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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멋진 신세계 (2) (184/449)


184. 멋진 신세계 (2)
2022.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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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그렇게 퍼붓더니 오늘은 또 안개냐?

진우는 우호적이지 않은 날씨에 질려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지끈, 팔의 상처와 머리가 동시에 짜릿한 통증을 준다.

약. 그래, 약국부터 찾아야 해. 그런데 어제 돌아다니면서 약국을 봤던가?

진우는 기억을 더듬으면서 사무실 책상에서 찾은 종이에, 역시 사무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볼펜으로 필요한 물건들을 적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쓴 단어는 ‘약’이다. 진통제, 소염제, 배탈 약. 그리고 그다음에는 ‘반창고(붕대)’라고 적었다.

팔의 상처에 붙일 무언가도 필요하지만, 미리 챙겨두면 앞으로도 요긴할 것들이다. 이제 더 이상 다치지 않을 거라고는 믿지 않으니까.

그리고 가방. 배낭도 좀 괜찮은 놈이 있으면 좋겠다. 할머니 장바구니는 여러모로 불편하다.

또 가방에 넣을 것으로 ‘점퍼’를 썼다. 고어텍스나 방수 방풍 기능이 있는 아웃도어 점퍼. 밤에 꺼내 입는다면 덜덜 떨며 잠을 청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꼭 필요하다.

긴 줄, 음료수, 음식, 라이터, 손전등, 배터리, 양말…….

적다 보니 갖고 싶은 게 점점 늘어난다. 모두 구할 수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지만, 구해진대도 휴대할 수 있는 부피와 무게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단순히 짊어지고 걷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언제라도 기민하게 뛰고 숨고 뛰어내릴 때 신체 능력이 제한되지 않아야 한다.

일단 K―2가 두 정이나 되니까 그것만으로도 벌써 7킬로그램이다. 담요를 쓸까 말까 고민하던 진우는 미련을 버리고 펜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냥 이만큼만 챙겨도 장거리 이동을 하는 데 적잖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작은 동네에서 부디 필요한 것들과 마주할 수 있기를 빌었다.

“운이 좋기를 바라자.”

준비를 마친 진우는 두 정의 K―2를 챙겨 들었다. 되찾은 자신의 총은 허리 뒤쪽에 오도록 사선으로 메고, 어깨에는 어제 새로 주운 총을 걸었다.

“갈게요.”

죽은 이에게 인사를 던지고 하이바를 쓴 진우는 계단을 반쯤 내려가다가 다시 사무실 문을 열고 되돌아왔다. 그러고는 중년 사내의 목을 단단히 조이고 있던 넥타이를 당겨 풀었다.

빳빳하고 차가운 시체의 목에서 넥타이를 벗겨내 옆에 놓아준 뒤, 진우는 다시 문을 나섰다. 이제야 좀 숨이 트이는 기분이다.

“자, 약국부터 가봐야 하나? 어디에 가면 약국이 있을까?”

기대 반, 걱정 반의 심정으로 거리에 발을 딛자 안개의 농도가 걱정스럽게 느껴졌다. 아침인데도 가시거리가 20미터는 될까 싶을 만큼 사방이 온통 뿌옇고, 공기는 축축하다.

농협과 슈퍼를 잇는 도로 위에는 머리가 날아간 좀비들의 시체가 어지럽게 널려 있다.

시체, 안개, 그리고 낯선 마을…….

한마디로 여러모로 불길해 보이고 오싹한 풍경이다. 공포 영화에서라면, 그것도 주인공이 죽는 공포 영화에서라면 아주 좋은 조합일 테지만.

머리를 가볍게 흔들어서 밀려드는 두려움을 날려 버린 진우가 첫 번째로 만난 가게는 식료품점. 그걸 보자마자 그는 자신의 경솔함을 자책했다.

“아! 그렇구나. 멍청했다, 진짜.”

불에 타서 내부가 온통 새까맣게 그을린 가게. 당연히 내부의 상품들도 다 못쓰게 되었다.

하아~ 불을 질러도 그 많은 집들 중에 왜 하필이면 이런 시골에서 보기 드문 식료품점이자 잡화점에 불을 질렀던 걸까?

세상에, 어쩌자고 그 많은 라이터와 음식과 음료수와 술이 있는 곳에…… 흥분 속에서 앞뒤 재지 않고 내렸던 결정이 몇 시간이 지난 지금 커다란 아쉬움으로 돌아온다.

삐걱―

아직 뭔가 쓸 만한 게 남아 있을까 해서 불타고 남은 잔해들 사이로 들어가려던 진우는 금방 포기해 버렸다.

그런 물건도 없거니와, 화재에 시달린 낡은 건물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린다면 더 상처를 입기 십상이다.

“뭐…… 일반 가정집도 많이 있으니까.”

진우는 계획을 전환하여 한 집씩, 한 집씩 차분히 뒤져 보기로 했다.

어차피 아무도 없는 마을이고, 하루나 이틀 정도 여기에서 허비하다가 늦는다고 해도 땅속에 묻혀 있는 만 발은 크게 화를 내지 않을 것이므로…….

편안하게 잘 수 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큰 이득이다. 수십 가구는 족히 되어 보이는 마을에서 한 집당 좋은 게 하나씩만 나와도 배낭 하나를 채우는 정도는 문제없으리라.

“실례합니다.”

남의 집이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진우는 총을 겨눈 채 대문을 발로 밀고 들어갔다.

삐이익―

낡고 기름칠이 벗겨진 철문에서는 기분 나쁜 소리가 났다.

개집이 보이고, 원래 개가 묶여 있었을 목줄은 비어 있다.

집주인이 도망치면서 풀어준 걸까, 아니면 굶주림을 못 견딘 개가 제 힘으로 풀고 나간 걸까?

중요한 건 개가 풀려났다는 사실이다. 지난 며칠 동안 진우는 몇 번이나 들개 떼를 보았다. 시골이라 풀어놓고 기르는 개들도 많았을 테니,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아직 가까이에서 대치해 본 적은 없어도 진우에겐 그렇게 떠돌아다니는 개들은 작은 고민거리였다.

사람 모양의 좀비를 그렇게 많이 죽여놓고서 이런 말을 한다면 좀 위선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에게는 개를 죽일 용기가 없었다.

살아 있는 것이므로 죽이고 싶지 않다. 하지만 과연 개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 그게 딜레마였다.

만약 개 떼가 달려든다면 어떻게 하지?

머릿속으로 정리해 둔 매뉴얼은 있다.

제1단계, 하늘에 총을 쏴서 소리로 겁을 주어 도망치게 할 거다. 만약 그래도 개들이 도망가지 않으면 제2단계…… 2단계부터는 없다. 온통 뿌옇고 막연하기만 해서 엉망이다.

아까운 총알을 낭비하는 것도 문제고, 사람보다 개가 훨씬 빠르다는 것도, 개새끼들의 이빨에 무슨 균이 얼마나 묻어 있는지 모른다는 것도, 그리고 그놈들이 대단히 굶주려 있으며 떼를 지어 다닌다는 것도 다 골치 아픈 문제였다.

“개새끼들아, 제발 멀리 도망가 있어라. 근처에 있지 말아라…….”

삐걱거리는 마루 위에 올라서면서 진우는 개를 위한 주문을 외웠다. 다행히 아무리 청각을 곤두세워 봐도 개 짖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안방으로 들어간 진우는 서랍들부터 다 열었다. 약, 진통제, 그리고 상처가 더 벌어지기 전에 꽉 조일 수 있는 깨끗한 뭔가가 필요하다.

약은 금방 찾았다. 그것도 엄청 많이. 시골에는 노인들이 많고, 노인들은 으레 약을 달고 사니까.

그런데 젠장, 문제는 그 약들이 설명서가 동봉된 케이스가 아니라 약국에서 조제된 것들이라는 데 있었다. 봉투 안에는 줄줄이 사탕처럼 묶인 치료제들이 한 번 먹을 양씩 포장된 채 주인을 잃고 남겨져 있다.

“싱경통…… 당노…… 유마치스…….”

맞춤법을 무시하고 삐뚤빼뚤 적혀 있는 봉지의 글씨가 진우에게 쓴웃음을 짓게 한다. 다 비슷하게 생긴 약들이 대여섯 알씩 묶였는데, 정작 각각의 효능이 뭔지 모르니 무용지물이다.

게다가 붕대는 없고 파스만 잔뜩 사다 모아뒀다. 이 집은 포기다. 할아버지 체구가 어지간히 작은 사람이었는지, 건질 만한 옷 한 벌도 없었다.

“소주만 풍년이네……. 이게 당뇨니 류머티즘에 좋았을 리가 없잖아요.”

냉장고 옆에 짝으로 놓여 있는 소주를 지나치며 진우는 군침을 꾹 삼켰다.

소주 한잔으로 통증을 달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감각과 판단력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 당장 어제만 해도 슈퍼에 불을 질러 버리는 실수를 하지 않았던가.

낡고 조그만 진달래색 배낭을 찾아낸 진우는 거기에 사탕과 양갱, 그리고 마른 멸치가 든 봉지를 쑤셔 넣은 뒤 옆집으로 향했다.

“으아, 들어가기 싫다.”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눈을 찌푸리게 만드는 것은 유리가 날카롭게 깨진 마루문과 거기에 뿌려놓은 것처럼 안쪽에 잔뜩 달라붙어 있는 핏자국들이다.

핏자국은 마루 내부에서 길게 안방 쪽으로 이어졌다. 피의 색깔이나 말라붙은 정도로 봐서 요 며칠 사이에 생긴 건 아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이건 살인 사건의, 그것도 날카로운 흉기를 이용하여 반복적으로 찌른 아주 잔인한 살인 사건의 현장이었다.

난자된 시체가 기다리고 있을 게 빤한 이런 곳에는 안 들어가는 게 낫다.

별로 무섭지는 않지만, 괜히 감정이 소모된다. 어차피 비어 있는 집이 많으니까, 라고 핑계를 대면서 진우는 고이 문을 닫고 돌아 나왔다.

그런 방식으로 열댓 집을 돌고 나니 그래도 꽤 수확이 있었다. 몇 개쯤 빼먹은 타이레놀을 발견해서 두 알을 우적우적 씹어 삼키고 나머지는 가방에 넣었다.

팔의 상처는 에틸알코올로 소독한 뒤, 유효기간이 한참 지난 상처 치료제를 듬뿍 바르고 거즈로 잘 동여맸다.

비타 500, 박카스, 구론산, 타우스까지. 자양 강장제도 종류별로 몇 병이나 들이켰다. 그렇게 하고 나니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온몸을 콕콕 쑤시고 머리통을 옥죄던 통증이 조금은 가라앉는 느낌이다.

고이 접어 매듭까지 만들어둔 빨랫줄도 세 묶음이나 챙겼고, 라이터에 두툼한 양말, 싸구려 전자시계, 맥가이버 칼까지……

진우는 목록에 충실한 쇼핑을 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장롱 안에서 포장도 뜯지 않고 고이 모셔둔 새 U넥 반팔 셔츠와 팬티를 만났을 때에는 가벼운 설렘까지 느꼈다.

농협 사무실 1층에 정수기가 있었으니까 이따가 필요한 걸 다 찾고 나면 그 물로 목욕을 해야지. 그리고 위아래로 새 속옷을 입어야지.

정말 간만에 보송보송해질 걸 기대하니 콧노래가 절로 난다. 그런데 아직 못 찾은 것도 있다. 방수 방풍이 되는 아웃도어 점퍼가 영 마땅치 않다. 사이즈도 문제지만, 색깔이 너무 튄다.

“아, 이것도 색깔이 이렇게 알록달록하네. 아저씨들…… 그냥 검은색이라도 좀 사지.”

붉고, 노랗고, 푸른색이 어지간히 촌스럽게 조합된 점퍼들. 입고 미팅에 나갈 것도 아니니까 대단한 걸 바라는 건 아니다.

그저 숲속에서 ‘나 여기 있소’라고 두드러지게 위치 표시를 하지 않을 정도의 검은색이나 쑥색이면 만족할 건데, 그런 물건이 눈에 띄지 않는다.

결국 한참을 더 돌아다닌 끝에 조금 구식이기는 해도 많이 낡지는 않은 어두운 회색 점퍼 하나를 찾아냈고, 진우는 그걸 잘 접어서 배낭 위쪽에 넣었다.

휴우~ 큰 숙제를 하나 끝낸 스스로가 대견해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두 번째 좀비 병사의 총과 약국은 아직 찾지 못했지만, 그래도 정말 간만에 씻을 수 있다.

이도 닦고, 면도도 하고, 근질근질한 사타구니에 비누칠도 좀 해야지, 그렇게 개운한 상태가 되어 마실하듯 다시 한 번 동네를 살살 돌다 보면 나머지도 다 찾게 되겠지…….

생각만 해도 청량감이 찾아오는 것 같아서 농협 건물로 돌아가는 길에는 가벼운 콧노래까지 흘러나왔다. 그렇게 모든 게 다 잘 풀리리라고 생각하던 때였다.

부르르르릉~!

엔진 소리다. 잊기도 어려울 것 같은 군용 트럭의 엔진 소리.

어제 도망갔던 그놈들인가?

진우는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어디에 숨지? 그런데 왜? 왜 갑자기 또 이리로 오는 거지? 어제 동료를 둘이나 버리고 갔으면 충분히 피를 본 거 아닌가? 혹시 복수를 하러?

아니, 그러기에는 너무 늦다. 전열을 재정비하고 돌아오는 데 열두 시간이나 걸릴 리가 없다. 골목 안으로 뛰어든 진우는 자세를 낮추고 벽에 기댄 채 귀를 기울였다.

부르르릉―

고요하던 작은 마을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진우는 살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두 대, 세 대…… 총 네 대의 트럭과 두 대의 레토나가 농협 사거리 안으로 들어온다. 어제 그가 보았던 병력보다 오히려 늘었다. 그리고 온 방향도 반대쪽이다.

- 높으신 분들 없을 때 우리도 사제 물건 좀 먹어보자.

어제 그 초소에서 병사들이 나누던 대화가 기억이 난다.

그런가? 어딘가로 행차했던 높으신 분들이 돌아오는 길이었던 건가?

아찔해진 진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자유를 위해 그 개고생을 했는데 여기에서 붙잡혀 탈영병 취급이나 받다가 또다시 누군가의 쓰다 버릴 졸병으로 편입되기는 싫다.

문제는 식료품점과 농협을 잇는 구간에 잔뜩 자빠져 있는 좀비의 시체들이었다. 레토나에 탄 장교들이 이 길을 지나 어딘가로 갔을 때에는 없던 시체 더미.

그 부자연스러운 광경을 보고도 과연 그냥 지나쳐 줄 것인지…… 진우는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입술을 움직여 작은 목소리로 계속 중얼거렸다.

제발 그냥 지나가라. 좀비 시체, 너희들도 많이 봤잖아. 그냥 눈살 한 번 찌푸리고 지나가 다오…….

끼익―

하지만 브레이크 소리가 울리며 차량들이 멈춰 섰다. 그리고 진우는 의외로 덤덤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럼 그렇지, 내가 언제 운이 그렇게 좋았다고. 후우~

잡히기는 싫으니 이제 숨어야 한다. 진우는 발소리를 죽여 골목 안으로 조금씩, 조금씩 걸어 들어갔다.

“이 시체들 뭐야? 여기에서 교전이 있었나 본데? 야! 저기 저 죽어 있는 병사 확인해 봐. 저거 우리 애 아니야?”

“야, 빨리빨리 내려!”

정신없이 떠들어 대는 장교와 부사관들, 병사들의 복창과 전투화 소리. 사거리는 순식간에 장날처럼 왁자지껄해졌다.

아침나절에 그렇게 무성하던 안개가 그리워진다. 안개 속에 숨어서라면 여기에서 벗어나기도 그리 어렵지 않을 텐데.

“우와~ 쩐다.”

“뭐야, 이 새끼야! 뭘 보고 쩐다 만다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어! 야! 너희 사주경계 똑바로 안 해?”

“중사님, 이 좀비들 말입니다. 전부 대가리에 한 방씩만 뚫려 있습니다.”

“여태 좀비가 대가리 뚫려야 죽는 것도 몰랐어?”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다른 데는 관통상이 없습니다. 대가리만 날린 겁니다.”

“……그러면 저격이라는 이야긴가? 저격을 할 만한 데가…… 야, 너희! 저 건물 올라가 봐. 그리고 너희! 저 죽은 애 총 어디 있어? 빨리 찾아!”

“소대장님! 저희 중대 애 맞습니다!”

“걔는 왜 죽었어? 엉? 이거 무슨 상황이야? 왜 터널 경비하던 놈이 여기에 시체가 돼서 누워 있어? 초소에 무전 때려! 야! 걔도 총상 있어?”

“그렇습니다! 아! 실탄도 분실된 것 같습니다!”

고요하던 사거리가 멍청하고 시끄러운 대화들로 가득 메워진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워커 소리. 진우의 마음도 덩달아 다급해졌다. 이제 여기서 잡히면 아군 살해범으로까지 몰리게 생긴 상황이다.

아니야, 이 멍청이들아…… 너희 부하들이 군기가 빠져서 소주 가지러 왔다가 좀비한테 물려서 작살 난 거라고! 내가 죽인 건 좀비였어,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변명을 해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팔목 잘린 좀비의 총을 옆구리에 꽉 끼고 있는 채다.

삐이익―

골목으로 나 있는 창문을 최대한 조용히, 살살 당겨 열었다. 그러고는 얼른 그 안으로 몸을 던져 넣었다.

쿵―

마룻바닥이 조금 울렸지만, 이미 저 바깥의 농협 앞에서는 워낙 시끄럽게들 뛰어다니고 있어서 그 정도쯤의 작은 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아, 젠장! 하필이면…….”

고개를 들자마자 진우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깨진 유리창, 거기에 범벅이 되어 있는 핏자국, 마루 위에 길게 남은 피의 흔적.

아까 그 집이다. 끔찍한 시체의 모습을 보기 싫어 그냥 외면하고 나왔던 집. 옆집으로라도 갈까…… 하고 망설이는데, 골목 안으로 들어온 전투화 소리가 들린다.

저벅저벅, 진우는 얼른 안방으로, 그러니까 말라붙은 피딱지가 길게 라인을 그리고 있는 방향으로 뛰었다. 물론 피가 묻지 않은 부분만 골라 디뎠다. 그런 데에 발자국을 남길 만큼 멍청하지는 않다.

쿵,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뭔가가 걸려 더 이상 밀리지가 않는다. 반응을 보기 위해 한 번 더 세게 밀쳤다.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다. 좀비는 아니다. 진우는 문 사이를 비집고 힘겹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윽!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문과 벽 사이에 낀 시체를 보며 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비스듬히 기대앉은 중년 여자의 시체는 어디 한 곳 멀쩡하다고 할 만한 데가 없다.

난자당해 잘리고 베인 상처들은 끔찍하게 벌어져 있다. 피투성이의 몸을 끌고 간신히 집 안으로 도망 온 것인지, 여자의 주위에 다른 발자국은 없었다.

몸 전체 중 부러지고 뒤틀린 손가락과 종아리뼈는 뭔가 크고 무거운 무기를 막으려다가 박살이 난 것으로 보인다. 원망스럽다는 듯 홉뜬 눈과 쩍 벌어진 입은 그 어느 공포 영화의 장면보다 오싹하다.

그녀의 시체에서 가장 끔찍한 점은 머리가 온전하다는 사실이었다. 다시 말해 좀비가 아니었던 상태인데 이렇게 잔혹한 테러를 당한 것이다.

“아…… 농협 그 아저씨도 그렇고, 이 아줌마도 그렇고…… 이 동네 인심이 왜 이리 흉악한 거야? 왜 멀쩡한 사람을…….”

중얼거리며 방문을 닫는 동안에도 진우의 눈은 방 안 구석구석을 훑었고, 머리는 바쁘게 돌아갔다. 옆구리에 식칼이 꽂힌 채 죽은 아줌마의 일은 소름이 끼치도록 유감스럽지만, 일단 그 자신의 운명부터 챙겨야 한다.

이 방에 숨을까, 아니면 다른 방으로 옮길까?

“야! 나 엄호해라! 응? 확실히 해야 한다! 후우~ 후우~”

“네! 아, 알겠습니다!”

대문 밖에서는 병사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역할을 분담하고 있다. 아마 모든 집들을 다 수색하고 다니려나 보다. 그 겁먹은 목소리가 진우에게 아이디어를 주었다.

몰랐는데 이 방은 꽤 입지가 좋다. 진우는 대문을 열자마자 시각을 압도하는 검붉은 핏자국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저 겁먹은 놈들이 그렇게 불길한 기운이 가득한 곳으로 들어올 리가 없다. 그리고 만약 정말 간덩이가 부어서 이 방의 문을 연다고 해도, 섬뜩한 비주얼의 아줌마 시체가 그들을 물리쳐 줄 것이다.

하지만 이 각도라면 놈들이 시체를 바로 발견할 수 없는데…….

잠시 고민하던 진우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시체의 양쪽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차갑고 뻣뻣하고, 정말이지 엄청난 냄새가 난다. 하지만 진우는 이를 꽉 물고 문과 마주 보는 위치까지 여자의 시체를 끌어내 와 가장 효과적인 자세로 앉혔다.

그러고는 문이 완전히 열리지 않도록 베개 따위들을 받쳐 뒀다. 준비를 마친 진우는 원래 시체가 있던 자리에 서서 숨을 죽인 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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