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킬러 (3)
(194/449)
194. 킬러 (3)
(194/449)
194. 킬러 (3)
2022.03.13.
“묶으려고 했었지. 그것참, 기분 더럽더라고요. 밧줄을 딱 꺼내는데, 그거 하나로 갑자기 사람이 아니고 동물이 되어버리는 느낌이었어. 그래서 내가 말했어요. 난 도망 안 간다. 오 대위랑 같이도 안 도망간 사람이 혼자 무슨 배짱으로 그러겠느냐. 하지만 너희가 그걸로 묶으면 난 아마 자살할 것 같다. 그렇게는 못 견딘다. 사람을 잡아두고 싶으면 줄로 묶을 게 아니라 계속 머물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잘해줘라. 그게 서로 편해지는 방법이다…… 뭐,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이 사람들도 알아듣는 눈치였어요.”
음……. 고개를 끄덕인 진우는 붕대와 소독 솜을 건빵주머니에 넣고 장비들을 챙겨 일어났다. 그러고는 정자세를 하고 하 중위에게 말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가시죠, 중위님.”
“간다고? 하하, 어디로 가요? 박 이병 복장이며 상태 보니까 그동안 바깥의 상황이 더 악화되었으면 악화되었지, 나아진 것 같지가 않은데. 안전한 곳이 어디 있겠어요?”
“일단 화천을 거쳐야 하겠지만, 최종 목적지는 서울입니다. 거기에는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대형 시설이 운영되는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서울? 강릉이나 원주라고만 해도 까마득할 텐데, 서울이라고요? 여기가 어딘지는 정확히 몰라도 거리가 200킬로미터는 넘을걸? 그 먼 곳까지 걸어서 가겠다는 거예요? 게다가 나라는 혹까지 달고서? 우와, 나 같은 사람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지치는 것 같은데……. 그리고 난 맨발이라니까. 그렇게 빨리 못 걸어요. 멀리도 못 가고. 아마 금방 따라잡히게 될 거야.”
하 중위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진우도 깨달았다. 일단 출발을 같이한다고 해도 목적지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그녀에게는 서울까지 그 먼 여정을 감내해야 할 이유가 없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돌아가겠다는 목표를 가진 자신과는 다르다. 그제 터널에서 보았던 부대를 떠올린 진우는 자신이 걸어온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오솔길을 따라서 저 방향으로 하루만 가면 제가 지나온 작은 마을이 나옵니다. 길도 좋습니다. 그리고 제 배낭 안에 양말이랑 여분의 옷이 좀 있습니다. 붕대로 잘 싸고 양말을 신으신 뒤에 테이프를 덧대면, 조금 고생스러우시겠지만 하루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겁니다. 그곳에서 신발과 옷, 다른 장비들을 갖추신 후 반나절을 더 가면 중대 규모의 군부대가 주둔 중입니다. 차량과 장비도 갖추고 있고, 명령 체계도 유지되는 부대였습니다. 거기까지 호위해 드리고 저는 서울로 가겠습니다.”
험로 대신 평지를 찾아 돌아가야 하므로 사실은 그가 말한 것보다 두 배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 중위는 선뜻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진우를 쳐다봤다. 잠시 고민을 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처음 박 이병이 냇가에서 말을 걸었을 때, 아주 잠시나마 가슴이 두근거렸던 건 사실이에요. 당연히 다른 부대원들과 이동하던 중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이제 구조될 수 있나 하는 기대가 들었지. 물론 박 이병의 그 낡은 군복이랑 부상당한 상태를 보고 나서 그게 아니라는 걸 곧바로 깨달았지만……. 저는 못 가요. 이제 조금 있으면 남자들 네 명 다 돌아올 텐데, 그 사람들 내가 없어진 걸 알면 아마 미친 듯이 찾아 나설 거야. 뭐, 당연하잖아요, 여자가 이제 하나밖에 안 남았으니. 그러다 보면 곧 잡히겠지. 공연히 나 때문에 박 이병까지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아요. 그 사람들 아직 실탄도 잔뜩 남았어.”
“저는 전투 경험이 많습니다. 네 사람을 제압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 있게 말하자 하 중위는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진우의 얼굴을 보았다.
“……다시 말할게요. 난 안 가요. 가지는 않지만, 그렇게 말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총 가진 군인 네 명하고 싸우게 될 거라고 하는데도 물러나지 않는 배짱도 멋지고. 하지만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너무 위험해. 가만히 서 있는 표적을 맞히는 것하고 총알을 주고받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잖아. 박 이병의 말대로 하면 결국 추격전이 벌어질 거고, 누군가는 죽어야 끝이 날 거야. 그리고 만약 그 불운하게 목숨을 잃는 누군가가 박 이병이라면 나는 정말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요. 내가 그냥 여기에 있으면 수치스럽고 힘들긴 하겠지만, 아무도 안 죽고, 아무도 안 위험해져. 나는 그걸로 됐어요.”
“하지만…… 여기에 남으시면 중위님은 계속 불행하게…….”
“불행? 그래요, 이렇게 사는 게 정상적이지는 않지. 고통스러울 때도 있고, 부모님들께는 절대 보여 드리고 싶지 않은 모습인 것만은 분명해.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 불행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내 생각에는 없을 것 같아요. 여기로 끌려오기 전에 내가 맡은 임무는 강릉 인근에서 발생한 사고의 부상병들을 응급 처치해서 후송할 때까지 살리는 거였어요. 참 많이도 다치더라고……. 폭발물을 설치하다가, 진지 구축 공사를 하다가, 또는 좀비들이랑 싸우다가 오발 사고로……. 그 사람들 대부분, 며칠을 못 넘기고 죽었어요. 국군 병원엔 애초부터 그만큼 많은 부상자들을 다 수술하고 치료해 낼 만큼의 설비도, 인원도 없거든. 태양 그룹에서 의료 지원을 해준 덕에 그나마 경상 환자들은 그쪽으로 보냈지만…… 그래도 병원이 미어터질 지경이었지. 매일매일이 지옥이었어요. 비명 지르는 사람들 사이로 뛰어다니느라 하루에 두 시간도 못 자면서 피를 닦고, 살을 자르고, 게다가 가끔씩 좀비로 변하는 환자라도 나오면…….”
하 중위는 눈살을 찌푸리며 진저리를 쳤다. 이 사람이 있던 곳도 삼척 원자력발전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진우가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다는 표시를 하자, 중위가 한숨을 내쉰다.
“나를 납치한 저 사병들도 애초부터 미친 사이코패스라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니에요. 매일 철책 앞에서 좀비들에게 총질을 해 대고 동료들을 잃는 동안 조금씩, 조금씩 돌아버린 거지. 그리고 나도 아마 반쯤은 미쳐 있는 거겠지. 맨 정신으로 이렇게 하고 산다는 게 말이 돼? 그리고 나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는 게 두려웠는지도 모르겠어요. 박 이병이 나에게 가자고 말해주고 나니까 그걸 새삼 깨닫게 된 것 같아. 어차피 죽음이 코앞까지 와 있다는 점에서 여기나 거기나 다를 게 아무것도 없는데, 뭘 걸고 누군가의 희생을 바라고…… 그렇게 하는 게 다 무의미해. 그러니까…… 나는 괜찮아요. 오 대위님이 죽은 다음부터는 저 녀석들도 조심을 하는 분위기고, 그 짓도 이제는 실컷 했는지 며칠 전부터는 한결 덜 요구해. 술만 먹지 않으면…….”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멀리 구릉 저편의 숲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들의 목소리였다.
하 중위는 얼른 진우를 끌고 숲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그러고는 나무 사이로 얼굴을 내민 채 소리가 나는 방향을 살폈다. 병사 넷이 이야기를 나누며 오두막을 향해 걸어오는 중이었다.
“가야겠어, 찾으러 오기 전에…… 박 이병.”
하 중위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진우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하 중위는 그를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주며 말했다.
“그 용기, 정말 멋있었어. 박 이병이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바랄게요. 그리고 그리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를 빌게. 조심해서 잘 가요.”
하 중위가 가방을 집어 들고 돌아가려 할 때, 진우가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그러고는 물었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겁니까?”
엷은 미소를 지으며 진우를 보던 하 중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는 그녀를 잡았던 손에서 힘을 뺄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데리고 나서는 순간부터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리고 서울까지 가는 동안 겪어야 할 고통이 얼마나 클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약속해 줄 수 없다. 그러니 그녀가 원치 않는다고 하면 강요할 수는 없다.
“가요, 빨리! 내가 안심하게 해줘요.”
하 중위의 말에 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뒷걸음질을 쳐서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하 중위는 이내 돌아서서 오두막 쪽으로 뛴다. 그 뒷모습을 보는 게 왜 그렇게 속이 쓰린지……. 진우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쩌자고? 응? 이 미친놈아, 어떻게 하잔 말이야? 함부로 개입하려고 하지 마. 네가 책임질 수 없잖아? 당장 너조차도 그저께 폭풍 속에서 죽을 뻔했어! 잘 알잖아? 저 누나는 그래도 지붕 달린 집이 있어. 개고기라도 먹을 수 있고, 근처에 냇물도 졸졸 흐른다고. 좀비들이 들이닥치기 전까지는 안전해. 그리고 저번에 그 터널도 그렇고, 이 산도 좀비들이 정말 덜 보여. 청정 지역에 가까워서 얼치기들이라도 버틸 만하다고. 그러니까 그냥 내버려 둬. 원하는 대로 살게 두라는 말이야! 저 누나가 오래 살아남을 가능성이 너보다 더 높아!’
오솔길로 돌아와 걷던 진우는 자꾸 발길을 돌리려는 자신의 머리통을 쥐어박으면서 잊어버리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등에 10킬로그램을 짊어지고 매일 산길 30킬로미터를 도보로 이동하는 것과, 남자 네 명을 상대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힘들까에 대해서 비교하며 이마를 찌푸리기도 했다. 그러나 자꾸 마음이 쓰인다.
그러다가 오른팔의 그 눈부시게 흰 새 붕대가 눈에 들어왔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곤 뒤돌아 뛰었다.
순식간에 오솔길을 지나 언덕을 뛰어넘은 진우는 다시 냇가를 건너 그녀가 자신을 치료해 줬던 그 숲속으로 돌아왔다.
“보기만 하고 가자, 보기만. 누나가 말한 것처럼 그 정도로 괜찮은 것만 확인하면 더 이상 미련 가지지 않을게. 인간으로서 대접받고 있는 것만 확인하면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고 갈게. 그럼 되잖아.”
진우는 또 다른 자아를 향해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새로 얻은 K―2의 조준경을 오두막 쪽으로 겨눴다.
잠시 후, 오두막의 문이 열리고 병사 둘이 하 중위와 함께 걸어 나왔다. 세 사람의 손에는 빈 대용량 플라스틱 소주병이 들려 있었다. 물을 뜨러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리로 지나간다.
진우는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얼른 위치를 옮겼다. 20여 미터 뒤로 물러나 아름드리나무 세 그루가 밀집한 곳에 몸을 숨겼다.
여기라면 내려가는 길목도, 그리고 5미터 정도 언덕 아래의 계곡에서 일어나는 일도 모두 보인다.
진우가 자리를 잡는 동안 세 사람은 숲을 지나 냇가로 내려갔다.
하 중위가 물병을 씻고 다시 물을 채우는 동안 바짝 마른 병사 하나는 바위 위에 앉아 기다렸고, 또 다른 녀석은 총을 동료에게 맡긴 채 세수를 했다.
“이리 와봐.”
물을 다 채우고 기다리던 하 중위에게 씻던 놈이 말했다. 하 중위는 천천히 그에게 걸어갔다. 씻던 놈은 빙글거리며 그녀의 허벅지를 쓸더니 치마를 들어 올렸다.
“왜 여기에서 이래? 옷 다 젖어. 하고 싶어? 그럼 좀 편한 데로 가. 나, 지금 넘어질 뻔했어.”
“안 넘어진다! 내가 잡아주잖아. 크크크, 그리고 옷이야 좀 젖으면 어때? 쟤가 하는 동안 바위에 널어두면 다 마를 텐데.”
씻던 놈은 뒤쪽에 앉은, 마른 놈을 가리킨다. 마른 놈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낄낄댄다. 씻은 놈의 손이 몸을 훑어 대는 중에도 하 중위는 차분하게 대응했다.
“너 많이 취했니? 이렇게 두 명씩 한꺼번에 덤벼들면 내가 못 버틴다니까. 기분도 문제지만, 몸이 망가진다고. 이런 식으로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고 약속했잖아.”
“응. 그건 알지, 알아. 약속한 것도 기억하고, 너 힘들 것도 알아. 흐흐흐, 근데 저 새끼가 말린 고기 가지고 오는 동안에 자꾸 구라를 치면서 사람을 열 받게 하잖아. 자기가 제일 오래 한다고. 야, 너는 당사자니까 제일 잘 알잖아. 저 새끼가 별거 없다는 거. 그치? 내 말이 맞지?”
“하아…… 그런, 시간 같은 걸 재면서 하는 여자 없어. 그리고 너희 다 잘해. 그러니까 이상한 걸로 싸울 필요 없어. 전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다섯이서 서로 몰래 연애하듯 그렇게 지내자. 응? 그렇지 않아도 힘든 세상이잖니.”
“거 봐, 내가 주연이 요게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말하면서 여우처럼 넘어가려 할 거라고 했지? 요년은 요렇다니까? 존나 자기가 무슨 도사야, 씨발. 그래서 우리가 내기를 했거든. 공정하게 동일한 환경에서 누가 제일 오래 하는지. 조금 있다가 나머지 애들도 올 거야. 그러니까 오늘만 딱 예외적으로 네 번 해. 대신 내일하고 모레는 쉬게 해줄게. 응? 그럼 되지? 서로 기분 좋게 되는 거지?”
“되긴 뭐가 돼? 아! 아! 아파! 그렇게 만지지 좀 마. 너 왜 그래? 짐승처럼 무례하게 굴면 기분이 좋아지니?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 너는 하루에 여자 네 명 상대할 수 있겠어? 그리고 왜 자꾸 이렇게 불편한 데에서…….”
하 중위가 몸을 비틀어 피하자 씻던 놈이 그녀의 머리통을 때린다. 그러고는 머리칼을 움켜쥐고 뒤로 당겼다.
“자꾸 토 달지? 응? 매가 고팠어? 한 새끼 끝나면 와서 씻고, 또 하고 씻고, 그러라고 물가에서 하자는 거 아니야! 내기니까 동일한 환경에서 해야 한다고! 이 똥걸레 같은 년이 진짜 며칠 오냐오냐해 줬더니 무슨 상전이나 되는 양 이래라저래라……. 야, 요년 요거, 버릇 좀 고쳐 줘야겠지?”
씻던 놈이 윙크를 하며 망보던 놈을 돌아본다. 하지만 거기에 앉아 있던 마른 놈은 이미 눈을 까뒤집은 채 고꾸라져 있다. 대신에 분노한 진우가 시야를 가득 채우고 뛰어온다.
“억!”
외마디 비명을 지르려던 놈의 불룩한 사타구니에 진우의 발길질이 꽂혔다. 진우는 개머리판을 돌려 놈의 턱을 후려갈겼다.
큭, 씻던 놈은 숨이 넘어가는 신음 소리만 남기고 바위에 얼굴을 찧으며 쓰러졌다.
“왜? 왜 안 가고?”
하 중위는 수치심과 당혹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진우는 입을 꾹 다문 채 그녀의 흐트러진 옷을 제대로 걸쳐 줬다.
“두 명이 또 온다고 했어. 금방 올 거야.”
하 중위도 이제는 결심을 한 듯, 진우의 손을 꽉 잡았다. 고개를 끄덕인 진우가 놈들의 총을 물속에 집어 던져 버리려 하자 하 중위가 말했다.
“나도 개인화기 줘. 나도 군인이야.”
진우는 한 정을 골라 탄창을 확인하고 그녀에게 넘겼다.
파지하는 모습만 봐도 군사훈련을 받았다는 그녀의 말이 허풍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만큼은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불안함이 남은 진우가 나머지 한 자루를 물속에 던지며 당부를 한다.
“제가 앞에 섭니다. 제 뒤에서 벗어나지 마십쇼.”
하 중위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진우가 그녀가 내려온 비탈 쪽으로 몸을 틀려 할 때, 손을 잡은 하 중위의 저항이 느껴졌다.
“그쪽으로 가면 오두막이야. 이리로 가야 멀어지는 거…….”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압니다. 가까이로 가서 내려오는 길목에 숨었다가 제압할 겁니다. 저기 저 언덕 아래 숨으면 위에서 안 보여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잠시 머뭇거리던 하 중위는 결국 진우가 잡아끄는 대로 따라왔다. 두 사람은 내리막길 바로 옆, 움푹 파인 비탈에 바짝 붙어 몸을 숨겼다.
저벅, 발소리가 울린다. 그런데 두 놈이 아니다.
“야, 너네, 씨발, 왜 이렇게 급해? 응? 좀 기다리라니까, 씨발. 아, 여기는 참 비탈이 안 좋아. 언제 날을 잡아서 계단을 만들든가 해야지…….”
개소리를 지껄이며 발아래로 시선을 돌리던 놈의 멱살을 잡아 바닥에 내리꽂았다.
끅! 당연히 기절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놈은 용케 목을 들고 버텼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정신을 못 차리는 놈의 눈앞에 진우가 총구를 댔다. 그러고는 전투화로 목을 밟았다.
끄윽, 놈은 신음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버둥댄다. 놈의 목을 밟은 발에 힘을 주었다. 숨이 차오르자 놈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끄으, 사, 살려줘……. 나, 나는 마, 말리려고……. 끄윽, 컥, 컥! 사, 살려…….”
놈의 눈에서 눈물이 솟는다.
말리려고 했다고? 거짓말이잖아. 너도 낄낄거리며 시간을 재러 온 거였잖아…….
진우는 총을 돌려 개머리판으로 놈의 얼굴을 내리찍었다.
칵! 칵! 칵!
세 번을 찍자 바위에 뒤통수를 연달아 부딪친 놈은 눈을 홉뜨고 뻗어버렸다. 그 과정에서 녀석이 비명을 질렀던 것일까? 진우는 그걸 모르겠다. 하여간 위쪽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야, 너 왜 죽는 소리 했어? 뭐야?”
쉿―
진우는 왼손 검지를 입술에 대고 하 중위를 돌아봤다. 하 중위도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인다.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네 번째 놈의 신경은 극도로 날카로워졌다.
“어어? 씨발, 기집년도 안 보이고……. 야! 야! 대답하라고! 씨발 놈들아! 뭔데? 습격이냐? 응? 나 놀리는 거면 다 죽일 거야! 쏜다고!”
말의 끝맺음이 정확하지 않은 걸 보니 술을 꽤 마신 것 같다.
머리 위에서 네 번째 놈이 좌우로 움직이며 풀을 밟는 발소리가 와삭와삭, 울린다. 아마도 시야를 확보해 보려는 모양이다. 그러더니 갑자기 발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왜 이래! 씨발, 뭐냐고! 으아아아! 어떤 개새끼들이야!”
네 번째 놈은 언덕 아래를 향해 무차별 난사를 하기 시작했다.
투투투투툭― 투투투투둑―
머리 위의 흙이 파이고, 발 아래로 총알이 날아와 자갈을 쪼갠다. 예상을 넘어선 반응이었다.
퍼버벅―
목이 밟혀 기절해 있던 놈의 얼굴과 가슴을 총알이 관통하며 피가 솟아오른다.
꺄아악, 하 중위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이러다가는 눈먼 총알에 목숨을 잃게 생겼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진우는 하 중위를 안전한 벽으로 밀고 자신의 등으로 막으면서 계속 중얼거렸다.
투투투투둑―
철컥, 총소리가 끊겼을 때, 진우는 냇가를 향해 몸을 날리면서 방향을 틀어 언덕 위로 총구를 겨눴다.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예비 탄창을 끼우던 놈이 총을 고쳐 잡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늦었다, 개새끼야…….
진우는 방아쇠를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