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멋진 신세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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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멋진 신세계 (4)
2022.03.05.
세 친구의 눈빛이 교차한다. 누나라고 하기 싫다. 지금도 저렇게 사람을 깔보는데, 거기에 호칭까지 더해지면 아예 종놈 다루듯 하고도 남을 계집애다. 호칭은 관계를 규정한다.
하지만 어쩌지? 저 바보 같은 유빈이 새끼가 이미 나이를 까버렸으니…….
그때, 보안관이 아주 유치하지만 효과적인 대응법을 생각해 냈다.
“민증 까!”
“뭐?”
태권소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효과가 있다.
“서열 정하자며? 서열 정리할 때 기본 아니냐? 민증부터 보고 얘기해야지.”
“하, 진짜 유치해서. 이 난리가 났는데 지갑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어딨어?”
“오, 지갑을 잃어버렸구나? 아쉽게 됐네. 그럼 못 믿는 거지, 뭐.”
“내 나이, 규영이가 알아. 쟤는 내 신분증도 본 적이 있고.”
태권소녀가 새로운 공격 방법을 찾아냈다. 증인으로 채택된 규영이 놈은 당연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건 뭐라고 반박해야 되지?
보안관이 망설이고 있을 때, 삼식이가 지껄였다.
“근데 지금 모텔에 남은 신입 알지? 걔가 스물넷이야. 나도 이력서에서 걔 생년월일 다 봤어. 그럼 너부터 당장 돌아가서 걔한테 오빠라고 할 거야? 그러면 우리도 누나라고 부르는 거 생각해 볼 수 있어.”
신입 오빠 나이 그렇게 많았어요?
제니가 옆에 앉은 유빈에게 소리 죽여 묻는다.
아니, 그럴 리가. 걔, 우리보다 한 살 많은데 첨 일하러 왔을 때부터 말 놓으라고 제 입으로 그랬어. 그냥 삼식이, 저 미친놈이 뻥 치는 거야.
유빈은 고개를 저으며 귀엣말로 알려줬다. 하지만 이 구라를 기반으로 한 공격이 의외로 먹혀서 태권소녀가 얼어붙었다.
그 멍청하게 생긴 놈…….
고릴라 뒤에 숨어서 계속 상스러운 말을 하던 놈에게 오빠라고 할 수는 없다. 그녀의 혼란을 읽은 삼식이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너도 싫지? 왜인 줄 알아? 네 마음속에서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안 드니까 그런 거야. 한 살, 두 살 차이? 그게 뭔데? 나이로 벼슬하던 시대는 이제 끝났어!”
삼식이는 조금 전 중2짜리에게서 배운 말을 그대로 써먹고, 보안관은 그 사실이 들통날까 봐 얼른 규영의 입을 막았다.
유치하기가 하늘을 찌를 것 같다. 틱틱거리고 있던 세 사람의 나이 전쟁이 갑자기 중지된 것은 좀비들의 포효 때문이었다.
그롸아아아―
저 멀리서 들려오는 좀비들의 울음소리에 보안관과 삼식이, 그리고 규영이는 재빨리 거리가 보이는 난간을 향해 이동했다.
아차차차, 지금 시간 12시 45분. 야, 저거…… 안쪽으로 벌써 꽤 많이 들어와 있는데, 이거 시간 어떻게 하지? 한 2분 빼고 적을래?
보안관과 삼식이는 다시 망원경과 매직펜을 들었고, 규영이는 옆에서 참견을 한다. 갑자기 끊긴 논쟁 때문에 아직 열이 다 식지 않은 태권소녀에게 유빈이 다가가며 살갑게 불렀다.
“누나~”
태권소녀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징그럽다. 노숙자 같은 외모로 느물거리며 다가오는 저 얼굴이, 저 찐득한 말투가, 게다가 셋 중에서는 제일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놈이라서…….
그녀의 반응을 바라보던 유빈이 싱긋 웃는다.
“그것 봐. 부담스럽지? 너도 아직 준비가 안 됐잖아. 저기…… 호칭 문제도 그렇고, 존댓말도 그렇고, 어차피 시간이 좀 필요할 거야. 일단 좀 더 가까워지자. 같이 살아남는 게 우선이니까.”
태권소녀를 달랜 유빈은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런 남자들의 뒷모습을 보며 빙글거리던 제니가 태권소녀의 옆구리를 툭, 치며 진심으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이제 제 말을 알겠죠, 언니? 정말로 매력적인 오빠들 맞죠?”
그 순간, 태권소녀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제니라는 아이의 웃는 얼굴은 TV에서보다 실제로 가까이에서 보는 편이 백만 배는 더 예쁘다는 것. 둘째, 자신의 새 일행들은 다들 나사가 하나쯤 빠져 있다는 것. 특히 뇌 쪽의 나사가.
“이번 건 좀 규모가 작았네.”
벌써 꼬리 부분이 상봉역을 지나친 좀비들의 행렬을 보며 보안관이 중얼거렸다. 좀비들은 이제 거꾸로 매달린 중년 사내의 시체를 스쳐 가고 있다. 자연히 세 친구의 시선도 거기에 꽂혔다.
총에 맞아 거시기가 날아간 남자……. 총! 총이 기억난 보안관이 손뼉을 치며 물었다.
“맞다! 너희 총 있었잖아? 그거 어디 뒀어?”
“이젠 총알이 없어. 그래도 필요해?”
태권소녀가 귀찮다는 듯 되물었고, 이번엔 유빈이 대답했다.
“빈총인 줄 모르는 사람 상대라면 요긴할 수도 있겠지. 너희가 우리 겁줄 때처럼.”
“너희 보니 별로 겁먹는 것 같지도 않던데. 하여튼 총은 저 골목 중간쯤에 있을 거야. 들고 있던 애가 헬리콥터 내려오는 거 보고 신이 나서 휙 던져 버리더라. 뭐, 나도 굳이 줍지 않았고. 이젠 힘든 거 다 끝났다고 생각했으니까.”
검은 헬기에게 손을 흔들고 기뻐하던 그 상황이 떠오르자 태권소녀의 미간에는 또 가느다란 주름이 생겼다. 유빈은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아까 아침 먹을 때, 우리한테 너희는 무슨 실수를 저질렀느냐고 물었잖아? 그 말을 돌려서 생각하면 여기에 있던 너희들 일행도 뭔가 실수를 했고, 그것 때문에 힘들어졌다는 뜻이잖아. 그렇지? 그 실수가 뭐였어?”
“후…… 너희는 정말 궁금한 것도 많구나. 게다가 내가 기억하기 싫은 것들만 골라서 물어보는 재주도 있고. 뭐, 어쩌겠어. 눈치 없는 놈들한테 항복했으니 내가 참는 수밖에…….”
태권소녀는 이마에 손가락을 짚고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규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그때도 나였어.”
“응? 무슨 소리야, 나였다니?”
“우리들이 실수를 한 게 아니라, 내가 문제를 일으킨 거였다고. 그제 헬리콥터를 붙잡아놓고 모텔로 아이들을 부르러 갔던 것하고 똑같이, 내 잘못 때문에 사람들이 죽었다는 말이야.”
“언니, 그건 언니 잘못이 아니라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군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물어보면 다들 일행이 어디 있는지 말할 거라고요. 저라도 당연히 기다려 달라고 했을 거예요.”
제니가 달래봐도 태권소녀의 기분은 별로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가끔 깊이 한숨을 쉬면서도 자신의 실수가 무엇이었는지 설명을 해줬다.
“너희는 애초부터 다섯 명이 전부였다고 했지? 우리는 아니었어. 훨씬 많았다고. 저기 보이는 저 주상 복합 상가에 갇혔다가 밖으로 나와서 음식을 찾고, 허술하기는 해도 안전한 곳을 구할 때까지…… 정말 힘들었고, 정말 많이 죽었어. 게다가…… 너희도 알겠지만, 죽었다는 게 정말로 죽는 게 아니잖아. 저것들에게 물리면 똑같이 좀비처럼 변하니까. 바로 조금 전까지 우리랑 함께 싸우다가 상처 입은 사람들의 머리를 부숴야 했어. 친한 사람이든, 낯선 사람이든 모두 다 말이야. 가까웠던 사람에게 그 짓을 해야 할 때의 그 기분은 정말…… 겪어보지 않으면 몰라.”
거기까지 말하고 태권소녀는 또다시 규영을 돌아봤다. 거리가 꽤 되는데도 자신의 목소리가 혹시 들리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규영이 여전히 보안관과 삼식이 사이에서 좀비들에 집중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 태권소녀가 말을 계속했다.
“이제는 조금 안전해졌다 싶었을 때, 내가 고집을 피웠어. 우리랑 함께 싸우던 사람들을, 그것도 가장 앞서서 싸우다가 당한 사람들을 저렇게 길바닥에서 썩게 놔두면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물론 내 말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장사를 지내주자는 쪽이 더 우세했어. 그래서 화장을 하기로 했지. 하~ 그런데 막상 화장을 하려고 보니까 적당한 장소가 별로 없더라. 아무 건물에나 불을 붙였다가는 큰불로 번질 것 같고, 길에는 차들이 잔뜩 서 있으니 더 위험하고. 그래서 고른 게 저 뒤쪽, 길 건너 삼거리에 있는 주차장이었어. 거리나 다른 조건들이 다 맞았지. 죽은 사람들을 모아서 쌓고 불을 질렀는데, 정말 잘 안 타더라. 끔찍해서 못 볼 수준으로 훼손만 되고…… 계속 불이 꺼지는 걸 막기 위해서 잘 탈 만한 걸 끼워 넣고 기름을 잔뜩 부었어. 그랬더니 그날 밤…….”
“좀비들이 왔군요.”
제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태권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그전까지는 상상도 못 했을 만큼 잔뜩 몰려왔지. 일부는 갇혔고, 우리는 도망쳤어. 갇힌 사람들은 아직도 저기에 있고, 나를 원망하면서…….”
태권소녀가 가리킨 것은 처음 보안관 일행을 유혹해서 이곳으로 끌어당긴 코스트코였다. 유빈과 제니도 뭔가 새로운 것을 대하는 심정으로 코스트코의 정문을 바라봤다.
강화유리 문을 들이받던 좀비들, 보안관이 후딱 죽여 버리자고 말했던 바로 그 좀비들이 이 태권소녀의 일행이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으~ 이상한 기분이 들어 유빈은 얼굴을 찌푸렸다. 태권소녀가 상념에 젖어 코스트코를 바라보고 있을 때, 새로운 좀비들이 또 대로 위로 밀려 들어왔고 보안관이 다가와 물었다.
“하루에 열댓 번 정도 지나간다고 했지? 그게 총 몇 덩어리가 그 짓을 하는 거야?”
“뭐? 무슨 말이야?”
보안관이 너무 앞뒤 잘라먹고 묻자 태권소녀가 한 번에 이해를 못 한다. 유빈도 궁금했던 사실이어서 보충 설명을 했다.
“그러니까 쟤 말은 하루 동안 열댓 개의 덩어리가 이 앞을 지나간다고 했는데 그게 전부 다른 놈들인지, 아니면 같은 놈들이 몇 번씩 도는 건지, 그걸 묻는 거야.”
“……모르겠는데? 매일 망을 보는 것만으로도 지쳐서 그런 건 생각도 안 해봤어. 그게 중요해?”
“나름 중요하다면 중요하지. 예를 들어서 서너 그룹이 네 바퀴를 도는 거라면 그렇게 큰 원을 그리지 않는 거잖아. 그러니까 이 근방 어딘가가 활동 반경이라는 말이고, 만약에 전부 다른 놈들이 하루에 한 번만 이 앞을 지나는 거라면, 엄청 멀리까지 빙~ 둘러보고 온다는 거니까. 게다가 얘들이 어떤 방향으로 회전하고, 어떤 방향에서 진입해 여기로 오는지 이런 것들까지도 다 알아두면 나쁠 게 없는 정보지. 우리는 전에 있던 데에서 그런 걸 알게 된 덕에 먹을 것도 구하고 했었거든.”
유빈의 이야기가 굉장히 신선했는지, 태권소녀는 듣는 내내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하긴 애초에 삼식이가 여자 좀비를 알아보지 않았더라면 그들 역시 좀비 덩어리를 하나하나 구분한다는 발상 자체를 못 했을 것이다.
멀어져 가는 좀비들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태권소녀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저렇게 수천 마리씩 몰려다니는데 어떤 게 어떤 건지 구분을 할 수 있다고? 무슨 줄을 맞춰서 움직이는 것도 아니잖아. 차 사이로 막 들어가고 자빠지기도 하고, 뒤섞이고…… 그런데 딱 보고 있으면서 ‘아, 저건 몇 번째 놈들이구나. 아까 몇 시쯤에 지나갔었지!’ 이런 식으로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이잖아, 지금. 그게 정말로 가능해?”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유빈도 상황이 번화가 쪽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에 비하면 그곳에 돌아다니던 좀비들은 규모가 거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했고, 또 그룹의 수도 몇 개 안 됐으니까.
게다가 번화가와 달리 이 앞 대로에는 시선을 가리는 장애물이 너무 많다. 그룹을 특정하기 위해 점찍어둔 좀비를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을 거다.
그렇구나, 거기랑 여기는 다르네. 변수도 너무 많고…….
상념에 젖었다가 갑자기 자신감이 사라진 유빈은 구원을 찾듯 삼식이를 돌아봤다. 좀비가 사라진 시간을 열심히 적으면서 유빈의 시선을 느낀 삼식이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 아니, 무리야……. 쟤들은 지금 너무 상태가 안 좋아. 다 썩어서…… 이젠 정말 어디가 입이고 어디가 코인지도 잘 분간이 안 될 지경이잖아. 저걸 어떻게 알아봐. 번화가 때처럼 원래부터 잘 알던 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제일 중요한 문제가 뭐냐면, 얘가 한 말처럼 너무 많아. ‘내가 점찍은 애 여기 있나?’ 하고 망원경으로 하나씩 쫓다 보면 그사이에 벌써 다 지나가 버릴걸? 에이~ 그럼 나 이거 지금 괜히 적고 있는 거야, 유빈아?”
매직으로 시간을 적어둔 플라스틱 쪼가리를 흔들며 삼식이가 물었다. 원래부터 시크했던 태권소녀의 시선이 아주 한심한 놈을 대할 때의 그것으로 바뀌어 머뭇거리는 유빈을 주시하고 있다.
멍청한 놈, 어디서 되도 않을 소리를 잘도 지껄였던 거잖아…….
입술을 움직이지 않는데도 그녀의 생각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난간에 기대 좀비 행렬의 끝을 다 지켜본 보안관이 입을 연다.
“그건 그렇고, 너희들 나름 대단했는데? 저렇게 계속 좀비들이 틈을 주지 않고 돌아다니는데 용케 그만큼 음식을 챙기고, 비밀 통로도 만들고, 모텔도 청소해서 치우고, 그런 일들을 다 했다? 어차피 이 골목에도 좀비들이 꽤 많이 돌아다녔을 것 아니야? 그러면 걔들도 다 잡아 죽였으니 지금 안 보이는 걸 테고. 그 생각을 하면 더 아쉽네. 모텔에 모아놓은 음식이나 물건들 보니까 그냥 구조니 뭐니 바라지 말고 너희들끼리 살았어도 충분했을 것 같던데.”
“충분하다고?”
태권소녀가 어처구니없어 하며 되물었다.
응. 충분하지 않아? 그만큼이면…….
보안관은 순진한 표정으로 긍정한다.
훗, 쓴웃음을 지은 태권소녀가 말했다.
“대체 몇 명이 며칠 동안 지내기에 충분하다는 거야……. 우린 스물세 명이었어. 한 사람이 물을 2리터만 쓴다고 해도 하루에 50리터씩이 없어져. 2리터라니까 많이 쓰는 것 같지? 그중에서 세수하고 양치하는 데 쓸 수 있는 건 한 컵도 안 돼. 물티슈로 몸을 닦고, 고양이 모래에 볼일 보고, 빨래 같은 건 생각도 안 하는데도 그만큼이 들어가는 거야. 상상해 봐. 하루 만에 커다란 음료수 캔 박스 여섯 개 분량씩이 사라지는 거야. 1.8리터 생수라면 여섯 개짜리 묶음이 다섯 개씩 없어지는 거고. 그런데도 충분하다고? 우린 매일 아주 느린 속도로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었어. 좀비들은 점점 더 늘어 더 가까이까지 행진을 하고 있고, 인철이 같은 미친놈들은 자꾸 몰래 숨어 들어와서 불을 지르고 도망가고. 이 근처에서 손에 넣을 수 있는 마실 것들은 다 긁어왔는데도 겨울은커녕 가을도 넘기기 어려울 정도밖에는 안 됐으니까. 이젠 너희도 그 문제에 대해 아주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걸?”
태권소녀는 비장한 말투로 보안관에게 일장 연설을 했다. 이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이 어리바리한 고릴라도 조금 겁에 질리게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보안관과 유빈은 그다지 큰 심경의 변화가 없는 것처럼 태평한 표정으로 열심히 듣기만 한다.
육 곱하기 일점팔에다가, 에…… 또 오를 곱하면…….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그려가며 태권소녀가 말한 셈법을 확인하느라 잠시 뜸을 들이던 보안관은 계산이 끝났는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태권소녀의 눈을 보며 별거 아니란 듯 말했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어제 뭐랬어? 우리가 먹었던 거 다 갚아준다고 했잖아. 일단 저기 보이는 코스트코부터 털자. 그러면 그걸로 가을 날 수 있고, 그다음 다른 대형 마트를 또 털면 겨울 나겠지. 그럼 되는 거 아냐?”
미쳤구나, 자신만만하게 떠드는 보안관을 보면서 태권소녀는 생각했다.
이놈…… 뇌까지 다 근육이었어.
“너 어린애냐? 코스트코를 털고, 그다음엔 다른 마트를 턴다고? 야! 생각을 하고 좀 말을 해! 여기서 코스트코가 빤히 내려다보이는데도 그래? 저 유리문 안에 좀비가 우글거려! 너무 많아서 몇 마리나 되는지도 몰라! 네가 싸움을 좀 잘한다고 해서 저 많은 걸 다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해? 허풍도 적당히 쳐! 계획도 없으면서! 계획이 있어?”
“계획? 없는데?”
하하하하, 보안관의 순진한 반응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태권소녀는 소리를 내서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그 특유의 깔보는 눈빛으로 돌아와 보안관을 향해 말했다.
“큰소리치는 용기는 재미있었어. 하지만 계획이 없다면 난 너희랑 같이 못 움직여. 하하…… 어처구니없다, 정말. 잠깐이지만 기가 막힌 방법이라도 있나 기대했던 내가 바보지.”
“아! 기가 막힌 방법, 그건 말이지…….”
보안관은 여전히 느긋한 표정으로 곁에 서 있던 유빈의 어깨를 확 끌어안아 당겼다. 그러고는 말했다.
“이제부터 얘가 생각할 거야.”
“응, 이제부터 이 머리에서 나올 거예요.”
제니도 환하게 웃으며 기름과 먼지로 떡 진 유빈의 머리를 쓸어준다. 그때까지 한쪽에서 계속 규영이와 놀고 있던 삼식이도 힐끗 고개를 돌려 중얼거렸다.
“맞아, 걔가 계획을 짤 거야. 걱정하지 마.”
뭐지, 이 분위기는?
태권소녀는 어리둥절해져서 유빈을 바라봤다. 몇 개의 시선이 한꺼번에 자신에게 집중되자 유빈은 쑥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비에 젖은 머리에서 땟국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먼발치에서도 개 냄새를 풀풀 풍기는 얘가? 도대체 얘가 뭔데?
몇 번을 다시 봐도 어제 자신에게 맞아 거품을 물고 정신을 못 차리던 그 약골 맞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너! 너! 너!’ 따위의 외마디 소리만 외치던 그놈. 신뢰가 생기지 않는다.
“아니, 아니…… 애들이 과장하는 거야. 저기, 그냥 며칠 동안 생각을 좀 해볼게. 좀 쉽고 안전한 방법이 있을지. 그렇게…… 너무 기대를 하고 있으면 부담스러운데.”
유빈이 손을 내저으며 말을 더듬거리자 태권소녀는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홱 돌아서며 차갑게 내뱉었다.
“기대 같은 거 안 해. 네 꼴을 보고 있으면 네가 나라고 해도 그럴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