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운수 좋은 날 (1)
(196/449)
196. 운수 좋은 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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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운수 좋은 날 (1)
2022.03.15.
공교롭게도 잠실 쉘터와 건대 쉘터의 딱 중간 정도 지점에서 이런 사고를 만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도보로는 둘 중 어디로도 이동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두 쉘터 중 어느 곳에서 지원 차량을 보낸다고 해도 시간이 비슷하게 걸릴 것이다.
“헬리콥터가 잠실하고 건대 양쪽에 알려서 더 빨리 올 수 있는 쪽에 지원 요청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 인근에 대형 좀비 무리는 없답니다. 뭐, 바꿔 말하면, 소형 좀비 무리는 있다는 이야기도 되는 거지만 말입니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신호가 잘 잡히지 않아 소형 무전기를 들고 여기저기로 뛰어다니면서 겨우 헬기와 교신을 마친 무전병이 밤톨에게 다가와 보고한다.
“나? 나한테 물어본 거냐?”
밤톨은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장갑차장이 엄연히 있는데 왜 내가 지휘자……’라고 중얼거리며 뒤를 돌아보니, 장갑차장의 안색은 이미 납빛이 되어 있었다.
“저, 전사하셨다고? 다시 확인해 봐. 정말로 숨 안 쉬셔?”
밤톨의 명령을 들은 병사가 장갑차장의 가슴에 귀를 대보고 고개를 젓는다.
허! 이게 대체 무슨!
장갑차장의 사망으로 졸지에 인솔자가 되어버린 밤톨은 그 책임이 너무 무겁게 느껴져서 병장 계급장을 뜯어내 버리고 싶었다. 아홉 명이나 되는 병사가 전부 그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다.
어떡해, 우리 다 죽나 봐. 이게 웬일이야……. 아저씨! 이게 뭐예요! 왜 운전을 이렇게 해! 우리 안전한 거 맞아? 응? 대답을 하라고!
민간인들은 겁에 질려 울부짖고, 그사이에도 20톤이 넘는 무게를 버티던 연결 고리가 까드득대며 신경을 자극한다.
저건 이제 분리고 뭐고 다 불가능한 지경까지 하중이 실려 있다.
아니, 아니, 넋 놓고 있으면 안 돼. 내가 정신을 차려야 돼.
밤톨은 이를 악물고 지휘자로서의 첫 번째 명령을 내렸다.
“조용히 하십쇼! 병사들한테 욕하지 않습니다! 거기 여자분! 그리고 선배님! 뒤로 물러나 조용히 앉습니다!”
“뭐라고! 야! 애초에 너희가 운전을 똑바로 했으면…….”
“저분은 여러분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래도 더 필요합니까? 앉아요!”
밤톨은 소리를 버럭 지르며 위압적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그 위세에 눌렸는지, 아니면 전사한 장갑차장을 상기시킨 것이 효과를 발휘한 것인지, 하여간 민간인들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지원은 금방 옵니다! 그때까지 여러분을 지켜 드릴 수 있는 건 우리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그렇게 할 겁니다! 그러니 지시를 잘 따라 주십쇼! 그러면 전원이 무사히 구출될 수 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배에 힘을 주고 최대한의 용기를 발휘해서 외친 밤톨은 일행 모두를 20여 미터 후방의 진입로 입구까지 이동시켰다.
공연히 싱크홀 근처에서 위험을 감수할 이유도 없고, 고가도로 아래라는 공간은 여러모로 안전치 못하다.
잔디가 무성하게 자란 삼각형의 안전 지역에 민간인들이 모여 앉게 한 뒤, 벌써 식어가고 있는 장갑차장의 시신을 군복으로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트레일러에 부착되어 있던 연장을 떼어 오게 하고 병력을 2인 1조로 나누어 전후좌우의 경계를 하도록 배치했다. 거기까지 하고 나니 막막해졌다. 더 이상 아무 생각이 나질 않는다.
“이거 좀 마셔요, 오빠. 보고 있는데 너무 목이 말라 보여서요…….”
멍해져 있는 밤톨에게 초희가 다가와 물병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입이 바짝바짝 타고 가볍게 두통이 인다.
네, 고맙습니다.
밤톨은 물 한 모금을 들이켜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애들한테도 수통에서 물 좀 마시라고 해야겠다…….
“조 병장님…….”
무전이 잡히는 위치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전병이 다시 돌아와 밤톨의 귓가에 소곤거린다.
“제일 빨리 도착할 수 있는 구조 차량이 두 시간 후에 도착 가능하답니다. 그것도 주변 상황이 좋아야 그렇답니다.”
“뭐어?”
언성을 높였던 밤톨은 자신에게 쏠린 민간인들의 시선을 깨닫고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두 시간? 왜 그렇게 오래 걸려? 아니, 씨발. 무슨 경기도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건대하고 잠실이잖아. 오리걸음으로 와도 그것보다는…….”
말을 하던 도중에 밤톨은 자신들 역시 한강을 건너는 데만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좀비들의 행렬이 통행로 주변을 지나면 그동안은 차량이 이동할 수 없다.
쉘터 부근을 좀비들이 장악하고 있어도 마찬가지다. 그럴 때 게이트를 열었다가 좀비들이 들이닥치거나 하면, 여기에 있는 사람 수보다 몇 배나 많은 목숨이 위기에 처하게 되는 거다.
긴급하니까 빨리 와달라는 소리 같은 건 안 통한다. 구조 요청을 하는 쪽도, 구조하러 오는 쪽도 다 목숨은 하나뿐이니까.
“어디에서 오는데? 왜 두 시간이래?”
“건대에는 흑표 전차 한 대밖에 기갑 차량이 없답니다. 그건 방어 때문에 절대 이동시킬 수가 없고, 징발해서 쓰는 차량 중에 5톤 트럭이 있는데, 그게 차고가 높고 화물칸에도 철제 덮개가 있어서 만일의 사태에도 대응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걸 여기로 보내겠다고…….”
“아니, 근데 왜 두 시간이냐고? 좀 더 빨리 안 된대?”
“그 트럭이 현재는 외부에서 작업 중이기 때문에 그걸 되돌려서 오느라 그렇다고 합니다.”
두 시간…… 이 사방이 다 뻥 뚫린 벌판 같은 데에서 고작 열 명이 두 시간을 버텨내야 한다니…….
밤톨은 아득해져서 뺨을 문질렀다. 조금 전까지는 별 의미 없이 보이던 구멍 뚫린 철책들이 이제는 엄청난 중압감으로 다가왔다.
“자, 잠실은? 잠실에서는 더 빨리 올 수 없나?”
“잠실은 추가 지원이 아예 어렵답니다. 오늘만 벌써 성수행 한 대, 저희가 타고 온 저거 한 대, 이렇게 장갑차가 두 대 빠져나갔고, 저희가 서른 명이나 되다 보니까 다 태우려면 장갑차도 두 대 이상을 보내야 하는데, 그러면 화력 공백이 너무 커진다고…… 잠실 입장에서는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는 지원 차량이 성수 쉘터에 이주자들 내려주고 되돌아오는 거랍니다.”
“우와, 씨발. 매정하구나. 좃같다, 그치?”
“네, 좃같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상황은 이해가 간다. 자신이 지휘관이었어도 비슷한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이제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물론 어떻게 기다리느냐가 생사를 가를 수도 있으니 신중하게 생각하고 움직여야 한다.
쉬지 않고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며 밤톨은 뇌를 최대한 가동했다. 물론 그래봐야 애초부터 그닥 대단치 않은 뇌라는 건 본인도 잘 안다.
“야, 잠실대교로 이동한다고 알리고, 애들 다 불러들여.”
무전병에게 명령한 밤톨은 민간인들이 모여 앉아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불안에 질린 사십여 개의 눈동자가 일시에 그에게 집중된다, 한 사람만 빼고. 예의 그 칼자국 난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사방을 훑고 있다. 마치 그 혼자만 다른 차원에 속해 있는 것같이 여유롭다.
“저…….”
밤톨은 민간인들이 받을 충격을 걱정하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구조대가 올 겁니다. 그런데 도로 상황이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원활한 건 아니기 때문에 시간이 조금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우리는…….”
“시간? 시간이 대체 얼마나 필요하다는 거야? 몇 분?”
흥분하고 겁을 먹은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을 던져서 말을 끊는다. 밤톨은 긍정적인 쪽으로 숫자를 조금 속여서 대답했다.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사이라고 했습니다. 더 빨라질 수도 있고 말입니다.”
“두 시간? 두 시간이라니! 두 시간을 어떻게 기다려, 여기서. 좀비들이 지금 사방에 득시글거릴 텐데. 민간인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빨리 오라고 해!”
악다구니를 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갈라졌다. 밤톨은 스트레스 때문에 뇌의 신경이 끊기는 것 같았다. 때마침 멀리서 좀비들의 포효가 울려오자 사람들은 더 난리가 났다.
“저기 저거! 저거 타고 가면 되잖아요, 군인 아저씨. 응? 저거 내려오라고 해. 우리 타게.”
여자가 가리킨 것은 그들 머리 위에 떠 있는 500MD 헬리콥터였다. 밤톨은 고개를 저었다.
“저기에는 최대한 끼어 앉아도 네다섯 명밖에 못 탑니다.”
“일단 다섯 명씩 타고 빨리빨리 옮겨다 놓고, 또 오고 그러면 되잖아. 왜 자꾸 안 된다는 소리만 해? 왜?”
“저 헬리콥터가 그냥 떠 있는 게 아닙니다. 저기에서 관측을 하다가 대규모 좀비들이 몰려오거나 하면 저희에게 알려줘서 피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화력지원도 해주고 말입니다. 게다가 저희한테만 매여 있는 게 아니라 이 부근을 계속 돌면서 이동하는 차량들 전부에게 훈수를 해주는 겁니다. 다섯 명이 저걸 타고 가면 그 사람들은 좋겠지만, 그동안 나머지는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이렇게 좁은 지역에는 내리지도 않습니다. 소리 지르시지 말고 좀 진정하십쇼! 제가 지시하는 대로 잘 따르셔야…….”
“너나 진정해, 인마! 너나! 지시? 누가 누굴 지시해? 나도 예비역 육군 병장이야, 이 새끼야! 빨리 다시 무전 때려! 민간인들이 위험하니까 최대한 빨리 오라고! 뭐해! 빨리 무전 때리라고!”
거품을 물고 악을 쓰는 것은 아까 트레일러 안에서 기강이니 어쩌니 헛소리를 지껄이던 중년 남자다.
“그러지 말고 군인들 말을 들어요. 저 사람들이 더 잘 알지.”
몇몇이 밤톨의 편을 들어주려 한다. 하지만 중년 남자는 오히려 더 목소리를 높이고 생지랄을 한다.
“그러다 뒈지면? 응? 그러다가 뒈진다고! 이 좃도 무식한 여편네야! 모르면 잠자코 있어! 원래 군대는 쪼아야 뭐가 돌아가는 데야! 대가리에 똥만 찬 년이 어디서 끼어들어?”
밤톨은 이를 꽉 물었다. 밉다. 정말 성질 같아서는 반쯤 죽여 버리고 싶다. 시범 케이스로 한 놈을 조지면 나머지들도 다 순순히 지시를 따를 테니까.
하지만 그랬다가는 쉘터에 돌아가서 그 엄한 지휘관으로부터 어떤 처벌을 받게 될지…… 차라리 저 남자가 막 달려들기라도 하면 총을 빼앗길까 봐 그랬다는 핑계라도 대겠는데, 이놈은 앉은 자리에서 버럭버럭 고함만 친다.
가뜩이나 불안함이 극에 달해 있는 상황에서 그렇게 무질서를 부추기는 이 미치광이를 통제하기 위해 위협이 불가피했다고 하면 받아들여 줄까?
그렇게 밤톨이 고민하고 있을 때, 민구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꽂은 채 중년 남자 쪽으로 걸어갔다.
팍―
민구의 킥이 턱을 돌리자, 여전히 뭐라고 악을 쓰며 핏대를 올리던 중년 남자가 맥없이 쓰러졌다. 말리고 자시고 할 여유도 없을 만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 어?
민간인들이 놀라서 뒤로 물러나고, 군인들은 밤톨의 눈치를 본다. 민구가 민간인들을 향해 나직하게 내뱉었다.
“조용히 해. 지금부터 아가리 열지 마.”
“어, 어이! 이, 이 새끼 왜 안 말려…….”
군인들을 향해 하소연을 하던 남자가 두 번째 킥의 희생자가 됐다.
민구의 발이 번쩍 들리는가 싶더니, 얼굴이 새파래진 남자가 배를 부여잡고 쓰러져 신음한다. 격통에 휩싸인 남자를 향해 민구가 말했다.
“열지 말라고.”
사람들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밤톨과 군인들은 이래도 되는 걸까 싶어 불안했지만, 기분만은 속일 수가 없었다.
속이 다 시원하다. 정말 시원하다.
“아가리 처닫고 저 군인 말 들어.”
밤톨을 지목한 민구는 초희의 곁으로 돌아갔고, 모처럼의 고요가 흐트러지기 전에 밤톨은 서둘러 지시 사항을 말했다.
“지금부터 우리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잠실대교 위로 올라갈 겁니다. 그곳에서는 전방과 후방 경계만 하면 되기 때문에 훨씬 안정적으로 방어를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기다리다가 구조 차량이 도착했다는 무전을 받으면 다시 이 지점으로 복귀할 겁니다. 자, 알아들으셨으면 다들 일어나서 3열로 서세요. 거기 남자분들, 기절하신 분들 깨워서 양쪽에서 부축하시고 가장 앞에 서십쇼. 일어나요, 빨리!”
선봉과 후위를 둘씩 세우고, 나머지는 중간에서 민간인들을 호위하며 속보로 이동했다.
길고 완만한 곡선의 램프를 따라 걸어 올라가는 동안, 사방에 복잡하게 얽힌 고가도로에서 언제 좀비가 뛰어내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싸우는 게 가장 힘이 들었다.
이윽고 잠실대교의 북단에 도착한 병사와 민간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실대교에 올라온 이후에야 새로 알게 된 사실은 이 도로 위에 꽤 많은 로드킬의 흔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장갑 트레일러의 옆으로 난 공기구멍을 통해서는 전혀 보이지 않던 광경이다. 물론 로드킬의 희생자는 동물이나 그런 게 아니라 사람 모양을 한 좀비들이었다.
신체가 심하게 훼손되고 머리가 터진 좀비들의 시체가 드문드문 널려 있다.
이곳 역시 청정 지역이 아니라는 걸 알리는 증거였다. 어쨌든 보기에 너무 끔찍해서 밤톨은 깔려 죽은 시체들이 눈에 띄지 않는 곳까지 일행을 이동시켰다.
“여기에서부터 저 다음다음 가로등까지, 가로등 세 개만큼을 민간인 구역으로 지정하겠습니다. 그 안에서만 이동하고 경계를 넘지 말아주십쇼.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휴식하셔도 좋습니다. 아, 그리고 가급적 도로 가운데에 계시고, 자동차 밀어서 쌓아놓은 데에 기대거나 그 위에 올라서지 마십쇼. 대충 겹쳐 놓은 거라 언제 무너질지 모릅니다.”
밤톨은 가로등 세 개 만큼의 길이, 약 40미터 안에 사람들을 모아두고 병력을 반으로 나눴다.
트레일러의 포대에서 가져온 K―3 경기관총을 앞뒤로 한 정씩, 병력도 총 세 명씩이다. 좀비가 시야에 잡히면 머뭇거리지 말고 먼저 사격부터 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자신과 무전병을 포함한 넷은 민간인 구역에서 양쪽을 번갈아 살피다가 필요할 때 지원을 하기로 했다.
“아, 아이구, 아야야…… 내가 저 개새끼…… 언젠가는 꼭 복수한다. 씨부랄 새끼…….”
민구에게 맞아 뻗었던 중년 남자가 민구의 뒷모습을 멀리서 흘겨보며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를 웅얼거렸다.
배를 맞고 숨을 쉬지 못했던 남자 역시 그 바로 곁에서 이를 북북 갈고 있다. 담배 생각이 간절한데 꽁초까지도 다 피운 지가 옛날이다.
“어이, 후배님. 담배 있으면 한 대만 빌립시다.”
중년 남자가 부탁해도 이 꼴 보기 싫은 놈에게 그걸 줄 만큼 속 좋은 병사는 없었다. 다들 못 들은 척 외면하거나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어?”
쌓여 있던 자동차를 보던 남자 하나가 기쁨과 놀람이 섞인 탄성을 지르고 밤톨에게 다가왔다. 무슨 용건이시냐고 묻는 밤톨의 질문에 남자는 엉망으로 망가진 승용차를 가리켰다.
“저, 저기 개머리판으로 한 대 툭, 치든가 해서 저 차 유리창 좀 깨줘요. 아니면 아까 삽 가지고 오던데, 그걸 좀 빌려주면 내가 깨도 되고. 조수석에 담배가 있네. 그것도 갑이 아니라 보루로. 반 보루는 넘게 남은 것 같은데, 너무 아깝잖아. 여기 버려두고 가면.”
내키지는 않지만 별로 힘이 드는 일도 아니었다.
이번만 특별히 해주는 거니까 더 요구하지 말라고 이야기한 밤톨은 삽을 들고 가 유리창을 박살 낸 뒤, 담배를 꺼내 줬다. 정말로 한 대여섯 갑은 족히 들어 있다.
신이 나서 남자의 주변으로 모여든 흡연자들이 한 대씩을 얻어 물고 만족한 표정으로 연기를 뻑뻑 풍겨 댄다.
민간인 구역으로부터 30여 미터를 떨어져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군인들도 한 대씩을 피워 물었다.
날은 후끈거리지, 시간은 죽여야 하지, 게다가 마음은 떨리지, 그야말로 담배 피우기 딱 좋은 조건이다.
“형님은 담배 안 피우십니까? 하나 드릴까요?”
초희와 함께 민간인 구역의 북단에 서 있던 민구에게 다가간 밤톨이 물었다. 민구가 고개를 저었다.
“아, 비흡연자십니까? 그럼 저만 한 대 피우겠습니다.”
“피우기는 하는데, 걸리는 게 조금 있어서.”
밤톨이 다시 물었다.
“걸리는 거요? 그게 뭡니까?”
“예전에 어떤 놈들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그놈들 말로는 괴물들이 담배 냄새를 맡고 온다고 하더군.”
불을 붙이려던 밤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시 민구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웃음을 터뜨리며 라이터를 켰다.
“하마터면 믿을 뻔했습니다. 큭큭큭, 농담도 꽤 잘하시네요. 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