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3. 멋진 신세계 (1) (183/449)


183. 멋진 신세계 (1)
2022.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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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는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이상하다. 너무…… 편안하다. 뭐지, 이 푹신함은?

자신이 파라다이스 모텔의 침대 위에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까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약간의 불안함마저 느꼈다.

딱딱한 바닥에서 잠이 들고, 새벽 공기에 부들부들 떨다가 깨어나던 습관이 이제는 아예 몸에 밴 모양이다.

아아, 맞아. 여기였지…….

머리맡에 놓여 있는 랜턴을 보자 어젯밤의 일들이 기억난다. 밤이 아주 깊어서야 새로 만난 사람들과 헤어지고 이 방에 들어왔다.

혼자 방을 쓴다는, 그 당연했던 일이 이제는 꽤나 어색하게 느껴져서 랜턴의 불빛을 한참이나 들여다본 후에야 겨우 잠이 들 수 있었다.

제니는 다시 침대에 몸을 눕히고 눈을 감았다. 간만에 느끼는 이 안락함을 좀 더 즐겨보고 싶다. 커튼 사이로 햇살이 비쳐 들지 않는 걸 보면 아직 아침이 밝지 않은 모양이니, 좀 더 여유를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잠시 더 누워 있는 동안 감각이 하나씩 살아나면서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창밖이 어두운 게 이른 시간이라서가 아니라 궂은 날씨 때문이라는 걸 깨달을 정도로 뇌도 움직임을 시작했다. 제니는 팔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일곱 시. 착한 어린이는 일어나야 할 시간이다.

“우웅~!”

길게 기지개를 쭉 켜고 침대에서 벗어나 문을 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벌써 복도를 서성이던 사람이 있다.

“아, 오빠. 일찍 일어나셨네요? 잘 잤어요?”

복도에 서 있는 유빈에게 제니가 인사를 건넸다.

으응, 안녕…… 손을 들어 보이는 유빈의 눈은 퀭하고, 얼굴에는 졸음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아무리 봐도 잘 잔 얼굴은 아니다.

“왜 그렇게 피곤해 보여요? 혹시…… 밤샜어요? 이 자리에서?”

“아니, 아니. 사실 난 일어난 지 얼마 안 됐어. 처음엔 삼식이가 먼저 보초 서줬거든.”

“그 오빠도요? 왜요?”

드르렁, 삼식이의 코 고는 소리가 우렁차다. 당연하다는 표정의 유빈은 눈짓으로 301호를 가리켰다. 태권소녀와 규영이 든 방이다.

“왜겠어, 낯선 사람끼리 어찌어찌 같은 공간을 쓰게 됐으니까 그렇지.”

“에? 뭐야…… 그거 감시잖아요. 믿는다면서요? 믿으니까 그 언니한테도 믿어달라고 했었잖아요.”

“믿는 건 믿는 거고, 그래도 또 해야 할 일은 해야지. 그건 별개의 문제인데.”

“그건 무슨 억지예요? 게다가 감시를 하려면 오빠가 아니라 보안관 오빠한테 부탁했어야죠. 오빠는 어차피 저 언니한테 못 이기니까.”

눈에 장난기가 데구루루 흐른 제니가 유빈을 놀리고 있을 때, 301호 문이 열리고 태권소녀가 얼굴을 내밀었다.

“아, 다들 일어났네. 잘 잤니?”

“네, 언니. 방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행이네.”

태권소녀가 쑥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막 일어난 척하고는 있지만, 그녀의 얼굴도 유빈만큼이나 지쳐 보여서 피곤이 뚝뚝 떨어진다.

아마 계속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남자들이 왔다 갔다 하는 인기척 때문에 복도에 나오질 못했던 모양이다.

제니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저렇게 자신이 깨어 있음을 알린 걸 보면, 어지간히 답답했던 게 분명하다.

제니는 그런 태권소녀의 행동에 안쓰러움과 기쁨을 함께 느꼈다. 아직 이 새로운 조합은 서먹서먹하기 짝이 없고, 서로에게 신뢰 같은 건 성급한 단어다.

그러나 적어도 상대방은 제니를 완충제 정도로는 생각해 주는 것 같다. 새 일행이 마음을 열기까지 그녀의 역할이 중요했다.

“뭘 해야 돼?”

유빈에게 고개를 돌린 태권소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 예상치 못한 질문에 유빈은 금방 답을 못하고 머뭇댔다. 지금까지 그들은 세 친구의 자연스러운 라이프 사이클 안에서 살아 왔다.

일어나면 당연히 다 같이 모여서 수다를 떨며 씻고 밥을 먹었다. 그다음에 유빈이나 보안관이 하자는 일을 함께했다.

거기에 신입이 끼어 있었고, 또 중간에 제니를 만나 함께 살기 시작했지만, 사이클에 변화는 없었다.

조금 쑥스러워하면서도 ‘밥 먹어’라고 말할 수 있던 건 그게 그들이 구해온 식량이고, 그 장소가 그들이 지켜낸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또 복지 센터의 구조가 뻥 뚫려 있어서 다 함께 모여 앉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는 애초에 사생활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만들어놓은 모텔이라는 곳이고, 아래층에 쌓여 있는 음식은 그들의 땀과 무관한 것들이다. 이래라저래라 하기가 망설여질 수밖에 없다.

“아침 먹으면 좋겠는데, 그…… 너희는 밥 어떻게 먹었었어?”

“어떻게라니? 대충 알아서 먹는 거지. 요리 당번 같은 건 따로 안 뒀어.”

식순이 역할을 시킬까 봐 불안해진 걸까?

태권소녀의 목소리에 다시 가시가 돋으려고 한다. 유빈은 다급하게 설명했다.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방식을 물은 거야. 어딘가에 다 같이 모여서 먹었는지, 아니면 따로 자기 방에서 먹었는지…… 뭐, 이런 거.”

아…… 그거.

태권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냥 너희가 하던 대로 해. 우리는 두 명뿐이니까.”

“그래. 그러면 30분 뒤에 내 방에서…… 뭐, 정확히 말하면 내 방은 아니지만, 어제 내가 304호에서 잤거든……. 거기에서 볼까?”

알았어. 규영이 깨울게, 라는 말을 남기고 태권소녀가 문을 닫자 유빈은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처음이다 보니 조심스러운 게 한두 개가 아니다. 옆에 와 있던 제니가 어깨로 툭, 치며 속삭인다.

“우와, 오빠, 저 언니한테 마음이 있나 보다. 얼굴이 아주 그냥 새빨개졌는데요? 새벽부터 복도에서 서성거리던 게 괜히 그런 게 아니었네. 그렇구나, 오빠는 강한 여자를 좋아하는 타입이었구나. 이런 거죠? 두근! 날 기절시킨 건 네가 처음이야.”

“하, 하하……. 네…… 여자한테 맞고 거품 문 사람입니다. 놀림 받아도 싸지요. 그냥 처음이라 말 한마디도 조심스러운 거야. 워낙 성격도 까칠한 것 같고, 괜히 오해 사고 싶지 않으니까. 아, 그리고 왜 보안관을 안 세웠냐면, 걔는 좀 쉬어야 돼.”

유빈이 중얼거리는 모습은 가히 걱정박사답다. 하지만 30분 뒤, 304호의 분위기는 그가 우려했던 것보다는 훨씬 호의적이고 밝았다. 스타트는 태권소녀가 끊어줬다.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그냥 내가 아침에 먹는 걸로 가져왔어.”

말로는 그렇게 했지만, 한쪽 발을 절며 들어온 그녀가 침대 위에 내려놓은 묵직한 봉투 안에는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이 골고루 들어 있었다.

즉석 밥, 즉석 죽, 통조림 반찬, 캔에 든 연어와 햄, 육포, 크래커, 봉지에 든 누룽지, 그리고 시리얼까지. 음료도 여러 가지여서 멸균 팩에 든 우유부터 물, 주스, 캔 커피. 거기에 종이컵과 일회용 식기도 있다.

누가 봐도 정말 신경을 써서 골고루 담았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아픈 다리를 끌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고마움은 더 컸다.

“고마워. 잘 먹을게.”

배낭에서 비상식량을 꺼내 먹어야 하나 어쩌나 망설이고 있던 유빈이 감사 인사를 하자 태권소녀가 무뚝뚝하게 몇 마디를 보탰다.

“다음부터는 안 가져다줄 거야. 음식 어디에 있는지 너희도 다 알잖아.”

“우리가 게을러서 안 가지고 왔냐? 네가 하도 도둑놈 취급하니까 또 그 소리 들을까 봐 무서워…… 읍!”

보안관이 또 입바른 소리를 떽떽거려서 유빈이 얼른 입을 막았다. 하여간 이놈은 전쟁의 화신 같은 놈이고, 분위기도 모른다. 태권소녀는 보안관을 힐끔 쳐다보더니, 고개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며 중얼거렸다.

“맘대로 하라고 말했잖아. 당연히 물건도 포함되지, 멍청이.”

“너, 사람 볼 줄 아는구나!”

멍청이라는 말에 꽂힌 삼식이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고, 신입도 술이 덜 깨 탱탱 부은 눈으로 킥킥거린다.

윽, 죽을 떠 넣으려고 입을 벌리던 유빈은 아주 작게 신음을 흘리며 턱을 잡았다.

으~ 인정하기 쪽팔리지만, 어제 맞은 곳이 아프다. 관절이 제자리에 있기는 한 건가…… 시험 삼아 몇 번 턱을 움직여 보다가 태권소녀의 시선을 느낀 유빈은 친절한 표정을 지으며 웃어줬다.

“아니, 아니. 괜찮아. 그냥 조금 부은 거야. 이도 다 멀쩡하고, 씹는 데도 문제없으니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미안하다고 한 적 없는데? 근데 너, 운동 좀 해야겠더라.”

태권소녀는 진지하게 대꾸했지만, 보안관과 삼식이는 깔깔거리며 좋아서 아주 죽는다.

허…… 흐흐…… 유빈도 씁쓸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이 건은 두고두고 아주 오래갈 것 같다…….

증인도 너무 많고, 게다가 그 증인들이 놀리기를 워낙 좋아하는 것들이라 잘하면 묘비에까지도 써줄는지 모른다.

‘여자에게 맞아 기절했던 남자 여기 잠들다’ 뭐, 이렇게…….

“근데 제니 누나, 한강으로 가던 길이라고 했죠? 우리도 같이 갈 수 있을까요?”

방에 들어오고부터 내내 오직 제니에게만 눈을 고정시키고 있던 규영이가 물었다.

“그러엄~ 당연히 같이 가지. 그런데 이렇게 비가 와서는 당분간 어려울 거야. 산책로를 따라 차를 타고 가야 하는데, 물이 안 빠지면 길이 막히거든.”

“좀 기다리다 보면 금방 마를 거예요. 그때까지 제니 누나도 여기서 안전하게 기다리면 되죠. 그치, 혜주 누나~!”

제니가 웃으며 말상대를 해주자 규영의 얼굴은 금방 홍조를 띠었다.

어제 칼을 휘두르며 저주를 퍼붓던 때와는 목소리도 달라져서 혀 짧은 소리로 귀염을 부린다. 시리얼을 떠 넣던 태권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기에 있다는 수용소인지 뭔지는 안전한 곳이 맞아? 어제 너희가 말한 그런 데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어?”

“그야…… 정부가 운영하는 데라고 했으니까요. 군대가 보호해 준다는 말도 있었고.”

“그거 그냥 찌라시에 적혀 있던 거잖아. 인쇄기만 있으면 그런 거는 누구라도 찍어낼 수 있어.”

태권소녀의 우려를 확실하게 안심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제 그 비디오를 보고 난 후부터 세 친구 역시 모든 게 혼란스러웠으니까. 유빈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우리도 그 부분이 영 찜찜하긴 해. 처음 출발할 때에는 그저 밥 주고 재워준다고 하니까 그 전단지 하나만 믿고 출발한 거지. 태양 그룹같이 큰 회사가 그런 짓을 할 거라는 상상도 못 했었고, 게다가 우리 살던 데에 워낙 좀비가 많이 몰려와서 더 버티고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거든.”

“여기도 별로 나을 거 없어. 이제는 큰 도로에 좀비가 없는 시간이 더 적을 정도니까. 그것들은 한번 몰려들기 시작하면 감당이 안 돼. 너희는 무슨 실수를 저질렀어? 어제 보니까 담배 피우는 녀석들도 있던데.”

태권소녀의 시선이 삼식이와 신입에게로 향한다. 신입은 움찔했지만, 삼식이는 태평하게 물었다.

“너도 담배 이야기 하는 것 보니까 무슨 상관이 있긴 하나 보네. 정말 좀비들이 그 냄새 맡고 오는 거야? 아는 거 있어?”

“몰라. 확실하게 아는 게 있었다면 어제 네가 담배 피울 때 못하게 했겠지. 그냥 나도 누군가에게서 주워듣고 말하는 것뿐이야. 얼마 전에 누가 그러더라고. 담배 피우는 놈이랑 같이 숨으면 좀비들이 거길 귀신같이 알고 쫓아온다고. 그러니까 조심하자는 분위기였어. 혹시 모르는 일이면 안 하는 게 나으니까……. 그럼 너희는 담배 계속 피웠다는 거네? 그래도 괜찮았어?”

“아니, 뭐…… 딱히 맘대로 피운 거는 아니고, 우리도 신경이 쓰이기는 했는데…….”

삼식이가 머뭇거리자 태권소녀가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남자애들 방에 올라가 보면 전자 담배 있을 거야. 그걸로 바꾸든가.”

“별걸 다 가지고 있네. 그건 안 피워봤는데…… 정말 담배 피우는 맛이 나기는 할까? 맞다. 그리고 그거, 전기 쓰는 거잖아. 충전을 어떻게 해? 아, 그것도 보조 배터리를 쓰면 되나?”

삼식이가 자문자답을 하는 동안 곁에 앉은 신입은 ‘그거 다 소용없어. 괜히 뻘짓거리하는 거야’라며 손을 내저었다. 제니가 태권소녀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으며 물었다.

“언니, 혹시 구급약도 가지고 계세요? 파스나 소염제나 압박붕대 같은 거. 언니 발목 치료해 드릴게요. 지금도 많이 부었어요.”

“돼, 됐어. 그런 거는, 그냥 내가 하면 돼.”

태권소녀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에잉, 혹시 의사 놀이를 같이하게 될 수 있을까 들떴던 삼식이가 괜히 아쉬워한다.

휘이이이~

음식 냄새도 뺄 겸, 사람들의 체취도 뺄 겸해서 열어둔 창문 사이로 강한 악취가 바람을 타고 날아 들어왔다.

좀비들 특유의 그 지독한 냄새는 비가 오는 날에도 예외 없이 강렬하다. 그리고 규모에 비례해서 냄새의 스케일도 달라진다.

읍, 유빈이 얼른 창문을 닫았다. 그래봐야 이미 들어온 냄새는 그대로다. 태권소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익숙해질 거야. 요즘은 하루에도 열댓 번씩 저렇게 지나가니까.”

“열댓 번이라고? 정말 그렇게 자주?”

“낮이든 밤이든 정찰 나가면 일고여덟 번은 봐. 그거 곱하기 2는 할 줄 알잖아.”

행렬이 길게 뻗은 도로를 통과하는 데만 30분은 걸릴 텐데, 그런 게 열댓 번이나 반복된다면 온종일 좀비들이랑 사는 거나 다름없다.

골목 안으로 숨어 들어와 있다고는 해도 대로까지 겨우 몇십 미터뿐인데…….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유빈은 아찔함을 느꼈다. 번화가를 버리기로 결정했을 때, 좀비들은 1킬로미터 밖에 있었다. 그 정도도 무섭다고 도망을 쳤건만…….

물론 그때 그들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쉘터까지 한나절이면 닿을 수 있다는 섣부른 희망뿐이었지만, 하여튼 그렇게 텅 빈 곳을 버리고 온갖 고생을 해서 도착했더니 오히려 더 낯설고 힘든 환경이라니……. 자신의 멍청함에 새삼스레 질린다.

하지만…… 괴로워하고 자신을 연민한다고 해서 환경은 바뀌지 않는다. 환경을 바꾸려면 끊임없이 보고, 생각하고, 발버둥이라도 쳐봐야 한다.

때로는 그 발버둥이 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진다고 해도 그저 얌전히 슬퍼하다가 죽어줄 생각은 없다.

후우~ 한숨을 삼킨 유빈은 고개를 들고 애써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 밥 다 먹었으면 우리도 슬슬 정찰 한 번 나가봐야지?”

***

“으, 머리야…….”

잠에서 깬 진우는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꽉 눌렀다. 바로 근처에 뒀던 생수병을 벌컥벌컥 들이켜도 갈증은 가시질 않고, 온몸은 열이 펄펄 끓고 쑤신다.

어후~ 젠장.

겹겹이 덮었던 담요를 걷어내고 몸을 일으켜 소파 등받이에 기대는 그 간단한 동작을 하기 위해 진우는 이를 악물어야 했다.

더럽게 아프다. 하긴 그 비를 다 뒤집어써 가며 밤새도록 난리를 쳤던 걸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다.

그나마 이 농협 사무실 소파에서 곰팡내 나는 담요라도 덮고 잤으니 이 정도지, 바람 맞고 찬 바닥에서 쓰러졌더라면 아마 일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약. 약 좀 먹었으면 좋겠다…….”

얼굴을 쓸어 붙어 있던 잠을 털어내고 바닥에 뉘어둔 총을 버릇처럼 집으려던 진우는 가벼운 비명을 질렀다.

윽―!

잊고 있었다. 어제 쌀집에 숨어 있던 좀비, 그 개새끼와 총으로 줄다리기를 하다가 유리에 찢긴 오른팔을.

후우~ 진우는 몸 전체를 휘감는 격통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팔을 묶어둔 스타킹을 풀었다.

찐득하게 마른 피딱지와 진물이 뜯겨 나가면서 날카로운 새 통증을 준다.

크흐흐흐~ 씨발~

진우는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애매한 소리를 내며 상처를 살펴봤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직 온전히 붙지 않았다. 그리고 문틀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조각들도 점점이 박혀 있다.

“아아, 정말…… 좃같아서 진짜.”

눈에 보이는 페인트 조각과 유리 조각들을 떼어내는 동안 찌릿찌릿한 고통 때문에 손가락이 벌벌 떨린다. 진우는 훈련소에서 맞았던 파상풍 예방주사가 진짜 효과가 있는 것이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다행인 점을 고르라면 힘줄이 찢겨 나가거나 신경이 다치지는 않은 것 같다는 정도이다. 아니었다면 어제 그만큼의 저격은 해낼 수 없었을 테니까.

그래도 불안해서 진우는 손가락을 오므렸다 폈다 하며 계속 테스트를 했다. 방아쇠를 당기는 이 감각이 그가 가진 힘의 9할이다.

“옷이나 나나, 아주 너덜너덜하구나.”

군데군데 찢기고, 피 얼룩이 지고, 구멍이 난 군복을 보면서 진우가 한숨을 쉬었다. 우스운 건 이 허접하고 꼴 보기 싫은 옷이 어느새 몸에 배서 편안해졌다는 것이다.

주머니의 위치나 개수도 그렇고, 여차하면 숲속에 들어가 위장을 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해도 그렇다. 카모플라주 무늬가 들어간 아웃도어 재킷을 구하기 전까지는 이걸 버릴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저씨는 편해요?”

전술 조끼를 걸치고 축축한 전투화 사이로 발을 집어넣던 진우가 사무실 구석으로 시선을 돌려 중년 사내의 시체에게 말을 걸었다. 어제 사무실에 뛰어들었을 때 그를 놀라게 했던, 그 교살당한 시체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놀라기 싫으니까 뭐라도 덮어두고 자야지 생각은 했는데, 자꾸 눈이 감겨서 그냥 둔 채 잠이 들고 말았다. 버릇처럼 생각이 혼잣말로 입 밖에 나온 것인데, 듣자마자 못할 말을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편할 리가 없지. 저렇게 되어 있는데.”

피가 몰려 부어 있는 사내의 얼굴을 보며 진우가 자신에게 답을 해줬다.

튀어나온 눈, 길게 빼문 혀, 검게 변한 안색…… 어디 하나 편해 보이는 구석이 없지만, 무엇보다도 퉁퉁한 목을 꽉 조이고 있는 넥타이가 가장 신경 쓰인다. 오래 보고 있을 만한 모습이 아니었다.

“와! 이거, 뭐가 이렇게 뿌옇게…….”

창가로 다가가자 블라인드 사이로 안개가 자욱하게 낀 바깥의 풍경이 들어온다. 강원도니까 안개가 놀라울 것은 없지만, 오늘은 유별나게도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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