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광기와 폭력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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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광기와 폭력 (5)
2022.03.10.
“앞쪽에서는 좀비들이 달려오고 있고, 뒤쪽은 군인들과 철책으로 막혀 있는데 그 수감자들은 왜 그런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나? 박 소위가 한 사람을 제압하자마자 투항한 걸 보면 강한 동기도 없었던 것 같고 말이야. 그 부분이 제대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 나뿐인가?”
문 대위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냉정하게 묻지만, 박 소위는 벌써 억울해서 감정이 폭발하려 한다.
왜? 왜? 대체 왜 부하 장교가 아니라 죄수 놈들 편을 드시는 겁니까!
그의 벌어진 입은 그 말을 외치고 싶어 미치겠는 모양이다. 그 고지식한 반응을 도저히 더 보고 있기가 불편해서 강 소위는 한 수 거들기로 했다.
“중대장님, 박 소위가 그 수감자들을 제압할 때, 저도 보고 있었습니다. 무장했다고는 하지만 선두에 서서 선동하는 주범만이 이상할 정도로 흥분해 있었고, 나머지 수감자들은 마지못해 따르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사망한 주범은 박 소위가 두 차례나 경고를 하는 동안에도 오히려 욕설을 퍼부으며 도끼를 쥔 채 뛰어들었고, 박 소위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때, 개머리판에 맞아 쓰러지지 않았더라면 누군가에게 치명적인 상해를 가한 다음에야 끝을 봤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끼어든 강 소위의 말을 듣고 문 대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1분쯤 침묵 속에서 두 부하 장교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그는 결론을 내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눈이 돌아갔었나 보군. 있을 수 있는 일이지.”
“그렇습니다.”
강 소위는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박 소위도 아직 꾹 참고 있는 말이 많은지 숨을 씩씩댔다.
“알았다. 다들 피곤할 테니 그 이야기는 그만하기로 하자고. 앞으로도 너희들이 서로 잘 협조하고 도와라. 눈 돌아가는 사람 없도록 챙기는 것도 잊지 말고. 이만 돌아가서 쉬어.”
박 소위는 경례를 붙이고 돌아 나와 장교 숙소로 이동할 때까지도 가슴을 들썩일 만큼 흥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던 강 소위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어이, 박 소위. 나한테 한 번 신세진 거야. 그거는 알고 있지?”
“음? 아아, 그래, 고맙다. 근데 중대장님이 네가 한 그 말, 믿으셨을까?”
“참나, 우리 중대장님이 무슨 어린애냐, 아니면 바보냐? 그걸 믿으실 리가 있어?”
“응? 그럼 왜…….”
“그거야 당연히 문 대위님이 참아주신 거지. 동료끼리 돕겠다고 내가 나선 게 플러스 2점! 네가 사고 친 거가 마이너스 2점! 똔똔 났는데 굳이 처벌을 해봐야 죽은 사람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잘해서 그걸 만회하라고 하시는 거잖아. 기억해 봐. ‘눈이 돌아갔었나 보군’이라고만 하셨어. ‘누가’라는 말이 없다고. 박 소위, 너 들으라고 하신 말씀인데, 정작 너는 못 알아들은 것 같아서 내가 이렇게 다시 설명해 주는 거야. 또 사고 치지 말라는 의미로.”
“가, 강 소위, 네가 그 상황을 못 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거야. 그 새끼가 톱을 들고 서 있었다고! 성수 1쉘터에서도 바로 그런 새끼들이…….”
박 소위가 다른 쉘터 수감자의 이야기를 다시 거론하며 언성을 높이자, 강 소위도 잡았던 문손잡이를 놓고 이마를 찌푸렸다.
“다른 데서 어떤 새끼가 어떤 사고를 쳤는지, 그런 건 나는 몰라! 관심도 없고! 내가 아는 걸 이야기해 줄게. 우리 쉘터에서 작업 나가는 수감자 중에 절반은 톱이나 도끼를 들어. 왜? 나무를 잘라야 하니까! 그리고 오늘 막 잘린 나무가 있어! 거기에 깔린 사람들도 있었고! 너도 아까 그쪽으로 겨냥을 했으니 봤겠지. 걔들이 자기 동료 깔렸다고 소리소리 질렀을 텐데, 우리는 못 들었어. 우리는 좀비 때문에 존나게 무서웠거든! 총소리도 계속 났고! 그러다가 네가 걔들을 본 거야. 알겠어? 내 말이 안 믿기면 네가 한 번 오늘 일을 복기를 해봐. 그러면 알게 될 거야. 걔가 정말로 돌아서 박 소위, 너를 어떻게 해보려고 연장 들고 설친 건지, 아니면 그 연장으로 깔린 사람들을 어떻게 빼내려고 했던 건지……. 운이 없었다는 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네가 혼자 암만 고집을 부려봐야 사실관계는 안 바뀌어. 계속 그런 식이면 나도 네가 싼 똥 못 치워준다!”
아픈 말을 잔뜩 쏟아낸 강 소위는 항변할 틈도 주지 않고 쾅! 문을 닫으며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복도에 혼자 남겨진 박 소위는 그 상황이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를 더 화나게 하는 것은 저 약아 빠진 강 소위의 말들이 대부분 옳은 이야기처럼 들린다는 사실이었다.
너무 늦게 보기는 했지만, 그도 나무에 깔린 수감자의 시체를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게다가 돌이켜 보면 그 작업반장이 그런 비슷한 말을 했던 것도 같다.
억울하다고 했던가? 그리고 그다음에 뭐라고 했더라…….
그게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자신은 흥분해 있었다. 그리고 겁에 질려 있었다. 좀비 때문에, 그리고 그 염병할 동기 새끼에게서 전해 들은 다른 쉘터의 사고 이야기 때문에…….
씨발, 애먼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두 번, 아니, 세 번 죽인 거나 마찬가지다. 대갈통을 후려쳐서 한 번, 좀비에게 물리게 해서 두 번, 그리고 자신이 직접 사살하는 것으로 세 번…… 대체 무슨 철천지원수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 슬프고 우울해진다.
아니, 아니, 안 돼…….
박 소위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차라리 분통을 터뜨리고 누군가를 원망하는 편이 훨씬 속이 편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 건지, 누구의 죄가 커져야 자신의 죄가 덜어지는 것인지 그걸 모르겠다.
박 소위는 얼굴을 쥐어뜯다가 밖으로 뛰어나갔다.
사람의 시선이 싫어서 아직 정비가 끝나지 않은 건너편 건물까지 건너간 박 소위는 거기에서조차 컴컴한 구석을 찾아 어둠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여기라면 아무도 없다. 나를 심판하고 원망하고 나무라는 새끼가 없다.
나를 심판한다고? 왜 씨발! 왜 죄수 새끼들이 아니고, 나를!
담배를 뻑뻑 피우며 계속 욕설을 늘어놓아도, 자기 합리화를 해봐도 마음은 편해지지 않는다.
강 소위와 문 대위의 책망이 뇌를 직접 쑤시고 들어와 전해지는 것 같다. 개머리판으로 후려치기 직전 망막에 새겨진 그 죄수의 얼굴이 뱃속 어딘가에 있는 죄책감을 후벼 판다.
하아~ 씨발, 하아~ 씨발.
박 소위는 벽을 걷어차고 계속해서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박 소위님?”
귀에 익은 혀 짧은 소리에 박 소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가희다.
왜 이 시간에 혼자서 이렇게 후미진 곳에?
순간적으로 의문이 들었지만, 그보다는 지금의 자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부끄러움이 더 컸다.
“아후, 세상에……. 얼마나 여기 계셨던 거예요? 이 비를 맞으면서……. 다 젖으셨잖아요. 안 추우세요?”
“아…… 가희 씨, 아…… 지금 제가…… 아니, 그보다 여기에 어쩐 일로?”
당황한 박 소위가 말을 더듬거리자 가희는 바짝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으며 소곤거렸다.
“이건요, 정말 기적 같은 일인데요, 가희가 깜빡 졸았었거든요. 조금 있다가 박 소위님 방에 놀러 가야지~ 하는 생각하면서요. 그런데 꿈을 꿨어요. 꿈속에서 바로 여기, 이 자리에 소위님이 비를 맞고 계시는 거예요. 너무 슬픈 표정으로……. 가희도 같이 울다가 잠에서 깼는데, 근데 그 꿈이 너무 생생한 거예요. 그래서 무섭지만 나와봤어요. 그랬더니 세상에, 정말 여기 박 소위님이 계시지 뭐예요? 가희 꿈이 맞았던 거야. 어떡해요. 가희랑 소위님은 하늘이 맺은 인연인가 봐요. 그래서 이렇게 만나게 된 거겠죠.”
가희가 몸을 꽈대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나불댄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다.
박 소위의 동향을 계속 감시하던 만배파 조직원이 육만배에게 박 소위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는 보고를 했고, 육만배는 재빨리 가희를 이곳으로 보냈다. 녹여놓으라는 당부와 함께.
“제, 제가 꿈에 나왔다고요? 그, 그런 일이……. 참 이상하네요.”
박 소위에게도 허무맹랑하게 들리긴 했지만, 믿고 싶다는 욕망이 더 우세하게 작용했다. 이 젊고 예쁜 여자 연예인과 운명의 짝이라는 걸 인정하면 자신이 뭔가 더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 같다.
게다가 이 여자, 이 가희라는 여자의 모습이 그의 숨을 가쁘게 만든다.
비에 젖어 몸에 밀착된, 흰 티셔츠를 통해 비쳐 보이는 그녀의 브래지어와 날씬한 라인이, 젖은 머리카락과 입술이, 뭔가를 갈구하는 듯한 눈빛이…… 욕망을 끓어오르도록 한다.
하지만…… 더 이상 사고를 칠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문 대위가 자신을 어떤 눈으로 쳐다볼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팽팽히 부풀어 올랐던 그의 욕망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죽은 죄수의 얼굴과 죄수를 감싸던 문 대위의 얼굴, 그리고 죄수들을 조심하라던 동기 놈의 얼굴이 모두 교차하며 그의 감정을 부정적인 기운으로 가득 채웠다.
“제가…… 오늘 사고를 쳤습니다. 죄수 하나가 저 때문에…… 죽었습니다. 하아…… 그게 괴로워서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어머, 하지만 죄수는 나쁜 사람이잖아요. 가희 생각에 그건 죄가 안 될 것 같아요. 소위님은 죄 없어요. 이렇게 착한 분인데.”
“아니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문 대위님 말씀이…… 그리고 강 소위도 비슷한 말을 했어요. 제가 실수한 거라고.”
“가희는 그런 거 몰라요. 그냥 소위님 속상하게 하는 사람들은 다 싫어요.”
가희는 점점 더 바짝 몸을 밀착시키며 속삭였다. 그 숨결이 귀를 간질이고 탱글한 가슴이 느껴지자 정신이 다 아득해지는 것 같다.
“가, 가희 씨, 이, 이렇게 있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다, 다른 사람들의 눈이……. 저 때문에 무슨 소문이라도 나면…….”
박 소위가 황급하게 자리를 피하려 하자 가희가 그의 손을 붙잡는다. 긴장한 박 소위가 멍해 있는 사이, 가희는 박 소위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얇은 옷 사이로 느껴지는 이 감촉!
아아, 너무 아찔해서 박 소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목 뒤로 두 팔을 둘러 당기며 가희가 말했다.
“그래요, 박 소위님 말이 맞아요. 가희도 여기 안 있을래요. 우리 같이 박 소위님 방으로 가요. 가서 좀 더 솔직해지고 싶어요.”
“저, 저는…… 그, 그런 일은 금지한다고 문 대위님이…….”
“가희는 지금 박 소위님밖에 안 보여요. 문 대위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요. 방으로 가요. 박 소위님도 가희 생각만 나도록 해줄게요. 슬픈 것도, 화나는 것도 다 잊어버리고 가희 생각만 남도록 만들어줄게요. 아주우~ 기분이 좋게, 행복하게 해줄게요. 봐요, 벌써 이렇게…….”
가희의 손이 박 소위의 바지춤을 훑고 지나자 그의 절제가 녹아내려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으으으~ 박 소위는 미친 사람처럼 가희의 입술을 빨고, 두 손으로 그녀의 온몸을 수색하듯 더듬었다.
그녀를 탐하고 싶다는 것 외의 모든 생각이 그의 뇌에서 깨끗이 지워져 버렸다. 의무도, 명예도, 부끄러움도 사라지고, 그 자리를 빨갛고 뜨거운 욕망이 채웠다.
박 소위는 가희를 바닥에 눕히고 지퍼를 내렸다. 그가 가희의 노예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
아침이 밝았을 때, 잠실 쉘터는 평소보다 조금 더 소란스러웠다.
여섯 시가 되자마자 울리기 시작한 장내 확성기는 10시 30분에 성수 1쉘터행 장갑 트레일러가, 11시 30분에는 건대 쉘터행 장갑 트레일러가 출발한다는 내용의 방송을 몇 시간 동안이나 반복해서 틀어 댔다.
미리 이동 의사를 밝혀놓았던 신청자들은 졸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자신의 짐을 챙기고, 화장실을 가고, 여느 때보다 일찍 배식을 시작해 한산한 식당에서 밥을 챙겨먹었다. 초희와 민구도 그런 사람들 중 한 무리였다.
“근데 강 실장 오빠, 의외로 짐 싼 사람이 별로 없다, 그치? 나는 이것보다는 훨씬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번에 육 회장님이랑 우리 식구 다 움직일 때는 꽤 바글바글했거든.”
3분의 1쯤 남은 오징어 국을 수저로 휘적거리며 초희가 재잘거린다. 초희는 무슨 나들이라도 가는 것처럼 짧은 치마까지 골라 입었다.
어제저녁부터 군인들 열댓 명으로부터 이별 선물 비슷한 걸 받은 터라 그녀의 기분은 좀 들떠 있다.
과자를 받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팬이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어서 그게 어지간히 좋은 모양이다. 민구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겠지. 갈 마음이 있던 사람들은 다 그때 그 첫차 타고 갔을 테니까.”
“그런가 봐. 아, 오빠. 근데 좀 웃긴 게 뭔 줄 알아? 여기 사실 별로 아쉬울 것도 없는데, 막상 떠난다고 하니까 괜히 막 그리워질 것 같은 거야. 아련하고…… 눈물도 좀 날 것 같고. 이상해. 정들었나 봐. 오빠도 그런 기분 쪼금 들었지? 그쵸? 내 말 맞지?”
“그런 거 없고, 다 먹었으면 일어나. 짐 찾으러 가야 하니까.”
‘칫, 뭐야. 낭만도 존나 없어’라고 깡알거리는 초희를 데리고 식당을 나선 민구는 그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지나온 1층의 경기장 외부로 향했다. 평소 민간인들의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하던 지역이지만, 오늘은 장갑 트레일러 탑승객들을 위해 개방되어 있었다.
“창고 L5, 창고 L5…….”
철책을 따라 경기장 외곽을 걸으며 민구는 어제저녁 대민 지원 센터에서 전해 들은 창고의 이름을 되뇌었다.
과거에 음식점이나 기념품 판매점이었던 공간들이 이제는 창고로 개조되어 있고, 셔터가 내려진 그 창고들 내부에는 여러 가지 보급품들이 가득하다.
원래 편의점이었던 곳에 세워진 L5의 앞에는 몇 명인가 짐을 찾아가려는 민간인들이 줄 서 있었다. 민구는 초희와 함께 끝에 가서 섰고, 20여 분가량을 기다리자 그의 순서가 됐다.
“짐 찾으러 오셨습니까?”
물어보는 병사를 포함해 경비병 전원은 긴 가방을 내려놓는 민구보다 그 뒤에 서 있는 초희에게 더 관심이 많아 보인다.
그 시선을 눈치챈 초희가 가볍게 어깨를 까딱거리며 인사를 건네주자, 병사들의 얼굴에는 금방 발그레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민구는 자신의 사물함 열쇠를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음, 이걸 반납하면 여기 들어올 때 보관시킨 내 물건을 찾아갈 수 있다던데.”
“네, 잠시 기다리십쇼. 이게 시간이 좀 걸립니다. 전산이 아니고 제가 선반에서 직접 찾는 방식이라…….”
빙글거리는 낯으로 사물함 열쇠의 번호를 확인하며 창고 내부로 들어간 병사는 몇 분 뒤, 경직된 표정을 하고 돌아왔다.
“저기 확인차 다시 한 번 여쭤보겠습니다……. 선생님, 그…… 찾으시는 물건이라는 게 혹시…… 도검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오, 제대로 보관해 뒀군.
민구는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전부 다 해서 세 점. 마세티 하나, 쿠크리 하나, 울트라마린 나이프 하나.”
“아니, 그게…… 선생님, 그…… 하하하, 참내…….”
어처구니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리던 병사가 급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건 가져가실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민간인 수용소가 그런 걸 가지고 들어오도록 허락하겠습니까?”
“하지만 그건 내 개인 물건이잖소? 일단 가져갔다가 옮겨간 데에서도 반입이 안 된다고 하면 그때는 거기에 맡기면 되는 거고.”
“선생님이 만약에 혼자 걸어서 건대 쉘터까지 가시는 거라면 그러셔도 됩니다만, 저희가 제공하는 이동 수단을 이용하실 거잖습니까? 그것도 다른 분들이랑 같이. 입장을 바꿔서 생각을 좀 해보십쇼. 생판 모르는 어떤 분이 날 길이가 팔뚝보다 긴 칼을 가지고 선생님 옆자리에 타면 그 기분이 어떻겠나. 그리고 딱 봐도 불법 도검류인데.”
“괴물들이 법 따져 가면서 덤벼들지는 않지. 그리고 정 신경이 쓰이면 군인 아저씨들이 따로 가져가도 나는 별로 상관없는데…… 중요한 건 여기 버려두고 가기 싫다는 거요. 내가 내 돈 주고 산 걸 버려라 마라 할 권리는 없지 않소?”
“무슨 말씀을 어떻게 하셔도 제 대답은 안 바뀝니다. 이건 못 가져가십니다. 아니, 그리고 대체 뭐하시던 분이기에 그런 걸 몇 개씩이나……. 후우~ 뭐, 그건 제가 관여할 바는 아닙니다만, 어쨌든 안 돼요. 안 됩니다! 칼을 가지고 이동하신 전례가 없어요.”
군인이 강경하게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온갖 예쁜 척을 다 하고 있던 초희가 끼어들어 한마디를 거들었다.
“근데요, 군인 오빠. 내가 태클 거는 건 아니지만, 저번에 보니까 태술이 아저씨는 칼 잔뜩 찾아가지고 갔거든요. 이렇게 두루마리에다가 한 열댓 자루? 완전 많았어요. 왜 그거는 되고, 이거는 안 돼요?”
태술이 아저씨? 그게 누구야? 칼을 잔뜩 가지고 간 사람이 있다고?
병사들은 자기들끼리 웅성거린다.
아, 아, 그 사람…….
정보를 확인한 군인이 대답을 해준다.
“아, 초희 씨가 말씀하시는 분이 누군지 알겠네요. 전에 건대로 이동하신 요리사분 말씀이시죠? 그분은 요리사니까 칼이 자기 작업 연장이잖습니까. 연세도 꽤 되셨고.”
“우리 강 실장 오빠한테도 그거 작업 연장이에…… 아우, 오빠. 왜 말을 못 하게 당겨! 내가 도와주려고 하는데!”
민구는 초희를 뒤로 당겨 치우고 다시 한 번 설득을 해봤다.
칼이 있어야 만일의 사태에 내 힘으로 내 몸을 지킬 수 있다는 논리였는데, 별로 먹혀들지 않는다. 이 군인 놈도, 그 옆에서 고개를 젓는 놈들도 전부 다 어지간히 고집불통이다.
하지만 신기한 점은 그렇게 자신의 말을 반대하고 뜻을 막아서는 이 어린 군인 놈들이 별로 밉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괴물들의 대규모 습격 때, 이 녀석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모습을 보고 난 이후의 변화랄까? 하여튼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마음속에서 뭔가가 조금은 바뀌었다.
논쟁이 길어지자 지나던 병사들도 멈춰 서서 멍하니 구경을 하고 있다.
짧은 치마의 미녀, 칼자국 난 사내.
충분히 호기심을 자극할 만하다.
그들이 말다툼을 하는 동안 몇 사람인가가 와서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보관시켜 뒀던 물건들을 찾아갔다. 물론 칼은 아니다. 한쪽 구석으로 옮겨가서 민구와 계속 흥정을 하던 병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선생님, 안 됩니다. 아무리 길게 이야기를 하셔도 결론은 똑같아요. 절대 못 드려요. 계속 말씀을 하시는 건 상관없는데,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겁니다. 물론 저희가 임의로 저 물건들을 폐기 처분하지도 않을 겁니다. 세상이 좋아지면, 그때 오셔서 찾아가세요. 그리고요…… 이러시다가 건대 가시는 장갑 트레일러 놓치셔도 전 그 책임은 못 집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부터 확성기에서는 통로 앞으로 와서 줄을 서라는 안내가 계속 울려 퍼지는 중이다. 뒤에서 구경하던 병사들도, 다른 민간인들도 다 어딘가로 사라진 뒤였다.
후우~ 민구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놈들을 설득하기는 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