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멋진 신세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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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멋진 신세계 (3)
2022.03.04.
“으허억!”
대문을 열던 병사가 비명을 지르는 게 들려온다. 고참이 곧바로 타박을 한다. 그의 목소리에도 긴장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어우, 깜짝이야! 이 새끼! 왜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놀랐잖아!”
“그게 아니고 말입니다! 저 피! 저 피가!”
“어휴~ 씨발, 진짜 좃같기는 하다. 무슨 도살장도 아니고.”
두 병사가 더 들어오지 않고 주춤거릴 때, 멀리서 또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어 호통을 친다.
“야! 거기! 뭐해, 이 새끼들아! 제대로 안 해?”
“네, 넷! 들어가고 있습니다!”
등을 떠밀린 병사들의 발소리가 마당을 울렸다.
저벅저벅, 들어오는 놈들도 죽을 맛이겠지만, 진우도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다.
만일의 경우가 닥쳤을 때,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진우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했다. 분명히 총구를 앞세워 들어올 테지. 그러면 그 총구를 잡아당기고 그다음 놈을 개머리판으로 후려치고…….
그렇게 저 두 놈을 제압하고 뛰어나가면 달아날 수 있을까? 괜히 등 뒤에 총알이 박히는 거 아닌가? 그렇다고 순순히 투항을 하면 나에게는 어떤 미래가 기다릴까?
진우는 자신과 마주 보는 위치의 중년 여자 시체로 시선을 돌렸다. 저 눈, 저 표정. 다시 봐도 정말 섬뜩하다.
제발, 저 시체의 저 끔찍한 모습이 병사들의 발걸음을 되돌리게 해줘야 할 텐데…….
“고 상병님, 마루에 핏자국이 깨끗한 걸 보면 말입니다, 이리로는 안 온 것 같지 말입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올라가. 올라가서 저 방 문 열어봐.”
“예? 제가 말입니까?”
“그럼 이 새끼야, 너 말고 할 사람이 누가 있어. 빨리 튀어 올라가.”
마루 앞에서는 두 병사가 거의 만담을 하고 있다.
어제 그 터널 경비병들도 그렇고…… 이 녀석들, 실전 경험이 거의 없는 놈들이다. 어지간히 덜덜 떤다. 좀비들이 몰려오기만 하면 이놈들도 오래 버티기는 텄다.
삐거덕, 마루가 울리는 소리. 놈들이 겨우 용기를 쥐어짜서 다가온다.
삐거덕, 삐거덕, 그리고 끼이이익―
문이 아주 천천히 밀렸다. 진우는 숨을 멈춘 채 문과 벽 사이에 몸을 밀착시켰다.
“으아아아아! 어후!”
두 병사가 거의 동시에 비명을 지르고 마당으로 뛰어나간다.
왜 그래? 뭐 찾았어?
외부에서 물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아닙니다! 시체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대답하는 병사들. 그런 후, 후다닥 발소리가 울렸다. 집 밖으로 나간 것이다.
“너희, 확실히 수색했어? 분실된 개인화기 회수할 때까지 수색 안 끝나!”
“저, 전부 뒤졌습니다! 저기엔 시체만 있습니다. 예전에 죽은 시쳅니다!”
그 말이 별다른 의심을 받지 않았는지, 발소리들이 멀어져 간다. 그리고 옆집 대문이 열리는 소리.
하아아~ 그제야 진우도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던 목소리는 분명 총을 다 회수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
완전히 빈말 같지가 않다는 게 문제다. 좀 전의 두 녀석보다 겁이 적은 놈들이 다시 이 집을 수색하러 오기 전에 달아나야 한다.
“달아난다고? 젠장, 내가 잘못한 게 뭔데…….”
생각하고 보니 억울하다. 자신이 한 일이라곤 저 어리바리한 부대 놈들을 습격하러 올라가던 좀비를 싹 다 잡아 죽인 것뿐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남의 총을 쓰기는 했지만, 수십 명의 목숨을 구해주고 겨우 총 한 자루를 가져가는 건데, 그게 죄란 말인가.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뛰어나가 큰 소리로 외치고 싶은 지경이다.
너희들, 오해하고 있어, 이 멍청이들아!
……뭐, 그건 어차피 실현될 수 없는 일이니까 진우는 상상을 그만두고 현실로 돌아왔다. 먼저 크게 신세를 진 중년 여자의 시체를 향해 눈으로 사과부터 건넸다.
가뜩이나 괴로웠을 텐데, 마음대로 움직여서 미안합니다…….
그러는 동안 어쩌면 저 사람도, 그리고 그 농협의 아저씨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게 오해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로부터 좀비로 변할 것이라는 오해를 받아 살해당했을지도……. 끔찍하지만 이렇게 미친 세상에서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까.
자신의 손으로 묻어주고 온 좀비 할머니, 농협의 그 아저씨, 또 이 아주머니까지……. 난 죽어버린 이들에게만 이런저런 말들을 전하고 있구나, 생각하며 진우는 벌어진 문틈으로 바깥을 내다봤다.
텅 비었다. 발소리는 조금 전보다도 더 멀어져서 이제 다음 골목으로 향하는 듯하다. 움직이려면 지금밖에는 없을 것 같다.
심호흡을 마친 진우는 살금살금 마루로 나와 조금 전 자신이 들어왔던 창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골목 위에 내려앉았다.
“야! 건성으로 보지 말고 확실하게 수색해!”
멀리서 들리는 말소리에 저절로 움찔한다. 가슴을 쓸어내린 진우는 자세를 낮추고 뛰었다.
어제 좀비들과 정신없이 뛰어다니기도 했고, 오늘 집집마다 뒤지고 다닌 덕에 동네의 지도가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진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진우는 병사들의 시선을 피해가며 달리고, 숨고, 지름길을 가로질렀다. 마침내 비닐하우스까지 도달했을 때에는 긴장감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비닐하우스는 어제 그가 잠시 몸을 숨겼던 때와 조금도 변함이 없는 상태로 서 있다. 그가 토해냈던 토사물도, 머리가 터져서 죽은 좀비들도, 그 좀비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뇌수도 그대로였다.
“아, 숨차. 하아~ 하아~ 여기만 오면 토할 것 같네. 무슨 악연이냐.”
비닐하우스를 벽 삼아 기댄 채 잠시 숨을 돌렸다. 일단 안전이 확보되자 미련이 생겨난다. 젠장, 마을에 남아 있는 수많은 먹을거리들과 편안한 잠자리, 그리고 끝내 하지 못한 목욕.
아쉬운 것들이 너무 많아서 손으로 다 꼽지도 못할 지경이다. 멀리 뒤쪽에서는 아직도 삼삼오오 모여 다니며 여기저기를 헤집고 소란을 떨어 대고 있다. 그 꼴을 보니, 저놈들 정말 총을 찾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을 기세다.
수색 병력이 여기에 도착할 시간도 별로 머지않았다. 비단 그게 아니더라도 이 마을은 오래 머물 곳이 못 된다는 걸 진우는 절실히 깨달았다.
저들이 얼마나 자주 이 길을 지나는지 몰라도, 그때마다 오늘처럼 운 좋게 들키지 않기란 정말 어려울 것이다. 아쉽지만 다 버려두고 가는 게 현명하다.
“진정하자, 진정해. 그래도 좋은 일이 많았잖아.”
그래. 진우는 얻은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방수 점퍼, 물, 음식, 실탄과 총, 그리고 무엇보다도 꼼짝없이 죽었다고만 생각했던 목숨.
뭐, 그 정도면 꽤 괜찮은 거래를 했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킨 후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배낭에서 물병을 꺼내 입술을 적신 진우는 비닐하우스 둘레에 쳐진 울타리를 넘어 비탈진 언덕의 나무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싸구려 전자시계에 표시된 시간은 오전 11시 51분. 잠시 표류했던 북쪽으로의 긴 여정이 지금 막 다시 시작됐다.
***
“11시 52분, 새로운 놈들 입장. 우와, 이 새끼들도 장난 아니게 많은데!”
“음, 이번에는 26분 간격이네. 어디 보자, 11시 52분…….”
보안관이 망원경을 통해 저 멀리 망우로 사거리의 상황을 보고 알려주면, 구구단을 못 외우는 기록원이 그 등장 시간과 앞 행렬과의 간격 따위를 계산해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적는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경전철역 옥상에서 번화가를 지나는 좀비 무리를 관찰하던 때와 거의 다를 바가 없다. 달라진 거라면 오늘은 신입 대신 어린애 하나가 끼어들었다는 것 정도.
제니 곁에 바짝 붙어 앉아 온갖 애교와 추파를 던지는 데만 열중하고 있던 규영은, 좀비가 지나간다는 소릴 들으면 어김없이 가까이 와서 보안관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보챘다.
“나도, 나도 볼래!”
아, 또? 그냥 아까 봤던 거하고 똑같아. 별 차이도 없어…… 라고 귀찮아하면서도 보안관은 망원경을 넘겨주었다.
유빈은 손톱 주변의 거스러미를 물어뜯으며 생각에 잠겨 있고, 제니와 태권소녀는 빗방울이 닿지 않는 구조물 밑에 앉아 그런 남자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현 위치는 파라다이스 모텔에서 두 블록 정도 떨어진 7층짜리 건물의 옥상.
바로 길가는 아니지만 높이가 있어서 멀리 사거리 너머까지 시야가 확보된다. 그제 보안관 일행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던 그 장소이기도 하다.
‘자식, 어지간히 호기심도 많구만. 하긴, 굉장히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쐬는 거라고 했지…….’
앞으로 몸을 기울인 채 열심히 바깥 구경, 좀비 구경을 하는 규영을 보며 보안관은 자비로운 ‘큰형 미소’를 지었다. 데리고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길가의 건물로 이동해서 나오기까지 규영을 휠체어째 들고서 비밀 통로를 통과해 두 층을 내려가고, 다시 일곱 층을 올라오느라 몸은 상당히 힘들었지만, 그만한 보람이 있지 않은가. 흐뭇해진 보안관은 규영의 머리통을 잡고 장난스럽게 좌우로 휙휙 흔들었다.
탁, 갑자기 발끈한 규영이 보안관의 손을 쳐낸다. 그러고는 원망을 담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어라, 이놈 봐라?
어처구니없어진 보안관은 즉시 쓰다듬던 손의 모양을 꿀밤으로 바꾸어 한 대 콩, 쥐어박았다. 그러고는 물었다.
“왜 까불어? 뭔데?”
선 응징, 후 질문. 애새끼라도 예외는 없다.
“아! 머리 만지지 말라고! 20분 동안 빗고 나온 건데!”
그 말을 하면서도 규영은 황급하게 모자를 벗어 허벅지 위에 올리고 두 손바닥으로 머리카락을 정성껏 펴서 붙인 다음, 구레나룻을 쪽쪽 잡아당겨 제비 꼬리처럼 정성껏 다듬었다.
“야! 비가 이렇게 오고 모자까지 썼는데 그게 네 생각처럼 스타일이 유지될 것 같아? 아까 벌써 다 흐트러졌지. 그리고 누가 본다고 그래? 아무도 네 머리 모양 안 봐!”
“안 보긴 왜 안 봐? 자기네들이 거지꼴을 하고도 창피한 줄 모르니까 남들도 다 그런 줄 아나!”
“거지꼴이라니! 이 셔츠도 제니가 직접 골라준 거야, 뭘 알고 말해!”
“웃기시네! 꿈에서나 그랬겠지. 제니 누나가 잘도 그렇게 촌스러운 걸 골랐겠다. 레드 카펫 시선 강탈자인데!”
그렇게 항변하는 동안에도 규영의 시선은 제니를 슬금슬금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매번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좀비의 출현 시간과 규모, 간격, 시야 밖으로 사라진 시간 따위를 다 적고 나서 삼식이가 대화에 참전했다.
“근데 얘, 테라에 대해서는 안 물어보고 용케 꾹 참네? 저렇게 연예인을 좋아하면서.”
“흥, 그깟 빈유 로리, 어디서 뭘 하든 무슨 상관이야? 관심 없어.”
과장되게 팔짱까지 낀 규영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죽었어.”
헉, 규영은 깜짝 놀라 삼식이를 돌아봤다. 관심이 없는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삼식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덧붙였다.
“그러니까 제니 앞에서 걔 이야기 꺼내지 말라고.”
시무룩해진 규영이 머리를 숙인 채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제니를 돌아보며 연극배우의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보자. 그리고 행복해지자.”
“뭔 소리야, 뚱딴지같이?”
보안관이 물었다. 가만 보니 이놈도 꽤나 또라이 기질이 보인다.
“안네 프랑크의 말이야. 힘들 때마다 되새기면 용기가 생겨.”
“그래, 용기 많이 생겨라. 그것도 나쁠 거 없지. 근데 반말 찍찍 싸지 말고 존댓말 좀 써. 애새끼가 좀 굽히고 들어오는 맛이 있어야 귀여워해 주지.”
“가슴을 펴라. 스스로 허리를 굽히는 자는 억압 받을지니…… 마틴 루터 킹. 나는 존경하는 사람한테만 존댓말을 쓸 거야. 나이로 벼슬하던 시대는 이제 끝났어.”
보안관과 삼식이가 얼굴을 마주 봤다. 어이가 없다.
뭐지, 애들 보는 만화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이 새끼는?
보안관이 물었다.
“너 몇 살이야? 설마 초딩이냐?”
“덩치가 작다고 얕보지 마! 엄연한 중학생이다! 그것도 2학년!”
중2…… 아아, 그랬구나.
모든 것이 이해가 된다. 세 친구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놈을 이기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이젠 형들하고 잘 노네요? 역시 남자끼리라서일까요?”
멀찍이 떨어져서 보안관, 삼식이, 규영이가 투닥거리는 걸 보고 제니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줄곧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태권소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네?”
“어제 많이 힘들었지? 처음이라 좀 무서웠어.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아, 처음엔 다 낯설고 그러니까요. 오빠들한테 물어보세요. 저도 처음에 얼마나 자주 울었는지 몰라요. 만날 긴장해서 눈치 보고.”
“어휴~ 불쌍하게…….”
제니를 돌아보는 태권소녀의 표정에는 진심 어린 동정이 짙게 뱄다. 제니는 당황스러워서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불쌍하긴요. 오히려 전 진짜로 운이 좋았던 건데요. 지금도 그렇고요.”
“오늘부터는 규영이랑 방 따로 쓸게. 그러니까 너 혼자 고생하지 말고 나눠서…… 나눠서 짊어져.”
으응? 이거, 어째…….
둘이 서로 전혀 다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던 것 같다. 제니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언니…… 그…… 뭘 나눈다는 말이에요?”
“그렇게 무덤덤한 척하지 않아도 돼. 다 알아. 어젯밤에도 계속 남자들이 문을 열고 들락거리는 소리 들었어. 교대하자 어쩌고 하면서 역겨운 소리 하는 것도. 후~ 지금까지 매일 그랬을 테지…….”
아, 또 그 이야기구나. 좋은 오빠들이라고, 걱정하는 그런 일 없을 거라고 했는데도…….
하긴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긴 하다. 제니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거 완전 오해예요, 언니. 저기 저 오빠랑 저 키 큰 오빠가 교대로 복도에서 밤새도록 서성거린 건 맞는데요, 그냥 버릇처럼 보초를 선 거였어요. 저 오빠들, 저한테 손끝도 대지 않았어요, 어젯밤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럼…… 그, 너는 저 고릴라가 독점했던 거야? 대장이랍시고?”
“아아뇨~! 그것도 아니에요. 보안관 오빠도 마찬가지예요. 그냥 저를 귀여워하고 아껴주는 거지, 성적인 뭔가를 요구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정말 단 한 번도! 언니에게도 마찬가지일 거구요. 어제 제가 장담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이번에는 태권소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제니를 본다.
“……그 말을 믿으라고? 성욕이 없는 것도 아니고, 당장 저 멀대만 해도 경순이 언니랑 같이 잤다는 걸 우리 둘 다 알고 있는데. 그런데 너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를 그냥 뒀다고? 보름이 넘도록?”
“경순이 언니랑 삼식이 오빠는 억지로 한 건 아니었잖아요. 둘이 서로 갑자기 전기가 찌리릭 통했으니까. 제 생각에 저 오빠들은 뭐랄까, 세상이 이렇게 되어버려서 오히려 더 조심하는 것 같아요. 강박적일 정도로요.”
흠, 다시 침묵 모드로 들어간 태권소녀는 빗속에 서 있는 세 남자를 다시 한 번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녀는 사람의 호의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원래부터 그랬고, 좀비 세상이 온 후에 훨씬 더 불신하게 되었다가 조금 나아지는가 싶었지만, 이틀 전 검은 헬기가 왔을 때 아주 입장이 확고해졌다. 사람은 기대를 배신한다.
“네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건 또 그것대로 힘들었겠네. 언제 저놈들이 돌변해서 덤벼들지 모르니까 지금도 계속 불안이랑 싸우고 있어야 하는 거잖아.”
제니는 뒤로 기대앉으며 오빠들에게 시선을 두었다. 보안관과 삼식이가 번갈아가며 규영이를 쿡쿡 찔러 대고, 유빈은 그 모든 상황이 다 귀찮다는 듯 옆으로 자리를 피한다.
불안? 저 오빠들에게?
제니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음, 불안이라……. 그러네요. 생각해 보면 분명 그런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아니에요. 지금 당장 흥분해서 달려든대도 하나도 안 무서워요.”
“무슨 말이야? 왜 무섭지가 않아?”
“정말…… 좋아하게 됐으니까요.”
태권소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제니와 세 남자를 번갈아 봤다.
정말 좋다고? 저 거지 같은 꼴의 지독한 땀 냄새 풍기는 놈들이? 왜?
그녀가 뭔가를 더 물으려 할 때, 보안관이 큰 소리로 말을 걸었다.
“야! 네 동생 존댓말 좀 하라고 해! 내가 이런 애새끼한테 사사건건 반말 들어야겠냐?”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다친 발을 절룩이며 빗속으로 걸어 들어간 태권소녀가 방수 재킷의 후드를 올렸다. 그러고는 보안관에게 물었다.
“그래, 안 그래도 서열 정리는 해야 할 것 같았는데…… 이참에 하자. 너희 몇 살이야?”
“스물일곱 살이다!”
바지춤에 손을 넣어 긁적거리고 있던 삼식이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 예상했던 것보다 고령이었는지, 태권소녀가 주춤한다.
태권소녀는 잠시 유빈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유빈이 발끈 성을 냈다.
“내 얼굴 보고 납득하지 마! 그리고 삼식이, 너도 뻥치지 말고! 우리 스물하나야. 너는?”
당연히 동갑이거나 한 살쯤 어릴 거라고 여겼다. 키는 제법 크지만 피부나 짧은 커트머리를 볼 때 딱 그 또래로 보여서다.
훗, 태권소녀가 콧방귀를 뀌더니 같잖다는 듯 말했다.
“스물셋! 두 살이나 차이 나네? 그러니까 누나라고 불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