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REDEMPTION (3)
(203/449)
203. REDEMPTION (3)
(203/449)
203. REDEMPTION (3)
2022.03.22.
같은 시각, 쉘터와 옆 건물을 잇는 공간에는 초희와 가희가 이중 철책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분위기는 당연히 무겁고 당혹스럽다.
장교들과 통하는 가희로부터 잠실에서 새 이주민이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육만배는 기뻐했었다. 민구가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적잖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조 차량을 보낸다고 했을 때에도 별걱정이 없었다. 만약 거기에 민구가 타고 있다 하더라도 그에게 어떤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부상당한 단 한 사람이 강민구라니……. 이런 날벼락이 없다.
육만배가 느낀 상실감은 그의 휘하 모든 사람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민구가 누워 있는 건너편 건물을 바라보며 가희가 물었다.
“어머, 초희야. 어떡하니……. 저 오빠 다 죽어가더라. 아휴, 도대체 뭘 어쩌면 천하의 강 실장 오빠가 저런 꼴이 될 수가 있니?”
“아우, 몰라. 존나 짜증 나. 좀비들은 신나게 다 죽여놓고 괜히 군인들 사이에서 낄낄거리다가 한 방에 뻗었어. 너 상처 못 봤지? 완전 빵꾸가…… 와~ 이따만 한 게 옆구리에…… 아흐, 소름 끼쳐. 피가 있지, 막 콸콸 쏟아지는데……. 근데 저 오빠, 존나 독종이다? 자기가 자기 살을 막 불로 지졌어, 피 멎게 한다고.”
“어머, 어머, 그건 좀 짱이다. 비명도 안 질러?”
“비명은 고사하고, 두 번이나 지지더라. 위에 한 번 치익! 흐읏! 이러더니, 또 아래 한 번 치익! 아, 맞다. 또 그전에는 자기 가슴에 칼 박힌 거 빼면서 막 실실 쪼갰다? 그거 실제로 보면 완전 소오름!”
두 여자의 수다가 멎은 것은 굳은 표정의 육만배가 등장하면서부터다.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가희의 곁으로 다가온 육만배가 초희를 빤히 쳐다보며 독기가 서린 입술을 뗐다.
“짧게 대답해라. 무슨 일이 난 거냐?”
“그냥…… 사고였어요. 갑자기 좀비가 매달리니까 놀란 군인이 아무 데나 막 총을 갈겼는데, 그게 하필이면 강 실장 오빠한테 맞은 거예요.”
“상처는 얼마나 깊은지 봤나? 내장이 상하거나 했느냔 말이야. 뼈가 부러져서 밖으로 튀어나오지도 않았고?”
“네, 당연히 봤죠. 제가 바로 옆에서 계속 땀도 닦아주고, 얼마나 열심히 간호해 줬는데요. 오빠가 피는 엄청 나왔는데, 그…… 뭐라더라, 군인이 한 말이 있었는데, 간…… 간통상이라고 했던가? 뭐, 그런 비슷한 말을 했어요. 그러면서 간통상이라서 다행이라고. 뼈나 내장은 안 다쳤을 거래요.”
“그래? 그건 확실한 거지? 의식은 있나?”
쏘아보는 육만배의 눈빛에 압도된 초희가 진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공연히 죄인이 되는 것만 같다.
“네. 여기 트럭 타고 올 때에도 가끔 한 번씩 눈을 떴어요. 그리고 제가 말을 하면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요.”
“아이구, 하하하, 고생 많으셨습니다. 자매님도 놀라셨겠네요. 이렇게 무사히 도착하신 것도 다 주님의 은총이고, 성령의 보살핌입니다. 이 격리가 마무리되고 나면 꼭 모임에 참여하셔서 감사 기도를 드리도록 하세요…….”
근처에 다른 사람들이 지나는 동안 목소리와 표정을 바꿔 엉뚱한 소리를 다정히 지껄이던 육만배가 다시 정색을 하고 말했다.
“……며칠이나 저기에 따로 둘지는 모르겠지만, 그 안에 있는 동안에는 초희, 네가 강 실장 병수발을 잘 들어라. 해달라는 거 해주고. 군인들만 믿고 있으면 안 돼. 물론 걔들한테도 잘 봐달라는 부탁 단단히 하고……. 알아들었지? 강 실장 목숨이 곧 네 목숨이다 생각하고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말이야. 그리고 가희는 얘랑 자주 만나서 강 실장 상태 전해 듣고.”
“네.”
공손히 고개를 숙인 두 여자는 육만배가 멀어진 걸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큼 그의 얼굴은 표독한 살기로 가득했다. 기다리던 민구가 저 꼴이 되어 돌아온 게 어지간히 분하고 화가 치미는가 보다.
초희는 핸드백을 뒤져 담배를 꺼낸 뒤, 떨리는 손가락으로 라이터를 켰다.
“가희야, 너도 지금 육 회장 얼굴 봤지? 와, 씨발, 강 실장 오빠 잘못되면 곧바로 내 목 딸 기세다, 그치? 염병, 좃 됐네. 아니, 솔직히 내가 무슨 죄야? 그 넓은 잠실에 나 혼자 똑 떨어뜨려 놓고 이제 와서 강 실장 오빠 총 맞은 게 내 잘못인 것처럼 구네. 아니, 막말로 내가 쐈나? 후우~ 야, 나 어떡하니…….”
“그러게. 가희는 아까 피만 봐도 막 몸이 벌벌 떨리던데, 너는 그래도 그 무서운 거 잘 참고 간호도 해줬는데 상은 못 줄망정……. 어쩌겠어. 이제 강 실장 오빠가 내 서방님이다, 생각하고 피땀으로 간호해. 그거밖에 방법이 없잖아.”
“아, 씨발. 돌겠네. 저 오빠가 지랄해서 담배도 몇 시간째 못 빨고 계속 참았구만. 후우~ 가희, 너도 한 대 줄까?”
“으응? 아니, 아니. 가희는 여기서 그런 이미지 아니야, 얘. 가희 완전 요조숙녀걸랑. 그리고 여기는 코딱지만 해서 소문이 빨라. 그래서 남이 안 볼 때 몰래 숨어서 피워야 돼. 후훗.”
그녀들이 이야기에 몰두하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암만 미인이시더라도 여기에서 담배 피우시면 안 되는데요. 흡연 구역은 저 뒤쪽 주차장이지 말입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거기랑 여기가 공기가 차단되어 있는 건 아닙니다만.”
초희가 돌아보니 거기에는 밤톨과 의무대 병사 둘이 서 있었다. 아까 민구를 데리고 옆 건물로 들어갔던 그 멤버들이다. 초희는 반색을 하며 물었다.
“어머, 군인 의사 오빠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벌써 수술 다 끝났어요? 우, 울 오빠 이제 괜찮아요?”
“수술이오?”
하사는 반문을 하며 잠시 시간을 끌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저희로서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상태가 그리 좋은 건 아닙니다만.”
“아니, 오빠, 그렇게 건성으로 말하지 말고요. 우리 강 실장 오빠 정말로 꼭 나아야 돼요. 죽으면 큰일 난단 말이에요. 수술 정말 성공한 거 맞아요? 그럼 이제 말은 할 수 있게 됐어요?”
초희가 하사의 손을 붙잡은 채 호들갑을 떨고, 가희도 다리를 꼬아가며 애교와 간절함을 섞어 거들었다.
“네, 하사님. 얘 말이 맞아요. 그 오빠 꼭 살아야 돼요. 가희도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강 실장 오빠 낫게 해주세요.”
“어이구, 저 새로 오신 환자분이 인기가 아주 대단하신 분인가 보네. 아까부터 이놈도 계속 저분 의인이라서 살려야 한다고 난리를 치더니…… 이제는 미녀 두 분이 합창으로 걱정을 하시네요. 암만 봐도 친오빠는 아닌데, 이쯤 되니까 어째 살짝 질투도 나는 것 같고……. 지금 약에 취해 거의 기절하신 상태라 말은 못 하십니다. 아마 당분간 어려울 거예요.”
능글거리며 대응하던 하사의 손을 더 꼭 잡으며 초희가 찡긋 윙크를 보냈다.
“그렇구나, 말 못 하는구나. 근데…… 아유, 군인 의사 오빠, 질투를 왜 해요? 강 실장 오빠만 살려주시면 원하는 건 제가 다 해드릴 수 있는데. 응? 아시잖아요? 기브 앤 테이크!”
초희의 속삭임을 들은 하사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발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주세요. 저도 이렇게 아름다운 분을 보고 있으면 갑자기 원하는 게 막 생겨나고 뭐 그러지만, 사람 생명이 달린 문제에서 기브니 뭐니 그런 말은 못 써요. 기술은 없지만 저는 최선을 다할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건 제가 우연히 저 환자분을 담당하게 됐기 때문이지, 아름다운 여성이 보상을 약속해 주셔서가 아니에요. 그거 하나는 확실하게 해두고 싶습니다.”
초희와 가희는 멍해져서 잠시 하사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서로 마주 보았다. 짧은 침묵 뒤에 초희가 말했다.
“그러니까…… 미리 해달라고요?”
***
불과 몇 시간 만에 장갑차 두 대만큼의 화력 손실을 입은 잠실 쉘터는 병력 재배치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늦어도 오후 늦게까지는 돌아올 거라 기대했던 두 대 중 한 대는 사고를 당해 유실되었고, 또 한 대는 길이 막혀 복귀를 못 한다.
장갑차와 트레일러까지 삼켜 버린 30여 미터 길이의 싱크홀을 메우고, 그 주변의 지반을 보강하는 공사까지 마무리하려면 적지 않은 시일이 소모될 것이다.
좀비들이 몰려오는 시간을 피해 일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고, 누가 공사의 주체가 되어 인력과 장비를 지원할지 정하는 것만 해도 또 시간이 걸린다.
국방부는 그런 일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으므로 추가 지원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 그러니 당분간 그 두 대는 열외로 놓고 모든 방어와 전투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쿠르르르릉― 쿵― 쿵―
전차와 장갑차들이 위치를 바꾸기 위해 도로 위를 서행하고, 병사들은 철책과 게이트를 세우고 망루를 건설하는 중이다. 중장비들은 도로에 구멍을 뚫고 말뚝을 박아 진지 공사의 기초를 마련하고 있다.
그리고 야구장 내에 수용된 민간인들 중 몇몇은 외부가 보이는 곳을 찾아 멍하니 그걸 구경한다. 그 사내도 그런 구경꾼 중 하나였다. 매우 눈에 띄는 구경꾼.
잠실 쉘터 내에서 그는 여러모로 이질적인 존재였다. 체격부터가 남달랐다.
190센티미터의 키, 130킬로그램에 달하는 몸무게는 쉘터 어느 곳에 가더라도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물론 결코 우호적인 시선은 아니다. 수용소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뚱뚱하다는 것은 곧 죄악처럼 취급받는다.
그렇게 크니 옷차림 역시 남들과 달랐다. 대부분의 수용자들이 입고 있는 트레이닝복은 그에게 맞지 않는다.
혹시 더 큰 사이즈를 구할 수 있겠느냐고, 최대한 예의 바르게 물어봐도 카운터의 군인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찢어지고 땀과 먼지에 찌들어 이제 거의 넝마에 가까운 양복을 입고 산다. 교묘한 라인으로 신체적 단점을 적절히 보정해 주던 이탈리안 슈트가 한 달도 안 돼서 노숙자의 옷처럼 전락했다.
냄새도 이질적이다. 그가 근처에 가면 사람들은 코를 막아 쥐었다. 땀이 많아 체취가 강한 것뿐인데, 그걸 이해해 주지 못하고 괴물을 대하듯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의 기분도 불쾌해졌다.
정작 온갖 냄새 때문에 숨쉬기가 괴로운 것은 오히려 그 자신인데……. 그러니 자연스레 사람의 왕래가 적은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그는 눈동자의 색깔이 다른 수용자들과 달랐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밝은 파란색 눈동자는 그의 고향에서 그리 특별하지 않지만, 여기 이 동양의 이국에서는 그것이 피부색과 더불어 그를 이 수용소 내의 이방인으로 도드라지게 했다.
42세의 타일러 젠킨스는 잠실 쉘터에서 외로운 이방인이었다.
“제기랄…….”
젠킨스는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배를 꽉 움켜쥐고서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버릇처럼 내야석 꼭대기까지 올라와 외부의 풍경과 하늘을 보고 서 있지만, 우울함은 그대로다. 무심하게 빛나는 파란 하늘을 향해 젠킨스가 중얼거렸다.
“오늘도 소식이 없는 건가? 지치는데 말이지.”
지난 이틀 동안 쉬지 않고 내린 비 때문에 축축하고 무거워진 공기 속에는 여러 가지 냄새들이 잔뜩 섞여 있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내내 지겹게 맡아야 했던 경유 냄새, 제대로 씻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고약한 체취, 그리고 급식소의 환풍기를 통해 배출되는 음식 냄새. 그 음식 냄새가 그를 우울하고 비참하게 만든다.
흙탕물처럼 뿌연 짜디짠 갈색 수프와, 소이 소스로 범벅이 된 형편없는 가공육들, 거기에 마늘 냄새가 섞여 있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것이 미치도록 먹고 싶다. 평소의 그였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그런 형편없는 요리들이…….
문제는 그가 이미 한 시간 전에 그 음식들을 먹었다는 데 있다.
대체 누가 정했는지, 이 수용소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양으로 매끼 식사를 제공한다.
100파운드도 나가지 않을 것 같은 바짝 마른 여자애들과 한때 체중이 320파운드에 달했던 그가 똑같은 양을 배급받아야 한다니! 세상에 이렇게 불합리한 일이 또 있단 말인가.
- 보시다시피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크고 몸무게도 많이 나갑니다. 당연히 더 많은 칼로리가 필요해요. 폐가 되지 않는다면 밥을 몇 번 더 퍼 주실 수 있겠습니까?
……라고 최대한 예의를 갖춰 부탁도 해봤다. 물론 영어로. 그것이 그가 사용할 줄 아는 유일한 언어니까.
그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 못 알아들은 건가 싶어 이제는 무례함을 무릅쓰고 ‘Rice! More! Please! Hungry!’ 따위의 단어들만 나열한다. 그러면 군인들은 인심 쓴다는 듯 밥을 반 주걱 더 얹어 주었다.
애초에 식판의 크기가 작아서 그보다 더 담을 수도 없다. 팔찌를 대고 급식대로 입장하는 시스템이라 두 번 줄을 서는 것도 안 된다.
한마디로 이곳에 온 이후 그는 늘 배가 고팠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직후에조차도! 하루에 한 봉지 지급되는 건빵은 한입거리도 안 된다.
“후후후.”
젠킨스는 냉소적으로 웃으며 자신의 손가락과 팔목을 바라봤다. 처음 구조되어 왔을 때에는 파텍 필립 시계와 플래티넘 반지로 치장되어 있었건만, 지금은 아무런 장신구도 없이 허전하다.
그것들 외에도 그가 지니고 있던 많은 값비싼 물건들이 너무도 헐값에 싸구려 음식들과 맞바꾸어졌다. 생각해 보면 쓴웃음만 난다.
물론 아깝다거나 억울하다거나 하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 것쯤이야 은행이 제 기능을 회복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다시 사도 그만이다.
그저 더 이상 간식거리와 교환할 물건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그 엄혹한 현실이 가슴 아플 뿐이다.
그의 외양은 끔찍해졌다. 헤어 드레서의 손길을 보름 이상 받지 못한 머리는 듬성듬성 빠지고 엉클어져서 거울을 보기가 두려울 만큼 형편없고, 렌즈 모퉁이가 깨진 안경 때문에 그 초라함은 몇 배나 증폭되어 있다.
과거의 그를 아는 사람이 지금 이런 모습을 본다면 도저히 믿지 못할 것이다.
“아, 씨발, 노린내. 냄새 존나게 나네.”
근처를 지나던 두 명의 청년이 그를 쳐다보며 뭐라고 떠든다. 한국어를 전혀 모르지만, 그 어휘들 속에 경멸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분하지만 젠킨스는 노려보거나 대거리를 하지 않았다. 싸움이 벌어진다면 이방인인 그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없을 테니까.
“속 쓰려. 그런데 너도 이제 줄어든 식사량에 익숙할 때가 되지 않았나?”
젠킨스는 배를 쓸어 비어 있는 위장을 달래며 먼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구름의 모양을 살피는 일에 싫증이 나자 그는 공사하는 군인들의 동선 관리에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 이 굶주림을 좀 잊을 수 있을까 해서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이내 실패로 돌아갔다.
“2파운드짜리 스테이크…… 거기에 으깬 감자.”
그의 단골 식당 메뉴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 진한 버터 향기가 코끝에서 느껴지는 것 같다.
와인…… 거기에는 사토 마고가 잘 어울리는데…….
꾸르륵!
배에서는 또 난리가 났다. 젠킨스는 스스로를 힐난했다.
너는 이럴 자격이 없어! 저 사람들을 봐! 저 지치고 우울해진 사람들을! 이 뻔뻔한 개자식! 이렇게 되었는데도 그런 욕망을 가진다고?
물론 그런 자책을 해봐야 기분이 나아지는 데에는 아무런 긍정적인 효과를 거둘 수 없다. 그저 자존감에 상처만 줄 뿐이다. 그리고 사실 그의 진심도 아니다.
“결국 이걸 팔아야 하나…….”
젠킨스는 안주머니를 뒤적거려 만년필을 꺼냈다. 다른 모든 사치품들을 다 팔 동안 이 만년필을 간직하고 있던 이유는, 이것이 아마 지금은 사망했을 아내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아내의 마지막 선물.
젠킨스는 금으로 정교하게 장식된 만년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지난봄, 함께 도쿄로 여행을 갔을 때 로라가 몰래 사놓았던 물건이다.
‘매년 결혼기념일 카드는 이 만년필로 써줘요’ 하고 부탁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그는 굶주렸고, 카드를 받을 로라는 이미 세상에 없다.
……없을 것이다.
“나중에 다시 되찾으면 돼.”
가망이 없는 말로 스스로를 속인 젠킨스는 24시간 언제나 열려 있는 암시장으로 향했다.
“크크, 이 아저씨 또 왔네? 씨발, 뭐가 이렇게 줄줄이 계속 나와? 그렇게 팔아먹고도 아직 팔 게 또 남았어?”
“크크크, 그러게. 얘, 그젠가 어제 목걸이랑 바꿔서 건빵 한 박스 가지고 가지 않았냐? 와, 벌써 그 많은 걸 다 처먹었어? 참 너도 이젠 완전히 거지 꼬라지구나. 첨엔 대가리에 기름도 바르고 번쩍번쩍하더니…… 크크크, 헤이! 와썹 맨! 웰컴! 웰컴!”
그를 기억하는 사내 두 놈이 낄낄거리며 인사를 한다. 팔을 벌려 인사를 하는 녀석이 손목에 차고 있는 물건은 며칠 전까지 젠킨스의 것이던 시계다.
놈들의 곁에는 아직 십 대로 보이는 계집애들이 핫팬츠와 탱크톱만 입은 채 쪼그려 앉아 있다.
발아래에는 저것들이 몸을 팔아 수집해 온 게 분명한, 허접한 물건들이 쌓여 있다. 젠킨스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건빵 박스를 가리켰다.
“오! 건빵! 그거 좋은 거지. 맛도 있고, 배도 부르고! 근데 뭘 내놓을 건데? 쇼우 미! 쇼우 미! 왓 유 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