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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둥지 (5) (180/449)


180. 둥지 (5)
2022.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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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태권소녀의 애원에도 삼식이는 흔들리지 않았다.

“셋!”

그렇게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쾅! 소리가 나도록 요란하게 화장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안에서 분노로 떨리는 앳된 목소리가 소리쳤다.

“혜주 누나 그만 괴롭혀, 이 개새끼야! 죽여 버릴 거야!”

모두의 시선이 화장실 내부로 향한다. 거기에는 휠체어에 탄 소년이 있었다. 한 손에는 식칼, 한 손에는 플래시. 아직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소년의 얼굴은 분노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너냐? 네가 혜주 누나 괴롭혔냐? 응? 이 씨발!”

소년은 꼭 쥔 식칼을 들어 보이며 삼식이를 위협한다. 너무도 예상 밖의 광경이어서 모두들 할 말을 잃었다.

“규영아! 문 열지 말랬잖아!”

태권소녀가 소년을 감싸며 주저앉자 소년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치만, 흐윽! 누나가 힘들어하잖아. 으으~ 이 나쁜 개새끼들아! 우리 누나가 나 때문에 이런 더러운 새끼들한테! 나 같은 건 죽어버렸어야 했는데! 으앙!”

신입이 술에 잔뜩 취해서 나불거린 말이 맞았다. 삼류 신파 영화도 아니고, 이게 무슨…….

난데없는 울음바다에 세 친구와 제니는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부상당한 여자가 휠체어 탄 미성년자를 보호하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삼식이는 그런 비밀을 억지로 까발리려 들었으니…….

상황만 놓고 보면 이제 정말로 보안관 일행은 나쁜 놈들이 되어버린 거다. 모두의 등골에 식은땀이 주르륵 흐른다.

“경순이 아니잖아, 이 바보 새끼야! 애초에 머리 나쁜 새끼가 왜 갑자기 예리한 척 추리는 한다고 지랄을 해 가지고. 너, 이 상황 어떻게 수습할 거야?”

보안관이 진땀을 뻘뻘 흘리며 삼식이에게 귀엣말로 타박을 한다. 어지간해서는 뻔뻔함을 잃지 않는 삼식이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상황이 의심하기 딱 좋았잖아……. 여러 가지 단서로 볼 때.”

“단서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아, 나 미치겠다. 쟤 왜 저렇게 우냐? 이러면 진짜 우리가 큰 죄 지은 거 같잖아.”

보안관은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억울하다. 냉정히 말해서 우리 편은 계속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다가 그저 문 한 번 열어보자고 했던 것뿐인데……. 문제는 그 문 안에서 나온 상대가 너무 엉뚱한, 해결 불능의 존재인 것이다.

“아, 그 새끼 존나 징징거리네. 씨발, 나라 잃었냐? 명색이 사내대장부라는 게. 남자는 말이야…… 이 새끼야, 딱 일생에 딱 세 번 우는 거…… 읍!”

알딸딸하게 취한 신입이 되도 않는 꼰대 소리를 늘어놓다가 유빈에게 입을 틀어막힌 채 뒤쪽으로 끌려나갔다.

“저기, 진정해. 그만 좀 울어.”

제니가 달래보려 다가가자 보안관이 가로막는다.

“오빠, 왜요? 저렇게 울다가 정말 기절할 것 같아요.”

“쟤 칼 있어. 게다가 이빠이 흥분해 있고. 애든 어른이든 칼로 그으면 다쳐. 가까이 가지 마. 야! 걔 칼 버리라고 해!”

보안관이 태권소녀에게 소리치자 휠체어에 탄 소년이 곧바로 받아쳤다.

“으아아! 나를 죽이기 전에는 이 칼을 빼앗을 수 없을걸? 죽은 다음에도 악귀가 돼서 평생 저주할 거다! 죽는 순간 똑똑히 보고 다 기억할 거야! 너도! 너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멘트를 잘도 진지하게 날린 소년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향해 플래시를 비추며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

“너도 저주할 거야, 덩치 큰 바보 새끼야! 너도! 그리고 너! 어…… 어라?”

제니의 얼굴을 비춘 소년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한동안 그녀의 얼굴에 멈춰 있던 플래시가 천천히 아래로 훑고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 가슴에서 멈췄다. 확신을 얻은 소년은 큰 소리로 외쳤다.

“제니?”

조금 전에 통곡하던 때와는 목소리의 톤이 완전히 달라졌다. 눈물이 쏙 들어갔다.

“우와, 짱이다! 진짜 제니야! 누나, 저거 제니라고!”

저거? 이런 싸가지…… 이 새끼야, 저분이라고 해야지! 라며 나서려던 보안관을 제니가 얼른 제지했다.

제니? 태권소녀가 반문하자 소년은 답답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 누나! 핑크 펀치 제니!”

그제야 태권소녀도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다.

참 일찍도 알아봐 주는군. 그만큼 긴장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상태였단 의미겠지.

어쨌든 이제는 대화가 가능할 것 같아서 제니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진정이 좀 됐니?”

“어…… 어, 네. 네!”

“그럼 우리 이제 이야기 좀 할까? 이야~ 안 우니까 훨씬 잘생겼네.”

“정말이요?”

땡그렁―

소년의 손에서 힘없이 떨어진 칼이 화장실 타일을 때렸다. 태권소녀가 복잡한 표정으로 제니를 바라본다. 제니는 자애로운 미소를 곁들여 손을 내밀었다.

“그러엄~ 자, 일단 나오자. 누나가 도와줘도 될까?”

그 후에는 일이 매끄럽게 진행됐다. 연예인 파워가 톡톡히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태권소녀도 처음보다는 훨씬 경계를 푼 시선으로 보안관과 나머지 남자들을 대했지만, 완전히 믿는 눈치는 아니다.

양쪽으로 갈라 앉은 두 팀의 사이에 제니는 플래시를 켜뒀다. 은은한 조명은 대화하는 상대의 마음을 연다. 유빈이 이야기의 물꼬를 텄다.

“자, 그러면 우리부터 먼저 소개를 할게. 전에도 말했다시피 우리는 이렇게 다섯 명이 전부야. 첨부터 남자 넷, 여자 하나였어. 태릉 위쪽에서 여기까지 정말 힘들게 왔고, 동료가 필요해. 믿을 만한 동료. 제니는 따로 설명 안 해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나는 유빈이야. 그리고 저기 덩치 큰 애는…….”

보안관이 말을 자르며 끼어든다.

“아니, 무슨 미팅하냐? 그딴 호구조사 말고 헬리콥터 이야기부터 해야지! 그거 타면 다 죽는다고. 야, 너희 나머지 어디 있어? 걔네들한테도 빨리 알려야 돼. 까만 헬리콥터 타고 구조대라고 구라 치고 다니는 새끼들이 있단 말이야. 아마 너희도 그 방송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차피 이 근처로 날아다녔으니까.”

“뭐라고?”

태권소녀의 미간이 깊은 상처처럼 팼다.

아, 좀 한 번에 알아먹어라. 보안관은 귀찮아하면서도 한 번 더 반복해서 설명을 해줬다.

“구조해 준다고 다니는 헬리콥터가 있는데, 그거에 타는 순간 저세상행이라고. 그것도 아주 좃같은 방법으로 죽으니까 절대 타지 말라는 이야기야. 그거 알려주려고 기껏 찾아와서 하루 종일 헤맸는데 도둑놈 취급이나 당하고, 에휴~ 지랄 맞게. 하여튼, 뭐, 그건 지난 일이고, 너도 빨리 네 일행들한테 알려. 이 밤중까지 헬리콥터가 돌아다닐 것 같지는 않지만, 미리 조심해서 나쁠 것 없잖아. 어린애는 우리가 봐주고 있을게. 저거 봐라, 저 새끼. 눈이 아주 제니한테 가서 꽂혔네. 야, 인마. 시선 관리 좀 해.”

“……거짓말하지 마. 군인들이 그런 짓을 왜 하겠어?”

“걔들 군인 아니야. 태양 그룹 직원들이 군인인 척 구라 치는 거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을 것 같아? 대체 무슨 꿍꿍이야, 너희들?”

“이거 봐, 삼식아. 내가 안 믿을 거라고 했지? 그러니까 어젯밤에 안 오길 잘한 거야. 괜히 그 깜깜한데 위험하게…….”

보안관이 ‘그것 봐’ 하는 표정으로 돌아보자, 삼식이가 진지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정말이야. 우리한테 증거도 있어. 거기에서 일하던 사람이 찍은 건데…… 아참, 배낭 저쪽 여관에 두고 왔지? 하여튼 그 사람 핸드폰에 비디오가 엄청 많이 있어. 잡아온 사람들 좀비 밥으로 주는 비디오.”

“……그런 게 어떻게 너희 손에 들어갔어?”

태권소녀의 목소리가 떨린다.

음, 이야기하자면 긴데…… 삼식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렇게 하자. 백 번 듣는 것보다 비디오 한 번 더 보는 게 나으니까, 내가 지금 가서 핸드폰을 가져올게. 넌 경순이랑 애들한테 알려서 이리로 오라고 해. 같이 보면 되잖아. 아, 혹시 보조 배터리 있어? 그거 아마 간당간당할 텐데. 어제 하도 많이 주물럭거려서.”

“……애들 여기 없어.”

“응? 좀 크게 말해. 안 들려.”

“애들 여기 없다고! 다 그 헬리콥터 탔단 말이야!”

태권소녀가 얼굴을 감싸 쥔다. 휠체어 소년도 다시 울상이 되었다.

하아아~ 삼식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파라다이스 모텔 314호실에는 잠시 무거운 정적이 찾아왔다.

“너희가 봤다고 하는 비디오. 그게 사실이 아닐 가능성은 없어?”

침묵을 깨고 태권소녀가 물었다. 그녀의 질문이 내포한 간절함을 알기에 유빈은 잠시 유혹을 느꼈다.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다는 유혹. 기르던 개가 죽었을 때 시골의 친척에게 보냈다는 거짓말로 아이들을 안심시키는 부모들처럼…….

하지만 그녀는 어린아이가 아닐뿐더러 이 일에는 자신들의 목숨도 걸려 있다. 냉정하게 바라보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이다. 유빈은 딱 잘라 말했다.

“아니, 그럴 가능성 없어. 증거가 너무 확실해.”

“내 눈으로 보기 전에는 안 믿어!”

태권소녀가 고함을 지르자 삼식이가 곧장 일어났다. 금방 가서 핸드폰 가져오겠다며 방을 나서려 할 때, 태권소녀가 다급하게 삼식이를 불러 세운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삼식이를 마주 보지도 못하고 태권소녀가 모깃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냥…… 가지고 오지 마. 안 볼래.”

그러고는 넋 나간 얼굴로 보안관과 삼식이, 제니의 얼굴을 차례로 돌아본다. 친구들 모두 조금 전 유빈이 단호하게 한 말에 긍정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흑! 으으으흑~!”

다시 머리를 감싸 쥐고 있던 태권소녀가 소리 죽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유빈이 물었다.

“그래도 다행히 너랑 얘는 여기 있어서 살았네. 다른 애들은 다 그 헬기에 탔다면서?”

후우~ 태권소녀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닦아내고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본다.

“어제…… 너희들 가고 좀 지나서 헬리콥터 두 대가 왔어. 구조대라고 하더라. 정말 그렇게 보였고. 우린…… 큰길에서 감시를 하고 있었어. 손을 흔드니까 헬기에서 군인들이 내려와서 그물망 안에 들어가라고 하는 거야. 수용소로 데려가 주겠다고. 그때 내가…… 내가 기다려 달라고 했어. 일행이 더 있으니까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그리고 여기로 뛰어왔어. 야간 감시조 애들이 쉬고 있었거든. 왔더니 애들도 벌써 뛰어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어. 걔들도 확성기 소리를 들었으니까. 구조대래! 내가 소리를 질렀지. 바보처럼 잔뜩 들떠서……. 그런데 5층에서 내려오는 애들 중에 규영이가 없는 거야. 뭐…… 이해는 해. 다들 흥분해서 자기 한 몸 챙기기도 바빴을 테니까. 그래서 내가 올라왔지. 멍청했어. 두 번 왕복하면 되는 거였는데, 급한 마음에 규영이를 업고 휠체어까지 들고…….”

“그러다가 계단에서 굴렀구나? 여기는 그때 다친 거고?”

보안관이 태권소녀의 오른쪽 발목을 가리킨다. 긴 트레이닝복과 신발에 가려져 미처 몰랐지만, 지금 자세히 보니 꽤나 부어 있다. 태권소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멍청해서 하마터면 규영이까지 죽을 뻔했어.”

“아니야! 나 다치는 거 막으려다가 그렇게 된 거잖아! 내가 짐이 돼서!”

휠체어소년이 태권소녀를 두둔한다. 보안관은 소년의 말을 끊었다.

“누가 짐이고 뭐고 그런 이야기는 됐고…… 너, 치료는 제대로 했어? 그냥 놔뒀다가 일주일 고생하면 나을 거 한 달 내내 고생한다.”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어. 어제 잠깐 고생했지만…….”

그 거짓말을 하는 동안에도 태권소녀의 얼굴에서는 굵은 땀이 뚝뚝 떨어졌다. 조금 전 남자들과 난투를…… 아니, 일방적으로 죽기 살기의 주먹질을 해 댔던 게 어지간히 무리였던가 보다.

그렇게 계단에서 구른 뒤 태권소녀는 다시 소년을 업고 절룩이며 한 계단씩, 한 계단씩 걸었다.

자신과 규영이가 합류할 때까지 당연히 기다려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불안하지는 않았다. 정 급하면 누군가 데리러 올 수도 있는 일이고.

그렇게 비지땀을 흘리며 겨우 한 층을 내려왔을 때, 머리 위로 지나가는 프로펠러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또 한 대. 두 대의 헬기가 모두 날아가 버린 것이다.

태권소녀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잠시 멍해 있었다.

설마…… 버림받은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군인들이 왜 하필 나만 내버려 두고……. 그리고 군인들이 출발하겠다고 해도 다른 친구들이 그걸 얌전히 수긍했을 리가 없다.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보름이 넘는 시간 동안 서로 의지하면서 목숨을 걸고 함께 싸운 동료인데…….

설령 다른 사람들은 다 그럴 수 있다고 해도 경순이 언니만큼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혼자만 피신할 만큼 의리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쨌든 떠나간 헬기는 돌아오지 않았고, 옥상에 올라가 기다리던 태권소녀는 구름 속에 달이 떠오른 이후에야 깨달았다. 자신이 여기 버려졌다는 것을…….

“그 일로 맘 상해 있을 때 우리가 온 거구나. 흠, 하필이면 한창 예민해져 있을 때……. 혼자만 남겨졌지, 몸은 불편하지, 게다가 지켜야 하는 애도 있지. 우리가 믿을 만한 사람들인지 아닌지도 그때는 확실히 몰랐을 테고.”

“난 지금도 너희 별로 안 믿는데?”

태권소녀의 퉁명스러운 말에 유빈은 미소를 지었다.

“믿어도 돼. 아니, 믿어줘. 나도 너를 믿을 만하다고 생각해.”

“뭘 보고 나를 믿는다는 거야?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너, 말은 이렇게 사납게 해도 모질지 못한 애인 거 다 알아. 아까 나 덮칠 때 만약에 그게 주먹이 아니라 칼이었다면 난 지금쯤 저세상에 있을걸? 칼까지는 아니더라도 망치나 그 정도만 됐어도 턱뼈가 작살났을 테고. 너 엄청 무섭고 긴장했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일단 한 수 접어준 거잖아.”

“누, 누가!”

태권소녀의 얼굴이 빨개진다.

“그냥 주먹만으로도 충분했을 뿐이야, 너 같은 약골 상대로는…….”

“그런데 저 애새끼는 왜 변소에 처박아뒀던 거냐? 저까짓 놈 누가 욕심 부린다고. 혹시…… 쟤 무슨 엄청난 사연이 있거나 그런 새끼인가? 재발 2세라서 현상금이 붙었다거나…….”

맥주를 가지고 올라와 홀짝거리던 신입이 규영을 가리킨다. 규영은 곧바로 받아쳤다.

“네 상상력은 그게 전부냐? 출생의 비밀? 막장드라마 어지간히 봤나 보다? 혜주 누나는 그냥 나를 보호해 주려고 했던 거야! 숭고한 희생이라고!”

규영아…… 태권소녀는 소년을 진정시켰다. 보안관 일행이 정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저 숨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화장실 문을 닫기 전, 그녀는 규영에게 신신당부를 했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문을 열지 말라고. 꼭 돌아와서 구해줄 테니까 3, 3, 7 노크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절대로 문을 열지 말라고.

무슨 수모를 당하더라도 그 꼴을 규영이가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몸이 불편한 아이를 단지 거추장스럽고 손이 많이 간다는 이유만으로 죽이려 드는 놈들도 있다. 인철이도 그런 부류였으니까.

“너희 몇 명이었는데?”

유빈이 물었다.

“나까지…… 스물세 명 남았었어. 계속 줄어서.”

“그럼 널 놓고 간 게 말이 되네. 들어봐. 아마 경순이도 너랑 같이 가겠다고 버텼을 거야. 그런데 힘으로 끌고 갔거나 다음 헬기편으로 온다고 속이거나 했겠지. 스물한 명이나 스물세 명이나 큰 차이 없는데, 차라리 그 시간에 한 군데 더 도는 게 나으니까.”

“걔들을…… 원망했었어. 후우~ 정말 바보처럼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날 버리고 간 배신자라고만 생각해서……. 내가, 부르러 오지만 않았다면 여기 있던 애들은 살 수 있었는데. 내가 죽인 거야…….”

또다시 눈가가 촉촉해진 태권소녀를 제니가 가만히 안아준다.

“아니에요! 언니 잘못이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 나쁜 거지, 언니는 아무 잘못 없어요. 그리고 언니는 도와주려고 했던 거잖아요. 저 같은 겁쟁이처럼 도망치지 않고…….”

제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마 테라와 헤어지던 때, 도와달라고 내민 그녀의 손을 잡아주지 못했던 것이 두고두고 가슴속 칼날이 되어 자신의 가슴을 후벼 파고 있을 터였다.

공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태권소녀의 울음소리는 더 커졌고, 소년까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난감해진 것은 남자들이다.

“아…… 난 담배 좀 피워야겠어.”

여자 전문가인 삼식이까지 신입과 함께 빠져나가 버린다. 경순이를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생각에 잠시나마 어지간히 설렜을 녀석의 심정을 알기에 참으라는 말도 못 했다.

방에는 보안관과 유빈만 남았다.

하아아…… 저절로 한숨이 난다. 머쓱할 뿐 아니라 우는 소리를 듣고 있기도 괴로워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

하지만 아직 낯선 사람들과 제니만 남겨두고 자리를 비울 수도 없어서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버텨야 했다. 시간이 너무도 더디게 간다. 아까부터 소변을 보지 못한 유빈에게는 더욱 그랬다.

***

“아유, 강 소위님도 참! 그렇게 농담하시면 가희는 정말로 믿는단 말이에요.”

가희가 애교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소위의 가슴을 두드렸다. 미녀의 손길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젊은 장교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다.

“농담이 아닙니다. 정말로, 진짜 아름다우십니다. 가희 씨가 커피 가져다주실 때마다 보면 뒤쪽에서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빛이 나요. 지금도 문 여시는데 저는 이게 꿈인가 해서…….”

“호호호! 강 소위님, 말씀을 너무 잘하신다. 바람둥이신가 봐. 조심해야겠는걸요. 이러다가 홀랑 넘어가 버릴까 봐 무섭네요. 가희는 순진해서 잘 상처 받는데…….”

말을 하는 내내 가희는 쉬지 않고 강 소위의 어깨와 팔을 만지고 쓸어내린다. 호감을 가진 여자의 모습을 연기하기 위해 계속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후리기 전문가에게 걸려든 것도 모르고 강 소위의 표정은 기대와 흥분, 그리고 승리감으로 도취되어 있다.

연예인이 나에게 커피를 가져다주고 친근함을 표시하고 있다. 그것도 모두 잠이 든 깊은 밤에 몰래 찾아와서…… 이건 신호일지도 모른다.

가희의 콧김이 닿을 때마다 그 이상을 상상하며 그의 욕망은 부풀었다. 장교라는 완장을 달고 있지만 이제 겨우 스물다섯. 세상과 여자는 그에게 거의 미지의 영역과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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