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4. REDEMPTION (4) (204/449)


204. REDEMPTION (4)
2022.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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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한정판이라서 100개밖에는 존재하지 않는 거야. 정말 귀한 거지.”

놈들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구구절절 설명을 하게 된다. 그만큼 간절하다. 하지만 놈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뭐야, 씨발? 이 새끼, 볼펜 가지고 왔어. 떽! 야, 인마! 이젠 공부할 일이 없어요. 세상이 싹 다 좃 됐거든!”

“크크큭.”

놈들의 비웃음이 당혹스럽다. 젠킨스는 열심히 만년필의 가치를 역설했다.

이건 ‘마키에’라고 일본 전통의 금 세공법이야……. 그중에서도 최고의 장인이 만들어낸 예술이라…….

“노! 이 새끼야! 어디서 씨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볼펜 쪼가리를 가지고 와서. 거지 같은 새끼가. 그런 거 말고 시계나 목걸이 이런 거 없어? 야, 노 모어 골드? 응? 골드! 와치!”

“야, 그냥 받고 건빵 한 두어 봉지 줘서 보내라. 냄새나서 머리 아파지려고 한다.”

두 놈이 뭐라고 떠들어 대더니 건빵 두 봉지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선심 쓴다는 표정으로 만년필을 달라는 손짓을 한다. 젠킨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아내의 유품이다. 그렇게 헐값에 넘길 수는 없다.

“박스…… 박스째 줘. 제발.”

“됐어, 꺼져! 안 팔아, 개새끼야!”

녀석은 만년필을 올려놓은 젠킨스의 손을 사납게 후려쳤다.

탁, 아내의 유품이 바닥에 나뒹군다. 젠킨스는 얼른 그걸 줍고, 놈을 노려봤다.

벌레 같은 하찮은 놈이……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 구두나 핥았을 천한 밑바닥 놈들이…….

“어쭈, 이 씨발 새끼가 꼬나보네? 뭐, 꼬와? 꼬우면 덤벼! 컴 온! 이 개새끼야!”

놈의 그 역겨운 얼굴에 주먹을 날릴 만한 배짱도, 기술도 젠킨스에게는 없다. 그가 이 세상에 가지고 태어난 무기는 무력이 아니라 뇌의 기능과 인맥이었다.

젠킨스는 분한 마음을 꾹 삼키며 돌아섰다. 거래는 결렬되고 자존심은 상처를 입었는데, 여전히 배는 고프다.

이래저래 지친 젠킨스는 자신의 돗자리가 깔린 야구장 구석으로 쓸쓸히 돌아왔다. 컴컴한 그늘 아래에는 아무도 없다. 애초에 그런 자리를 골랐고, 다른 사람들도 냄새 때문에 그를 피했으니까.

괜찮아, 괜찮아……. 너는 저런 것들보다 몇백 배나 뛰어난 인간이야. 잊어버려. 그리고 잠들어. 자야 해.

다음 식사 시간이 올 때까지 자는 게 가장 덜 괴로운 방법이야……. 그리고 조금만 더 참아. 이 고생을 영원히 계속해야 하는 건 아니야…….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딱딱한 바닥에 몸을 뉘었을 때, 그의 눈앞에 문제의 꼬마가 나타났다.

이제 만으로 두 살이나 세 살 정도 되었을 어린 사내애가 부모의 보호도 없이 혼자서 뛰어다닌다. 시끄럽게 꽥꽥! 소리를 지르면서.

젠킨스는 눈을 떼지 못하고 그 꼬마의 움직임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귀엽다거나 사랑스러워서가 아니었다.

그 젠장 맞을 꼬마 녀석이 커다란 과자 봉지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달콤하고 맛이 좋은 과자가 잔뜩 들어 있는 봉지.

“좋겠구나, 꼬마야.”

처음에는 그저 부럽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러다 불현듯 근처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도 없다. 그와 저 과자를 든 꼬마 외에는…….

벌떡 몸을 일으킨 젠킨스는 혹시 이쪽에 시선을 두는 사람이 있나 싶어 주변을 둘러봤다.

……없다!

저걸 빼앗아 먹겠다고? 미쳤어? 쟤는 보호를 받아야 할 어린이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이!

거의 퇴화되어 있는 그의 양심이 그래도 한 번 반항을 해본다. 젠킨스는 자신의 양심을 비웃었다.

‘이 멍청아, 바로 그 ‘아무것도 모르는’이라는 게 가장 매력적인 부분인 거야. 후후후.’

저 꼬마의 부족한 어휘로는 과자를 빼앗아 먹은 게 자신이라는 걸 아무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빼앗을 필요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 맞아. 아이니까 그냥 순순히 과자 봉지를 넘겨줄 가능성도 있어. 가치를 모른다고. 쟤는 저걸 다 먹지도 못해…….

젠킨스가 스스로의 비열하고 한심한 계획을 합리화시키는 데는 몇 초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리 오렴. 그래, 착하지. 이리 와.”

젠킨스는 가능한 한 친절한 미소를 지으면서 아이에게 손짓을 했다. 어지간히 부산스러운 놈이라서 주의를 끌기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젠킨스를 인지한 아이가 아무런 의심 없이 다가왔다. 젠킨스의 굵고 통통한 손에 땀이 솟는다. 긴장되는 순간이다.

“이리 줘. 응? 착하지? 그거 이리 줘.”

아이가 3피트 정도의 간격을 남기고 더 가까이 오지 않는 바람에 젠킨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에게 다가갔다.

이미 그의 시선은 과자 봉지에만 고정되어 있다. 주변의 상황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꼬마야, 아저씨가 그거 한 번만 만져 볼게. 응? 줘봐.”

아이는 쉽사리 과자 봉지를 넘기지 않고 오히려 뒷걸음질을 쳤다. 젠킨스는 다급해지고 더 간절해졌다. 광적인 집착 때문에 입가에는 침이 고이고, 눈엔 핏발이 섰다.

“내놔. 제발! 놓으라고!”

젠킨스는 과자 봉지의 끝을 잡고 서서히 당겼다. 이 빌어먹을 꼬마가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거라는 보장만 있다면 그냥 확 잡아채고 싶은 심정이다.

턱―!

그 순간, 자신의 팔목을 잡는 가냘픈 하얀 손.

헉, 젠킨스는 심장이 멎는 듯했다.

우리밖에 없었는데…… 꼬마와 나밖에 없었는데…….

젠킨스는 공포에 사로잡힌 채 고개를 들었다. 긴 검은 머리의 소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젠킨스는 그 소녀가 누구인지 안다. 야구장의 스코어보드 옆에는 음료수를 광고하는 그녀의 사진이 붙어 있다.

곧바로 이성을 찾은 젠킨스는 과자 봉지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소녀도 그의 팔목을 놓아주었다. 그러곤 곧바로 아이를 들어 올렸다.

“이렇게 멀리까지 왔어? 어이구, 종민이 잘 걷네. 자아, 이제 누나랑 엄마한테 가자아~”

아이를 어르는 소녀를 향해 젠킨스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변명을 필사적으로 늘어놓았다.

“베이비, 큐트. 마이 선, 띵크. 베이비, 호프.”

젠킨스는 뻔뻔한 얼굴로 외마디 소리들을 나열했다. 영어를 할 줄 모르는 것들과 사느라 변명조차 궁색한 단어 나열로만 해야 해서 그게 좀 불편하지만, 그래도 의미는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자신은 과자를 빼앗으려던 게 아니다. 아기가 너무 귀엽고 예뻐서 어르려던 것뿐이다.

하지만 소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이를 안고 인파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소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젠킨스가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한다. 자신이 납득시키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불안감을 느낀 젠킨스의 목소리가 커진다.

“아기가 귀여워서 웃은 것뿐이야! 과자를 건드린 건 장난을 친 거니까 그걸 가지고 무슨 도둑놈 취급하지 말라고! 너 설마 아기라는 영어 단어도 모르는 바보냐? 혹시? 나를 소아성애자 취급하려고?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고! 야! 대답을 해! 나를 보고 대답을 하라고! 이 천박한 것아! 비록 지금 내 꼴이 이래도, 나는 네까짓 것들이 그렇게 깔봐도 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너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중요하고 특별한 사람이라고! 어차피 너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지만!”

온갖 개소리를 다 지껄이고 목에 핏대를 세워도 소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종잇장처럼 날씬한 몸매가 사람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자 젠킨스의 불안감은 더욱더 커졌다.

“젠장……. 타일러, 너답지 않게 무슨 멍청한 짓을 한 거야……. 오, 하느님.”

두려움이 온몸을 감싸고 짓누른다. 젠킨스의 자아는 겨자씨만큼 작게 줄어들었다. 혹시 저 멍청한 여자애가 돌아가서 내가 소아성애자라는 소문을 퍼뜨리기라도 한다면?

끔찍한 상상이 떠오른다.

아이를 건드린, 더러운 이방인을 때려죽이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

가뜩이나 온갖 스트레스 때문에 날카로워져 있던 사람들이 자신을 분노의 분출구로 삼아 몽둥이를 휘두르는 상상……. 이 보잘것없는 것들에게 맞아 죽는 자신의 모습…….

“어쩌지?”

초조함 때문에 자신의 투실투실한 뺨을 문질러 대면서도 젠킨스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차피 숨거나 달아나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 수용소 내에 그와 비슷한 사람은 단 하나도 없으니까.

꾸르륵, 그 상황에서도 여전히 제 기능을 충실히 하는 위장이 비었다는 신호를 보낸다.

제발 닥쳐! 난 지금 너 때문에 위기에 처해 있다고!

젠킨스는 자신의 위장을 향해 원망을 퍼부었다.

“엇!”

5분쯤 뒤, 소녀가 다시 찾아왔다. 혼자서.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젠킨스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고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최선을 다해 또 외마디 단어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여자아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고, 자신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그런 수준의 단어들.

“아임 굿 가이. 투 키즈 파더. 노멀. 아이 러브 코리아. 코리안 피플 프랜드! 김치, 불고기 베스트.”

“제발 그렇게 단어들만 나열하지 좀 마요. 사람 무시하는 것 같아서 열 받으니까.”

엄지를 치켜세우고 ‘킴취, 풀코기’를 발음하던 젠킨스의 입이 멈췄다.

그녀가 하는 말을 너무도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어다, 그것도 아주 유창한. 얼떨떨한 젠킨스에게 소녀가 과자를 내밀었다.

“자요, 이건 아까 그 아이를 밀어 넘어뜨리지 않아줘서 고맙다는 의미의 선물이에요. 또는 아저씨에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켜 달라는 부탁이라고 생각하셔도 되고요. 뭐가 됐든 다시는 아이들 가까이 가서 그 애들이 가진 음식을 빼앗으려고 하지 마세요.”

젠킨스는 과자 봉지를 받아 들고 얼떨떨해진 채 물었다.

“동부에서 왔구나……. 뉴저지?”

“제가 동부에서…… 더 정확히 하자면 플로리다지만, 어쨌든 거기 살았다는 것 따위보다 아저씨 본인에게 몇 배나 더 중요한 사실을 알려 드릴게요. 여기에는 아저씨가 하는, 그 차별적이고 못된 말들을 알아듣는 사람이 저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에요. 사람들이 화내주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면 제발 다시는 그러지 말아주세요. 제가 무슨 말 하고 싶은 건지 아시죠, 텍사스에서 오신 ‘대단하신’ 아저씨?”

“알아듣는 사람이 많다고? 그런데 왜 다들 아무 반응을 하지 않는 거야?”

“그야 귀찮으니까, 남의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거겠죠. 하지만 어느 순간 화가 많이 난다면 그때는 이야기가 다를 거예요.”

“그, 그건…… 좀 공정하지 못하구나. 사람은 누구나 남들이 모른다고 생각할 때 아무 소리나 하게 마련이잖니. 말하자면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는 거랑 비슷한 거지. 아무리 천사 같은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이라도 머릿속으로는 꽤나 나쁜 생각들을 하기 마련이니까…….”

“그럼 이제 그 나쁜 생각이 아주 선명한 소리로 표현되고 있고, 그걸 다 알아듣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아셨네요.”

젠킨스는 초조하게 과자 봉지를 주무르다가 결국 뜯었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이 건방진 말투의 소녀에게 과자 봉지를 되돌려 줄 여유가 그에게는 없었다. 젠킨스가 과자를 우걱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지……. 어린 소녀에게 과자를 얻어먹는 이 시점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설득력이 없어 보일 거라는 건 안다만, 내가 특별하고 중요한 사람이라는 건 명백한 사실이야. 내 정체를 알게 된다면 이 스타디움 안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앞다투어 머리를 조아릴걸? 물론 내가 이야기해 주지는 않겠지만.”

“후우~ 저는 단지 아저씨가 겨우 과자 한 봉지 때문에 화난 사람들에게 맞아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았던 것뿐인데, 이제 보니 그것조차도 굉장히 무리한 바람이었나 보네요.”

고개를 저으며 돌아서려는 소녀에게 젠킨스가 다급하게 말했다.

“농담이야, 농담. 여기 있는 보름 만에 처음으로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과 만난 게 너무 좋아서 한 농담이라고! 알겠어, 알겠어. 잘난 척을 하지 말라는 거잖아. 그래, 그건 받아들일게. 네가 화를 내고 가버리기 전에 내게 과자를 선물한 고마운 사람의 이름 정도는 알고 싶구나. 난 타일러 젠킨스라고 한다.”

잠시 머뭇거리던 소녀는 아주 우아하고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까딱 고개를 숙였다.

“……테라입니다.”

그러고는 곧바로 돌아서려는 테라에게 젠킨스가 말했다.

“테라 양, 우리가 만나게 된 계기는 그다지 아름답다고 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어 영광이야. 나도 광고를 볼 줄 아니까 네가 슈퍼스타라는 것도 알고, 군인들이 너를 보면 좋아서 미칠 지경이라는 것도 알지. 그리고 네 개인 사물함 속에는 저 젊은 군인들이 바친 엄청난 양의 간식거리가 있다는 사실도…….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도 내가 계속 얌전하고 매너 있게 굴면 매일 이렇게 과자를 얻어먹을 수 있을까? 너도 알다시피 이 수용소에서 주는 식사만으로 버티기에는 내 몸이 너무 크거든.”

“아뇨, 과자는 이번 한 번만 드리는 거예요. 매정하게 잔소리만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정 힘드시면 다이어트를 위한 조언은 해드릴 수 있어요. 물론 그건 아저씨가 음식 때문에 자존심을 버려야 하는 이 상황에 지고 싶지 않을 때의 이야기겠죠.”

테라가 의외로 냉담하게 나오자 젠킨스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더듬거렸다.

“그…… 좋아, 이, 이러면 공정하지 않을까? 앞으로 네가 매일 과자를 가져다주면 내가 그걸 기록해 두었다가 이 좀비 사태가 정리된 이후에 네게 현금으로 대가를 지불한다면 말이야. 과자 1그램을 금 1그램의 가격으로 계산해 줄게. 약속할 수 있어. 어떠냐? 매력적인 제안이잖아. 부작용이 없는 마이더스가 되는 셈이라고.”

“저를 도둑이나 사기꾼으로 만드시려는 건가요? 그런 짓은 하지 않아요. 좀비 사태가 정리되기만 하면 제게도 필요한 만큼의 돈은 있고요. 젠킨스 씨, 제가 계속 아저씨께 호의를 가지고 있을 수 있게 해주세요.”

“너는 그렇게 여유로울 수 있겠지! 왜냐면 너한테는 다 먹지도 못할 양의 엄청난 과자가 있고, 음료수가 있고! 또 필요한 건 뭐든지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 둘을 봐라! 무게가 백 파운드도 나가지 않을 너는 그렇게 많은 음식을 가지고 있고, 삼백 파운드에 가까운 나는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이건 너무 불공평해! 공정하지도 않고! 비인도적이야! 이러면 안 된다고!”

젠킨스는 억울함을 강조하고 극적 효과를 부여하기 위해 두 팔을 쫙 벌렸다. 하지만 테라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반년 치 봉급보다 비싼 값을 치르며 그 키톤 양복을 맞추셨을 때도 그런 생각을 하셨나요? 아저씨는 이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던 사람이잖아요.”

말을 마친 테라가 돌아서서 걸어간다. 보통 이쯤 되면 아니꼽고 치사해서라도 협상은 결렬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젠킨스는 절박했고, 이 수용소에서 가장 부유한 자본가와 마주하는, 아주 흔치 않은 기회를 잡은 상태였다. 그러니 쉽게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젠킨스는 안다, 목표까지 닿는 과정이 비굴하다거나 비윤리적이라고 해서 그 열매가 가진 달콤함이 훼손되는 법은 없다는 것을. 젠킨스는 비대한 몸을 끌고 테라를 앞질러 가서 다시 말을 걸었다.

“박애주의자인 줄 알았더니, 자본주의자였구나. 그러면서 동시에 금을 사랑하지 않는, 이상한 자본주의자. 좋아, 그러면 뭘 지불해야 내가 이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겠니?”

“젠킨스 씨, 치사하게 굴고 싶지는 않지만, 이 과자들은 파는 물건이 아니에요. 많은 군인 오빠들의 호의거든요.”

“호의라……. 아름다운 말이야. 이렇게 생각해 보자. 만약에 나도 너에게 호의를 베푼다면, 그러면 네가 가지고 있는 그 많은 달콤하고 짭짤한 호의들을 우리가 일정 부분 공유할 수도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세상이 모르고 나만 아는 비밀을 네게만 몰래 알려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지. 다행히 너와 나는 대화가 가능하잖아. 이 수많은 좀비들이 애초에 왜 만들어졌는지 같은 이야기는 어떨까?”

테라는 슬슬 귀찮아졌다. 이 미국인 남자…… 배가 고픈 것은 알겠지만, 이 정도로 집요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슬슬 광인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기 시작했다.

“미안하지만 젠킨스 씨, 전 관심이 없어요. 계속 이렇게 길을 막으시면 화낼 거예요.”

“제발 화내지 말고 들어봐. 그럼 좀비에게 물리고도 죽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에도 관심이 없다고 할 거니? 아닐 텐데? 관심이 있을 텐데?”

응? 테라는 뜨끔해서 자신도 모르게 왼쪽 발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새끼발가락.

이 남자 뭐지? 설마 지금 이게 내 이야기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테라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애써 태연을 가장했다.

“그런 사람이…… 정말로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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