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산다는 것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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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산다는 것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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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산다는 것 (2)
2022.02.15.
격하게 뛰는 가슴이 조금 진정됐을 무렵, 경사진 저 먼 아래로 썩은 대갈통과 몸뚱이들이 무리를 이루고 나타났다. 산길이라고 특별히 지치는 법이 없는지 놈들은 정말 빠른 걸음으로 휙휙 사라져 지난다.
하나, 둘…….
반사적으로 놈들의 수효를 헤아리던 진우는 30이 넘어간 다음부터 세는 것을 관두었다.
자신이 가진 화력으로는 저놈들을 처리할 수 없다는 게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 허비하기에는 탄알이 너무 소중했다.
정면으로 놈들을 제압할 수 없으니 남은 선택지는 피하는 것뿐이었다. 진우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조심하면서 좀비들의 행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가만히 앉아 기다린다는 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비탈 위에서 내려다보고는 있지만, 혹시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목덜미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그 땀 냄새를 맡은 모기들은 계속 달려들었다.
그놈들을 조용히 쫓는 것도 꽤나 신경이 쓰였다. 지루하고 답답한 시간이 계속 흐르는 동안 진우는 조바심과 싸우면서 얌전히 제자리를 지켰다.
“다 간 건가…….”
좀비 행렬의 꼬리가 시야 밖으로 사라진 뒤에도 입속으로 600을 더 셀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진우가 어깨를 벅벅 긁으며 일어났다.
지랄 맞은 모기 새끼들 덕에 온몸이 간지러워졌다. 몇 걸음을 옮기던 진우는 새삼 주변을 살폈다. 어느 쪽으로 가야 북쪽인 건지 방향을 잃어버렸다.
해는 하늘 정가운데에 높이 떠 있으니 한동안은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 산속에서 그림자가 길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건 현명하지 못하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는 평지로, 적어도 몸을 숨길 만한 장소까지는 가야 한다.
“남쪽으로 난 가지가 더 굵다고 했던가? 뭐,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눈대중으로 가지들을 살피고 오솔길의 방향과 대충 끼워 맞춰 걸어가면서도 마음속 한구석이 불안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만약 방향을 잘못 잡고 있는 것이라면 소중한 하루 치 식량을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낭비한 셈이니까.
“제발 맞아라. 이쪽이 북쪽이어야 한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울퉁불퉁하고 미끄러운 산길을 걸었다. 완만한 비탈이 연속으로 이어져 있고, 빽빽하게 늘어선 나무들을 피해 다니다 보니 똑바로 걸어간다는 것이 꽤나 힘들었다. 마치 산에 홀리는 것 같다.
이래서 사람들이 산속에서 미아가 되는 걸까?
진우는 계속 뒤를 돌아보면서 방향을 수정하고, 움푹 팬 곳을 밟아 휘청거리면서도 또 부지런히 전방을 경계했다.
100미터를 전진하는 게 평지에서 1킬로를 걷는 것보다 더 어렵고 힘들다. 세 시간도 채 자지 못한 사람이 삼복더위 한낮에 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아, 어지러워. 이게 무슨…….”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벌써 몇 시간째 볼일을 보지 않았는데도 오줌이 마렵지 않았다. 당연히 그만큼 입안은 바짝바짝 말라서 격하게 수분을 원한다.
하지만…… 실컷 뭘 마실 수도 없는 입장이다. 할머니네 집에서 가져온 두유가 이제 두 팩밖에 남지 않았다.
하나만 뜯을까? 그래도 하나는 남는 거니까…….
가방을 열어 애절한 눈으로 두유 곽을 보던 진우는 고개를 흔들면서 다시 지퍼를 잠갔다. 아직 버틸 만하다. 대신 그는 솔잎을 한 줌 뜯어내 입안에 넣고 씹었다.
쓰고 떫다. 그래도 그 덕에 침이 나오고 솔잎 고유의 향기를 맡고 나니 어지럼증도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런 데 송이버섯도 있을 법한데, 내 눈엔 왜 안 보이냐…… 아, 그보다 물을 찾아야 하는데. 샘물이나 약수터라도…….”
물은 참 곤란한 놈이다. 그 무게 때문에 한꺼번에 많이 짊어지고 다닐 수가 없는데, 워낙 소비가 빠르고 정작 필요할 때마다 다시 보충하기가 어렵다.
정수기에서 콸콸 쏟아져 나오던,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그립다. 다시 그런 물을 마실 날이 오기나 할지……. 솔잎을 우물거리며 갈증을 진정시킨 진우는 다시 기운을 내서 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숲속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푹푹 찌는 날씨 때문에 끈적거리는 온몸에서는 쉰내가 풍긴다. 하긴 거지도 이런 상거지가 없을 정도의 몰골이니 자연스러운 일이기는 하다.
“아카시아!”
아찔할 만큼 달콤한 향기. 부러진 나무에서 무성하게 피어오른 녹색과 흰색을 본 진우의 입에서는 반가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새로 올라온 가지에서 고맙게도 피어오른 꽃이 탐스럽다.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바짝 마른 라면 따위보다 몇 배나 좋은 음식처럼 느껴진다.
손에 닿는 대로 꽃을 훑어 입속에 욱여넣던 진우는 따끔한 감촉 때문에 손을 움츠렸다. 잊고 있었다. 이 나무에 장미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날카롭고 단단한 가시가 있다는 사실을…….
피가 맺힌 손바닥을 쪽쪽 빨고 나서 곧바로 또 꽃잎을 뜯어 입으로 가져갔다. 연한 꽃잎을 씹으면 달콤한 꿀과 수분이 터져 나와 혀를 행복하게 해준다.
그렇게 옆으로 누운 나무의 아카시아 꽃들을 거의 다 뜯어 먹고 나니 한결 살 것 같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꽃잎 부스러기와 꽃가루가 잔뜩 묻어 있는 입가를 닦으며 진우는 대견하다는 듯 아카시아 나무를 칭찬해 주었다.
그 지독했던 태풍을 이겨내고 남아 있는 건 아닐 테니, 아마 이 꽃들은 어제나 오늘 막 피어올랐을 것이다.
아직 지지 말고 힘내라는 의미를 담아 강원도의 자연이 작은 선물을 준 것 같아서 진우는 한층 용기를 얻었다. 덕분에 두유 하나를 절약할 수 있었고, 우울했던 마음의 그늘도 어느 정도 걷힌 기분이다.
“훗~ 크큭!”
양쪽으로 나란히 잎이 붙은 아카시아 나뭇가지를 보던 진우는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어린 시절, 저 잎을 하나씩 뜯으며 친구들과 했던 온갖 시답지 않은 내기들이 떠오른다.
나중에 누가 더 예쁜 마누라를 얻을 건지, 누가 더 돈을 많이 벌게 될 건지, 그딴 것들을 참 진지하게도 아카시아 가지에 대고 물었었다.
가끔은 너무 진지해져서 티격대며 쌈박질까지 했다. 물론 늘 보안관의 승리로 끝나는, 싱거운 싸움이었지만.
“젠장…….”
웃음이 사라지고 곧바로 눈가가 뜨거워진다.
어쩌다 이런 세상이 되어버려 가지고…….
진우는 후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들, 친구들……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해도 이렇게 불쑥불쑥 떠오르면 뜨거운 것이 이렇게 목구멍을 치받고 올라온다.
다들 살아 있을까? 어렵겠지, 아마도…….
여기까지 오는 나흘 동안 도로를 이동하는 군인들 말고는 살아 있는 사람 구경을 못 했다.
강원도처럼 인구가 적은 지역도 이럴진대 서울, 경기는 더 엄청난 수의 좀비들이 떼를 이뤄서 휩쓸고 다녔을 게 분명하다. 특히 삼식이처럼 멍청한 놈은 어~ 어~ 하다가 아마 벌써 저승으로 가버렸겠지.
“아냐! 아냐!”
진우는 자신의 뺨을 톡톡 두드리며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아무도 남지 않았다고, 이런 길고 괴로운 여정이 전혀 의미 없는 헛걸음이 될 거라고 자꾸 마음에 핑계를 만드는 건 슬슬 포기하고 싶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자신의 눈으로 보게 될 때까지는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고 진우는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다.
……살아 있을 거야. 살아 있어! 전부는 아니라도 분명히 누군가 하나 정도는 살아남아서 네 걱정을 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약해지려고 핑계 대지 마. 넌 어떻게든 자대 구령대 아래서 만 발을 캐내고, 살아남아서 서울로 가야 돼. 거기에 가면 분명 반가운 얼굴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너를 맞을 거야…….
하지만 아무리 상상을 해봐도 그 반가운 얼굴이 도무지 그려지지가 않는다. 마치 모자이크를 해놓기라도 한 것처럼 목 위가 뿌옇게 흐리기만 하고, 누구인지 알아볼 수가 없다.
후우우~ 진우는 크게 숨을 쉬면서 지친 두 다리에게 걸으라고 명령했다.
보급품을 공수해 주던 헬기 조종사가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해주었던 이야기. 도시에는 쉘터라는 이름의 긴급 대피처가 운용되고 있다는 그 이야기만이 그가 붙잡고 있는 유일한 희망의 끈이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유지가 될까? 장갑차가 지키고 있던 원전도 무너졌는데?
대화를 할 사람이 없으니 망상은 점점 더 깊어지고, 그렇게 되면 집중력은 흐트러진다.
“윽!”
진우가 현실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할 때, 자연은 예외 없이 채찍질을 가했다. 튀어나온 나뭇가지가 종아리를 찌르고, 단단하지 않은 지면을 밟으면 발이 미끄러진다.
진우는 머릿속에서 암울한 생각들을 떨쳐 버리고 지금 당장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산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지만 생각하려고 애를 써야 했다.
다행이라면 그렇게 산을 헤매는 사이, 그림자의 길이가 미세하게나마 길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자기 그림자를 오른쪽에 두고 걷기만 하면 북쪽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는 게 가능하다.
시계가 없어서 정확한 시간 경과는 알 수 없지만, 두어 시간은 족히 울퉁불퉁한 산길을 누빈 뒤에야 진우는 능선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더럽게 됐네.”
정상에서 바라보자 산의 북쪽은 그가 지나온 남쪽보다 훨씬 더 가파르고 바위도 많았다.
나무들에 가려 정확히 보이지는 않지만, 중간중간에는 등반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나 좋아할 것 같은 난코스도 끼어 있었다.
찍― 진우는 자신의 전투화를 바위에 대고 문질러 봤다. 슥, 하고 미끄러지는 것이, 안정적인 접지와는 거리가 있다. 진짜 싫다.
진우는 조용히 투덜거리며 다시 나뭇가지를 꺾어 전투화 바닥의 홈을 최대한 깨끗하게 청소했다. 내키지는 않지만, 여길 지나지 않으면 앞으로 전진할 수가 없다.
나무들을 붙잡고 거기에 체중을 실으며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다시 앞으로 팔을 뻗어 다음 나무를 잡고, 발아래를 잘 살피면서 한 발, 한 발…… 경사로를 내려갔다.
태풍의 여파는 이쪽이 더 크게 남아서, 흙이 파이고 나무가 부러진 흔적이 훨씬 자주 눈에 띈다. 그만큼 지반이 약해졌다는 의미고,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
엑스 자로 교차시켜 멘 K―2와 장바구니가 꽤나 거추장스럽게 느껴져서 진우는 도중에 몇 번이나 끈을 다시 메고 총구 방향을 돌렸다.
“자, 이제 여기만 내려가면 되는 건데…….”
둥글게 튀어나온 바위 덕에 아래쪽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지점까지 도달했을 때, 진우는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내밀고 밑을 살폈다.
바위와 바위,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나와 자란 나무들. 그 외에 더 편한 루트는 없다. 등산 같은 건 해보지도 않았기에 어디를 어떻게 잡고 이동해야 할지 계산이 잘 서지 않는다.
까딱하면 10여 미터 아래로 구르게 생긴 상황이어서 팔에 돋아난 소름이 가시질 않는다. 차라리 돌아가야 하나 싶어진 진우는 조금 전 자신이 내려온 길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가파른 경사를 어찌어찌 나무들에 의지해 내려오기는 했지만, 저길 기어오르는 건 이 암벽을 타고 내려가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어 보인다.
“하는 수밖에 없네.”
허벅지를 가볍게 팡팡, 두드린 진우는 튀어나온 부분을 두 손으로 잡고 한 발짝을 바위 위로 내려 디뎠다. 그러고는 몸을 바짝 붙인 채 다리를 아래로 뻗어 미리 보아두었던 지점을 찾았다.
3미터도 가지 않아 절실하게 느낀 것은, 이건 아마추어가 할 짓이 못 된다는 깨달음이었다. 나름 체력에 자신이 있던 그지만, 금세 손끝과 종아리가 달달 떨리고, 전완근이 뻐근해진다.
머릿속으로 그렸던 경로로의 이동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믿을 것이라고는 새까맣게 때가 낀 손톱과 국방부에서 지급해 준 전투화의 밑창뿐이다.
“……제발 좀, 닿아라.”
허공에 대롱거리며 디딜 곳을 찾던 진우의 입에서 애원이 터져 나왔다. 이제 딱 한 고비만 넘기면 무사히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도무지 발 댈 곳이 나타나지 않는다.
더 허우적거려 봐야 근력만 소진될 것 같다고 판단한 진우는 한 팔을 나무에 둘러 버티면서 대검을 빼 들었다. 그러고는 오른쪽 아래에 있는 바위틈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휙―
거리가 조금 모자라서 대검은 허공을 갈랐고, 진우의 몸은 크게 휘청거렸다. 크윽~ 나무에 걸친 왼팔에 무게가 실리자 저절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진우는 이를 악물고 그 고통을 참으면서 몸을 흔들다가 다시 한 번 목표를 향해 대검을 찔러 넣었다.
칵―!
대검의 날이 바위틈을 가르는 반가운 소리가 울린다. 진우는 손에 힘을 주어 대검을 더 깊숙이 박았다. 칼이 박혀 들어갈수록 진우의 두 팔은 더 넓게 벌려졌다.
이게 내 체중을 버텨줄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 상태로 멈춰 있을 수는 없는 일. 나무에 두르고 있는 왼팔이 더 버틸 수 없을 것 같다고 느낀 순간, 진우는 기합과 함께 팔을 풀고 대검을 잡고 있는 오른손 위로 왼손을 겹쳐 쥐었다.
카가각―!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돌 부스러기가 얼굴 위로 쏟아진다. 하지만 대검은 용케 바위틈 깊숙이 박힌 채 버텨주었다. 대롱대며 매달린 진우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제 발 댈 만한 곳만 찾으면 된다. 허우적대며 사방으로 발을 젓다 보니 어딘가 닿는 부분이 있었다. 푹신하다. 나무라는 의미다.
아아~ 진우는 발에 체중을 싣고 조심조심 아래로 몸의 중심을 옮겼다. 그때, 대검이 쑥― 하고 빠지며 진우와 함께 떨어졌다. 딛고 있던 나뭇가지는 매정하게 휘면서 아무런 저항도 되어주지 않았다.
어어어~! 아래로 떨어지는 동안 진우는 아무것이라도 잡아보기 위해 두 팔을 미친 듯이 휘저었다.
후드득,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주먹은 애먼 이파리만 잔뜩 움켜쥐는 꼴이 되었다.
눈앞으로 튀어나온 바위가 스쳐 지난다. 진우는 팔을 뻗었다.
꽈득!
손끝에 전해지는 통증!
잡았다!
하지만 그렇게 붙잡는 것이 몸무게를 지탱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진우는 손가락으로 암벽을 훑으면서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중심을 잡아야 돼! 낙법이라도!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몸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고, 옆구리에 둔중한 통증이 전해졌다.
빠악―!
진우는 입을 크게 벌리고 옆구리를 감싸 쥐었다. 숨이 꺼지는 것 같은 끓는 소리가 벌어진 입을 통해 새어 나왔다.
어찌나 아픈지 한동안은 호흡하기도 힘이 들었다. 그래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캄캄하던 눈앞이 훤해지고 의식도 제대로 돌아왔다.
“끄으으~ 끄으~ 후우~”
진우는 일단 손으로 몸 이곳저곳을 더듬고, 두 다리를 움직여 봤다. 머리통, 목, 허리와 두 다리……. 모두 움직인다. 감각이 있다.
손바닥의 살갗이 벗겨지고, 그 덕에 몸 이곳저곳에 피가 묻었지만, 다행히 그 외에 찢어지거나 부러진 곳은 없는 모양이다. 그러다 자신의 왼손 끝이 조금 이상해 보인다는 걸 깨달았다.
손톱이었다. 왼손 검지의 손톱이 들려 거의 직각으로 일어나 있었다.
“후우우~ 후우우~”
진우는 부들거리는 오른손으로 들려진 손톱을 지그시 눌러봤다. 살짝 닿은 것뿐인데도 뒷목까지 찌릿해질 만큼 엄청난 통증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대로 두었다가는 통증만 더 커질 것이기에, 진우는 입술을 꽉 깨물면서 억지로 그 손톱을 눌러 다시 원래의 모양처럼 되돌렸다. 손톱이 움직일 때마다 울컥울컥 피가 솟는다.
씨발!
저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끝부분만 살과 붙어 있어서 고정을 시켜줘야 할 것 같다고 느낀 진우는 오른손으로 가방을 더듬거렸다. 뭔가 묶을 만한 걸 찾기 위해서였다.
“어?”
가방이 축축하다.
설마? 피?
돌아보니 물기가 겉까지 다 적셔놓았다. 빨간색은 아니다. 젠장, 지퍼를 열어보니 탐스러운 베이지색 액체를 사방에 뿌려놓은 건 두유 팩이었다.
두 개가 전부 납작하게 터져 있다. 아마 땅에 떨어질 때 그의 몸에 깔리면서 이 사달이 난 모양이다.
진우는 넋이 나간 얼굴로 흥건하게 젖은 장바구니를 바라보았다.
방수 원단이었다면 가방 안에 고인 두유라도 좀 떠먹었을 텐데, 싸구려 폴리에스테르 천은 흡수한 대로 고스란히 투과시켜 진우의 목구멍이 아닌 흙바닥을 적셔놓고 있었다.
“아까 마실걸, 아끼지 말고.”
영혼 없는 말투로 중얼거린 진우는 비척거리며 일어나 근처에 떨어진 대검을 주웠다.
대검은 날이 빠지기는 했지만 부러지지는 않았다. 국방부 지급품인 주제에 이렇게 튼튼해도 되는 건가 싶은 내구성이었다.
진우는 고개를 들어 자신이 떨어져 내린 곳을 보았다.
저만한 데서 떨어져 굴렀는데 이만하면 다행인 건가…….
진우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애를 썼다.
깔아뭉갠 것이 두유가 든 가방이 아니라 K―2였다면 갈비뼈가 부러졌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렇게 서서 숨을 쉬지도 못했을 터다.
손목이나 무릎이 좀 뻐근하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버틸 만하다. 손톱이 덜렁거린다는 건 이미 잊어버렸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K―2의 먼지를 털어내며 진우는 주변을 둘러봤다. 아까 솟았던 소름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게 이상했다.
이만하면 위험한 코스는 다 벗어난 게 아닌 건가?
이상하다, 이상해. 뭐지?
그렇게 자문하던 중, 자신의 신경을 긁는 불안이 어디에서 온 건지 깨달은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이지? 응? 씨발,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