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킬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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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킬러 (2)
2022.03.12.
여자는 한 번씩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도 큰 움직임 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뒷걸음질을 치거나 뛰어서 달아날까 봐 걱정을 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군인이 왜 여기에? 어디 소속이에요? 다른 부대원들은요?”
“없습니다. 저 혼자뿐이에요.”
“왜요? 어째서 혼자만?”
여자의 얼굴에 갑자기 실망의 기운이 돈다.
구조대라도 만났다고 생각한 걸까?
진우는 솔직하게 말을 했다.
“작전을 수행하다가 전부 전사했습니다. 저만…… 남았어요.”
아아~ 여자의 입에서 탄식이 쏟아진다. 급한 마음에 진우는 얼른 그녀를 달랬다.
“동료 병사들은 없지만 제가 충분히 지켜 드릴 수 있습니다. 혼자십니까? 혹시 일행분들이 있으신가요?”
“이병 혼자서 나를 지켜준다고요? 좀비가 사방에 깔린 이 험한 세상에서? 하하하~”
여자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는다. 작대기 하나가 가슴에 붙어 있기는 하지만, ‘군인 아저씨’가 아니라 ‘이병’이라는 호칭을 쓰는 게 조금 의외이다.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며 젖은 머리를 계속 쓸어 넘기던 여자는 문득 생각이 났는지 머리를 갸우뚱한 채 물었다.
“지금 내가 목욕하는 거 다 봤죠?”
으아…… 난감하다.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그럼 계속 거짓말을 해야 할 것 같아 진우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런데 왜 옷을 다 입은 다음에 불렀어요?”
“그렇게 해야 덜 당황하실 것 같았습니다. 믿지 않으셔도 어쩔 수 없지만.”
“아뇨, 믿어요.”
여자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착한 사람이네. 총도 있겠다, 보통은 덮치고도 남았을 텐데.”
‘착한 사람’이라는 말에 진우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조금 전까지도 그의 눈은 젖은 원피스 위로 도드라진 그녀의 가슴을 힐끔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 뭔가를 고민하며 여전히 머리카락을 넘기던 여자가 진우의 오른팔에 감긴 붕대에 관심을 보였다.
“부상당했군요? 언제?”
“아, 예. 이거…… 이틀 전에 유리에 찢겨서…….”
“치료는 했고?”
“그냥 진통제 먹고 소독했습니다. 연고 발랐고요.”
“어디 봐. 좀 볼게요?”
여자가 다가와 팔의 붕대를 푼다. 살 냄새를 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여자를 본 게, 아니, 살아 있는 사람을 본 게 얼마 만인가. 여자의 손길이 스치자 진우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안 좋아. 곪기 시작하잖아.”
퉁퉁 부어올라 있는 진우의 상처를 살피면서 여자가 중얼거렸다. 뭐,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거라서 별로 새로운 소식도 아니다.
그렇게 심하게 찢어진 상처를 대충 소독만 한 후에 염천에 꽁꽁 싸매고 다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붕대를 다시 고쳐 감은 여자가 말했다.
“따라와요. 드레싱을 새로 해줄 테니까.”
그렇게 돌아선 여자는 여전히 맨발로 자갈밭 위를 걸었다.
뭐지, 이 상황?
진우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졌다.
산중에서 낯선 사람을 만났는데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대응하는 저 여자, 그리고 부상당한 부위에 대한 그녀의 관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드레싱이라고? 무엇으로 소독을 하고 감싼단 말인가.
신발도, 팬티도 없는 여자가 그런 도구는 가지고 있다는 게…….
“뭐해요, 오라니까?”
진우가 멍하니 서 있자 앞서 걷던 여자가 뒤돌아보며 손짓을 한다.
아, 이거, 무슨 옛날이야기 속에서 봤던 전개 같아……. 여우에게 홀려 저택인 줄 알고 무덤에서 잠이 드는 그런 패턴인 건가?
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여자는 맨발로도 꽤나 능숙하게 부드러운 흙이나 풀만을 골라 디디며 언덕을 올랐다.
5분여쯤 더 산길을 걷자, 저 멀리 작은 오두막이 눈에 들어온다. 아래에서는 나무들에 가려 전혀 보이지 않던 집이다. 울창하게 들어선 나무들의 끝자락에 진우를 멈춰 세우고 여자가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요. 금방 다녀올 테니까.”
“아, 저, 저도 같이…….”
진우는 말까지 더듬을 정도로 다급했다. 혹시라도 여자가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어떻게 만난 사람인데, 이렇게 쉽게 그 인연을 놓을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너무 외롭다.
훗, 여자가 가볍게 웃는다.
“저기 저 집에 갔다 오는 거예요. 여기에서 훤히 보이잖아. 설마 맨발인 여자가 도망갈까 봐 무서워? 아참, 그리고…….”
여자는 하늘의 해를 보며 잠시 뜸을 들였다.
“아직 올 때가 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말은 해둬야지. 있죠, 누가 저쪽 산에서 내려오는 걸 보더라도 말 걸지 말고 가만히 숨어 있어요.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금방 갔다 올 테니까.”
고개는 끄덕였지만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 여자, 너무 수수께끼투성이다.
어쨌든 남의 집에 함부로 따라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진우는 얌전히 앉아서 여자가 오두막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일까? 혹시…….
진우의 머릿속에 가설이 하나 떠올랐다. 여자는 미끼인 거다. 의도적으로 냇가에서 목욕을 해 지나가는 사내들을 유혹하고, 이런저런 핑계로 여기까지 불러오는 거다.
딱 바로 이 지점, 이 소나무 아래. 그러면 미리 매복하고 있던 놈들이 목에 밧줄을 걸어 당기거나 화살을 쏴서 죽이고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훔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딱 맞아떨어……지기는 개뿔. 지나가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이 지독한 산골에.
진우는 얼른 자신의 멍청한 추리를 지워 버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는 등 뒤로 돌려 멘 K―2를 왼손으로 꺼내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
정말 여자가 치료를 해줄 요량이라면, 혹시라도 오른팔을 내주고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생겼을 때를 대비할 필요가 있다.
의심 없이 시작되는 관계라는 건 대개 좋지 않은 결말로 이어지기 마련이니까.
“그렇다면 뭐지? 왜 이런 데 혼자 있지? 그리고 저쪽 산에서 내려올 사람이라는 건 또 뭐고?”
진우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동안 오두막을 나와 다시 그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 여자의 손에는 빨간 십자가가 그려진 흰 플라스틱 가방이 들려 있었다.
“여기 앉으면 내가 처치하기가 편할 것 같네. 이쪽을 보고 앉아요.”
진우를 평평한 바위 위에 앉힌 여자가 다시 붕대를 풀어냈다. 고름과 진물, 피가 잔뜩 묻은 붕대를 잘 말아 건네주며 여자가 말했다.
“이건 따로 모아놓을 테니까 배낭이나 건빵주머니에 넣어요. 여기 버리고 가지 말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진우의 상처를 자세히 살피던 여자가 플라스틱 가방을 열고 그 안에 들어 있던 새 라텍스 장갑의 포장지를 벗겨내 낀다.
뭔가 전문적인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여자는 알코올 적신 솜들을 뜯어 일회용 종이 트레이 위에 펼쳐 두고, 라텍스 장갑을 낀 손으로 상처를 벌린다.
“참아요, 아플 테니까.”
흐음! 진우의 눈이 똥그래진다. 찌릿찌릿 전기 고문을 당하는 기분이다. 하지만 신음도 흘리지 않았다. 알코올 솜으로 소독하는 내내 이를 꽉 문 채 버티는 진우를 보며 여자가 웃었다.
“그렇게 이를 깨물면 오히려 안 좋아요. 이에 상당한 부담이 가니까. 그래도 뭐, 남자답기는 하네.”
여자가 핀셋을 내려놓는다. 그녀가 상처 내부를 쑤셔 댄 솜에는 고름과 피뿐 아니라 아주 작은 이물질들도 잔뜩 묻어 있다.
소독을 끝낸 후, 여자는 상처 위에 군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그 빨간 약도 듬뿍 발라주었다.
“자, 이것도 챙겨 가시고.”
여자는 더러워진 소독 솜들을 전부 모아서 장갑이 들어 있던 비닐에 담고, 아까 풀어낸 붕대 옆에 놓았다.
“그런데 내 소견으로는…… 물론 내가 의사는 아니지만, 꿰매는 게 나을 것 같긴 해요. 지금 이대로는 자꾸 벌어져서 붙지를 않을 거야.”
“꿰맨다고 해도 뭐로 말씀이신지……. 그리고 하실 줄 아십니까?”
진우가 묻자 여자는 ‘하겠다는 거지?’라고 중얼거리며 가방 안에서 휘어 있는 바늘과 의료용 봉합사를 꺼내 비닐을 뜯었다. 없는 게 없다.
작은 펜치와 바늘을 들고 다가서던 여자가 진우의 망설이는 얼굴을 보며 말했다.
“봉합용 밴드만 붙여줄 수도 있기는 해. 하지만 워낙 자주 움직이는 부위라서, 지금 조금 아픈 게 훨씬 나을 거예요. 어떻게 해요? 봉합해 줘? 나 이거 배웠어.”
여자의 눈에서 진심과 자신감을 읽은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생각했어요. 어찌 보면 조금 전 소독보다 오히려 이게 덜 아플 거야.”
안심하라는 듯 말을 했지만, 바늘이 생살을 파고드는 순간, 진우의 몸은 저절로 경직됐다.
윽! 팔이 부르르 떨린다.
후우~ 후우~ 이를 악물고 고통을 잊기 위해 노력하던 진우의 시선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여자의 다리에 머문다.
벌어진 원피스 사이로 허벅지 안쪽이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팬티도 없다. 그리고 여자는 자꾸 조금씩 자세를 고쳐 앉는다. 바늘이 들어갈 때마다 움찔움찔하면서도 진우는 계속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좀 도움이 됐지?”
열네 바늘을 꿰매고 나서 바늘을 내려놓은 여자가 치맛단을 정리하며 물었다.
예? 진우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나오자, 두툼한 습윤 밴드를 상처 위에 붙여주던 여자가 미소를 짓는다.
“뭐, 입으로는 모른 척해도 여기 증거가 있어. 그나저나 엄청나시네. 생살을 쇠로 쑤시는데 정작 여기는 이렇게 팽팽해졌어. 어이구, 이거, 내가 뿌듯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민망해야 하는 건가 잘 모르겠네. 후후.”
여자가 가리킨 부위는 물론 진우의 사타구니다. 진우 자신이 봐도 대단하구나 싶을 만큼 분기탱천해 있다.
그녀는 천사처럼 착한 마음으로 자신을 치료해 줬는데, 자신은 그런 그녀의 치마 속을 노골적으로 훔쳐보면서 이걸 세우고 있었다니…….
부끄럽다. 하지만 여전히 흥분은 가라앉지 않는다. 여자가 애잔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하긴 군인인데 여자 구경 언제 해봤겠어……. 어때요, 한 번 해줄까? 목욕도 했겠다.”
예? 진우는 또 깜짝 놀라 여자의 얼굴을 쳐다봤다. 여자는 콧방귀를 뀐다.
“참내, 무슨 못할 말 들은 사람처럼 왜 그래요? 나는 괜찮으니까 정 하고 싶으면 한 번 하자고. 뭐, 두 번 해도 되고.”
하마터면 이번에도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할 뻔했다. 사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욕망도 꽤 컸다. 하지만 이건 찢어진 살을 꿰매주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아니…… 잠깐만. 다르긴 뭐가 다르지?
그렇게 분열을 일으키던 진우의 자아가 겨우 제 궤도를 찾는다.
“아, 아니, 저는…… 그 정말 감사한 말씀이지만…… 일단…… 이야기부터 좀…….”
진우는 민망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말을 더듬었다. 깨끗한 흰 붕대로 습윤 밴드를 한 번 더 감싸서 묶어주던 여자가 웃었다.
“후후, 그렇게 말할 것 같은 타입이기는 하더라.”
팔이 한결 개운해졌다. 이쯤 되면 은혜를 받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감동한 진우가 고개를 숙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누나.”
“누나가 아니라 중위다, 박진우 이병.”
여자가 군복의 명찰을 읽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했다.
예? 진우는 세 번째 놀랐다. 놀라서 다시 얼빠진 소리를 냈다.
하긴 그 능숙한 치료 솜씨는……. 자기도 모르게 엉거주춤 일어나서 경례를 붙이려던 진우를 붙잡아 앉힌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됐어요. 정말 고지식하다. 제복도 안 입고 신분증도 없는데 뭘 그 정도로 예의를 갖춰? 증거라야 그저 내가 중위라고 말하는 것뿐이잖아. 근데, 군 생활 어지간히 빡세게 했나 봐? 상처가 그거 하나만 있는 게 아니네. 사방에 다 찢기고 벗겨지고…… 어이구, 이거, 손톱도 하나 날아갔고.”
장갑을 벗으려던 여자는 다시 소독약과 솜, 붕대를 꺼내 이곳저곳의 상처를 돌봐준다. 그녀에게 얼굴을 맡긴 채 진우가 물었다.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중위님?”
“음, 물어봐도 돼요. 어차피 입은 한가하니까.”
“그…… 왜 여기에 계신 겁니까? 그리고 저쪽 산에서 내려온다던 사람들은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건 질문 하나가 아니네? 뭐, 상관은 없지만. 간단히 말하면, 그 사람들도 군인이야. 같은 국군 병원에 있던……. 파견 나갔다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갑자기 그러더라고. ‘씨발, 그냥 재낄까, 우리?’, 그 말을 듣고 같이 타고 있던 오 대위님이 화를 버럭 냈지. 너 지금 장교 앞에서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고. 그랬더니 다른 병사가 곧바로 주먹을 날리더라고. 후후후, 네 명이 다 짰는데, 오 대위님이랑 나만 몰랐던 거야. 그리고 우리는 여기까지 끌려왔네? 차는 저기 멀리 버려두고.”
“잘 이해를 못 했습니다.”
“왜 이래……. 다 빤한 이야기잖아. 호위를 위해 딸려 보낸 사병 네 명이 여자 간호 장교 둘을 태우고 이동하다가 이러다가는 어차피 얼마 못 가 좀비에게 죽을 텐데, 차라리 그전에 술이나 실컷 마시고 XX나 실컷 하자고 의기투합해서 탈영을 했다고. 끌려온 여자 장교 둘 중 하나가 나고. 그게 벌써 열흘도 더 된 일이네. 하주연이라는 사람에게서 국군 강릉병원 내외과 소속 중위라는 수식어는 이제 다 사라지고, 그냥 여자라는 성별만 남은 거야. 생각해 봐요. 총을 눈앞에 딱 들이대면 계급장 따위 아무 소용 없다고. 그까짓 게 뭐야. 지킬 마음 없는 사람한테는 그냥 그림이잖아. 그리고 사실 남자 넷 대 여자 둘이면 총까지도 안 필요하지.”
하 중위는 진우의 얼굴을 소독하며 의외로 담담하게 엄청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니, 그래도 어떻게…… 라고 말하던 진우는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렸다.
돌이켜 보니 자신도 이 병장, 김 상병과 탈영을 모의했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걸 얻기 위해 장교의 턱에다가 총구를 겨눈 채 위협을 해 끌고 다녔었다. 그 모든 일의 끝에 결국 전사한 장교의 계급 역시 공교롭게도 중위였다.
이런 씨발……. 뭐야……. 엄청 나쁜 새끼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개새끼들보다 내가 나은 건 강간을 하지 않았다는 것 외에는 없구나…….
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이만큼 신세를 진 사람이 당하는 걸 알면서 이대로 지나쳐서는 안 된다.
“네 명에게 끌려왔다고 하셨고, 또 저쪽 산에서 내려올 거라고도 하셨는데, 그럼 그놈들이 그냥 자리를 비운다는 말씀입니까? 남아서 감시하는 놈이 없이요?”
“아…… 그게, 그게 좀 웃기는 일이긴 해. 들어봐요. 다들 무서운 거야. 그래서 사냥이든, 말려놓은 고기를 가지러 가든, 뭘 훔치러 가든…… 그냥 다 같이 움직이더라고. 훗, 하긴 안 무서울 수 있나? 좀비들이 돌아다니는데. 물론 여기 와서는 좀비 구경은 못 해봤지만……. 게다가, 지킬 필요가 있을까? 이걸 봐요.”
하 중위가 자신의 맨발을 들어 보인다.
“신발이 없잖아. 이 산속에서 신발도 없이, 무기도 없이, 여분의 식량도 없이 얼마나 멀리 도망갈 수 있겠어? 근데 오 대위님은 붕대로 잘 묶으면 된다고 생각했나 봐. 무리한 계획이었지. 애초에 우리가 여기로 들어올 때, 이 옷이랑 술 같은 거 집어 온 조그만 마을에서부터도 사흘 밤낮을 계속 산속으로만 들어왔거든. 그 거리를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맨발로 주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게…….”
“오 대위님이라는 분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진우가 묻자 하 중위의 손이 처음으로 멈칫한다. 잠시 침묵하던 하 중위가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나흘 전에 사망했어요.”
“아…… 어째서…….”
“글세……. 그분은 나보다 자존심이 셌던 걸까? 뭐,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하여튼 이렇게 비참한 꼴은 더 당할 수 없다고 하면서 도망을 쳤지. 나한테도 같이 가자고 했는데, 나는 자신이 없더라고. 그래서 여기 있겠다고 했어.”
“그래서 저놈들이 쫓아가 죽인 겁니까?”
진우가 분노한 눈으로 물었다. 이 하주연이라는 여자가 아까 자신에게 왜 그리 쉽게 XX 제의를 해줬는지, 그게 짐작이 되자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다.
넷이나 되는 놈에게 몹쓸 짓을 당해왔으니 한 명 정도와 더 상대를 한다고 해도 크게 다를 것 없다는…… 그런 자포자기의 심정이었으리라.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탈영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사람을 납치해서 온갖 모욕과 괴로움을 주고, 결국 죽이기까지 하는, 그런 놈들은 용서할 수 없다.
그렇게 진우가 자기 마음대로 분노의 불꽃을 피우고 있을 때, 하 중위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여자가 둘뿐인데, 그 정도로 죽이기까지 하겠어? 다시 잡아와 장난감으로 쓰면 되는데. 오 대위님은 좀 기구했어요. 혹시 여기 오다가 봤나 모르겠는데, 이 주변에는 밀렵꾼들이 쳐둔 덫이 많아. 박 이병도 조심해요. 오 대위님도 고개를 넘어가다가 중턱에서 올가미에 걸렸는데, 자기 혼자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어디 그렇게 쉽나. 계속 시간이 흘렀겠지. 그러다 해가 지고 나서야 오 대위님도 깨달았겠지.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오 대위님은 계속 구해 달라고 소리를 쳤어요. 그런데 남자 넷이 겨우 방향을 찾아갔을 때는…… 들개들이……. 올무에 걸려 꼼짝도 못 하는 상태에서 개들한테 뜯어 먹히고 있던 거야. 슬프다고 해야 할지, 소름이 끼친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이상한 기분이었어요. 좀비도, 사람도 아니라 개들에게 죽었다고 하니……. 남자들은 개를 다 쏴 죽이고, 죽은 오 대위님을 묻어주고 왔어요. 덕분에 지금까지도 질리도록 개고기만 먹었지.”
“그 이야기를 믿으십니까? 혹시 그분을 죽여놓고 중위님에게 거짓말을 하는 건…….”
진우가 끝까지 의심을 풀지 않자 하 중위는 쓸쓸하게 웃었다.
“하하…… 나한테 그런 거짓말을 해서 뭐 득 될 게 있을까요? 그리고 오 대위님이 구해 달라고 소리 지르는 건 나도 들었는데.”
“그 이후로 감금이나 감시는 없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