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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산다는 것 (3) (169/449)


169. 산다는 것 (3)
2022.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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밟혀 부러진 잡초들, 다져진 흙. 기시감이 드는 풍경.

그가 한나절을 허비하고, 그렇게나 아끼던 두유를 두 팩이나 터트려 가며 한 일은 산의 험로를 가로질러 좀비들의 오솔길 끝자락으로 다시 내려온 것뿐이었다.

이럴 거면 뭣 때문에 그 난리를 쳤던 것일까 싶어진 진우는 이마를 찡그리며 걸음을 서둘렀다. 가방에서는 아직도 두유가 뚝뚝 떨어진다.

끄롸아악!

좃같은 일은 늘 겹친다. 몇 걸음 달아나지도 못했을 때, 코너를 돌아 나온 좀비가 큰 소리로 포효하며 등장을 알렸다.

진우는 망설이지 않고 수풀 너머 언뜻거리는 목표를 향해 K―2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투둑―

앞줄에 선 세 놈의 머리통이 터지면서 뇌수와 찐득한 검은 피가 솟는다. 산 전체를 울리며 메아리치는 총성과 좀비들의 울음이 기괴한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그롸아아아―

간만에 손님을 맞이한 놈들은 미친 듯한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진우는 뒷걸음질을 치면서 가까운 순서대로 총알을 박아 넣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금방 탄알이 다 떨어지고 말 것이다.

퍼퍽― 퍼버벅―

맛이 갈 데까지 간 데다 관리라고는 받지 못한 K―2의 명중률은 급격하게 저하되어 버려서, 한 놈을 쓰러뜨리는 데 두세 발이 필요한 지경이었다.

그리고 놈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동료의 시체를 밀치고 총구 앞으로 돌진해 왔다.

투두둑― 투툭―

탄창 하나가 금방 동이 났다.

“아윽! 씨발, 진짜!”

탄창을 갈아 끼울 때,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던 검지의 손톱이 뜯어져 나갔다.

정말 말 그대로 손톱만 한 차이인데도 그게 없으니 탄창을 빼고 끼우는 게 훨씬 더디다. 그러는 동안 거리를 좁힌 좀비들의 아가리는 닿을 듯 가까워졌다.

더 이상의 교전이 무의미하다고 느낀 진우는 앞뒤 재지 않고 곧바로 비탈길 아래를 향해 뛰어내렸다. 사방의 풍경이 휙휙 스쳐 지나간다.

쫘아악― 쫘악―

나뭇가지들이 회초리처럼 얼굴을 후려치고, 발끝은 하늘을 나는 건지, 경사로 위를 내달리는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끄롸아아―!

진우를 따라 뛰어내린 좀비들이 중심을 잃고 굴러 떨어진다. 발목이 꺾이는 놈, 목이 부러지는 놈,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바위에 얼굴을 짓찧는 놈들까지…….

적지 않은 수가 뒈져 버렸지만, 아직 그의 뒤를 따라 뛰어오는 놈들이 있었다.

“크윽!”

진우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사실 이제는 자기 의지로 뛰는 게 아니라, 가속도가 붙어 빠르게 떨어지는 몸을 그의 발이 필사적으로 따라붙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나무를 피해 조금 방향을 바꾸는 것조차 엄청나게 어렵다. 이러다 넘어지면 아마 어딘가를 들이받고 죽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긴 내리막의 끝에는 대체 뭐가 있지?

끄롸아아아―!

속도를 늦추고 싶다가도 등 뒤에서 들려오는, 저 소름 끼치는 소리만 들으면 몸이 더욱 앞으로 기운다. 저 미친놈들은 포기라는 걸 모른다.

콰작!

또 한 놈이 뭔가에 받혀 뼈가 부러지는 모양이다.

되돌아볼 여유 같은 건 없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곧바로 저승으로 간다. 몇 번이나 아슬아슬하게 장애물을 피해 뛰어 내려가던 진우의 앞에 캄캄한 골짜기가 나타났다.

시커먼 골짜기의 아가리. 깊이도, 폭도 전혀 모른다. 확실한 사실은, 만약 여기서 멈추려 했다가는 100퍼센트 죽는다는 것뿐.

“윽!”

피한다고 생각했는데 방향을 온전히 틀지 못해 나무 밑동에 허벅지를 찧었다.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며 내달리던 진우는 낭떠러지 직전에서야 겨우겨우 몸을 바로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곧장 ‘이얏!’ 하며 있는 힘껏 하늘을 향해 뛰어올랐다. 골짜기 저편의 우거진 풀숲이 눈에 들어온다. 저기까지 닿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근데 아무래도…… 점프가 짧다.

으아아아아~

“이익!”

마지막 순간, 진우는 두 팔을 뻗어 건너편 절벽의 흙 바깥으로 뻗어 나와 있는 나무뿌리를 움켜쥐었다. 속절없이 아래로 미끄러지기만 하던 손가락에 휘어 있는 뿌리가 걸렸다. 진우는 온 힘을 다해 그걸 붙잡았다.

끄와아아―

그를 뒤따라 뛰던 좀비들이 골짜기 아래로 떨어져 내리며 쏟아내는 소리가 멀어져 간다.

그런 후, 쿵― 하는 울림.

진우의 시선은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골짜기 아래의 단단한 바위로 된 바닥에 온몸이 터진 좀비들의 시체가 쌓여간다. 까마득한 높이. 이렇게 깊은 낭떠러지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다면 도저히 뛸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뒤를 쫓던 추격자들이 하나하나 돌바닥 아래로 떨어져 박살 나는 소리를 들으며 진우는 뿌리를 꽉 잡고 천천히 절벽을 기어 올라갔다.

“하아~ 하아~! 쿨럭! 쿨럭!”

안전한 곳까지 도달한 진우는 완전히 탈진해서 큰대자로 뻗어버렸다. 아까부터 물을 찾던 입술은 바짝 마르다 못해 쩍쩍 갈라졌고, 입속은 침 대신 흙으로 잔뜩 채워졌다.

마른기침이 터져 멈추지 않는다. 팔다리에 감각이 없다. 그래도…… 살았다. 이번에도 이기고 살아남았다. 진우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돌아보니 골짜기 건너편에서는 아직도 속도를 줄이지 못한 좀비들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중이다.

비틀대며 걷던 진우는 나무 사이로 흐르는, 아주 가느다란 실개천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물, 물! 물이다! 물!

입을 대고 마실 수 있을 만한 깊이는 아니지만, 어쨌든 물이다. 진우는 신을 목격한 광신도처럼 납작 엎드려서 일단 두 손에 물을 묻혀 입술부터 적셨다. 손끝이 수면에 닿는 감촉부터가 너무나 황홀했다.

어떻게 하면 이 물을 마실 수 있을지 고민하던 진우는 손톱이 벗겨진 것도 잊은 채 정신없이 흙을 팠다. 그러고는 가방을 벗어 지퍼를 열고 구덩이 모양에 맞도록 잘 폈다.

이내 아까보다 훨씬 맑고 부유물이 없는 작은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두유가 섞여 희뿌연 물이 다 흘러 내려가기도 전에 진우는 거기에 얼굴을 박고 정신없이 마셨다.

오늘 흘린 땀과 뒤집어썼던 먼지가 섞인 물이, 너무도 달콤하고 시원한 그 물이, 입술을 거쳐 혀를 지나 목구멍으로 흘러든다.

두유 두 팩과 손톱 한 개, 그리고 탄알 30발을 써서 살아남은 자만이 느낄 수 있는, 벅찬 만족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

건대 쉘터의 피난민들 사이에서는 시간이 아주 느리게 갔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를 보내는 일이 실은 꽤나 고통스럽다는 걸 그들은 절실하게 느끼는 중이었다.

고맙기도 하고 잠실보다 나은 점에서는 확실하지만 여전히 맛이 있다고는 할 수 없는 세끼의 밥.

정해진 시간에 맞춰 그걸 꾸역꾸역 먹고 나면 중요한 일과는 모두 사라진다. 그 뒤에 남은 것은 자유라는 이름의 괴롭고 더딘 일상뿐.

체육관 벽의 무늬를 보며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가 얼마나 지난 걸까 하고 시계를 돌아보면 이제 겨우 20여 분이 지나 있기가 일쑤였다.

후텁지근하고 끈적끈적한 공기를 참아내며 간신히 버틴 그 20분이 끔찍하게 느껴질수록 사람들은 자연스레 체육관 뒤편의 주차장으로 몰렸다. 거기에선 최소한 바깥이라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임수정도 마찬가지였다. 뜨겁게 달아오른 아스팔트의 열기를 참아가며 철책에 매달려 바깥의 풍경을,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죽어버린 도시의 오후 풍경을 해가 질 때까지 멍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한심하지만 그것밖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잠실 쉘터의 푸른색 잔디와 넓은 건물 내부가 새삼 그리워졌다.

“탱크다.”

임수정의 곁에 서 있던 중년 여자가 먼 도로 쪽을 가리켰다. 임수정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크르르르르릉― 크르르릉―

육중한 소리를 내며 탱크와 중장비가 움직인다. 탱크는 그들에게 주어진 거의 유일한 볼거리이자 오락물이었다.

우드드득, 콰지직―

도로를 막고 있는 자동차들을 탱크가 밟아 찌그러뜨리고, 중장비들은 그걸 길 한쪽으로 몰아 길을 튼다.

철책을 넓혀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벌이는 그 작업은 며칠 동안 보고 있어도 별로 질리는 법이 없을 만큼 박력이 넘쳤다.

그리고 다른 쪽에서는 태풍으로 인해 날아간 외부 철책들을 재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타아앙―

근처의 건물에서 총성이 울린다. 이따금씩 들리는 총소리는 익숙해서 이제는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도 않는다.

“쟤들 봐요. 쟤들 뭔지 알아요?”

중년 여자가 지목한 것은 위아래를 모두 파란색으로 맞춰 입은 한 무리의 노동자들이다.

며칠 전부터 눈에 띄기 시작한 그들은 군인들의 지휘를 받으며 외부에서 철책 보수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임수정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네요. 공무원들인가요?”

“하하, 아니에요. 쟤들…… 죄수들이래요, 죄수들.”

대단한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중년 여자는 목소리를 낮춰가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죄수들…… 수감자라고요?”

“응. 그러니까 저렇게 외부 작업에 투입되잖아요. 여차하면 죽어도 아쉬울 게 없으니까.”

중년 여자가 태연한 표정으로 지껄이는 말에 소름이 끼쳐서 임수정은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

죽어도 아쉬울 게 없다니…….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면서 저 사람들을 동물 이하로 취급하자는 건가.

그랬구나, 그래서 저 푸른 옷을 입은 사람들은 야간에도 따로 별도의 건물에 몰아넣고 재웠던 거구나…….

이 지경이 되고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새삼 징그럽다. 그런 임수정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한 중년 여자는 계속 떠들어 댔다.

“지금 군인들이 교도소를 요새처럼 쓴대요. 거기가 워낙에 벽이 단단하고 높잖아. 그러니까 좀비들이 암만 몰려들어 봐야 안전하지. 그래서 원래 거기 갇혀 있던 죄수들은 다 밖으로 내보내서 저렇게 위험한 작업 하는 데 써먹는다는 거야. 우리한테는 잘된 일이지. 저런 죄수들도 죽기 전에 한 번쯤은 남한테 좋은 일도 좀 해야지 않겠어?”

여자의 말을 듣고 있자니 어쩐지 속이 메슥거리는 것 같아 임수정은 자리를 피했다. 가끔 저렇게 미친 사람처럼 구는 인간들을 만난다.

자기 목숨만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 좀비에게 세상이 다 갈기갈기 찢겨 버리는 아수라장을 직접 목격하고 겪었으면서도 천년만년 살 것처럼 구는 사람들.

걸으면서도 자연스레 임수정의 시선은 푸른 옷의 수인들 쪽을 돌아보게 되었다.

힘없이 해머를 휘두르고 시멘트를 나르는 그들의 모습에서 강한 연민이 느껴졌다. 저들 모두가 흉악한 살인마나 강간범들은 아닐 테니까.

“어? 언니, 어디 가세요?”

임수정과 교차하며 아는 체를 하는 여자는 가희였다. 잠실에 있을 때에는 잘 몰랐는데, 이 아가씨 꽤나 싹싹하고 친절하다.

군인이나 피난민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먼저 인사를 하며 친화력을 발휘한 덕에 가희는 며칠 만에 이곳의 인기인이 되었다.

테라도 그렇더니, 연예인이라는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사근사근한 걸까? 그렇다면 내가 가지고 있던 선입견이 틀린 거였나 봐…….

임수정은 멋쩍게 웃으며 그녀에게 마주 고개를 숙였다. 가희는 예쁘장한 얼굴에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수통과 컵을 들어 보였다.

“혹시 커피 드시겠어요?”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임수정은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오후의 커피 한잔. 예전 정수장에서 근무할 때에는 꼭 필요한 것이지만, 요새 같아서는 사양하고 싶다.

가뜩이나 하루가 길기만 한데 저걸 먹고 혹시 밤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게 된다면 너무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래도 마음이 내키기만 하면 아무 때고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긴 하다. 잠실에서는 저런 기호품이 지급되지 않았으니까.

커피는 이 건대 쉘터의 삶이 가진 물질적 풍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곳 건대 쉘터에서는 꽤나 다양한 먹을거리들이 피난민들에게 보급되었고, 잠실에 비해서는 양도 풍부했다.

아이들이 초콜릿 묻은 입을 오물거리며 웃는 모습도 꽤나 오랜만에 보는 흐뭇한 풍경이었다. 덕분에 좁은 체육관에 몰려 열대야의 더위를 견디면서도 멱살잡이를 하는 일은 잠실에서보다 적다.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임수정의 물음에 가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네, 저 건물이요. 저기 근무하는 오빠들도 피곤해하실 시간인 것 같아서 가희가 커피라도 좀 드릴까 하고요.”

가희가 도로 건너편의 건물을 가리켰다.

7층 높이의 은행 건물 2층과 그 맞은편의 5층짜리 식당 건물은 체육관 담장 위에서 뻗어 나간 철책을 통해 허공에서 연결되어 있고, 그 Y자 모양의 구름다리를 타고 저격수들의 이동 경로로 사용되었다.

체육관보다 더 높고 시야 확보가 쉽기 때문에 두 건물의 옥상에 배치된 저격수들은 24시간 잠시도 틈을 비우지 않고 교대해 가며 그 자리를 지켰다.

가끔씩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좀비들 서너 마리를 처치하기도 하지만, 주된 임무는 어디까지나 감시였다.

대형 좀비 무리가 행진해서 다가오거나 할 때면 신호를 주어 도로에서 작업하던 병력과 푸른 옷의 수감자들을 대피시키도록 했다.

탱크가 있어도 여전히 좀비들은 신경 쓰이는 존재였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도로가 종종 꺼져 버리는 통에 탱크의 운용에 지장을 초래하는 일이 많은 까닭이다.

“어머!”

굉음과 함께 도로 아래로 한쪽 차체가 빨려 들어간 탱크를 보며 가희가 입을 막았다.

위이이잉― 위이잉―

탱크는 무한궤도를 돌리며 안간힘을 쓰지만, 그럴수록 아스팔트 도로에 난 구멍은 더 크고 넓어지기만 할 따름이었다. 중장비를 동원해야 할 상황이 온 것이다.

“또 빠졌네요. 벌써 몇 번째야…….”

가희가 불안해하며 중얼거렸다. 그녀뿐 아니라 공사를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 모두 한마디씩 거들며 웅성댔다.

태풍 때문에 푹 젖어 있다가 물기와 내부 토사가 빠져나간 도로는 탱크의 무게를 버텨내기가 버거운지, 아무런 예고도 없이 푹푹 꺼져 나갔다.

작업 속도가 느리고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못하는 건 바로 그 때문인가 보다. 와이어를 연결하고 발판을 설치해서 탱크를 겨우 끄집어내고 나면 서너 시간은 후딱 지나가 버렸다.

“왜 저럴까요? 암만 망조가 들었다고 해도 길까지 저렇게 안 도와줄 수가 있나요? 평소에는 멀쩡하던 도로였는데, 왜 하필 이런 때에 저렇게 뻥뻥 구멍이 뚫리죠? 재수가 없어서 그런가?”

가희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임수정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아마 도로 아래에 깔린 파이프들이 비어서 그럴 거예요.”

“파이프요?”

“네. 왜, 있잖아요. 수도관이니, 가스관이니, 하수도관이니, 그런 것들.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도로 아래 어딘가 그런 게 잔뜩 깔려 있거든요. 예전에는 그 관들마다 내용물이 들어차 있으니까 그게 힘을 같이 받아줬는데, 이제는 텅 비었잖아요. 아주 약해졌을 거예요. 그만큼 버티는 힘이 약해진 거죠. 게다가 이미 균열도 많이 생겼을 텐데, 보수도 되지 않고…….”

“헤~ 설명을 들었어도 무슨 말인지 가희는 다 알아듣지를 못하겠네. 어쨌든 언니는 무진장 똑똑하시네요.”

“아뇨, 똑똑하기는요. 그냥 하던 일과 조금 관련이 있어서 그래요.”

잠시 입을 벌린 채 부럽다는 듯 임수정을 바라보고 있던 가희는 깜빡했다는 듯 자기 이마를 두드렸다.

“아차,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오빠들 커피 가져다 드려야 하는데.”

“근데, 우리가 저 건물로 가도 되는 거예요? 군인들이 지키고 있던데.”

“후훗, 그러니까 비밀이에요, 언니. 그래도 저 오빠들, 가희가 주는 커피 마시면서 엄~청 행복해하거든요. 그 정도는 해야죠.”

혀를 날름하고 담장으로 뛰어간 가희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 그곳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들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했다.

이미 여러 번 가희의 커피 배달을 경험해 본 경비병들은 고마워하며 그녀를 통과시켜 주었다.

가희는 사다리를 기어올라 파이프로 만들어진 구름다리를 밟고 건너편 은행 건물 쪽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철컹철컹.

파이프 사이로 아래 도로가 내려다보인다. 불타 버리고 찌그러진 자동차들, 2중으로 단단하게 쌓아둔 높은 철책, 그리고 군데군데 여러 유형의 얼룩이 눈에 띈다.

사람들의 핏자국, 좀비들의 체액과 뇌수.

청소를 했어도 죽고 죽이던 현장의 기록은 여전히 남아, 떼어지지 않는 껌딱지처럼 잊히지 않으려 발버둥쳤다.

“어, 가희 씨?”

옥상을 지키고 있던 분대 병력은 가희를 보자마자 일제히 만면에 웃음을 띠며 반갑게 맞이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하기도 한 일이다.

톱스타는 아니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TV에 나오던 미녀가 이렇게 손수 커피를 가져다주고 곱고 흰 손으로 한 잔, 한 잔 따라 준다는 게 어지간히 기쁜 것이다.

가뜩이나 이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피가 끓는, 20대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군인 집단에게 있어 연예인을 직접 보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건 단순한 흥분 이상의 의미였다.

게다가 좀비 세상이 도래하면서 휴가도 외박도 불가능해진 지금은 여자에 대한 열망이 커질 대로 커져 있는 상태. 그래서 오후 교대조에 속한 병사들은 경비를 서는 시간 내내 구원처럼 그녀의 방문을 기다렸다.

“오빠들, 피곤하시죠? 가희가 커피 가져왔어요!”

가희는 살살 눈웃음을 치며 수통을 들어 올렸다.

이예― 병사들은 체육관에 닿지 않을 만큼 소리를 죽여 환호했다. 그러고는 병장부터 순서대로 가희가 종이컵에 따라 주는 커피를 받았다.

다들 컵을 받는 척하며 은근히 손가락을 스쳤다. 그리고 가희가 허리를 숙일 때 트레이닝 지퍼 사이로 보이는 가슴 골짜기를 곁눈질했다.

“맛있어요?”

“네, 네. 물론입니다. 최곱니다.”

가희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 뒤, 느릿한 걸음으로 옥상 주변을 천천히 서성였다. 이병 둘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억눌러진 욕망의 뜨거운 기운이 옥상 위를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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