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둥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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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둥지 (3)
2022.02.25.
난데없는 알람에 보안관은 화들짝 놀라 문을 쾅! 닫았다.
유빈도 간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애초에 전기로 작동하는 장치가 살아 있을 거라는 가능성 자체를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우고 있었기에, 그 낯선 소음이 주는 충격은 엄청났다.
삐융~! 삐융~! 삐융~!
문을 닫았는데도 알람은 계속 울린다. 다급해진 보안관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문을 다시 여닫았다. 그래봐야 삥삥거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야, 이, 이거 어떻게 꺼? 이거 뭐야? 야이, 씨발! 왜 여기만 전기가 들어와?”
흥분한 보안관이 악을 쓰는 것에 알람 소리까지 더해지니 정신이 홀랑 빠지는 것 같다.
빨리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어쩔 줄 몰라 하던 유빈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진정해. 별로 큰 소리도 아니야. 게다가 빗소리에 묻혀서 큰길까지는 안 가. 그러니까 침착해야 돼.
삐유웅~! 삐유웅~!
그러는 동안에도 알람은 쉬지 않고 그 짜증스러우면서도 단조로운 소리를 내고 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안쪽을 엿보는 보안관이 흥분해서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들까 봐 두려워진다.
유빈은 보안관의 팔을 잡았다. 우선 진정시켜야 할 것은 알람이 아니라 보안관이다.
“보안관! 보안관!”
침착해야 돼, 차분하게 가자…… 라고 말하려 하는데, 보안관이 갑자기 홱 뒤를 돌아보며 인상을 썼다.
“아, 그 새끼. 거기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라니까…….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자꾸 이상한 소리가 나니까 걱정이 돼서 그러지! 안으로 들어와 버려서 보이지도 않고. 근데 이 알람 뭐야?”
삼식이였다. 그리고 바로 곁에는 제니까지 와 있다. 큭! 유빈은 잠시나마 보안관을 진정시키려고 했던 자신이 우스워졌다.
보안관은 그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문 안쪽을 살피면서도 뒤에 삼식이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까지 눈치채고 있던 것이다.
애초에 신체 능력 자체가 다르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기는 하지만, 다시 한 번 절감했다.
“몰라. 하여튼 이런 요망한 짓까지 해놓은 거 보면 여기가 맞나 봐. 제니야, 내 근처에 있어. 아, 맞다. 신입은?”
“딱 문 위에 서서 여차하면 셔터를 내릴 준비 하고 있어. 뭐, 그런 보험도 있어야지.”
흥, 그 새끼가 퍽이나 보험이 되겠다. 문답을 마친 보안관은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향하고 해머를 꽉 움켜쥔 채 문 안으로 들어섰다.
삼식이와 제니의 합류로 플래시의 광원이 두 개 늘자 시야도 한층 넓고 밝아져서 내부가 훤히 보인다. 어수선한 바깥쪽과 달리 모텔 내부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이건가?”
보안관이 카운터 안쪽을 살펴보고 있을 때, 삼식이가 뭔가를 주물렀다. 그러자 그렇게 신경을 긁어 대던 알람 소리가 그쳤다.
뚝. 그리고 쏴아아―
다시 들리기 시작한 빗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너 재주 좋다? 어떻게 하니까 꺼지디? 나는 열었다 닫았다 암만 난리를 쳐도 안 되던데.”
보안관의 물음에 삼식이는 문틀에서 떼어낸 조그만 플라스틱 조각 하나를 들어서 보여주었다.
“여기에 스위치가 붙어 있어.”
설명을 듣고 다시 보니 신기할 것도 없는 장치였다. 문과 문틀에 하나씩 붙여두고 스위치를 켜두면 그 사이가 벌어질 때 알람이 울리는 구조다. 배터리로 작동하는 거니까 정전과도 무관하다.
“이거 굉장히 싸. 혼자 사는 여자애들이 이런 거 많이 달거든.”
삼식이가 부연 설명을 하면서 뭔가 아득하게 그리운 표정을 짓는다.
개새끼, 또 무슨 좋은 추억이 떠오른 거냐…….
보안관과 유빈은 삼식이를 한 번 흘겨봐 주고 다시 실내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보았던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1층에서는 생활의 흔적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창고를 열어봐도 시트와 청소 용품 따위뿐이다.
주차장과 연결된 후문 안팎 역시 뭔가가 잔뜩 어지럽혀져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도 문제의 그 싸구려 알람이 발견됐다.
일행은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1층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라서 복도에서부터 벌써 여러 개의 박스가 그들을 반겨준다.
음료수, 라면, 과자, 생수, 통조림…… 온갖 먹을 것들이 편의점 창고처럼 한쪽 벽을 따라 그득하게 쌓여 있다.
“우와, 빙고!”
보안관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물론 한 가지 해결해야 할 사소한 문제는 있었다. 계단에서 복도로 진입하는 부분에 설치된 바리케이드가 바로 그것이다.
노가다끼리 아시바라고 부르는 굵은 비계용 파이프 대여섯 개가 가로로 박혀 있다. 꽤나 공을 들여 설치한 물건이지만, 해머를 든 보안관이 있을 때 그 정도는 장애물로 쳐주지 않는다.
콰앙―
해머질 여섯 번에 파이프 두 개가 떨어져 나갔고, 아무리 덩치가 큰 사람이라도 충분히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파라다이스 모텔이라더니, 진짜 파라다이스 맞네. 흐흐.”
복도 안에 들어선 보안관은 만족한 표정으로 음식 박스들을 쓸었다.
딸깍, 삼식이도 스포츠 음료 캔부터 따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 방은 옷이네. 크, 무슨 옷가게를 차려놨어.”
첫 번째 방문을 열어본 보안관이 껄껄 웃는다. 그 호기로운 모습에 제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기…… 오빠, 아직 남은 사람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그 사람들 총도 갖고 있었잖아요.”
“하하! 제니야, 괜찮아. 아무도 없어. 생각해 봐. 공격할 시간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 예를 들어서…… 에, 우리가 저쪽 여관에서 모여 있었을 때, 그다음에 우리가 현관문 뽀갤 때, 또 1층에서 알람 때문에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그리고 좀 전에 여기에서 저 아시바 부술 때만 해도 무방비였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안심해도 돼. 좀비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런 말을 하는 동안에도 보안관은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방문을 확확 열어젖혔다. 휴지, 물티슈, 비누…… 다람쥐처럼 정말 알뜰하게도 골고루 모아뒀다.
그렇게 확실한 건가요? 정말 그런 거면 좋겠지만……. 제니가 유빈을 돌아본다. 유빈 역시 안전하다는 의미를 담아 미소를 지어줬다.
보안관의 말이 맞다. 만약 누군가 자신들을 공격하려 했다면 이미 차고도 넘칠 만큼 충분히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어제 겪어본 태권소녀 일행은 외부인이 자신들의 아지트까지 들어와 활개를 치도록 내버려 둘 만큼 너그러운 성격은 아니었다. 즉, 지금까지 아무 반응이 없다는 건 여기가 텅 비어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맥주네. 소주도 있고.”
복도 끝 방에서 주류를 찾은 삼식이는 곧바로 그 방 창의 커튼을 젖혔다. 건너편 여관 입구에서 셔터를 꽉 쥔 채 불안해하는 신입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신입! 올라와! 괜찮으니까!”
창문을 열고 소리를 치자 신입이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올려다본다. 플래시 불빛이 유리에 반사되어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파티라고!”
삼식이는 맥주 박스를 들어 올리며 크게 외쳐 주고 복도로 나왔다.
객실마다 돌아다니며 문을 활짝 열고, 안에 들어 있는 게 뭔지 확인하느라 모두의 머리에 달린 랜턴이 정신없이 흔들거리며 사방에서 빛을 냈다.
처음엔 주저주저하던 제니도, 걱정 전문가인 유빈조차도 열심이다.
그만큼 이 아지트를 찾아냈다는 건 흥분되는 일이었다. 더 이상 한뎃잠을 자지 않아도 되고, 끼니를 거르게 될까 봐 전전긍긍할 일도 당분간은 없다.
“3층엔 뭐가 있나 보자!”
2층 맨 끝 방까지 돌아보고 난 뒤, 보안관은 모두를 데리고 다시 계단을 올랐다. 때마침 신입도 숨을 헐떡이며 합류했다.
창고처럼 물건들을 모아둔 2층과 달리 3층은 사람이 살던 흔적이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이불이 흐트러진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는 잡지들, 랜턴과 향초들, 방 입구에 가지런히 모아둔 신발들과 무기, 그리고 쓰레기통에 들어 있는 음식 포장지까지…….
음, 생필품과 음식에 눈이 돌아가 있다가 그런 풍경을 보니 갑자기 모두의 마음에 숙연함이 찾아들었다.
이곳을 사용했던 주인들의 죽음이 예정됐음을 이미 아는 입장에서 얼마 전까지 머물렀던 생활의 흔적을 마주하자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화장실을 이렇게 해서 썼구나.”
객실에 딸린 욕실의 문을 열어본 유빈이 중얼거린다. 흰 흙 같은 것이 담긴 종량제 쓰레기봉투를 변기 안에 넣어놓고 커버로 눌러 고정시키는 방식이다.
모래를 채운 페인트 통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볼일을 보던 다섯 명의 눈높이에서 보자면 초고도 문명에 가깝다. 물론 그런 수준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머리도, 몸도 꽤나 고생을 했을 테지…….
그다음 방은 아예 문도 열려 있다. 바닥에 내던져져 내용물이 쏟아진 과자 봉지를 보니 저절로 상상이 되었다.
이 방에 살던 누군가는 어제 헬리콥터에서 흘러나오는, ‘오늘이 마지막 구조 기회입니다’ 어쩌고 하는 그 개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물론 벌떡 일어나 이 문을 열고 뛰어나와서 죽어라 복도를 내달렸을 거고, 그리고 아마…… 지금쯤은 어딘가에 갇혀서 죽을 순서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어떤 운명에 처해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젠장, 여기에서 잘살고 있었구만. 그냥 더 버티지.”
보안관이 쓰게 입맛을 다셨다. 2층에 쌓여 있는 모든 물건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이 객실들에서 살던 자기 또래의 누군가가 목숨을 걸고 조금씩 가져와 모은 것이라는 게 실감되었다.
내일, 일주일 뒤, 한 달 뒤에 먹을 것들을 모아놓기 위해 갖은 애를 썼을 텐데, 정작 그 주인들은 헬리콥터를 탄 인간 사냥꾼들에게 끌려가 버렸다.
이 얼마나 억울하고 좃같은 일이란 말인가. 신입조차도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초상집에 온 것처럼 꽉 눌린 공기를 깨뜨린 것은 제니였다.
“그만 생각해요! 우리한테 집중하자고요!”
제니가 두 손으로 보안관의 양 뺨을 꽉 붙잡아 고정시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니가 손바닥으로 두 볼을 꾹꾹 누르자, 똥구멍처럼 모아진 입술을 오물오물 움직이며 보안관이 대답했다.
“알았어, 알았어. 우리 내려가자. 괜히 우울해진다.”
“그래, 맞아. 어쨌든 여기를 찾는 데 성공했잖아. 그러니까 오늘은 좀 기뻐해도 돼.”
삼식이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애써 표정을 바꿨다. 경순이 생각이 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계단을 내려가며 신입이 꺾는 시늉을 한다.
“그럼 술 한잔하는 거냐, 우리?”
“고오럼! 안주도 잔뜩 있는데.”
삼식이가 일부러 톤을 올린다. 분위기가 더 들뜨기 전에 시어머니 유빈이 끼어들어 한마디를 붙인다.
“일단 아시바부터 다시 붙여놓고.”
***
“후우우~ 후우우~ 너 차, 차, 차, 참 잘 걸렸다. 너, 너 없었으면 오, 오늘 진짜 빠, 빡 돌았을 텐데……. 사, 사람이 아주 죽으라는 법은 없나 봐.”
말을 마친 메이저는 탁자 위로 가서 온 더 락스 잔에 위스키를 채웠다. 한참 열심히 몸을 움직였더니 목이 탄다.
황금빛 조니 워커 블루가 얼음 사이를 타고 흐른다. 두어 번 술잔을 빙글거리던 메이저는 천천히 한 모금을 음미했다. 짜릿하다.
역시! 양놈들이 술 하나는 참 기가 막히게 만든다니까…….
메이저는 입술을 닦고 다시 돌아섰다. 주먹에서 묻은 피가 입안에 번지며 비릿한 향을 풍긴다.
좋아, 안주로는 이만한 게 없지.
메이저는 혀를 날름해서 입술에 남아 있던 피를 마저 핥았다.
기분이 더럽다. 오늘 하루 만에 쉐도우 쉴드 멤버가 둘이나 병신이 됐고, 문제를 일으킨 신 차장 개새끼는 잡아 족치지도 못한 채 놓쳐 버렸다.
신 차장을 데리고 나갔다는 말에 오 박사가 거품을 물고 길길이 날뛰는 걸 받아주는 것도 고역이었고, 뭐 하나 마음에 드는 일이 없다.
“크으!”
메이저는 잔에 남은 술을 마저 비웠다. 이런 날은 손맛을 좀 봐야 한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이번에 구해온 식사감들 중에 마침 아주 맷집 좋은 년이 하나 끼어 있었다는 거다.
“자, 사, 사, 삼 회전을 시, 시작해야지, 우리?”
철컹!
기둥에 오른손이 고정된 수갑이 흔들린다. 경순이는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왼팔을 굽혀 얼굴을 보호했다. 눈 주변이 부어올라서 저 망할 놈의 움직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쟤들은 죽은 걸까…….
그녀의 곁에 쓰러져 있는 두 명의 여자. 온몸에 피멍이 든 여자들의 가슴이 들썩이는 기미가 없다. 이 방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그녀들은 이미 반송장 상태였다.
하긴 그렇게 모진 매질을 당했으니…… 바닥은 온통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옆구리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 갈비뼈가…… 나간 게 분명하다.
어쩌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분명히 구조대라고 했는데…… 모두 구조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순서대로 그물망에 들어가라고 했는데…….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예방접종이라고 놓아주던 주사.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다. 깨어나 보니 속옷만 입은 채 이렇게 수갑으로 기둥에 결박당해 있었다.
“으윽! 후~!”
경순이는 차오르는 숨을 헐떡이며 이를 악물었다. 바닥에 발을 디딜 때마다 종아리에 전기가 오르는 것 같다.
“주, 주, 준비 다 됐지? 가, 가, 가, 가도 되지?”
메이저가 오른 주먹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히죽거린다. 그러다 갑자기 간격을 좁히면서 뛰어 들어와 옆구리에 훅을 먹인다.
흑! 대비도 못한 경순이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옆구리를 접었다.
그러느라 가드가 빈 얼굴로 또다시 놈의 주먹이 날아든다. 이미 마른 피딱지로 가득 차 있던 콧속에 혈관이 터지면서 뜨거운 피가 콸콸 쏟아진다.
개새끼, 주먹도 어지간히 맵다.
으아아아! 경순이는 아무렇게나 주먹을 휘둘렀다.
크크크, 놈은 뒤로 훌쩍 물러나 피하면서 기분 좋게 웃어 댄다.
“퉤! 치사한 새끼! 오른팔만 묶여 있지 않았어도 너 같은 건…….”
입안에 고인 피를 뱉으며 경순이는 오열했다. 너무도 분하다.
철컹! 철컹!
잡아챌 때마다 수갑에 긁힌 오른 손목에서는 피가 계속 흐른다.
“아! 수, 수갑? 그, 그, 그거 풀어줘?”
메이저는 미처 몰랐다는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표정을 바꾸며 경순의 따귀를 후려친다.
“나도 그, 그, 그렇게 해주고 싶은데, 규, 규정 위반이라 안 돼. 흐흐흐~”
악―! 무차별로 휘두르는 놈의 주먹을 한 팔만으로 어떻게든 막아보려던 경순의 입에서 비명이 터진다.
빠악!
이미 피멍이 든 허벅지에 워커발이 날아들었다. 다리가 풀린 경순은 그 자리에 허물어졌다. 무방비로 노출된 그녀의 가슴에 메이저의 팔꿈치가 날아와 꽂힌다.
죽는구나…… 의식이 가물거리는 순간, 그녀는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모든 것이 까만 어둠 속에 묻혀간다.
치이익―
흐윽! 정신을 잃어가던 경순은 진저리를 치며 깨어났다. 코 점막을 강하게 자극하는 암모니아 냄새. 그 개자식이 눈앞에서 스프레이를 흔들며 웃고 있다.
“이, 이제 시작인데 버, 버, 벌써 뻗으면 고, 곤란하지. 왜? 너무 힘들어? 좀 쉬, 쉬게 해줘?”
경순이의 머리채를 잡고 일으켜 세운 메이저는 옆에 쓰러져 있던 두 여자의 얼굴에도 차례로 스프레이를 뿌렸다.
으으으~ 여자들은 의식을 찾은 이후에도 좀처럼 몸을 가누지 못했다.
“일어나!”
메이저는 그녀들의 팔목을 고정시킨 수갑을 잡아챘다. 벗겨진 피부에 통증이 가해지자 여자들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너, 넌 좀 쉬어. 근데 나도 손을 푸, 풀어야 되니까 너 대신 마, 맞을 애를 고, 고, 골라. 얘, 아니면 얘?”
여자 둘의 머리카락을 한 번씩 움켜쥐며 메이저가 물었다. 분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고 있느라 아무 말이 없는 경순에게 메이저가 언성을 높였다.
“이 돼지 쌍년이 대, 대, 대답 안 해? 왜? 가, 같이 수, 숨어 있던 년들 보고 싶어? 하, 하나 더 데리고 올까? 가, 같이 맞을래?”
“걔들은 내버려 둬!”
경순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이런 꼴을 당하는 건 나 하나로 충분하다.
“그러니까 빠, 빨리 골라. 부, 분홍 빤쓰? 하얀 빤쓰? 어, 어떤 년?”
악마가 따로 없다. 경순이는 주먹에 힘을 줘봤다. 아직 감각이 있다. 저 밉살스럽게 이죽거리는 얼굴에 한 방은, 최소한 한 방은 먹일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꼭 먹이고 싶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또 그 지옥 같은 고통을 맛봐야 하는 거겠지…… 두렵다. 경순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외쳤다.
“약한 애들 괴롭히지 말고 덤벼, 이 개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