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둥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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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둥지 (4)
2022.02.26.
“술 남기는 사람 없기. 안주도.”
술병을 뜯기 전에 보안관이 말했다.
응? 무슨 의미야?
파라다이스 모텔 2층 특실에 앉아 있던 여덟 개의 눈동자가 보안관의 얼굴로 향한다.
“잔뜩 있다고 막 까놓기만 하고 안 먹고 버리지 말자는 이야기야. 우리가 땀 흘려서 구해온 게 아니니까.”
곁에 쌓여 있는 박스를 두드리며 보안관이 설명을 하자 삼식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하, 그런 의미로…… 동감. 딱 맥주 세 병씩만 마시자. 깔끔하게.”
그렇게 나름 장중하고 검소하게 시작을 했건만, 한 시간도 못 돼서 주변에는 빈 맥주 캔들이 굴러다니고, 소주도 몇 병이나 비워졌다. 근 보름 만에 가지는 술자리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야, 한잔하자? 씨발, 너 아까부터 계집애처럼 뒤로 자꾸 빠진다?”
버터 구이 오징어를 질겅거리면서 다가온 신입이 소주를 권한다.
휴, 얘는 왜 술만 취하면 나한테 와서 이러게 찍자를 놓을까.
유빈은 웃는 낯으로 손사래를 치며 거짓말을 했다.
“아, 미안, 미안. 난 소주 잘 못 먹어. 지금 딱 정량 채웠어.”
암만 바리게이트를 다시 세워놨다고는 해도 정신 줄을 잡고 있는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야 된다. 유빈은 세 번째 맥주 캔을 딸 때, 그걸 막잔으로 정했었다.
“신입, 왜 자꾸 거기 가서 치근거려어~ 유빈이 좋아해? 암만 그래도 그리로 도망가면 안 되지. 너, 내가 준 잔 아직 안 비웠잖아.”
신입 킬러 삼식이가 얼른 커버에 나섰다. 보안관은 제니의 곁에 바짝 달라붙어서 그녀의 얼굴을 안주 삼아 홀짝거리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하긴, 예전에도 제니의 얼굴이 캔에 박혀 있는 콜라만 골라 마시던 녀석이니까 지금 이 상황은 일종의 자아실현인 셈이다.
“……맛있다.”
맥주 한 모금을 넘기고 나무젓가락으로 고추 참치 통조림을 먹으면서 유빈은 인간의 간사함을 절감했다.
잡혀간 녀석들이 불쌍한 것도 맞고, 이렇게 남이 쟁여둔 걸 마음대로 집어 먹는 게 염치없는 짓이라는 것도 잘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 하고 있으니 몸이 즐겁다.
건너편에 앉은 제니가 찡긋 윙크를 보내며 맥주 캔을 들어 올린다. 유빈도 마주 웃어줬다. 제니는 보안관과 캔을 부딪치고 원샷을 외쳤다.
랜턴의 불빛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뭐랄까…….
어이, 어이, 뭐해, 이 새끼야. 유빈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머리를 흔들고 두 손으로 얼굴을 쓱쓱 비볐다.
안 그러려고 의식하는데도 자꾸 시선이 그녀에게로 가 꽂힌 뒤, 움직일 줄을 모른다. 대체 무슨 분란을 만들려고…….
분위기 전환을 해야겠다 싶어서 유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부터 방광도 적잖이 빵빵하다.
“응? 어디 가, 유빈아?”
소주 세례를 퍼부어 신입을 공격하고 있던 삼식이가 물었다.
“……오줌 눌 건데.”
“뭐하러 멀리 가? 여기에서 눠. 화장실 있잖아.”
보안관이 방에 붙은 욕실을 가리킨다. 칸막이가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안이 훤히 다 보이는데도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면 벌써 얼큰하게 취했다. 악당에게는 세고 술에는 한없이 약한 녀석이다.
“나도 같이 가자. 첨부터 맥주를 먹었더니…….”
삼식이가 따라나선다. 두 사람은 플래시를 들고 복도를 지나 3층으로 올라갔다. 음식이 쌓여 있는 방 화장실에다 지린내를 풍기고 싶지는 않다.
“어이쿠!”
플래시를 앞세워 아무 방이나 열고 들어가려던 유빈이 깜짝 놀라 얼른 다시 문을 닫았다.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옷들을 보자마자 그게 누구의 방이었는지 알 수 있어서였다. 공연히 삼식이에게 경순이를 기억나게 할 필요는 없잖은가.
“왜 그래? 뭐가 있어?”
“아니, 그냥 여자 방이라서…… 괜히 민망한 것 같잖아.”
대충 얼버무리며 서둘러 그다음 방을 연다. 똑같은 구조다. 침대, 냉장고, 컴퓨터, 그리고 코너에 화장실 문.
유빈은 화장실 문 손잡이에 손을 댔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뭔가가 확 튀어나온다.
“으억!”
첫 번째 공격을 겨우 피한 유빈의 입에서 놀란 숨소리가 터졌다. 삼식이도 덩달아 비명을 지른다. 유빈은 놀란 눈으로 돌아봤다.
뭐지? 좀비인가? 아니다! 아는 얼굴이다!
“너!”
반가움과 놀람, 그리고 두려움의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바람에 유빈의 뇌는 혼란스러워졌다. 그래서 그 긴박한 순간에도 제대로 반응을 하지 못했다.
그때…….
덜컥!
두 번째 공격을 정통으로 맞은 유빈의 턱이 홱 돌아갔다. 유빈은 피시싯, 거품을 뿜으며 복도에 나가떨어졌다. 게슴츠레한 눈이 감기기 직전 그가 본 것은 어제의 그 태권소녀다.
“야! 너!”
당혹스럽기는 삼식이도 마찬가지여서 한 글자짜리 단어만 계속 주워섬겼다. 하지만 유빈보다 나은 운동신경 덕에 날아오는 주먹은 피할 수 있었다.
“너! 너! 살아 있었구나! 경순이는? 경순이는 어딨어? 걔도 그 헬리콥터 안 탔어? 아! 아야! 아파! 그만해!”
쉴 새 없이 날아오는 주먹을 어깨로 받아 충격을 줄이면서 삼식이가 물었다. 쉽게 쓰러지지 않는 적을 보고 당황했는지 태권소녀의 인상은 한층 더 일그러졌다.
“뭐야? 삼식아, 왜 그래? 억, 너! 야! 야!”
비명 소리를 듣고 한걸음에 뛰어 올라온 보안관에게도 한 글자 바이러스가 전염되었다. 보안관은 ‘야!’만 죽어라 외치면서 삼식이와 태권소녀 사이로 끼어들었다.
“야, 너! 근데…… 다리가 왜 그래? 다쳤냐?”
“익! 이잇!”
태권소녀는 힘찬 발차기를 시전하던 어제의 그 당당함 대신 독기 어린 표정으로 주먹만 날려 댔다. 보안관이 그녀를 상대하는 동안 삼식이는 얼른 유빈이에게 뛰어가 뺨을 두들겨 깨웠다.
으으음~ 어후~
정신이 돌아온 유빈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복도 저 끝에서 비추는 플래시 불빛 두 개가 더해진다.
신입과 제니겠지. 젠장, 기절했던 건가. 세상에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왜 이래? 우리가 뭘 어쨌다고!”
손바닥으로 태권소녀의 공격을 쳐내면서 보안관이 짜증을 부렸다.
“어쨌냐고? 내 집에 들어와서 도둑질한 새끼가, 뭘 어쨌냐고? 응? 이야아!”
목의 핏대를 올리던 태권소녀는 곧바로 훅을 날렸다. 물론 빗나간다.
“갚아줄게! 주면 되잖아! 너 있는 줄도 몰랐어! 그러니까 왜 우리가 부를 때 대답을 안 해?”
도둑놈으로 몰린 것 때문에 발끈한 보안관이 오히려 더 큰 소리를 질렀다. 거기에 태권소녀가 내지른 주먹이 살짝 스치자 인내심이 폭발했다.
“아이, 계집애가 진짜!”
태권소녀를 밀쳐 낸 보안관은 자신의 분노를 킥에 담아 벽을 걷어찼다.
쿠웅―
유리창이 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옆차기다. 그 위력을 본 태권소녀는 곧바로 두 팔에서 힘을 빼고 쓸쓸히 고개를 숙였다.
“……내가 졌다. 마음대로 해.”
“뭐어? 뭐라는 거야?”
“반항해 봐야 소용없다는 거 알았으니 이제 다 각오했다고, 새끼야! 좋겠다? 다리 다친 여자를 이겨서. 이렇게 긴말 필요 없잖아? 여기 말고 2층으로 가. 가서 아무 방이나 잡아.”
“뭐어? 아오~ 이게, 말을 해도 꼭! 누구를…….”
졸지에 성폭행범 비슷한 취급을 받은 보안관은 분해서 펄펄 뛰었다.
“네가 일방적으로 때렸잖아! 그래놓고 무슨 피해자인 척을 해, 이 또라이야! 쟤 좀 봐! 너 쟤 저렇게 한 게 미안하지도 않냐? 보나마나 쟤는 너 여자라고 손도 안 댔을 텐데.”
어휴…… 유빈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보안관이 자신을 말싸움에 끌어들이는 바람에 쪽팔려서 죽을 맛이다. 여자한테 맞고 기절했다는 게 무슨 자랑이라고 저렇게 시끄럽게 구는지.
“오빠, 괜찮아요?”
제니가 다가와서 걱정스럽게 묻는다.
어후~ 제니야, 남자가 이런 상황일 때는 제발 그냥 못 본 체해주면 좋겠는데…….
얼굴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화끈거린다.
맞은 곳이 부어오르느라 그런 것인지, 부끄러워서 그런 것인지도 분간이 가지 않는다. 어쨌든 이젠 정말 창피함의 극치에 올라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 단계가 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입 주변을 닦아준다. 아마 거품까지 물었던 모양이다.
큭,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적어도 똥은 지리지 않았잖아…….
모든 걸 포기한 유빈은 손을 들어 제니에게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그러고는 삼식이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려는데, 바닥이 소용돌이라도 치는 것 같다.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지 못하는 유빈에게 태권소녀는 경멸의 시선을 던졌다.
아, 쟤도 성격 참 어지간하네. 유빈은 얼얼한 턱을 어루만지며 바닥에 떨어뜨렸던 플래시를 집었다.
“됐어, 보안관. 그만 열 내고…… 저기, 너. 너도 이제 그만둬. 주먹질해 봤으니 너도 대충 알잖아. 우리 그렇게 나쁜 애들 아니야……. 음식 먹은 거랑, 정문 망가뜨린 거는 미안하게 됐어. 그건 변상하라면 비 그치는 대로 해줄게. 우린 그냥 너희가 여기 없다고만 생각했어. 그 까만 헬기에 속아서 끌려간 줄 알았다고.”
“아니! 계산이 그게 아니지! 유빈이, 너 맞은 건 어떻게 보상 받을 건데?”
나 뻗은 이야기 좀 그만해라……. 근데 태권소녀, 넌 대체 왜 헬기 이야기를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아무 대꾸도 없냐…….
유빈이 한숨을 쉬는 동안 삼식이가 끼어들었다.
“경순이는?”
태권소녀는 삼식이를 향해 도끼눈을 부릅떴다.
“나 하나로는 모자라서 걔까지 또 어떻게 해보겠다고? 너희, 정말 바닥이 어디니?”
“아니, 그게 무슨…….”
“내가 졌다고. 마음대로 하라고 했잖아! 변상이고 뭐고 다 필요 없으니까, 그냥 빨리 할 짓이나 하고 가라고! 패싸움 나봐야 여럿 다치기만 할 테니까!”
그러니까, 그 패싸움을 할 네 패거리들이 어디로 갔냐고…… 라는 말이 삼식이의 입에서 나오기도 전에 보안관이 또 버럭 한다.
원래 체온이 99도라서 언제나 끓어오를 준비가 되어 있는데다가 술까지 들어갔으니…… 뭐, 놀랄 일도 아니긴 하다. 상대가 여자만 아니었다면 벌써 작살이 나도 여러 번 났을 상황이다.
“이 계집애가 진짜! 우리를 뭐로 보고! 할 짓이라니? 내가 언제 너를 뭘 어쩐다고 한마디라도 했어? 응? 너희는 그렇게 난잡하게 하고 살았었냐?”
“훗, 그래. 마음대로 모욕해라. 이런 것도 패자인 내가 감당해야 할 수모 중의 하나겠지.”
한쪽은 계속 가련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다른 한쪽은 흥분해서 방방 뛰는 것의 무한 반복이다. 여기에 술기운이 얼큰하게 오른 신입도 보안관의 뒤에 숨어 분란을 키운다.
“미친년, 삼류 영화 찍고 자빠졌네. 너 은근히 바라나 보다?”
이러니 대화라는 게 될 리가 없다. 참다못한 제니가 나섰다.
“그만! 그만! 다들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마요!”
“하지만 제니야…….”
“아니요! 하지만이고 뭐고 없어요! 딱 1분만! 1분만 조용히 생각 좀 해요! 실컷 싸웠잖아요!”
“훗, 네가 뭔데…….”
“언니도! 입 다물어요!”
역시 가수!
압도적인 성량의 사자후가 터지자 기세에 밀린 태권소녀도 주춤한다.
쏴아아―
그제야 다시 빗소리가 들린다.
보안관과 태권소녀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씩씩거리며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그래도 조금은 열기가 가라앉은 것 같아서 제니는 유빈이 들고 있던 플래시와 자신의 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지럽게 흔들리던 여러 개의 불빛 중에서 두 개가 벽 쪽으로 돌려지자 그것만으로도 분위기는 한층 더 안정되었다.
처음 3층으로 올라와서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는 유빈을 봤을 때엔 제니도 태권소녀를 용서할 수 없었다.
게다가 사람을 깔보는 저 건방진 말투,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 구는 태도까지 전부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머릿속에 섬광처럼 기억이 스쳐 가면서, 태권소녀가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테라와 소속사 사장을 차례로 잃고 처음 세 친구를 따라 복지 센터로 가던 그때, 제니의 가슴도 불안으로 터질 것 같았었다.
무력한 존재가 되어 낯선 사람들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순간이었으니까.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사장이 경고했던, 그 험한 꼴을 정말로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이가 딱딱 부딪칠 만큼 떨었었다.
제니는 세 명의 오빠를 만나게 된 것이 정말 큰 행운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렇지 못한 다른 수많은 여자들에게 법과 문명이 사라진 세상은 가혹하고 끔찍한 곳이었으리라는 것도.
왜 혼자만 여기에 있는지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조금 전까지 태권소녀는 외롭게 다섯 명의 이방인과 맞서고 있었다.
그것도 다리가 불편하기까지 한 상황에서……. 물론 그녀를 공격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녀는 그런 사실을 모를 테니까.
깊은 어둠 속에서 다섯 개의 플래시 불빛이 정신없이 자신의 얼굴을 비춰 대고, 바로 눈앞에서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압도적인 무력의 보안관 오빠가 흥분해서 소리를 버럭버럭 지른다.
거기에 술 냄새까지 풍겼으니 저 태권소녀가 험한 꼴을 당할까 봐 지레 겁을 먹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밉살스런 말투는 아마 두려움을 감추려는 몸부림일 테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 이상 태권소녀가 밉지 않았다. 후우~ 보안관 곁으로 걸어가며 생각을 정리한 제니는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언니, 좀 진정됐어요?”
“흥, 난 처음부터 흥분한 적 없어. 저기 이 고릴라가 혼자 흥분해서 방방 뛰었지.”
“뭐어? 고릴……, 이 미친…….”
제니는 곧바로 끓어오른 보안관의 손을 꽉 잡아 진정을 시키며 말을 이었다.
“믿든 안 믿든 그건 자윤데요, 이 오빠들…… 정말 좋은 사람들이에요. 언니가 걱정하는 그런 일, 절대 없어요. 제가 보장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날을 세우지 않아도 돼요.”
“내 말투는 원래 이래. 그러니까 듣기 싫으면 나가. 그러면 서로 깔끔하잖아?”
“언니가 정 싫어서 못 견디겠다면 그렇게 할게요. 하지만 지금은 밤이고, 비도 오니까…….”
“비가 오면 남의 집에 마음대로 들어와서 도둑질해도 되는구나? 몰랐네.”
제니에게 비아냥거리는 동안에도 태권소녀의 시선은 보안관에게만 고정되어 있다.
이 여자, 경계심이 지독하게 단단하구나…… 라고 느낀 제니가 말을 고르고 있을 때, 삼식이가 불쑥 물었다.
“야, 너 근데 그 방 화장실에 뭐가 있기에 그렇게 하고 있냐?”
“뭐, 뭘? 무슨 소리야?”
태권소녀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마음대로 하라고 할 때보다도 더 큰 떨림이다.
“아까부터 계속 화장실을 가로막고 서 있잖아. 계속 문손잡이를 주물럭거리면서 잘 닫혔는지 확인도 하고.”
“내, 내가 손잡이를 만졌다고? 아닌데?”
태권소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당혹감이 가득 차올랐다. 연기가 어설프다.
그래? 화장실을 보호하려던 게 아니란 말이지…… 라고 말하며 삼식이는 화장실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럼 좀 비켜봐. 나 오줌 좀 싸게. 아까부터 계속 참았단 말이야.”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고 다른 방에 가! 화장실이 여기밖에 없어?”
절뚝이며 삼식이를 막아서는 그녀에게서 조금 전까지의 도도함과 밉살스러움은 싹 사라져 버렸다.
“이것 봐라? 정말로 수상하네. 너 대체…….”
“야, 얘 좀 말려! 너 조금 전에 뭐라고 했어? 얘들 다 정말 좋은 사람들이라고 했지? 네가 보장할 수 있다면서? 이렇게 남이 싫다는 일을 억지로 하려고 하는 게 네가 말하는 좋은 사람들이야?”
다급해진 태권소녀는 삼식이의 팔을 잡고 늘어지며 제니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아…… 제니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 대체 뭘 숨겨놓고 있으면 저 도도한 척하는 여자가 저렇게 간절해지는 거지? 삼식이 오빠를 말려야 하는 걸까?
제니는 도움을 요청하며 유빈의 눈을 봤다.
유빈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제 보니 화장실 문 앞의 카펫에 곡선을 그리며 두 줄로 파인 자국이 있다.
뭐지, 이 자국? 뭘 끌고 간 건가?
그렇게 그들이 갈등하는 동안 누구보다 빠르게 결단을 내린 삼식이가 냉정하게 말했다.
“경순이가 어디 있는지 말해. 안 그러면 난 네가 걔한테 몹쓸 짓을 하고 여기에 숨겼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딱 셋까지만 센다.”
“그런 거 아니야!”
“하나!”
“저기, 그냥…….”
“둘!”
“……제발.”
이제는 완전히 여자의 목소리로 돌아온 태권소녀가 애원을 하며 두 손을 꼭 붙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