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걷히는 안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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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 걷히는 안개 (1)
2022.03.26.
“배요? 갑자기 배가 왜? 의미가 잘 연결이 안 돼요.”
테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차, 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젠킨스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보트들인데…… 그것에 관해 설명을 하자면 이야기의 흐름이 엉망으로 흐트러질 수밖에 없으니, 일단은 작은 배가 잔뜩 있었다고 해두지. 그리고 지금 느낀 걸 말하자면, 아예 연구가 시작되던 시점으로 돌아가서 거기서부터 차근차근 시간의 순서대로 사건을 짚어가는 게 어떨까?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이야기하다 보면 오해가 발생할 확률이 더 높아질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표현은 거창하지만, 결국은 젠킨스 씨 본인의 입장을 옹호하고, 조금이라도 책임을 덜기 위해서 이야기를 포장하려는 것뿐이잖아요.”
“뭐…… 완전히 아니라고 하기는 어렵군. 하지만 현명한 사람이라면 사건의 결과뿐 아니라 그 원인도 함께 알고 싶어 할 거라 생각하는데…….”
말을 잠시 끊고 테라의 눈치를 살피던 젠킨스는 그녀의 표정에서 동의를 읽어내고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가 이 긴 고백을 시작하기 전에 전제해 두고 싶은 건 딱 하나야. JL이 물론 천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류 멸망을 위해 존재하는 조직도 아니었어. 세상이 이 지경이 되어버린 건…… 결코 의도했던 결과가 아니었다는 거지. 이만큼이나 다수의 사람이 무작위로 죽는 일은 그 어떤 기업이라고 해도 원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알겠나? 대부분의 JL 직원과 그 가족들 역시 이 잔혹한 비극의 무대 위에 서 있었다고. 배후가 아니라. 그 점에서는 나도 예외가 아니지.”
젠킨스는 엉망으로 구겨지고 찢어진 양복을 손으로 훑으며 자신도 피해자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그의 입가에 묻은 싸구려 크래커 부스러기와 제멋대로 헝클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보고 있자니 테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글로벌 회사의 간부로 화려한 삶을 누리던 이 남자는, 7월이 시작되기 전 자신이 이런 신세가 되리라는 걸 상상이나 해봤을까…….
테라의 눈빛에서 동의를 확인한 젠킨스는 다시 시선을 야구장 쪽으로 돌린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상의 꽤 많은 일들은 우연한 접촉을 그 시작점으로 두지. 그리고 그 접촉이 의지를 수반한 행위의 결과로서 이루어질 때에 사람들은 그걸 발견이라고 불러. SPO는 그런 발견을 위해 존재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지. 아, SPO라는 건 남극점에 위치한 남극 관측소의 줄임말이야. 영하 55도 이하의 기온에서 수천 년 이상의 시간 동안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보존되어 왔던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해 세계 여러 나라에서 파견된 연구원들이 바쁘게 경쟁하는 곳이지. 상상이 가나, 테라 양? 영하 55도의 세계란 말이야. 바이러스가 생존할 수 없어서 아무도 감기에 걸리지 않는, 그런 아이러니한 곳이라고.”
말을 끊은 젠킨스가 의자를 통통, 두드려 과자를 달라고 한다. 초코파이 한 개를 놓으며 테라가 선을 그었다.
“이렇게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야기를 길게 끈다면 더 이상은 과자를 드리지 않을 거예요. 비밀스런 그 ‘무언가’가 나오기 전까지는요.”
“후후후, 냉정하고 계산적이군. 뭐, 좋아. 나도 그러려는 의도는 없었으니까. 이제부터는 누구나 아는 이야기 따위 더 이상 없어. 믿어도 돼. 그러니까 그게 아마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2010년 3월 20일이었어. 네 명의 영국 연구팀이 스노우 캣을 타고…… 스노우 캣이 뭔지 아나? 설원에서 달리기 위해 만든 무한궤도 장착 차량이지. 왜, 영화 <샤이닝>에서 잭 니콜슨이 그것의 엔진을 부수잖아. 그 광기 어린 표정, 섬뜩했지.”
테라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젠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모르는 모양이군. 하긴, 옛날 영화니까. 하여간 그걸 타고 그들의 기지에서 북서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까지 이동했다가 돌아와. 그게 이 이야기의 시작점이지. 외출 자체의 목적은 일상적인 탐사였지만, 그리 주목할 만한 건 아니었어. 어차피 낮이 급격하게 짧아지는 시기였기 때문에 외부 활동 시간도 길지 않았고, 그저 미리 설치해 둔 장비를 회수하는 정도였지. 그날 외출했던 네 명의 연구원 중 한 사람인 폴 휴슬리라는 지질학자가 얼음을 파고 단층 속에 넣어뒀던 장비였어. 그날 네 사람의 일지에 별다른 기록은 남겨져 있지 않아. 뭔가 새로운 걸 접촉했다는 메모도 없고. 그리고 그 일주일 뒤부터 긴 밤이 찾아오지. 자그마치 여섯 달 동안이나 밤만 계속되는 긴 겨울 말이야. 이게 지구라고 하면 이게 태양인데…….”
젠킨스는 주먹 두 개로 지구와 태양의 각도를 설명하려 들었다. 테라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손짓을 하며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좀비와는 무관한 잡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섯 달의 길고 어두운 겨울이 지나간 뒤 9월에 다시 해가 떠올랐을 때, 영국 연구팀들 전원은 그 기분 좋은 첫 햇볕을 쬐려고 기지 밖으로 나오지. 그리고 빛을 쐬고 돌아온 휴슬리는 40여 분 뒤,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어. 1분 내외 만에 다시 정신을 차렸고, 기지 내에 상주하던 의사로부터 간단한 진단을 받았지. 아무런 이상을 감지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한 의사는 그에게 외부로 가서 정밀 진단을 받으라고 조언해. 휴슬리 자신도 그것에 동의했고. 아무래도 흡연자다 보니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을 테지. 그래서 휴슬리는 열흘 동안 기지를 벗어나 뉴질랜드의 병원에서 검진을 받고 돌아와. 아주 건강하다는 보증과 함께. 그리고 멀쩡하게 잘 지냈어. 보름이 지날 때까지는 그랬지. 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겠어?”
젠킨스의 질문을 받은 테라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봤다. 여섯 달, 열흘, 보름, 그리고 또 그전의 며칠…….
“일곱 달인가요?”
“응, 맞아. 일곱 달이 넘는 시간이 지났어. 우리가 첫 접촉이라고 간주하는 그 3월 20일로부터 계산한다면 말이야. 놀랍지 않아? 지금 좀비들에게 감염되면 변하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아마 아무리 길어도 너덧 시간을 넘기지 않을 거야. 짧으면 1, 20분 안에도 변할지 모르지. 그런데 그때 휴슬리는 무려 일곱 달을 생존해 있었던 거야. 보균자로서 말이야.”
“잠깐만요, 젠킨스 씨. 어째 굉장히 신뢰하기 어려운 말들이 막 지나간 것 같은데요? 얼마나 될까라고요? 아마라고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어제는 저한테 좀비에 관한 최고 권위자인 것처럼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그저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처럼 어휘를 사용하고 계시네요. 물린 사람이 얼마 만에 좀비로 변하는지도 몰라요?”
당황한 테라가 말을 끊으며 묻자 젠킨스는 뒤를 힐끔 돌아본 뒤, 오히려 그녀의 무지를 동정한다는 듯한 어조로 평온하게 대꾸했다.
“기생하는 원핵생물에 대해 잘 모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그것들은 주변 환경과 숙주의 양에 따라 번식의 방법과 속도를 변화시킨단 말이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무 빨리 숙주를 죽여서 번식이 이루어질 수 없게 되어버리니까 그런 특성을 가진 것들만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는 거지. 좀비 박테리아도 마찬가지야. 햇볕이 없고 고립된 환경 속에서 좀비 박테리아는 숙주를 아주 천천히 변이시켰다고. 발병의 시기도 아주 늦추고, 게다가 이놈은 스스로의 존재를 숨기기까지 했지. 그러니 JL의 실험실에서 기록되었던 변화의 속도와 이렇게 사람들로 넘쳐 나는 대도시에서 좀비로 변하는 시간은 다를 수밖에 없어. 대도시 쪽의 박테리아가 훨씬 더 빠르고 활발하게 활동하겠지.”
“그럼 젠킨스 씨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좀비로 변하는 시간이, 지금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느렸다는 말씀인가요?”
“엄청난 차이가 있지. 배에 실었던 샘플들의 기대치는 빠르면 여섯 시간, 늦으면 이틀 만에 새 숙주를 좀비로 변화시키는 거였어. 그 정도면 딱 좋을 거라고 예상했지. 당연하잖아. 이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변해 버리면 그 증식의 속도를 걷잡을 수가 없으니까.”
배에 싣다…… 기대치…… 예상…… 딱 좋다…… 증식의 속도…….
젠킨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흘리는 단어들이 테라의 피부에 소름이 돋게 한다. 이제 알겠다. JL은 단순히 좀비 백신을 만들던 곳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좀비들을 양산해서 풀어놓았던 놈들이다.
이 대규모의 확산은…… JL이라는 회사의 의도적 행위였던 것이다. 이놈들이 범인이었다.
헉, 가벼운 탄성이 테라의 입에서 터져 나오자 그녀의 마음을 알아챈 젠킨스가 다급하게 손을 젓는다.
“제발 그렇게 미리 판단해서 나를 돌로 쳐 죽이겠다는 눈빛으로 노려보지 말아줘. 아까 말했잖아, 이 나라에 좀비들이 퍼진 것은 적어도 JL의 공식적인 의지가 아니었어. 어떤 똥멍청이가 자신들이 달아날 구석도 만들지 않은 채 좀비를 풀겠느냐고. 하아~ 참, 대체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믿어줄 건가? 그 정도의 신뢰도 없이 무작정 나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했던 거야?”
젠킨스의 다급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테라는 입술을 꽉 깨문 채 그를 노려보았다.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는다. 바로 눈앞에 엄청나게 탐욕스러운 악마가 앉아 있다. 어떻게 이 사악한 존재를 용서할 수 있을까?
흥분한 테라가 그 자리에서 일어날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 젠킨스가 말을 덧붙였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를 미워하고, 희생양으로 삼아 벌을 내리고자 하는 욕망이 강해진다는 건 알아.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상대보다 도덕적 우위에 있다고 판단하면 대상을 폄하하고 혐오하는 것으로 우월감을 느끼려고 하니까. 게다가 나는 그 희생양이 되기에 여러모로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 하지만 그걸 실행으로 옮긴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뭔지 생각해 봐. 없어. 그런 일차원적인 행위보다는 무엇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돼.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이렇게 대화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나는 네가 가진 풍부한 음식을 통해 생존할 수 있기를 원하고, 너는 내가 알고 있는 이 지식들이 간절하게 필요해. 암, 그 누구보다도 간절하지.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도와야 해. 서로가 필요한 사람들이란 말이야.”
“하…… 내가 젠킨스 씨의 지식을 그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필요로 한다고요? 대체 뭘 보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됐죠?”
테라가 분노와 경멸을 담아 냉소하고 있을 때, 젠킨스는 태연히 그녀의 잘린 발가락을 가리켰다.
“이거지.”
덜컹, 심장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정곡을 찔린 테라는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하고 얼어붙은 채 젠킨스의 그 뻔뻔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볼이 붉게 달아오른다.
……언제부터 눈치를 채고 있었던 걸까?
당혹스러워하는 테라와 달리 젠킨스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어제는 과자에 눈이 돌아가서 아무 주제나 막 던졌지만, 이 징그럽고도 딱딱한 이야기를 들으러 오늘도 또 나타나 줄 거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웠지. 좀비 면역자? 세 가지 유형? 생각해 봐. 누가 그런 소리를 믿어주겠어? 인간이란 자신의 상식을 넘는 주장에 대해 쉽게 신뢰를 보내지 않는 법이거든. 그리고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경험한 것은 좀비에게 물린 이들이 변해가는 끔찍한 광경뿐이야. 면역 같은 건 허상처럼 느껴진다고. 왜? 자기 주변에서 변하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테라 양, 귀하는 별 의심 없이 이 이방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지. 이상한 일이었어. 게다가 오늘은…… 널 키드에 관해 말하려는 걸 만류하고 굳이 아나필락시스 진과 필락시스 진의 차이에 대해 먼저 듣고 싶어 하더란 말이야. 둘 다 항체를 다른 사람에게 전파시키지 못한다는데도 그게 굳이 궁금했다? 후후후, 이 모든 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지.”
그랬나……. 그렇게나 표가 났던 건가.
테라는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성급해서 마음을 읽혀 버리다니…….
욕심을 드러내는 일에 좀 더 신중해야 했다. 뒤늦은 후회가 밀려온다. 기세가 꺾인 그녀가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자 젠킨스의 목소리는 더욱 차분해졌다.
“테라 양, 운이 좋았어. 물리고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 그렇지? 그리고 그 후에도 좀비들에게 공격을 받을 뻔했겠지. 그러니까 자신이 널 키드일 가능성을 아예 배제해 버렸던 거고. 후후후, 사람들에게는 그 상처, 어떻게 생겼다고 둘러댔나? 응? 불쌍해라.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민과 공포의 시간을 보냈을까? 아무에게도 말을 못 한 채 속으로만 끙끙 앓으면서. 혹시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돌팔매질을 당해서 죽게 될까 봐 두려웠겠지. 후후후.”
“그런 이야기…… 사람들에게 해봐야 믿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저를 협박할 생각은 관두는 게 좋아요.”
테라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최대한 당당한 어조로 젠킨스에게 말했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저항의 전부였다. 젠킨스는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협박 같은 건 하지 않아. 그래봐야 나에게 아무것도 생기지 않으니까. 난 그저 테라 양이 차분하게 이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함께 되짚어가 주기를 바랄 뿐이야. 내가 중요한 사람이던 시절의 이야기를 말이야. 지금처럼 보상으로 과자를 챙겨 주면서……. 사실 그 정도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혹시 모를 일이지, 이 이야기 끝에 정말로 구원의 힌트가 숨어 있을 수도. 나 같은 관찰자는 절대 알아챌 수 없는, 아주 작은 단서가 실제 좀비 면역자에게는 엄청 중요한 정보가 되어줄 수도 있는 거잖아? 어때, 서로 비밀을 가진 사람들끼리 좀 차분하게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었나?”
손바닥을 비비며 다음 이야기를 준비하는 젠킨스의 모습에서는 언뜻언뜻 광기마저 내비친다. 테라가 가볍게 입술을 떨며 물었다.
“저는 솔직히…… 당신이 왜 이렇게까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건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이쯤 됐으면 그냥 나에 대한 비밀을 지키는 대가로 과자를 달라고 흥정할 수도 있을 텐데……. 젠킨스 씨, 대체 뭘 바라고 있는 건가요?”
“좋은 지적이야. 어젯밤 나도 같은 의문을 가졌지. 왜 나는 그까짓 과자 부스러기의 대가로 나 자신을 파괴할 수도 있는 고백을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 걸까? 진실과 거짓을 적절하게 섞어서 적당히 둘러대지 않고 말이야. 그런데 그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아주 간단한 거였어. 그 생각을 하던 중에 나는 잠이 들었지. 이 수용소에 와서 처음으로 아주 편안하게…… 그 지긋지긋한 자기혐오에 빠지지도 않고, 마음을 뒤흔드는 후회와 압박감에 신음하지도 않고, 아주 편안하게 잠이 들었던 말이야. 바로 그거였어. 나는 그동안 혼자만 담아놓고 있기에는 너무 벅찬 비밀을 이 뇌 안에 꼭꼭 파묻어두고 억압해 왔던 거야. 미다스 왕의 당나귀 귀를 본 이발사처럼 말이지. 단 한 사람이지만 누군가와 그걸 공유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숨쉬기가 한결 편해졌어. 이 정도면 대답이 된 건가?”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무슨 음흉한 꿍꿍이가 있어 보이지도 않고……. 그런 거라면 대화를 이어가도 될 것이다.
그리고 어제의 대화 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는 면에서는 테라도 같았다. 테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젠킨스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좋아, 다시 SPO 영국 기지의 휴슬리에게 돌아가 보자고. 뉴질랜드에서 귀환한 휴슬리는 보름 동안 정상적인 연구 활동을 지속했어. 그건 그가 쓴 일지가 증명하는 거니까 알 수 있지. 그리고 16일째 아침, 긴급 의료 지원 요청이 들어왔어. 휴슬리의 심장박동이 비정상적으로 느려졌다는 내용이었지. 칠레의 푼타아레나스에서 곧바로 의료팀을 실은 경비행기가 출발했고, 가사 상태에 빠진 그를 싣고 돌아와. 병원에 도착한 뒤, 두 시간 만에 휴슬리의 심장은 완전히 멎지. 그런데…… 뭐, 여기서부터는 상상할 수 있지? 사망 판정을 받은 휴슬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거야. 바이탈 사인이 쭉 평평한 가로줄을 긋는 채로 말이지. 담당 의사는 처음에는 기기 이상이라고 생각해서 다른 심전도 측정기를 연결했어. 그리고 맥도 짚어봤겠지. 하지만 실제로 휴슬리는 심장이 전혀 뛰지 않으면서 신체 활동을 하고 있었던 거야. 의사는 재빨리 병실의 문을 봉쇄하고 전화 한 통을 걸었어. 그 놀라운 발견을 가장 비싼 값에, 그리고 확실하게 사 줄 상대를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건 JL이었지. 그 병원의 실제 소유주이기도 했고.”
“되살아난 휴슬리가 아무도 공격하지 않았나요? 그 의사나 다른 간호사들도 모두 무사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요.”
“음……. 타당한 의문이야. 지금의 좀비에 대해서만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 빠르고, 호전적이고, 강한 힘을 가진…… 그런 좀비를 떠올리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당시 휴슬리의 모습은 좀 달랐어. 그 자료 화면을 보여줄 수 없는 게 아쉽군. 되살아난 휴슬리에 대해 내가 아까 ‘움직였다’고 표현을 해서 그런 오해를 부추긴 경향도 없다고는 할 수 없겠군. 실제 그 움직임이라는 건 마치 경련과 비슷했어. 왜, 이런 것 있잖아.”
젠킨스는 두 팔과 두 다리를 곧게 뻗은 채 덜덜 떨어 댔다. 그러다가 이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정도의 운동도 거구의 그에겐 꽤나 힘이 든 모양이다.
“헤에~ 헤에~ 무슨 말인지 알겠지? 심장도, 폐도 기능하지 않는 상태에서 감전된 사람처럼 계속 몸을 떨어 대는 휴슬리를 보자마자 JL의 고위층 멤버들은 자신들이 미지의 영역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는 걸 알 수 있었지. 무한한 가능성의 혁명적인 세계 말이야. 그들은 곧바로 온갖 핑계를 대서 영국 기지의 모든 멤버들과 뉴질랜드 병원의 담당 의료진을 차례차례 불러들이고, 각종 검사를 실시했어. 그리고 할 수 있으면 그들을 JL의 직원으로 스카우트했지. 물론 대놓고 감시하기 위한 조처였지만. 그렇게 거의 모든 자료들을 독점하고 연구를 진행하면서 JL은 좀비 박테리아에 대해 조금씩 알아 나가게 되었어. 그런데 문제는…… 같은 기간 동안 좀비 박테리아 역시 인간의 몸에 대해 파악해 가고 있었던 거야. 그것도 JL의 첨단 연구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