“그거…… 규영이더러 기다리고 있다가 마개를 당기라고 할 건데?”

“뭐? 걔는 끼워 넣지 마! 왜 하필 몸도 불편한 어린애를…….”

“정색 좀 하지 마라. 당연히 농담이지. 버스하고 욕조에 조그만 도르래를 달 거야. 그리고 여기에 발목보다 조금 높게 줄이 걸리도록 만들어둘 거고. 그렇게 하면 여기에서 당기는 힘으로 위쪽 마개가 빠지겠지. 그러면 저기로 페인트가 쫘악― 쉽지?”

삼식이에게 비닐을 넘긴 유빈은 바지 주머니에서 주먹보다 조금 작은 도르래를 꺼내 보여준다. 물론 공구상에서 가져온 것 중 하나다.

“좀 전의 비닐은 뭐야? 그건 왜 가지고 왔는데?”

“페인트를 다 부어놓은 다음에 이걸로 욕조를 덮어놔야지. 그래야 마르기도 덜하니까.”

“그냥 욕조 자체가 당겨져서 확 엎어지는 편이 더 간단하고 확실한 거 아니야?”

“그러면 몇 놈한테만 묻고 말잖아. 바닥에 그냥 버려지는 양이 더 많을 거고. 우리가 바라는 건 별로 신경 써서 찾지 않아도 한눈에 어떤 놈들인지 알아볼 수 있는 거니까, 가능한 많은 놈들에게 골고루 묻혀둬야 해.”

흠, 태권소녀는 보안관을 도와 빨랫줄 매듭을 묶고 있는 유빈을 빤히 쳐다봤다.

힘 좋고 싸움 잘하는 리더 뒤에 숨어서 어찌어찌 잘도 도망 다니며 운 좋게 살아남은 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며칠 두고 보자니 그보다는 장점이 많은 녀석 같다.

생수 두 통을 써서 머리도 감고, 목욕도 하고 나니 거지꼴도 면했고…….

하지만 아직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페인트 뒤집어씌우기 작전이 정말로 그렇게 유효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회의가 남았다.

“시간 얼추 흘러간 것 같은데, 호루라기 소리가 안 들리네? 쟤들, 망 확실히 보고 있는 것 맞아?”

매듭을 다 묶어놓은 보안관이 시계를 보며 중얼거린다. 그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마침 길가 모텔 옥상에서 호각이 울렸다.

삐익― 삐이익―

“가자! 빨리 내려와!”

보안관이 버스 안에 기대 세워두었던 해머를 집어 들며 삼식이에게 손짓을 한다. 삼식이는 아주 가볍게 몸을 날려 옆 차의 지붕과 도로를 차례로 밟았다.

맞아, 이놈도…… 운동신경이 꽤나 좋다. 입만 열지 않으면 멀쩡하다고 할 수 있는데…….

태권소녀는 삼식이의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보며 생각했다. 일행은 대부분의 연장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모텔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드르륵―

셔터를 내린 뒤, 안에서 자물쇠를 잠가 고정을 시킨 태권소녀가 열쇠를 트레이닝복 주머니에 넣었다.

“이거야 원, 일하는 시간보다 숨어서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긴 것 같아. 그렇지, 보안관?”

계단을 오르며 삼식이가 중얼거렸다. 보안관도 고개를 끄덕인다. 평균 30분도 나가 있기가 어려우니, 이대로라면 코스트코를 털다가 대로 쪽에서 밀어닥치는 좀비들에게 당할 판이다.

뭔가 수를 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렇게 바삐 움직이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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