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Long and Winding Road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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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Long and Winding Road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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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Long and Winding Road (1)
2022.02.18.
같은 시각, 유빈 일행은 모두 한곳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중이었다. 죽은 사내로부터 받은 휴대폰.
그 안에는 신 차장이라는 사람의 최근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지난 보름 동안 그와 그가 속한 회사가 저질렀던 끔찍한 범죄의 기록도 포함되어 있었다. 별도로 모아둔 폴더 속에…….
― X―1 효과 참 좋구만. 몇 번을 봐도 신기해. 봐, 전혀 움직이질 못하잖아.
휴대폰 영상 속에서 신 차장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메라가 비추고 있는 것은 방균복을 입은 사람들과 크레인에 매달린, 발가벗은 남자였다.
카메라의 각도나 화면 위쪽에 검은 그늘이 존재하는 걸로 봐서 아마 어딘가에 휴대폰을 숨겨놓고 몰래 찍었던 모양이다.
― 내릴까요?
방균복을 입은 여자의 질문이 있은 후, 기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발판이 열리고 발가벗은 남자를 매단 크레인이 아래로 내려간다.
그러자 작은 회장이 뛰쳐나와 남자를 물어뜯기 시작한다.
콰드득~ 찌익! 꿀쩍, 꿀쩍, 우득!
남자의 얼굴에 작은 회장의 이빨이 닿을 때마다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어흐…… 이거 정말이야? 개새끼들, 진짜 이 지랄을 하고 있다고? 미쳤나?”
보안관은 얼른 제니의 눈을 가렸고, 유빈은 구역질을 참으며 휴대폰 화면에서 시선을 피했다. 도저히 눈 뜨고 봐주기가 어려웠다. 그런 동영상들이 몇 개나 이어졌다.
“이 사람, 왜 못 움직여? 발버둥이라도 쳐야지. 다리는 묶이지도 않았잖아?”
삼식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X―1이 뭐 어쩌고 했잖아. 아마 그게 마취약 비슷한 건가 보지…….”
설명을 하려던 유빈이 말끝을 흐렸다. 그들이 보고 있는 이 미친 짓에 비하면 그까짓 약 같은 건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어떻게…… 어떻게 사람에게 이따위 짓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그 일을 벌이는 주체가 조폭이나 미친 테러리스트들이 아니라 멀쩡한 대기업이라는 사실이 더 쇼킹했다.
- 진짜 위험한 걸 알려주지. 그 검은 헬기를 조심해. 거기에 타는 순간, 아주 끔찍하게 죽는 거야.
담배 연기에 쿨럭거리며 남자가 내뱉던 말들. 그 당시만 해도 믿지 않았었다.
그냥 죽어가는 사람이 정신이 이상해져서 헛소리를 내뱉는 거라고만 여겼는데…… 그런데 그게 휴대폰 안에서 생생한 화면으로 증명되는 걸 보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만약 몇 시간 전에 삼식이가 웃통을 벗고 뛰어나가 ‘여기요!’를 외쳤을 때, 그때 헬기가 멈춰 섰더라면…… 그랬다면 우리도 잡혀가서 저렇게…….
“아! 맞다! 걔들!”
닭살 돋은 팔을 만지며 상념에 잠겨 있던 유빈이 벌떡 일어나며 선로 저 너머를 돌아봤다.
“걔들? 누구 말하는 거야?”
“아까 길에서 만난 그 애들 말이야! 그, 무술하는 여자랑 그 쫄자들……. 그리고 네 애인!”
아! 경순이!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삼식이도 다급해졌다.
아, 어쩌지? 어쩌지? 지금이라도 뛰어가서 알려야 되나? 그 검은 헬기가 구조 헬기가 아니라는 걸, 거기에 탔다가는 아주 더러운 방법으로 죽게 된다는 걸…….
고민 끝에 삼식이가 헤드 랜턴을 걸치고 일어나려 하자 보안관이 붙잡았다.
“진정해. 지금 뛰어간다고 해도 이미 늦었어. 아까부터 흘러간 시간이 얼만데. 헬기에 탔을 거였다면 벌써 다 타서 걔네 본거지로 돌아가고도 남았을 시간이야. 그리고 만약에 정말 하늘이 도와서 그 새끼들이 아직 거기에 머물러 있다고 가정해도 마찬가지야. 네가 막을 방법이 없어. 걔들 총소리 들었잖아. 맨손으로 총은 못 이겨.”
“……하지만 혹시 아직 경순이네 있는 쪽으로는 안 왔을 수도 있잖아. 위험하다고, 그거 타지 말라고 미리 알려줄 수 있으면 알려주고 싶어.”
“걔네가 그 말을 믿겠어? 더러운 면 티 입은 놈들이 거지꼴을 하고 와서 헬리콥터 타고 오는 구조대를 무조건 피하라고 하면? 네가 아무리 이야기해 봐야 안 먹힐 거야. 우리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유빈도 보안관의 의견과 같았다. 사방이 어둑해진 이때, 상봉역까지 또 간다는 건 너무 위험했다.
게다가 정말 몇 개의 행운이 겹쳐서 혹여 경순이네 일행을 만날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꺼낸다면 오히려 경계심만 부추길 게 빤했다.
사람들을 잡아다가 좀비 밥으로 주는 인간 사냥꾼이 돌아다닌다는 말을 누가 믿겠는가.
“……그냥, 원래 약속했던 대로 내일 만날 수 있기나 바라자. 우린 지금 너 못 보내. 너무 위험해.”
유빈이 차분하게 달래자 삼식이는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근데…… 우리는 여기 이렇게 마음 놓고 있어도 되는 걸까?”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고 나서 삼식이가 중얼거렸다.
“아까 내가 웃통 벗고 나간 거, 그 새끼들도 분명히 봤을 텐데…… 그때 왜 우릴 태우지 않은 건지는 몰라도…… 하여간 여기에 사람이 산다는 건 알고 있는 거잖아.”
“엇, 정말! 씨발…… 좃 됐네.”
삼식이와 나란히 서서 담배를 피우던 신입이 욕설을 섞어가며 탄식했다.
그렇구나, 젠장. 남의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었네…….
유빈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가뜩이나 불안한 잠자리, 오늘부터는 더 마음을 졸이게 생겼다.
***
달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오른쪽 아래가 깎여 3분의 2쯤만 남은 달을 보면서 진우는 한숨을 쉬었다.
불을 피울 수도 없고, 플래시의 건전지도 바닥난 상황에서 희미한 달빛만이 그가 밤새도록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조명이었는데…….
“끄응~”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엉덩이가 배겨서 진우는 몸을 뒤척여 봤다. 그래봐야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나무와 허리를 묶어 고정시킨 전투화 끈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매듭은 튼튼했다. 이렇게 해두면 최소한 자다가 아래로 떨어지진 않을 것이다.
“여기까진 못 올라오겠지?”
진우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지금 그는 사람 두 길은 족히 되는 높이의 나무 위에서 잠을 청하는 중이다.
이파리 사이로 날아다니는 온갖 벌레들이 콧구멍과 귀를 들락거리는 것 따위는 괜찮다. 참을 수 있다. 여름 볕에 익은 피부에조차 소름이 돋아 오를 만큼 싸늘한 밤공기도 견뎌낼 만하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이 지독한 어둠이다. 정말 원시의 밤처럼 빛이라고는 구경하기 힘든 캄캄한 시간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처럼 느껴질 때면 숨을 쉬기가 어려워진다.
풀썩, 사방에 안개처럼 무겁게 깔린 고요를 깨고 어딘가에서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다.
“자야 돼, 자둬야 된다고.”
이를 악물고 눈을 감으면 수많은 상념들이 눈꺼풀 안쪽을 헤집고 들어온다.
피 흘리고 죽어간 동료와 선임들의 얼굴, 자신이 머리통을 날린 좀비들, 행복했던 과거, 그리고 그렇게 눈을 감고 나무 위에 기대앉아 있는 자신에게 좀비가 소리도 없이 다가와 목덜미를 꽉 깨무는 상상까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만큼 괴로운 건 없다. 상상하는 만큼 고스란히 두려움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숨을 헐떡이다가 피곤한 육체는 잠에 빠져든다.
“훗! 후후후우! 우웃!”
올빼미의 울음소리 때문에 진우는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씨발! 씨발! 어떻게 든 잠인데!
진우는 뒤통수를 나무에 쿵쿵, 찧으며 화를 삭였다.
윽! 주먹을 꽉 쥐던 진우는 손톱이 빠져 버린 검지의 고통을 다시 실감했다. 왼손을 들어 바라봤다. 때마침 구름에 달이 가려지자 바로 몇십 센티 앞의 손도 보이지 않을 만큼 완전히 깜깜해졌다.
꼬르르륵―
비어 있는 배에서 음식물을 찾는 소리가 울린다. 진우는 손으로 더듬어 수통을 열고 물 한 모금을 소중하게 마셨다. 물에서는 흙냄새가 났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민가를 찾는 데 실패했다.
“도로에서 벗어나지 말 걸 그랬어…….”
진우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반복이다.
숨을 헐떡이며 작아져 가는 달을 걱정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에 놀라고, 눈을 감은 채 온갖 두려운 상상 속에서 인내를 시험받는다.
금발의 백인 미녀 둘과 와이키키에서 물놀이를 하는 상상으로 공포를 몰아내 보려고 애를 썼지만, 이내 포기했다. 자료가 너무 부족하다.
후우~ 진우는 건빵 주머니 안에 손을 넣어 권총의 총신을 쓸었다. 차갑고 매끈하다.
이걸 턱에 대고 손가락만 한 번 까딱하면 편안해질 텐데…….
자신의 것이 아닌 악마의 목소리가 뇌에 직접 말을 건다.
- 정말이야. 편안해진다고……. 이렇게 아프지도, 무섭지도, 배고프지도 않아진단 말이야……. 너도 알잖아. 구령대 아래 묻힌 만 발 같은 건 있지도 않아. 이럴수록 너만 힘들어지는 거야……!
손잡이를 움켜쥐기 직전, 진우는 얼른 손을 빼 입술에 대고 엄지가 제멋대로 달아나지 못하도록 끝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내 우리해진다. 하지만 가벼운 통증과 함께 돌아온 이성은 악마를 몰아내 줬다. 진우는 다시 와이키키와 빨간색 비키니를 입은 두 명의 글래머를 상상하려고 애를 썼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 아직 싸울 수 있다.
잠이 든 것도 아니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밤이 지나갔다. 길고 지루한 밤이었다.
목덜미 사이로 파고드는 추위에 이를 악문 채 진우는 어떻게든 정신을 꿈속에 머물게 하려고, 밝고 좋은 상상 속에서 쉬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현재의 상태도 꽤나 고통스럽지만, 눈을 뜨고 현실의 어둠과 마주하며 시간을 보내는 게 몇 배나 더 괴롭고 힘들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나마 쉬지 않으면 몸이 버텨내질 못한다.
자라! 잠들어! 꿈속에서 비키니 입은 글래머들이랑 놀아!
진우는 뇌에게 억지를 부렸다. 하지만 어슴푸레 동이 터올 무렵쯤에는 더 이상 그렇게 할 수가 없어졌다.
쿠르릉!
산 전체가 울릴 만큼 커다란 천둥소리.
진우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며칠 전, 태풍 오던 밤의 온몸에 새겨졌던 악몽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하아~ 하아~”
어디지? 어느 쪽에서 비가 쏟아지는 거지?
진우는 겁에 질린 눈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오른편 하늘이 온통 시꺼멓다. 심상치가 않다.
번쩍.
멀리 구름 가운데에서 파란 벼락이 내리꽂히는 게 보인다. 그리고 몇 초가 지나서 다시 꽈르르릉! 하고 천둥이 울렸다. 꽤나 떨어진 곳이라는 것만 알 뿐, 정확한 거리가 가늠되지는 않는다.
“하아~ 하아~ 소, 소리가 1초에 340미터 가던가? 아, 아닌가? 420이었나?”
허리를 나무에 고정해 둔 전투화 끈을 서둘러 풀면서 진우는 저 벼락이 얼마나 먼 곳에 떨어진 것인지 계산을 했다. 하지만 막 잠에서 깬 터라 머릿속은 온통 뿌옇고, 초등학교 때 배웠던 지식은 긴가민가하다.
휘이이이~
바람이 거세지고 있다. 주변에는 낙엽과 풀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닌다. 불안하다.
이런 산속에서 폭풍우를 만나기라도 하면…….
게다가 이렇게 사방에 나무가 쭉쭉 솟은 지형은 낙뢰로부터도 취약하다. 달아나야 한다. 아직 시간이 있을 때 한 발짝이라도 더 달아나서 어딘가 지붕 아래로 몸을 숨겨야 한다.
“젠장! 이게 왜 이렇게…….”
전투화 끈이 시간을 잡아먹자 진우의 마음은 더 급해졌다.
쿠르르릉―
그러는 사이에도 쉼 없이 먼 하늘은 번쩍이고, 커다란 소리는 귀를 울려 댔다.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나무에서 내려오기 전에 한 번 더 사방을 둘러볼 정신은 있었다. 다행히 좀비는 눈에 띄지 않는다.
“윽!”
아무 생각 없이 나뭇가지를 잡다가 손톱이 벗겨진 검지가 닿았다. 묵직한 통증이 척추를 울렸다. 잊고 있었다.
후우~ 진우는 솟아난 진땀을 닦으며 조심조심 땅에 내려섰다.
꾸르릉―
다시 엄청난 천둥소리!
텅 비어 있는 배 속까지 함께 울릴 만큼 가깝고 크게 느껴진다. 진우는 가지가 부러진 나무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걷는 방향을 잊지 않기 위해 어젯밤 미리 꺾어놓은 것들이다.
“하아~ 하아~”
산의 정상에 가까운 곳이어서 호흡이 가빴다.
번쩍!
어둑한 하늘은 벼락이 칠 때마다 한 번씩 극적으로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지기를 반복한다.
공기는 벌써 싸늘해졌고, 바람이 휘몰아칠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시야가 탁 트인 위치에서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멈춰 섰을 때, 진우는 뒤를 흘끔 돌아보았다.
이미 먹구름이 가득 드리워진 고개 너머의 뒷산에서는 나무들이 춤을 추듯 흔들리며 폭우를 두드려 맞고 있었다. 비와 천둥이 아주 빠르게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중이다.
“산장이라도 하나 만났으면…….”
다시 뛰면서 진우는 간절하게 빌었다.
그게 실현될 가능성은 아주 낮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에게는 달리는 동안의 고통과 불안을 상쇄시켜 줄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필요했다. 무성하게 자란 잡초와 나뭇가지가 자꾸 그의 발목을 잡았다.
길도 없는 산속에서 나무 사이를 비집고 걷는 것이어서 서두른다고 속도가 나지는 않았다. 조금만 방심해도 발이 미끄러지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지친 체력은 속일 수가 없었다.
결국 폭풍우는 금방 그를 따라잡았다. 고개를 하나 겨우 넘었을 때부터 진우는 차가운 비가 떨어지는 걸 얼굴로 느껴야 했다. 조금 뒤부터는 어깨가 축축해졌고, 허벅지와 몸통도 뒤이어 젖었다.
점점 그 기세가 강해지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저 부슬비 정도였다. 본격적으로 쏟아붓기 전에 대피처를 찾아야 한다.
쿠르르르―
천둥소리는 이제 아예 산 전체를 덮으며 계속해서 울렸다. 진우는 온통 피딱지가 앉은 손바닥으로 눈앞을 가로막는 가지들을 헤치고 열심히 걸어 나갔다.
하늘은 온통 어둑해졌고, 흐르는 빗물 때문에 호흡은 어렵다.
딱 한 가지 어제보다 나아진 점이라면, 오늘은 더 이상 갈증 때문에 괴롭지는 않다는 것이다. 볼을 타고 흘러내린 빗물이 의도하지 않아도 꿀꺽꿀꺽 입안으로 들어왔다.
“길이다!”
진창과 미끄러운 돌바닥 사이에서 그렇게 사투를 벌이던 진우는 마침내 도로를 만났다.
2차선 도로.
바닥이 평평하고 장애물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자동차! 아무거라도 좋으니까 차 하나만 좀 서 있어라!”
텅 빈 도로를 달리며 진우는 혼잣말을 되풀이했다. 인적 없는 산속에 놓인 좁은 지선이어서 자동차를 만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래도, 그래도 길이라는 건 어딘가로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니까.
열심히 뛰고 있는데도 여전히 목덜미가 싸늘하고 오한이 난다.
밤새 얼어붙은 몸에 새벽부터 불어오는 비바람을 몇 시간째 고스란히 맞은 덕이다. 전투화 안에도 질꺽질꺽 물이 고여 있다. 분명 얼마 못 가 물집이 잡힐 것이다.
“허윽~ 헉~”
빠르게 걷다가 좀 호흡에 여유가 생기면 달리고, 다시 턱밑까지 숨이 차오르면 속보로 바꿨다. 그렇게 30분여를 더 내달렸을 때, 구원이 나타났다.
터널이었다.
“그, 그래! 그래!”
불이 꺼져서 어두컴컴한 터널 입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예전 같았으면 귀신 체험이나 하러 올 만큼 으스스했지만, 지금 그에게는 비바람을 막아줄 대피 공간이다.
기쁘면서도 한 가지 걱정이 되는 바는 저 안에 혹시 좀비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실탄은 이제 40발뿐이다. 권총에 들어 있는 여섯 발을 더해도 큰 무리의 좀비들을 상대할 수는 없다.
기대와 두려움이 번갈아 밀려오는 속에서 걸음을 옮기던 진우는 터널을 100여 미터 남겨두고, 길가를 향해 쓰러진 나무에 기대 잠시 숨을 돌렸다. 싸한 기운이 없는 걸로 봐서 좀비가 숨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웃!”
터널 안에서 난데없이 쏟아져 나온 환한 빛 두 줄기. 진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 아래로 몸을 숨겼다. 그 빛의 모양이며 크기가 너무도 익숙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부르르릉~!
속도를 높인 군용 트럭이 진우가 숨은 곳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 대, 그리고 또 한 대. 더 이상 엔진 소리가 나지 않을 때, 진우는 고개를 빼꼼 들어 트럭의 화물칸을 살폈다. 무장한 병력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어후~ 씨발, 놀래라. 뭐야? 왜 이런 데까지 군인이 있어? 젠장.”
가슴을 쓸어내린 진우는 시선을 다시 터널 쪽으로 돌렸다. 터널 안은 어느새 희미한 노란 조명이 밝혀져 있었다.
저 안에 사람이 더 있는 걸까?
확실하게 알려면 더 가까이 가보는 수밖에 없다. 진우는 가드레일을 넘어 다시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천천히 터널을 향해 다가갔다.
20미터 내외로 거리가 줄었을 때, 풀 냄새와 흙냄새 사이로 낯선 냄새가 풍겨왔다. 음식 냄새다.
그리고 저벅거리는 발소리, 사람들의 두런거림도 들려왔다. 진우는 수풀 속에 엎드려 기척을 숨긴 채 기다렸다.
“아, 씨발. 맛없어, 좃도!”
상병 하나가 전투식량을 들고 우물거리며 터널 입구로 나와 섰다. 그 바로 뒤에는 일병 둘이 무거워 보이는 바리케이드를 낑낑대며 밀고 있었다.
“소고기 맛 고르신 거 아닙니까?”
또 다른 목소리의 주인공도 상병이다. 총 네 명. 진우는 눈을 깜빡거리며 열심히 관찰했다. 병사들의 군복이 비교적 말끔했다. 여기에서 계속 뒹굴던 게 아닌 모양이다.
“응? 아니, 소고기 맛인 줄 알았는데…… 아, 씨발. 햄 볶음밥이야, 존나 싱겁고 느끼해서 못 먹겠다. 너 먹을래?”
“하, 저는 괜찮지 말입니다. 저는 김치볶음만 먹습니다.”
“음, 김치볶음? 나도 그걸 먹을까? 이따 내 것도 데워봐라.”
제일 상급자로 보이는 상병은 전투식량 봉지를 일병에게 안기고는 간식 과자를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눈치를 보던 일병은 도로 가장자리 배수로에 볶음밥을 부어버렸다.
콸콸―
물과 함께 볶음밥 덩어리들이 둥둥 떠내려간다. 그걸 보면서 진우는 꿀꺽, 침을 삼켰다.
“근데 말입니다…….”
넘버 투인 듯한 상병이 바리케이드에 기대며 묻는다.
“암만 한적한 데라도 그렇지, 여기에 저희 다섯 명만 꼴랑 남겨놓는 건 좀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