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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킬러 (1) (192/449)


192. 킬러 (1)
2022.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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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구는 칼을 보관소에 남겨두고 초희와 함께 통로로 이동했다.

“첨부터 나한테 맡겨뒀으면 잘됐을지도 모르는데…… 하여간 오빠는.”

조그만 캐리어를 끌고 따라오면서 계속 쫑알거리는 초희도 그렇고, 두고 온 칼도 그렇고, 여러모로 속이 좋지는 않다.

게다가 대기 구역에도 또 신경을 긁는 게 기다리고 있었다. 테라라는…… 그 말라깽이 계집애다.

줄 선 사람들을 살피던 테라가 민구를 알아보고 다가온다. 여전히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아직 팔다리의 멍이 다 빠지지 않은 모양이다.

“넌 머리가 나쁘냐? 얼쩡거리지 말라고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민구는 차갑게 내뱉었다. 민구의 태도에 신이 난 초희도 쏘아붙였다.

“하여간 미친년이라니까. 우리 오빠가 경고했잖아. 재수 없으니까 꺼지라고. 울 강 실장 오빠는 너처럼 엉겨 붙는 년들 딱 질색이야. 너, 스토커야? 우리가 오늘 다른 데로 간다는 건 도대체 어떻게 알고 졸졸 따라다녀? 아우, 섬뜩해. 저년 쳐다보는 눈깔 좀 봐, 오빠.”

성질 같아서는 끼어들지 말라고 초희의 머리채를 잡아채고 싶었지만, 민구는 그냥 그녀가 떠들도록 내버려 뒀다.

혹시나 이 테라라는 아이가 건대까지 따라올 생각을 했더라도 이렇게 모욕을 당하고 나면 마음을 바꿔 먹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육만배가 있는 곳은 언제나 피와 음모가 지배하게 된다. 그런 곳에 이 아이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

그러나 테라는 초희의 욕설이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차분한 표정으로 민구를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왜 저한테 그렇게 화가 나셨는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확실하게 아는 건 제가 아저씨께 정말 큰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에요. 그건 변하지 않아요. 다른 쉘터로 가시기 전에 인사는 드리고 싶었어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여서요. 정말 감사했습니다. 건강하시길 빌게요.”

테라가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가 들었다. 잠시 민구의 눈을 바라보던 테라는 더 돌아올 말이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뒤돌아 멀어져 갔다.

그 가녀린 어깨를 보며 민구는 생각했다.

이제 더 볼 일 없다. 이 정도면 된 거라고…….

“오빠, 오빠는 근데 저년이 왜 그렇게 싫어? 응? 말 좀 해줘, 응? 난 그 얘기 너무 듣고 싶다.”

트레일러에 올라서도 초희는 계속 바짝 달라붙어서 테라에 관한 험담을 듣고 싶어 했다. 민구가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막무가내다.

귀찮아진 민구는 그녀를 내버려 두고 앞쪽으로 좌석을 옮겼다. 그리고 따라오면 혼난다는 의미를 담아 지그시 노려보는 것으로 그녀가 제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도록 만들었다.

암만 미우니 고우니 해도 자기 식구라서, 여러 사람들 눈이 있는 데에서까지 쥐 잡듯 하고 싶지는 않다.

20여 명이 탑승하고 나니 앞쪽에서 견인하는 장갑차가 서서히 출발했고,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듬성듬성 찬 트레일러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청담대교를 타고 강을 건너는 것이 건대까지 이르는 최단 거리겠지만, 좀비들의 유입을 막기 위해 탄천을 잇는 모든 다리를 폐쇄했기 때문에 모든 장갑 트레일러는 잠실대교 쪽으로 우회하여 이동했다.

쉘터를 벗어난 지 10분가량이 지나고 슬슬 단조로운 덜컹거림에 익숙해질 무렵, 민구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계속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시선의 주인공은 트레일러의 앞쪽 끝에 앉은 두 군인 중 하나였다.

동글동글하고 귀염상이 있는 밤톨 같은 놈이다. 밤톨은 민구와 눈이 마주친 뒤에도 계속 빙글거리는 얼굴로 빤히 그를 쳐다본다.

초희의 짧은 치마에 꽂혀서 그 허벅지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놈의 동료와 너무 대조적이었다.

뭐지, 이 새끼?

의문이 들려고 할 때, 밤톨이 물었다.

“형님, 저 기억하십니까?”

잠시 생각해 보다가 민구는 고개를 저었다. 워낙 평범한 얼굴이기도 하지만, 인연이 얽혔던 기억이 없다. 밤톨은 수긍하는 표정으로 웃었다.

“하하, 그럴 것 같기는 했습니다. 그날 말입니다, 그…… 왜 형님이 처음 우리 쉘터에 오신 날이요. 지하철에서 걸어 나오셔가지고 철책 앞에서 군인들 만난 건 기억하시죠? 이것 좀 열어보라고 하시고, 왜 지하철 입구에다가 출입문을 안 만들었냐고도 하셨고……. 그러다가 좀비들이 뛰어오니까 안에 있던 군인들이 형님 보고 막 소리 질렀잖습니까, 도망가라고.”

민구가 머리를 끄덕이자 밤톨은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도망가라고 소리 지르던 군인이 저였습니다. 제가 그날 외곽 철책 담당이었거든요. 근데 여기에서 또 뵙네요.”

아, 그랬나…….

기억을 되짚어봐도 잘 모르겠다. 용건이 없는 남자의 얼굴을 기억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밤톨은 신이 나서 계속 말을 했다.

“그날 형님이 가방에서 칼 꺼내고 그다음에 좀비들하고 싸우신 거, 정말 멋있었습니다. 검도 선수신가 봐요? 아니다, 그런 칼은 우슈인가? 진짜…… 그런 게 가능하다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우와, 혼자서 그 많은 놈들을…… 제 눈으로 본 건데도 믿어지지가 않더라고요. 휙― 휙― 캬!”

밤톨이 한 손으로 작게 칼 휘두르는 시늉까지 해가며 감탄을 한다. 민간인 같은 말투도 그렇고, 어딘가 군대 간 막내들 생각이 나서 민구도 피식 미소를 지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것도 누가 봐도 불량해 보이는 자신의 이 얼굴을 보면서 형님, 형님 해가며 말을 거는 밤톨의 어설픈 추리 능력과 붙임성이 싫지 않았다. 한창 신이 나서 칼 쓰는 시늉을 하던 밤톨이 물었다.

“근데 결국 칼은 못 돌려받으셨나 보네요.”

아까 한창 실랑이를 벌일 때 이 녀석도 아마 그 뒤에 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나 보다. 민구는 그렇다고 했다.

“음, 안 주더군. 다른 사람들이 위협을 받아서 곤란하다고.”

“큭, 사실 그렇기는 하죠, 그거는. 그렇게 큰 칼을 보고 겁이 안 날 사람이 있겠습니까? 저도 처음에는 제가 뭘 잘못 본 줄 알았거든요. 가방에서 이따만 한 칼이 나오니. 큭큭.”

민구와 밤톨은 서로 마주 보고 훗, 웃었다.

“어? 어? 왜 속도를 줄여? 이거, 고장 난 거 아니야?”

바람구멍에 매달려 바깥을 보고 있던 구경꾼들이 당황한 목소리로 떠들어 댄다. 다른 민간인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커지기 전에 얼른 밤톨이 끼어들어 진정시켰다.

“걱정하지 마십쇼. 원래 그런 겁니다. 원래 구간에 따라서 잠시 멈춰 섰다가 가고 그럽니다.”

“그럴 리가 있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냥 휭, 밟으면 몇 분 걸리지도 않을 거리인데?”

“평상시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평상시가 아니잖습니까? 위에 헬기 소리 들리십니까? 저 헬기가 하늘에서 미리 보고 경로 인근에 좀비들이 움직이고 있으면 무전으로 일러줍니다. 그럼 이렇게 잠시 섰다가 그놈들 지나가고 나면 다시 출발하는 겁니다.”

“조, 좀비? 그럼 근처에 좀비 떼가 있다는 말이잖아? 그런데 이렇게 멈춰 서면 더 위험해지는 거 아니에요?”

여자들이 패닉을 일으키려 하자 밤톨이 빙글거리며 달랬다.

“어머니, 그리고 누님들, 좀비들 지나쳐 가는 데는 여기서 몇백 미터나 떨어진 곳입니다. 헬리콥터에서 지시하는 대로만 따르면 쓸데없는 교전 안 하고도 조용히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거요.”

밤톨은 전투화 뒤축으로 컨테이너의 벽을 퉁퉁, 걷어찼다.

“이거, 엄청 튼튼한 겁니다. 좀비들이 못 뜯어 먹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 그런가…….

민간인들은 조금 납득한 얼굴로 옆의 사람들과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중년 사내 하나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옌장! 좀비가 싸돌아다니면 그거를 보이는 족족 쏴 죽여야지! 언제까지 자꾸 그렇게 도망만 칠 거야? 그러니까 이게 시간이 가도 해결이 안 되지! 좀비가 지나가 줄 때까지 기다렸다가 몰래 살살 피해 간다고? 상전이네, 상전. 왜, 아예 좀비님들이라고 부르지? 대한민국 국군의 기강이 완전 바닥이구만. 빠져도 너무 빠졌어. 내가 군 생활할 때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인데.”

하~! 어처구니가 없어진 밤톨과 그 동료는 서로 잠시 얼굴을 마주 보고 웃었다.

빠졌다고? 지난 보름 동안 일인당 평균 육백 발을 넘게 사격을 했는데! 잠실 경계 근무를 맡은 3,000명 중에 50명이 넘게 전사를 했는데! 빠졌다고?

6.25 때 이래로 가장 빡세게 군 생활을 하고 있건만, 저런 말을 들으니 섭섭하기도 하고 헛웃음밖에는 안 난다.

물론 처음 쉘터 간 이동을 할 때에는 그들 역시 저 중년 남자의 말처럼 그냥 막무가내로 직진했었다.

뭐, 그땐 워낙 아는 게 없었으니까. 그리고 몇 차례의 생지옥 같은 전투와 좀비 시체의 산, 총격을 받아 박살이 난 철책을 경험한 뒤, 군에서는 수송의 원칙을 바꿨다.

시간이 걸려도 최대한 조우를 회피한다. 그렇게 해서 소요되는 시간이 교전을 하고 철책을 다시 세우는 데 드는 시간이나 비용보다 훨씬 적다. 게다가 안전하기도 하다.

***

그저 막연히 산길을 따라 북쪽으로만 걷기를 이틀째.

진우의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총을 두 자루나 메고 다녀야 하니까 그 무게가 조금 부담스럽기는 해도 그만큼 든든하고, 어젯밤 바람막이 점퍼를 입고 잠을 잘 수 있던 덕에 새벽에도 오한이 들지 않았다.

아직은 먹을 것이 배낭 안에 꽤 남아 있고 날씨도 이만하면 화창하다. 산속 오솔길을 걷는 거라 누군가에게 방해받을 일도 없다.

또 언젠가 한적한 계곡을 만나서 목욕을 하게 된다면 갈아입을 새 속옷도 가지고 있다. 아, 오늘은 아직까지 좀비도 안 만났지 참.

“근데 씨발, 왜 이렇게 서글프냐?”

미쳐 버리지 않기 위해 자신이 행복함을 느껴야 하는 이유들을 마음속으로 나열하던 진우는 혼자 중얼거리고는 씁쓸히 웃었다.

꼬르륵, 뱃속에서 음식을 달라는 신호를 보낸다. 새로 장만한 시계를 보니 점심을 먹어도 될 만큼 시간이 지났다.

배낭 속에서 양갱을 꺼내 조금씩 천천히 베어 먹으며 걸었다. 해와 그림자로 방향을 분간할 수 있는 시간 동안 부지런히 걸어둬야 한다.

“우와, 저런 데가 있네…….”

굽이를 돌았을 때, 나무 사이로 나타난 녹색 구릉과 그 건너편의 개울을 보며 진우는 감탄했다.

잔디밭도 좋지만, 개울이 마실 수 있는 물처럼 보인다. 불어난 흙탕물이 아니라 꽤나 맑은 물이 아주 잔잔하게 흐르고 있다.

“물을 채울까?”

진우는 배낭에서 등산용 물병을 꺼내 흔들어봤다. 절반 정도 차 있던 놈을 꿀꺽꿀꺽, 마시며 구릉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물은 보충할 수 있을 때 채워두지 않으면 정말 애를 먹게 된다.

“엇? 이거 봐라? 이런 걸 해놨었네? 밀렵꾼들인가?”

나무를 잡고 비탈길을 살살 미끄러져 내려가던 진우가 발을 멈추고 방향을 바꾸었다. 아주 허술한 올무가 길목을 막고 있다.

야생동물이라면 아무 생각 없이 그걸 밟았다가 발목을 잡혔을 거다. 그리고 발버둥을 치다가 끝내는 물이 끓는 솥 속으로 들어가야 했을 것이고. 뭐, 저걸 만든 놈들도 이제는 다 좀비가 되어버렸을 테지만…….

그냥 사 먹을 것이지, 고기 얼마나 한다고. 사람들 참…….

진우는 도리질을 치며 비탈 아래 자갈밭으로 내려섰다.

“우와, 시원해~”

손바닥으로 물을 떠올려서 냄새를 맡아보고 얼굴을 적셨다. 그 청량함이란……. 정신이 다 깨끗해지는 것 같아 진우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물을 끼얹었다.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릴 시기에 긴팔 군복에 전술 조끼, 배낭, 두 자루의 총 멜빵까지 겹쳐 메고 다니던 그에게 이렇게 차가운 물은 축복이나 다름없다.

목덜미와 팔뚝을 씻으며 등산용 물병에 물을 담던 진우는 충동적으로 배낭을 벗어 바닥에 두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런 날 물가에서 잠시 쉰다고 해도 그리 문제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발을 씻고 싶었다.

지난…… 아, 이제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대체 언제가 마지막으로 발에 비누칠을 했던 때인지. 하여간 동료들을 모두 잃은 그날 이후, 그는 발을 씻어본 적이 없다.

“그렇게 하고도 용케 아무 탈이 안 났네. 야생에서 살도록 태어난 몸일까?”

진우는 대견하게 견뎌내고 있는 자신의 발에게 칭찬을 해주며 전투화의 끈을 풀었다. 그동안 고생했던 발에게 이 시원한 물에 담그는 보상을 해주기 위해서다.

흠흠흠흠흠~ 콧노래를 부르며 전투화를 벗고, 찐득하게 달라붙은 양말을 벗겨내자 굳은살과 물집이 적절히 섞인 발이 모습을 드러낸다. 정말이지, 지독한 고린내는 덤이었다.

킁킁.

“우와!”

자신의 발을 코에 가져다 대본 진우는 기겁을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짜릿하다. 살아오면서 맡아본 최악의 발 냄새다.

뭐, 씻으면 되는 거지……. 진우는 빙글거리며 두 발을 얕은 물속에 담갔다.

하아…… 발가락 끝이 물에 닿자마자 신음과 한숨이 섞여 터져 나온다. 이렇게 시원할 수 있다니. 복숭아뼈까지 푸욱 물속에 담그고 먼 산을 보면서 양갱을 씹다가 이따금씩 손바닥으로 물을 떠서 마셨다.

좋다. 신선놀음이라는 게 별게 아니구나 싶을 만큼 좋다. 발가락을 까딱거릴 때마다 새로운 감촉이 되살아난다. 안전한 것 같은데, 아예 여기서 몸까지 좀 씻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망설이면서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응?”

상류 쪽에서 뭔가 움직이는 소리랄까, 기척을 느낀 진우는 개울에서 급히 발을 빼고 조심스레 뒤로 물러났다. 달궈진 자갈을 밟고 몇 걸음을 떼자 발바닥의 물기는 금세 말라 버렸다.

바스락, 저 멀리에서 풀숲이 흔들린다.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진우는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새로 획득한 K―2를 고쳐 잡았다.

“그냥 물 마시러 온 노루여라. 아니면 멧돼지거나…….”

진우는 조그만 목소리로 빌었다. 좀비도 지겹고, 군인들도 지겹다. 이제는 머리통에 구멍 뚫는 것도, 죄 없이 도망 다니는 것도 그만하고 싶다.

바스락, 풀숲이 더 흔들리고 기척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루도, 멧돼지도 아니었다.

“여자?”

진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좀비라고 하기에는 너무 멀끔한 몰골의, 소매 없는 헐렁한 7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천천히 개울가로 다가온다.

꽤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삐져나온 내장도 보이지 않고 팔다리의 피부도 다 온전하다. 고개도 똑바로 서 있고, 무엇보다도 눈동자가 까맣다.

뭐지? 이런 산속에 여자라고? 그것도 혼자? 금욕 생활을 너무 오래해서 헛것을 보나? 아니면 조금 전에 마신 물에 독버섯이라도 잠겨 있었던 걸까?

자신의 감각을 믿을 수 없어진 진우는 볼을 살짝 꼬집어봤다. 약한 통증이 느껴지는 걸 보니 환각 상태는 아니다.

하지만 아직 그녀가 사람이라고 단정 짓기는 아직 이르다.

좀비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면 시체의 상태가 저만큼 온전할 수도 있으니까. 저 짙은 색의 원피스가 실은 피에 흠뻑 젖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맨발이라는 게 아무래도 수상하다.

말을 하거나 노래를 불러준다면 확실해질 텐데, 여자는 그저 느릿느릿 개울을 따라 걸어오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 거리가 꽤나 남아 있지만, 진우는 어떻게 해야 할는지 몰라 식은땀을 흘렸다.

만약 그녀가 좀비라면 총소리를 내서 근처의 다른 놈들까지 불러들이는 것보다 자신이 먼저 빠지는 편이 나을 것이다. 진우는 서둘러 양말을 신고 전투화에 발을 밀어 넣었다.

그런데 만약에 그녀가 사람이라면? 그리고 지금의 자신처럼 그녀도 혼자만 살아남은 거라면? 그녀 역시 믿을 만한 일행을 간절히 기다렸던 거라면?

우와~ 찰나의 순간 동안 생각만 해도 아찔한 수천 가지 상상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함께 길을 걷고, 함께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고, 함께 잠을…….

여자가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든 채 좌우를 둘러본다. 저건 좀비가 자주 하는 행동이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멍 때리기. 저러다가 갑자기 ‘끄롸아악―’ 하고 포효하는 놈들을 많이 봤다.

여자는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그런 후, 좀비가 하지 않는 행동을 한다. 등 뒤로 손을 돌려 지퍼를 내린 뒤, 원피스를 바닥에 벗어놓았다.

“헉―!”

계곡물에 맨발을 담갔을 때보다 더 큰 신음이 진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체가 된 여자가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 손으로 물을 떠 몸에 끼얹고 있다. 자신의 눈앞에서……. 속옷 같은 건 입지도 않았다.

후우~ 후우~ 진우의 호흡은 엄청나게 거칠어졌다. 여자다. 살아 있는, 게다가 발가벗은 여자가 바로 2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목욕을 하고 있다.

지금 당장 뛰어나가 말을 걸고 싶은 충동을 꾹 눌러 참으며, 진우는 여자가 목욕을 마치고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물론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계속 주시하면서. 그게 점잖은 행동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고정된 고개와 눈동자는 도무지 양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좋은 핑계도 하나 있다. 지금 저 여자는 목욕을 하고 싶은 거야.

어쩌면 보름 만에 처음으로 물에 들어가는 것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그녀를 방해하지 말고 혹시 나타날지도 모르는 좀비들로부터 지켜주자…… 뭐,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 양심을 달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된다.

“후우우~”

물에서 나온 여자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몸의 물기를 몇 번 털어낸 후, 돌 위에 벗어두었던 원피스를 집어 다시 걸친다. 여자가 지퍼를 올릴 때까지 기다린 뒤, 진우는 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저기요.”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 작게 불렀는데도 여자는 기겁을 하며 가슴을 움켜쥐고 뒤를 돌아보았다. 진우는 아주 천천히 일어서서 바위 옆으로 걸어 나갔다.

“놀라지 마세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이에요.”

“헉! 구, 군인이에요?”

“네, 맞습니다. 대한민국 국군입니다.”

진우는 아주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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