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산다는 것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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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산다는 것 (4)
2022.02.17.
하아~ 난간에 두 팔을 기댄 가희는 입술을 쫑긋거렸다.
“다들 정말 대단하세요. 가희는 좀비들 생각만 해도 벌벌 떨리는데, 오빠들은 안 무서워하고 이렇게 우리를 지켜주시니까.”
“하하하, 무서워하지 마십쇼. 저희들이 확실하게 지켜 드립니다. 특히 가희 씨라면 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희들이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 드립니다.”
호언장담을 하는 군인들을 향해 몸을 돌리며 가희가 혀 짧은 소리로 물었다.
“정말이요? 하지만 좀비들이 저렇게 많은데?”
“좋습니다. 그럼 가희 씨가 안심하실 만한 걸 하나 보여 드릴까요? 야, 비켜봐.”
병장 하나가 호기롭게 이병을 옆으로 밀치며 난간 위에 팔꿈치를 걸쳤다. 그러고는 조준경에 눈을 가져다 댔다. 예전에 아마도 이 남자가 뭔가 호언장담을 했던 기억이 가희의 머릿속에 얼핏 떠올랐다.
“저기 보이십니까? 저기 저 러닝셔츠만 입은 배불뚝이 놈. 야, 누가 가희 씨한테 망원경 좀 보여 드려. 2시 방향이다.”
“네. 아, 이제 보여요.”
“저놈 머리를 날려 드리죠. 자아~ 잘 보십쇼.”
병장이 겨눈 것은 150여 미터 떨어진 도로 위에서 배회하고 있던 두 마리 좀비 중 더 큰 쪽이었다. 밖으로 흘러나온 내장이 러닝셔츠 아래에서 덜렁거렸다.
우리 남 병장님 사격 솜씨는 중대 내에서도 최곱니다! 귀신같습니다!
다른 병사들이 곁에 서서 바람을 잡는 동안 조준을 마친 병장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날아간 탄환은 좀비 등 뒤의 상가 유리창을 박살 냈다.
“죽은 거예요?”
가희가 천진하게 물었다. 병장은 얼굴이 빨갛게 돼서 다급하게 다음 발을 조준했다.
“바, 바람이 불어서 그렇습니다! 바람 때문에…….”
또다시 한 발을 당겼지만, 이번에도 탄착점은 좀비의 머리와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또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공연히 시작한 자랑 때문에 병장은 물론, 전 분대원들의 등에서 땀이 솟았다. 그리고 여섯 발째에야 비로소 좀비의 머리통이 터졌다.
퍽―
관자놀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벽에 처박힌 좀비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분대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캬아~ 보, 보셨습니까, 제 솜씨!”
병장은 상기된 얼굴로 가희를 돌아보았다. 가희는 눈을 가리고 중얼거렸다.
“네에~ 정말 대단하세요. 근데 너무 무서워요, 가희는 저런 거.”
“걱정 마십쇼, 가희 씨. 저희들이 이렇게 매일 좀비 수를 줄여 나가고 있습니다. 반드시 안전하게 지켜 드립니다.”
병장은 가희를 달래주는 척하며 슬쩍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가냘픈 쇄골이 만져지는 순간,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찌릿했다. 가희는 눈을 다소곳이 뜨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네, 믿을게요. 오빠들 믿을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모두를 향해 윙크를 찡긋하며 돌아서서 옥상을 빠져나왔다. 바래다주는 병장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절절하게 묻어났다.
***
“양쪽 건물에 다 커피 가져다주고 오는 길인가?”
체육관으로 돌아온 가희가 담배를 챙기고 있을 때, 육만배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아뇨, 은행 쪽만 다녀왔어요. 담배 한 대 피우고 식당 건물도 마저 돌게요.”
“잘 녹여들 놨나? 명심하고 있지? 테라처럼 굴라고 한 말.”
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아주 미친년처럼 사방에 보는 사람마다 웃고 다니고 있어요. 말도 다소곳하게 하고요. 근데 이거, 엄청 피곤하네요.”
“그리고 일단 녹여놓기만 해야지, 아직 아무하고도 X치고 다니면 안 돼.”
“회장님…… 저도 보는 눈이 있지…… 아이구, 하고 싶은 마음도 없네요, 저런 땀내 나는 애들이랑은…….”
그렇게 말한 가희는 담배를 숨어 피우기 위해 화장실로 떠났고, 육만배는 자신의 가방 안쪽에서 두툼한 성경과 건빵 봉지를 꺼냈다.
성경 바로 아래에 있던 염주가 따라 올라왔지만, 육만배는 누가 볼세라 얼른 그걸 가방에 도로 넣었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배지를 꺼내 양복 깃에 달았다.
국내 최대 교회의 장로들만 달 수 있는 배지. 물론 진짜다. 수백억이 걸린 교회 내 세력 다툼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필요에 의해 목사가 직접 임명하고 달아준 장로 배지였다.
손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본 육만배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 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둘러앉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머, 육 사장님! 사장님도 믿는 분이셨어요? 세상에! 이거, 큰 희망 교회 배지 아니에요?”
중년 여자가 육만배를 반기다가 그의 옷깃에서 배지를 발견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조용히 찬송가를 읊조리던 주변 사람들도 큰 희망 교회라는 말에 눈빛이 달라졌다.
이제 완장 하나가 더해졌으니 그는 단순한 사장이 아니게 되고, 자연스럽게 그에 대한 존경심도 더 커질 것이다.
“아이구, 부끄럽습니다. 장로나 일반 신도나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선 다 같은 어린 종들 아니겠습니까?”
육만배는 너스레를 떨며 일일이 고개를 숙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가 염주가 아닌 성경을 골라 쥔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이곳 건대 쉘터의 종교 분포는 기독교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좀비들에게서 살아남은 이후 사람들은 좀 이상해졌다.
XX에 지독하게 탐닉하거나, 종교에 더 깊이 몰입하거나, 계속 울어 대거나……. 하여간 어딘가 극단적으로 변해갔다. 죽음에 한 발을 담갔다가 빠져나온 사람들의 심리란 논리로 설명하기 어려운 법이다.
어쨌든 누군가에게 약점이 있다는 건 육만배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빈틈이 있는 자들은 쉽게 허물어뜨릴 수 있다.
“그런데 왜 잠실에서는 한 번도 신도들 모임에 참석을 안 하셨어요?”
중년 사내가 의심스럽다는 말투로 물었다. 주변의 눈치를 보아하니, 이 고지식하게 생긴 녀석이 그동안 이 모임의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모양이다.
그야 간단하지, 이 멍청한 새끼야. 거기엔 목사들이 있었으니까 내가 끼어봤자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가 없잖아.
육만배는 사내를 빤히 쳐다보며 웃었다.
“하하, 그런 자리가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러게요, 제 불찰이지요. 하지만 늘 마음속으로 감사 기도를 올렸습니다, 형제님.”
“장로님이 계시니까 훨씬 마음이 놓여요. 육 사장님, 아니, 육 장로님. 이제부터 우리 모임을 좀 집전해 주세요.”
여자들은 홍조를 띠고 기뻐했다.
“허허, 제가 무슨 목사님도 아니고…….”
육만배는 쑥스럽다는 듯 웃었지만, 이미 그럴 요량이었다. 아니었다면 이런 자리에 낄 이유가 없다.
“그럼 다 같이 기도부터 할까요? 형제자매님들…….”
육만배는 좌우의 수십 명을 둘러보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서우십니까? 먼저 보낸 가족 때문에 눈물이 나십니까? 왜 착하게 살던 우리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지 모르시겠습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다 하나님의 섭리이겠지요. 주님께서 준비해 두신 고난이겠지요. 우리는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쓰여야 합니다. 그러면 눈을 감는 날, 천국에서 먼저 간 가족들과 재회를 하겠지요. 성경 말씀에도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원망이나 탄식이 아니라 더 큰 믿음과 기도입니다. 찬양입니다.”
“아멘! 아멘!”
수년간 초대형 교회의 장로였기는 해도 암송하고 있는 성경 문구가 몇 안 되는 탓에 별로 그럴듯하지 않은 인용이었다.
그래도 붙잡을 것이 간절하게 필요했던 사람들은 장로라는 권위에 현혹된 채 육만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흘렸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어깨너머로 보았던 기억을 되살려 모임을 마친 육만배는 양복 품에서 건빵을 꺼내 체육관 바닥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십일조인가요? 수입이 아니라 배급을 받은 건데…….”
옆자리의 여자가 부끄러워하며 물었다. 육만배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역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양식이지요. 저는 열 끼마다 한 끼를 바쳐서 제 믿음을 증거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걸 대체 어디에 씁니까? 목사님이 계신 것도 아닌데, 관리는 누가 하고요?”
아까부터 계속 의심스런 눈길을 거두지 않던, 고지식한 사내가 또 딴죽을 걸었다.
귀찮은 놈.
하지만 육만배는 이런 놈들을 잘 다룰 줄도, 이용할 줄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지내면서 통성명도 못 했군요. 형제님, 실례지만 성함이?”
육만배가 물었다.
“이요섭입니다. 갑자기 이름은 왜?”
뭔가 꺼림칙해하면서도 사내는 순순히 이름을 일러주었다. 역시 순진한 놈이다.
“허허허, 의심이 많은 도마와 같은 우리 요섭 형제님. 이해합니다. 믿음보다 의심이 훨씬 더 영리한 것처럼 느껴지죠. 하지만 막상 세상을 겪어보면 저런 분들이 또 항상 고지식하고 바른 분들일 때가 많더군요. 형제님, 형제님은 저를 믿지 않으시지만, 제가 먼저 형제님을 믿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만약 누군가 십일조를 바친다면 요섭 형제께서 관리하시는 것으로 하면요. 그러면 공정한 일이 아닐까요?”
육만배가 인자한 미소를 얼굴에 그리며 말했다. 고지식한 남자가 당황해하는 것과 동시에 주변의 사람들은 육만배의 큰마음에 감탄하고, 내일부터는 자신들도 십일조를 바치겠다며 수군거렸다.
좋아, 좋아.
육만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식량이 여유롭다고 해도 언제 보급이 끊길지 모르는 일이니, 이 겁에 질리고 어리석은 돼지들에게서 조금씩 거둬 비축해 놓을 필요가 있다.
어차피 저 고지식해 보이는 이요섭이라는 놈은 십일조에 손을 댈 만한 깜냥도 안 되기 때문에 은행에 맡겨둔 것처럼 안전할 것이다. 사람 하나 구워삶는 것은 일도 아니지, 암.
“그럼 내일 또 이렇게 모여 함께 복된 시간을 가지시죠.”
육만배가 모임을 마치려 할 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부르르릉거리는 디젤 엔진 소리, 워커가 철판을 딛고 뛰는 소리, 철제문이 삐걱대며 열리는 소리가 차례로 들려왔다.
이 쉘터의 보급이 잠실보다 풍요로운 진짜 이유, 외부에서 식료품과 생필품을 조달해 오는 병력이 귀환을 알렸다.
보통 자동차 높이의 두 배는 될 만큼 커다란 모래 수송용 차량의 철제 화물칸이 위로 열리고, 병사들은 인근 물류 창고를 털어 징발해 온 박스들을 하역했다.
“저, 저…… 무거워 보이는데, 우리 신도들이 좀 도울까요?”
육만배의 제안에 문가에 서 있던 남자들은 트럭 쪽으로 엉거주춤 다가갔다. 그리고 그 선두에 자연스레 육만배가 섰다.
봉사하는 리더이자 민간인들 전체의 대표자라는 인상을 남기기에 더없이 좋은 찬스이다.
“뭡니까?”
소위 계급장을 단 덩치가 육만배를 막았다. 육만배는 사업용 미소를 다시 만들어냈다.
“하하, 수고 많으십니다. 저희들을 위해 이렇게 애를 쓰시는데, 저희도 뭐 자그만 도움이라도 드릴 수 있을까 해서요. 젊은 분들만큼이야 못하겠지만, 그래도 라면 박스 하나쯤은 거뜬히 나릅니다. 아무거라도 팍팍 시켜주십시오.”
“말씀이야 고맙지만…… 규칙에 어긋납니다. 민간인분들은 물러서 주세요.”
소위의 말에 망설임이 깃들어 있다는 걸 육만배는 눈치챘다. 이쯤 되면 웃는 낯으로 밀어붙여도 된다.
이렇게 해서 몇 번 말을 섞고 일을 돕는 시늉을 하면 그다음에는 군인 대 민간인이 아니라 아우와 형님의 관계가 될 것이다. 그때부터 주도권을 휘어잡고 휘두르면 된다.
“아이구, 참. 언제까지 이렇게 대접만 받고 있을 수야 없죠. 자, 자, 뭣들 하십니까? 얼른 하나씩 받아서 안에 들여놓읍시다.”
육만배의 말에 소위도, 사병들도 잠시 멈칫했다. 사실 피곤하기도 하다.
보급품이 넉넉해야 쉘터가 평화롭다는 중대장의 지론 아래 외부로까지 나가서 위험을 무릅쓰고 물자들을 징발해 오기는 하지만, 매번 철책이 지켜주는 게이트 바깥으로 차를 몰아 나갈 때마다 긴장감 때문에 땀을 한 바가지씩 쏟아야 한다.
아무리 커다란 특장 트럭이라고 해도 좀비들의 거대한 파도와 맞닥뜨리게 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매일 하루도 쉬는 날 없이 계속 철책을 넓히는 작업까지 병행하고 있으니, 체력적으로 꽤나 한계까지 와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괜찮지 않을까? 위험한 것도 아니고, 그저 짐을 안으로 들여놓는 정도라면?
소위는 잠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얼굴의 땀을 쓸어내렸다. 그때, 체육관 위층에서 확성기 소리가 삐익― 하고 울려온다.
“게이트에 계신 민간인 여러분! 게이트에 계신 민간인 여러분!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 지금 즉시 체육관 내부로 이동하십시오!”
확성기를 통해 메시지가 전달되자마자 소위와 다른 병사들의 얼굴이 경직됐다. 그러고는 황급히 사람들의 손에서 박스를 빼앗아 들었다.
“들으셨잖습니까?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빨리!”
소위가 원망스럽다는 듯 말하며 돌아보았다. 뻘쭘한 얼굴의 교인 남자들과 함께 체육관 내부로 돌아가며 육만배는 위층을 올려다봤다. 아직 젊은 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의 사내 하나가 창가에 서서 아래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저놈이 대장인가?”
육만배는 야비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입가에 고인 침을 닦았다. 하필이면 대장이랍시고 어깨에 힘주는 놈과 만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대장 노릇을 하게 붕붕 띄워주면 된다.
아무리 빳빳하게 구는 인간이라도 가까이에서 차분하게 관찰하다 보면 욕망으로 인해 뚫린 허점이 보이기 마련이니까.
저녁 식사 후, 육만배는 이요섭을 앞세우고 위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랐다. 계단 입구에 민간인 출입 금지라는 푯말과 함께 체인이 걸려 있었지만,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가 믿는 것은 교인들의 서명이 적힌 종이쪽지였다. 적극적으로 봉사하고 싶다는, 일종의 탄원서인 것이다.
“이쪽으로 더 확장을 했으면 하는데, 안전 구역을 말이야.”
계단 중간쯤에 이르자 위층에서 나누는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육만배는 이요섭을 잡아당기며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만큼 큰 공사를 수행하기에는 건축 자재가 부족합니다.”
“아니, 북쪽 외곽으로는 벽을 쌓지 않을 거야, 먼젓번처럼 그냥 폭약 설치해서 도로 자체를 건물들이랑 같이 날려 버려. 아예 유입 자체를 차단하고 싶으니까.”
“그…… 상부 허가를 먼저 받지 않으셔도…….”
“못 기다려. 그쪽도 지금 뭔가 어수선하고 정신이 없어서 이쪽에 크게 신경을 못 쓰는 분위기야. 그러는 동안 규모 넷짜리 같은 게 하나 밀려오면 너무 손실이 클 거야. 봐, 그쪽을 날리면 이 아래로 이만큼의 안전 지역이 확보된다…….”
제법인데?
도로가 깊이 파여 버리면 좀비들에게는 낭떠러지가 되는 셈이다. 그거라면 굳이 시간과 노동력을 들여 벽을 쌓는 것보다 오히려 더 안전하기까지 하다.
육만배는 눈을 빛냈다. 계속 더 듣고 싶었는데 눈치 없는 이요섭이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거기 누구야?”
대위가 지도에서 계단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경비병들이 총을 겨누기 전에 이요섭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저는 그…… 피난민 교인 대표 이요섭이라고 합니다. 그…… 저희가 저녁 시간 동안 이야기를 좀 해봤는데요…….”
이요섭은 종이 서너 장을 보이며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 육만배는 서너 걸음 떨어져 그 뒤를 따랐다. 이요섭을 꼬드겨 앞세운 이유는 간단했다. 얼굴을 너무 팔아서 주의를 끌고 싶지 않아서다.
“민간인 출입 금지라는 푯말 없었습니까?”
대위는 감정이 섞이지 않은 말투로 물었다. 이요섭이 우물쭈물하는 동안 육만배는 위층의 모습을 눈으로 훑었다.
양쪽에 난 계단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놓아둔 탄약 상자들.
이놈들은 민간인을 믿지 않는 모양이다.
“아, 그걸 보기는 했는데…… 안전한 일이라면 저희도 대위님 지휘를 받으면서 봉사를 하고 싶어서……. 지금 똑같이 힘든 위기 상황인데 군인들한테만 다 알아서 해달라고 하기가…… 물론 저도 병장으로 전역을 하기는 했고…….”
“내려가세요. 여러분이 작업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요청이 없더라도 제가 투입하겠습니다. 그런 것보다 규칙을 지키시는 게 지금으로서는 더 도움이 됩니다.”
대위는 단호한 목소리로 이요섭의 말을 잘랐다.
“아…… 그…….”
“내려가요! 저희가 보호해 드릴 수 있는 한은 보호하겠습니다. 그러니 대한민국의 군인들을 믿고 편안히 쉬십쇼.”
말로 예의는 갖췄지만, 계단 아래를 가리키는 대위의 표정에는 권위 의식이 뚝뚝 흘러넘쳤다.
“갑시다, 이 대표님.”
육만배는 이요섭을 당겨 먼저 계단을 내려가며 아주 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 대위 놈은 자부심을 가진 군인이다. 꽤나 영리하고, 원칙주의자인 데다가 부하들을 장악하는 힘도 있는 모양이다.
다시 말해 제대로 된 인간이고, 그러니 그냥 내버려 둬서는 곤란한 놈이라 결론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