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Long and Winding Road (4)
(174/449)
174. Long and Winding Road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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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Long and Winding Road (4)
2022.02.21.
“정말이야. 일단 누워보면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걸?”
못 이기는 척 당겨가서 침대에 무릎을 걸친 제니의 표정이 극적으로 변했다. 삼식이는 빙글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내 말이 맞지?”
삼식이 옆에 제니도 벌렁 누웠다. 그러더니 으흐흐흥~ 하는 앓는 소리를 냈다. 남자의 뭔가에 피가 쏠리게 만드는 소리였다.
아! 제니는 곧 깊은 탄식을 했다. 삼식이는 여전히 빙글거렸다. 보안관이 질투를 못 이기고 참전했다.
“얀마! 일어나! 누가 제니랑 나란히 누우래!”
“하하하, 그런 말 말고 너도 누우면 되잖아. 이 침대, 넓다고.”
삼식이가 궁둥이를 조금 옆으로 움직여 주자 보안관은 그 큰 덩치로 틈새를 파고들어 누웠다. 믿어지지 않는 편안함! 어깨와 갈비뼈, 척추가 녹아나는 것 같다.
돌이켜 보면 보름이 넘는 기간 동안 딱딱한 바닥에서만 잠을 청했다.
가장 편했던 게 자동차 시트에서 쪼그리고 쪽잠을 잔 거였고, 스티로폼 패드 위, 심지어는 선로 자갈 위에서 종이 박스를 깔고 새우잠을 자야 했으니까.
그렇게 온갖 고생을 하던 등에 갑자기 침대가 닿으니, 이건…… 게다가 바로 곁에는 제니가 누워서 가벼운 신음을 흘리겠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꿈꾸던 파라다이스가 아닌가. 온몸에 잊고 있던 피로가 밀려오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더 좋은 걸 알려줄까?”
삼식이와 신입이 침대 끄트머리를 두고 티격태격하고 있는 동안 샤워실 안을 살펴본 유빈이 물었다.
하지만 다들 관심이 없다. 침대에 등을 대고 잘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거라니, 상상도 잘 안 된다.
“뭔데요?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오빠도 낑겨서 누워요.”
제니가 반쯤 감긴 눈을 하고 이미 네 사람으로 포화된 침대의 구석을 두드렸다. 유빈은 아주 잘난 척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변기 안 막혀 있어. 게다가 물통도 차 있고. 무슨 말인가 하면, 단 한 번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문명인처럼 느긋하게 일을 볼 수가 있다는 거야.”
‘느긋하게’라는 말을 할 때 눈을 반짝 뜬 제니가 아주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냈다. 보고 있는 유빈조차 행복해지는, 그런 미소를.
***
진우는 도로변의 튀어나온 바위 아래 몸을 숨기고 있었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비는 바위가 막아주지만 흩날리는 빗방울들이 날아드는 데에는 속수무책이었기에, 그는 근처의 나무에서 꺾어온 나뭇가지들로 겹겹이 몸을 감쌌다.
그 정도만 바람을 막아줘도 추위가 한결 덜했다. 그렇게 완벽에 가까운 위장을 하고서 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돌아오는 트럭들이다.
아까 터널에서 보초병들이 나누었던 이야기, 그들은 분명 한 시간이면 트럭이 다시 돌아올 거라고 이야기했다.
읍내에 도착해서 작업하는 시간을 감안하면 아무리 멀어도 트럭으로 이십 분이 걸리지 않을 거리에 사람들이 살던 동네가 있다는 뜻일 터다.
육공 트럭의 속도를 감안해 보면 그 거리는 20킬로미터 안쪽.
그 정도라면 평지에 직선 도로니까 비가 오는 날이라고 해도 도보로 세 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게다가 아까부터 한참 동안 이 도로를 따라 뛰어 내려왔으니 그 시간은 더 단축될지도 모르겠다.
“흐으으~ 흐으으~”
진우는 가지고 있던 사탕 중 마지막 두 알을 입안에 털어 넣고서 배고픔을 달랬다.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트럭이 지나갈 것이고, 그러면 마을로 달려가 이 지긋지긋한 폭풍우를 피하면서 온갖 음식들을 입에 쑤셔 넣어주리라 다짐했다.
아무리 군인들이 열심히 털어 간다고 해도 분명히 흘리고 지나치는 음식들이 있을 것이다. 아니, 있어야 한다.
진우는 퀭해진 눈으로 전방의 도로와 건너편의 어두운 숲 속을 응시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 때문에 심장이 철렁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무의미한 그늘의 무늬조차 자꾸 좀비의 얼굴처럼 보여서 자신도 모르게 방아쇠에 손이 간다.
- 한 점만 계속 보고 있지 마. 그러면 헛것에 홀린다.
처음 야간 경계 근무를 나갔을 때 선임이 해주었던 충고가 떠올랐다.
그래, 맞는 말이었어.
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비바람에 줄기차게 두드려 맞은 몸은 떨리고, 발아래에는 불어난 물이 콸콸 흘러내렸다.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날 때마다 입에 맞지 않는다고 전투식량을 버리던 병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엄청난 적의가 가슴속에서 끓어오른다.
그놈도 아무 죄 없이 끌려와 소모되고 있는 놈일 뿐이라고 몇 번이나 스스로를 달래보지만, 자꾸 자신의 배고픔이 녀석의 탓인 것만 같아 그게 화가 나는 것이다.
그렇게 공포와 추위, 배고픔과 분노, 기대와 우려 사이에서 흔들리는 동안 자꾸 졸음이 밀려든다.
“잠들지 마…… 잠들면 죽어…….”
재난 영화에서 수없이 들었던 상투적인 대사를 읊으면서 진우는 자신을 다그쳤다.
뭔 놈의 시간이 이렇게 더디게 가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몇 번이나 아주 얕은 잠에 빠졌다가 진저리를 치며 깨어나곤 했다.
결국에는 졸음이 밀려올 때마다 극약 처방을 내리는 심정으로 손톱이 벗겨져 나간 상처를 꾹 눌러 그 통증으로 제정신을 차렸다.
우르릉― 쾅쾅―!
천둥과 번개는 계속해서 울리고 번쩍였다. 바람도 점점 거세져서 조금만 넋을 놓고 있으면 안고 있던 나뭇가지들이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초조히 기다리기를 얼마나 더 했을까. 마침내 도로 저쪽이 훤하게 밝아온다. 트럭이 돌아오는 것이다.
아아~ 진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우우웅~!
두 대의 트럭이 물을 튕기며 바쁘게 지나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도 혹시 몰라 200까지 헤아린 후에야 진우는 도로 위로 내려왔다.
쏴아아아~
차가운 비바람이 세차게 얼굴을 때려 댔다.
“가자!”
진우는 지친 허벅지를 채찍처럼 내려쳐 깨운 뒤, 비를 뚫고 달리기 시작했다. 완만한 내리막이어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돌풍이 지날 때마다 몸이 휘청거린다.
“멀어…….”
마침내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로 집들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진우는 완전히 녹초가 돼 있었다.
아직도 그칠 기미가 없는 굵은 빗줄기들 사이로 비치는 컴컴한 마을의 그림자는 그야말로 괴기스러웠다. 게다가 느낌이 영 안 좋았다.
등을 얼리는 것 같은 이 한기가 차가운 비바람에 두들겨 맞은 탓인지, 아니면 늘 그랬듯 그놈의 좀비들 때문인지 확실하지가 않아서 정작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진우의 걸음은 더 무거워졌다.
“이런 데가 있는 줄 알았으면 내가 먼저 오는 건데…….”
다리로 연결된, 마을 어귀에 걸린 소주 광고판을 보니 생활의 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입대한 이후부터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사제 생활의 기운이다. 이런 곳이 근처에 있는 줄도 모르고 그저 죽어라 산길로만 다니며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던 게 분했다.
진우는 흥분되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잠시 멈춰 서서 심호흡을 했다.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면 죽는다. 퇴로나 도주로를 확보하지 않고 함부로 뛰어들어도 죽는다. 괜찮겠지 하고 방심하는 그 순간이 제일 위험하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빗줄기를 씻어낸 진우는 K―2를 어깨에 바짝 붙이고 천천히 한 발을 내디뎠다.
콰르릉! 쿵!
쉬지 않고 울리는 천둥소리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바람 소리에 시달린 청각이 거의 마비되는 것 같다.
분명 아직 대낮일 텐데 태양이 먹구름에 가려지고 일체의 인공조명이 없는 마을은 커다란 그림자 덩어리처럼 음산했다.
포장도로에서 벗어난 공터에서 트럭들이 서 있던 것 같은 타이어 자국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바로 옆의 담 윗부분이 무너진 걸 보았다. 진우는 담에 가까이 다가가서 그 흔적을 살폈다.
깊이 팬 시멘트, 관통된 흔적.
총알에 맞아 부서진 것이다.
조금 전 생긴 것일까, 아니면 예전에 처음 좀비들이 이 마을에 왔을 때 그걸 사살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흠집일까?
강한 비바람 때문에 화약 냄새 같은 건 남아 있을 수도 없다. 핏자국도 마찬가지다.
혹시 조금 전 그 트럭에 탄 병사들이 좀비에 놀라 그대로 달아났던 거라면? 그러면 어떻게 하지?
트럭 내부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지 않은 게 후회스럽다. 좀 더 침착했어야 했다.
“손전등부터…… 챙겨야 돼. 하아~ 손전등부터…….”
야트막하게 이어진 담 사이로 아주 천천히 걸어가며 진우의 눈은 정신없이 좌우를 훑었다. 벽을 따라 집요하리만큼 계속 나 있는 총알 자국이 달아나라는 신호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디로 달아난다는 말인가. 여기에 좀비들이 있다 해도 다시 비바람 속에 몸을 맡길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몇 시간을 넘기지 못할 게 분명하다.
“후우~! 후우!”
긴장감 속에서 진우의 숨소리는 커지고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진우는 공터에서 가장 가까운 집의 대문을 아주 천천히 밀었다.
끼이이―
빗소리를 뚫고 녹슨 철제 대문이 열리며 나는 마찰음이 한층 더 분위기를 냉각시킨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진우는 마당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한지로 된 여닫이문은 구멍이 숭숭 뚫린 채 바람에 따라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했고, 그 안에는 악마의 눈동자처럼 캄캄한 어둠이 있다. 귀신이 기어 나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풍경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진우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두려움을 달래면서 삐걱거리는 대문을 닫고 자물쇠까지 찔러 넣었다. 이래야 뒤가 좀 안전해진다.
으스스하지만 겨우 좁은 집 한 칸이다. 실탄 40발로 해결 못 할 만큼 많은 좀비가 이 안에만 모여 있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이 살던 집 맞아?”
진우는 얼굴을 찡그리며 썩어가는 툇마루 위로 올라섰다.
삐걱,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허술해도 농가였을 테니 손전등이나 기본적인 연장은 있으리라.
방 두 개, 주방, 그리고 허름한 창고가 화장실과 붙어 있는, 작은 집이었다.
안방에 들어선 진우는 널브러져 있는 이불을 걷어차 한쪽으로 치우고, 총을 문 쪽으로 겨눈 채 왼손만으로 서랍장들을 열기 시작했다.
좀처럼 쓸 만한 게 나오지 않는다. 약봉지, 각종 영수증과 고지서, 명함, 통장 따위의 것들.
그리고 꼬질꼬질한 손지갑들을 꺼내 버리고 난 뒤, 양초와 성냥이 나왔다. 불을 켜도 될까 하는 걱정이 잠시 들었지만, 촛불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내부의 다른 목소리가 속삭인다.
치익―
축축해진 성냥을 몇 번 두드려 켜고, 양초에 불을 붙였다. 그 정도의 조명만으로도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방 안은 순식간에 동화 속 세계처럼 노란 불빛으로 가득해졌다.
촛불을 들고 서랍장을 모두 열어젖힌 끝에 진우는 손전등과 덕 테이프를 손에 넣었다. 손전등을 테이프로 친친 감아 총신에 고정시키니, 한 고비를 넘은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이제 시야가 확보됐다.
“먹을 거.”
손전등이 부착된 K―2를 앞세우고 주방으로 이동했다.
벽에 걸린 망 속의 야채는 이미 곰팡이가 피어 있었고, 썩은 내가 진동하는 냉장고에도 별로 먹을 만한 게 없었다. 하지만 찬장 안에서 통조림을 발견했다. 꽁치 통조림 캔 두 개가 소주 팩과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하아~ 꽁치! 꽁치!”
음식을 보자마자 위가 뒤틀리는 것 같다. 진우는 캔 두 개를 모두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서둘러 안방으로 돌아와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캔의 뚜껑을 땄다.
수저를 챙길 여유도 없었다. 일단 짭짤하고 비린 통조림의 국물을 입에 털어 넣고, 손가락으로 꽁치 토막들을 꺼내 씹었다.
달다! 꽁치라는 게 이렇게 맛있는 생선이었구나!
진우는 그야말로 게걸스럽게 꽁치들을 입에 욱여넣고 또 욱여넣었다.
고개를 두 번째 통조림에 처박고 있을 때, 갑자기 예의 그 싸한 느낌이 들어 진우는 머리를 들었다. 조금 전 대문 밖에서 뭔가가 지나갔다…….
뭐지? 착각인가?
보이는 것은 바람에 날리는 나뭇가지들뿐이지만, 입안에 가득 든 꽁치가 갑자기 맛을 잃었다. 진우는 통조림을 바닥에 내려놓고 손전등을 대문 쪽으로 향했다.
아닌가? 괜히 나 혼자 불안했나…… 라는 생각이 들 때, 대문 사이로 그림자가 비친다. 국방색 하이바를 쓰고 있다.
“컥!”
너무 놀라 입안의 것이 반쯤 튀어나왔다.
군인?
진우는 서둘러 플래시 스위치를 끄고 일어나 장식장 위에 쌓인 이불 뒤로 몸을 숨겼다. 혹시나 흥분하고 겁먹은 상대편 군인이 무작정 발포를 할 경우를 대비해야 했다.
군인들, 다시 돌아온 건가? 트럭 소리는 못 들었는데…… 플래시를 켜지 말걸…….
순식간에 후회가 진우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쪽의 존재와 위치는 손전등 불빛을 통해 고스란히 대문 너머로 전달돼 버렸을 것이다. 진우는 곰팡이 냄새가 풍기는 이불에 바짝 얼굴을 댄 채 바깥을 살폈다.
쏴아아아―
총알 대신 지독한 바람과 폭우가 퍼부어진다. 시야는 좁고 사방이 깜깜하다.
쿵― 쿵―
대문이 흔들린다. 하지만 그게 비바람 때문인지, 누군가 흔들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사방은 깜깜하고, 매서운 바람 속에 나뭇가지와 소쿠리가 하늘을 날아다닌다.
군인이라면 어떻게 하지? 또 그 반대로 좀비라면 그땐 어떻게 여길 벗어나지?
두 가지 경우 모두 좋을 게 없다. 그래도 하나를 고를 수 있다면 사람의 목소리가 더 듣고 싶다. 대화로 이 상황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쿵―
대문이 다시 한 번 더 크게 흔들렸을 때, 어두운 틈 사이로 군인의 그림자가 비쳤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쿵―!
슬슬 확신이 간다.
이건……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었다면 벌써 아까 플래시를 켜고 이쪽을 비추었을 테니까.
진우는 총을 바짝 든 채 마루로 걸어 나갔다. 애초부터 낡아 있던 대문은 벌써 반쯤 밀어젖혀졌다.
쿵―
대문을 밀어 치는 병사의 손!
팔목 부분이 잘려 나가 있다. 뼈가 하얗게 드러난 그 팔로 병사는 열심히 철제 대문을 두드려 밀어 댔다.
“이 새끼들…… 버리고 갔구나…….”
그제야 상황이 이해된 진우는 이를 바득 갈았다. 대문 경첩을 부수다시피 한 좀비 병사는 상반신을 벌어진 틈 사이에 밀어 넣고 이쪽을 향해 입을 쫙 벌렸다.
크롸아아아악―!
바람 소리가 잠시 잦아진 사이, 놈의 포효가 고막을 찢는다. 진우는 가늠자 안에 놈의 얼굴을 집어넣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쳤다.
불과 몇 시간 만에 다시 아군의 머리를 가늠자 원 안에 넣고 보자니 기분이 묘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쏠 수 있다.
놈은 가까워진 진우를 발견하고부터 더욱 흥분해서 쉬지 않고 몸과 머리를 흔들어 대면서 어떻게든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나, 둘, 하나, 둘…… 진우는 숫자를 세면서 놈의 움직임에 호흡을 맞췄다. 하이바가 보호하고 있는 머리를 쏘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나…….”
가늠자 속 놈의 머리가 앞으로 기울었다.
“둘…….”
놈의 머리가 뒤로 젖혀지면서 턱이 드러났다. 진우는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음속을 돌파한 총알은 좀비의 얼굴을 관통하며 하이바까지 닿았고, 그 운동에너지는 녀석의 아래턱과 광대뼈, 그리고 뇌를 산산이 부쉈다.
툭. 조금 전까지 그렇게 맹렬하게 움직이던 놈의 목이 뒤로 꺾인 다음,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뼈와 찢어진 가죽이 뒤엉킨 좀비의 얼굴 위로 빗방울이 쏟아져 붉은 핏물과 함께 울컥울컥 솟아올랐다.
“어쩌지?”
진우는 초조한 표정으로 입 주변을 닦았다. 담장 밖에는 조금 전까지 그가 달려왔던 그 긴 도로가 다리 너머에 펼쳐져 있다.
제멋대로 춤을 추는 도로 주변 아름드리나무들이 바람의 세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지금 빨리 여기에서 빠져나간다면 다른 좀비들을 만나지 않고 달아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상태로 저 차가운 비가 거센 바람과 함께 쏟아지는 산속으로 도망가는 것은 아주 느린 속도의 자살과 다를 바가 없다. 지금도 이미 푹 젖은 그의 몸은 얼음처럼 차갑고 부들부들 떨리는 중이니까.
싸운다면? 그런데 대체 몇 마리와 싸워야 하는 거지?
그게 두렵다. 트럭 두 대에 나눠 탈 만큼의 무장한 병력이 동료를 그냥 내버려 두고 달아났다. 그 정도라면 엄청나게 다급했다는 의미고, 그건 곧 그 자신이 처한 위기의 절박성이기도 했다.
진우는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여러 번 자기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K―2를 내려다보았다.
그 자신처럼 낡고 닳아 있지만 여전히 믿음직했다. 다만, 아무리 좋은 총도 실탄이 없으면 그저 플라스틱이 붙은 쇳덩이에 지나지 않는다.
전투 조끼에 붙은 마지막 탄창을, 10발밖에 들어 있지 않은 그 탄창을 감안하더라도 그에게 남은 실탄은 모두 40발. 아니, 조금 전에 한 발을 쏴버렸으니 이제는 39발뿐이다.
고작 이 정도의 화력을 가지고 이렇게 깜깜하고 비바람이 치는 상황에서, 게다가 처음 와보는 낯선 동네에서의 싸움을 이겨낼 수 있을까?
아니, 잠깐. 실탄?
진우는 문에 걸려 있는 좀비의 시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목이 꺾인 채 기묘한 자세로 대문 사이에 끼어 있는 시체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전술 조끼를 입고 있었다.
예비 탄창!
진우는 곧바로 뛰어가 녀석의 전술 조끼를 살폈다.
있다!
하지만 탄창은 두 개뿐이고, 수류탄 따위도 없었다.
“좀 많이 줘서 보내지, 개새끼들…… 이걸로 무슨 싸움을 하라고.”
진우는 끔찍한 형태로 박살 난 녀석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눈살을 찌푸리면서 시체가 가지고 있던 탄창을 챙겼다.
“총은? 이 자식 총은 어디에 뒀지?”
혹시 떨어뜨린 건가 싶어 시체를 당기며 뒤쪽 공터를 살펴봐도 총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오른팔이 이렇게나 잘려 나갔으니 총은 녀석이 습격을 당한 현장에 버려졌을 것이다.
어쨌든 아쉬운 대로 실탄을 보강했다. 이제 1분 전보다 이길 확률이 두 배가량 올라갔다.
“으흐읏~!”
테이프로 감아둔 플래시에 물이 들어가지 않을까 살피던 진우는 갑자기 밀려온 오한에 온몸을 떨었다.
돌이켜 보면 오늘 거의 한나절 동안 계속 조금씩 체온을 빼앗긴 채 이동을 해왔다. 지금 당장 쓰러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