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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산다는 것 (1) (167/449)


167. 산다는 것 (1)
2022.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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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하하! 하하하! 아하하하! 아~ 아하하하!”

“아하하하! 하하하! 아하하하! 아~ 아하하하!”

제니는 미친 듯이 웃어 댔다. 너무 히스테릭한 웃음이어서 저러다가 실성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제니야.”

유빈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보안관은 망설였다.

아무래도 그만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핸드폰을 뺏을 배짱은 없었다. 그렇게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제니가 핸드폰을 들고 뛰어왔다. 봄날의 나비처럼 경쾌한 발걸음이다.

“이거 봐요, 오빠!”

제니가 내민 화면에서는 좀비 한 마리가 울어 대고 있었다. 하도 많이 봐서 지겹기까지 한, 다른 좀비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그런 썩은 시체였다. 다만, 꽤나 고급 양복을 입고 있다는 게 눈에 띄기는 했다.

이놈이 그 작은 회장이라는 녀석인가?

비스듬히 위에서 찍은 동영상.

아무 사건도 벌어지지 않는다. 그저 좀비가 아가리를 벌리고 포효하는 걸 보여주기만 한다. 재미있는 부분이라곤 없다.

“이게 왜?”

그러는 동안에도 여전히 배를 잡고 웃어 대는 제니를 보며 보안관이 겁먹은 표정으로 물었다. 제니는 얼마나 열심히 웃었는지 눈물까지 맺혔다.

여자란 대체…… 조금만 섭섭해도 울고, 조금만 재미가 있어도 웃는 건가? 씨발, 너무 어려워.

핸드폰을 끄고 잠시 하늘을 보며 감정을 추스르던 제니는 갑자기 보안관의 목을 와락 껴안고 볼에 입을 맞췄다. 도깨비에 홀린 것보다도 더 정신이 없었다.

으흠, 흠!

예고 없이 찾아온 애정 행각에 당황한 것은 유빈도 마찬가지였다.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피하려 일어나는 유빈의 뒷덜미를 제니가 낚아챘다.

그러고는 먼지투성이의 떡 진 그의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유빈은 너무 당황스러워 폭신한 감촉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고마워요.”

어벙벙한 두 남자에게 제니가 말했다. 여전히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기에 두 남자는 멍한 표정을 짓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고마워요, 제가 살아 있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제니야, 너…… 괜찮아?”

보안관이 두려운 얼굴로 물었다.

“그럼요! 기분 최고예요! 아마 최근 몇 년 중에서 최고로 좋은 기분일걸요! 내가 이겼어요! 내가 이놈보다 더 오래 살았다고요. 그래서 이놈이 죽은 꼴을 보고 웃고 있잖아요! 하하하!”

제니는 또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금방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중얼거렸다.

“흐윽~ 테라도 이걸 봤으면 좋았을 텐데…….”

***

테라는 쫓기고 있었다. 꿈속에서 그녀를 쫓는 건 오렌지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사내들. 하나같이 더러운 악취를 풍기며 뾰족한 이빨을 드러낸 채 달려오고 있다.

잡히면 죽을 거야. 달아나야 해…….

테라는 안간힘을 쓰며 뛰었다. 하지만 두 다리는 천 근처럼 무겁고, 아무리 애를 써봐도 제자리걸음만 하게 된다.

벽을 밀치면서라도 달아나 보려는 테라의 등 뒤에서는 오렌지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사내들이 점점 거리를 좁히며 다가오고 있다. 달아날 곳은 없다.

제발…… 제발…….

마침내 놈들의 손아귀에 잡힌 테라는 눈물을 흘리면서 빌었다. 놈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어딜 달아나려고? 응? 이 여우 같은 년!

사내들은 그녀를 화장실 안으로 집어 던진다.

내가 먼저 한다!

덩치 큰 놈이 외친다.

씨발, 나도 할 거야!

쥐 같은 놈이 머리채를 휘어잡는다.

놔! 놔!

테라는 발버둥을 친다.

하지만 사내들은 거미줄처럼 테라를 칭칭 감고 놓아주질 않는다.

죽을 거야! 차라리! 죽을 거야!

테라는 악을 쓰며 고개를 저어 댄다.

테라야…… 괜찮아, 괜찮아.

그곳에 있지 않은 이의 목소리, 제니다. 제니가 손을 꽉 잡고 그녀를 달래준다. 꿈의 무대는 어느새 바뀌어서 이제 그녀는 제니와 함께 침대 위에 앉아 있다.

기억이 난다. 이 침대, 이 방, 제니가 입고 있는 이 얇은 옷. 이건 작은 회장에게 불려갔던 그날이다. 그 더러운 날이다.

괜찮아, 울지 마. 참을 수 있어…….

제니가 또 달래준다. 하지만 그러는 제니의 눈에도 눈물이 가득하다. 두렵다.

끼이이, 문이 열리는 소리. 고개를 돌려서 누가 오는지 보고 싶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제니는 굳은 표정으로 문 쪽을 노려보고 있다. 아파질 것이다. 이제 곧 엄청나게 아파지고, 수치스러워지고, 죽고 싶어질 것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인데도 신기하게 생생히 느껴진다. 마치 한 번 겪었던 일처럼…….

하아~ 고년들 참~

세상에서 가장 싫은 목소리가 저벅저벅 다가온다. 테라는 귀를 막고 싶어진다. 달아나고 싶다.

별것도 아닌 년들이 그렇게 애를 먹이냐, 그래. 응? 태양 그룹 작은 회장님 명을 어기고도 이 나라에서 버틸 수 있을 줄 알았어?

작은 회장의 악의가 짐승의 발톱처럼 사납게 몸과 마음을 할퀸다.

2년 전 그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에게 말할 수 없던 비밀. 너무 아파서 죽을까 봐 무서웠었다. 제니와 테라는 똑같이 아팠다.

내 소문은 다들 들어서 알고 있지? 그 소문 다 개소리야. 믿지 마. 크크크, 사실 난 그것보다 훨씬 더 하드코어하거든! 큭큭큭!

작은 회장의 입이 턱 끝까지 찢어진다.

빨간 혀, 악마!

그리고 그가 허리띠를 풀어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헉!”

테라는 소리를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다. 온몸은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고,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괜찮아? 아유, 얘 많이 아프네. 너 잠꼬대 엄청나게 했어.”

곁을 지켜주던 아주머니가 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

그래, 난 안전해. 이제 그런 일은 안 겪어도 돼. 그 흉터 아저씨가 지켜줬어…….

테라는 방망이질치는 가슴을 달래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고맙습니다. 저 세수 좀 하고 올게요.”

“내가 부축 좀 해줄까?”

“아니에요. 그냥 몸살인데요, 뭐. 혼자 갈 수 있어요. 훗.”

테라는 눈물과 땀을 훔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대낮인데 어느새 이렇게 앓아누웠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화장실에서 그 일을 겪은 후, 꼬박 하루 동안 일어나지를 못했다. 놈들이 꽉 움켜쥐었던 팔다리에는 퍼런 멍이 들었고, 그걸 감추기 위해 여기 와서 처음으로 보급 트레이닝복을 입었다.

검은색 미니드레스로 시선을 집중시키는 편이 군인들의 주의를 끌 수 있어 더 안전하다고만 믿었는데…….

“후우우~”

거울을 보며 테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입술과 눈은 퉁퉁 부었고, 팔을 걷어보니 아직도 멍 자국이 파랗다. 누가 볼까 두려워서 테라는 얼른 소매를 내렸다.

‘어지간히 무서웠구나. 그날 꿈을 다 꾸고…….’

세수를 끝낸 테라는 거울 속의 자신을 달래주고는 화장실을 나섰다. 쉘터는 언제 그렇게 무질서했나 싶을 만큼 평온을 되찾았다.

문제의 오렌지색 트레이닝복들도 오늘 아침 한강을 통해 배로 징집됐다고 하니, 이제 또 같은 일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걸음을 떼는 동안 잘린 발가락이 예리한 통증을 안겨주었다. 아물었던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

왜 이 상처는 자꾸만 도지는 걸까?

피가 배어 나오는 반창고를 보면서 테라는 생각했다. 특별히 염증이 생기거나 부어오르지도 않으면서 아물지는 않고 왜…….

그렇게 고통을 참아가며 테라가 향한 곳은 외야 흡연 구역이었다. 그날 화장실에서 완전히 얼이 빠져 있었지만, 자신을 구해준 이가 누구인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어디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지도 안다. 그동안은 너무 아파서 인사를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것뿐.

“아…….”

민구를 발견한 테라는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언제나처럼 민구는 담배 연기를 뿜어 대는 중이었고, 그 곁에는 초희가 있었다.

“저…… 안녕하세요.”

테라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지만, 민구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상했다. 그날 화장실에서 달래주던 친절함과 너무 다르다. 하지만 테라는 해야 할 말을 계속 이어갔다.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날 제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죠.”

“됐어.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민구는 차갑게 테라를 노려보았다. 테라의 순진해 보이는 얼굴이 금방 또 움찔하고 얼어붙었다. 뭔가 이 계집애랑 얽히면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어차피 자신은 곧 건대 쉘터로 가야 하고, 그곳에서 육 회장을 만나야 한다. 이쯤에서 인연의 싹을 자를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냉정하게 말했다.

“네가 나 한 번 살려줬고, 내가 너 한 번 살려줬으니 이제 빚 없잖아. 그러니까 제발 엉겨 붙을 생각 하지 마. 귀찮아!”

예상치 못했던 반응에 당황한 테라의 눈이 흔들렸다.

젠장, 이 계집애…… 이 표정으로 얼마나 많은 사내놈들의 혼을 빼놨을까? 간이라도 제 손으로 빼줬겠군그래.

민구가 속으로 혀를 차며 다시 한 번 마음에 없는 말을 했다.

“꺼지라고! 귀가 먹었냐?”

“……네.”

테라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뒤돌아서 걸었다.

왜, 왜 저렇게 말하는지 모르겠다. 곁에 있는 애인이 오해라도 할까 봐 과민반응하는 걸까? 하지만…… 하지만…… 그저 고맙다는 말을 하려 했던 것뿐인데, 친구가 된 것 같아 기뻤던 것뿐인데…….

테라는 계단 중간에 멈춰 서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우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흐느낄 때마다 자꾸 어깨가 들썩거렸다. 저 흉터 아저씨에게 너무 진심으로 다가갔던 모양이다.

“오빠…… 완전 짱이다.”

테라가 훌쩍거리는 걸 황홀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초희가 민구의 팔짱을 끼며 콧소리를 냈다.

“아후~ 속이 완전 다 시원해. 저 꼴 보기 싫은 년! 울 오빠는 또 어떻게 알아보고 살살 꼬리를 치려고. 아우~ 씨발. 얼마나 멋있었는지 알아, 오빠? 나 지금 완전 반했어, 정말로! 내 목소리 흥분해서 떨리는 거 느껴져?”

아양을 떨던 초희는 문득 서늘함을 느끼고서 슬그머니 팔짱을 풀었다. 1초라도 더 붙어 있었다간 목이 잘려 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민구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하아아~ 젠장, 왜 이런 데까지 군인들이 있는 거지? 젠장, 그냥 좀 내버려 둬도 좋잖아.”

울퉁불퉁한 산길 덕에 한층 더 심해진 발의 통증을 느끼면서 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홀로 남겨진 지 나흘째. 아무도 듣지 않는 걸 알면서도 자꾸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게 된다. 군 차량이 다니는 넓은 도로를 피해 샛길을 찾고 야산을 타느라 체력의 소모는 몇 배나 심했다. 방향에도 혼동이 왔다.

하지만 낮 동안 해를 오른쪽으로 끼고 걷기만 하면 북쪽으로 갈 수 있다. 남은 실탄은 겨우 70발. 혹시나 싶어 아무리 세고 또 세어봐도 도무지 늘어나지는 않는다.

“차라리 그냥 군인들을 피하지 말 걸 그랬나? 군대에 끌려가 있으면 총알이 모자라지는 않을 거잖아.”

약한 마음이 들다가도 그 불합리했던 폭풍우의 밤이, 그리고 그 밤 너무도 덧없이 스러져 갔던 고참들이 떠오르면 진우는 진저리를 쳤다.

다시는 군대에 묶이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또 이 병장과 김 상병에게 약속했다. 자신이 죽을 자리조차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는 조직에서 그렇게 소모되어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후우우~!”

진우는 잠시 멈춰 서서 두유를 꺼내 수분을 보충했다.

나무 그늘 아래라고 해도 찌는 듯한 더위, 어젯밤 제대로 숙면을 취하지 못해서 어질어질한 머리, 거의 나흘째 쉼 없이 걸은 두 다리……. 그러는 동안 먹은 것이라곤 라면과 물, 박하사탕과 두유뿐이다.

이쯤 되면 언제 의식을 잃고 쓰러진대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래도 이 오솔길을 발견한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발목까지 우거진 잡초를 헤치며 걷지 않아도 되고, 나뭇가지를 꺾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근데 누가 닦은 길이지? 여기 뭐가 있다고?”

약초꾼들이 다니는 길이라고 하기에는 꽤나 넓었다. 적어도 열 사람이 한 번에 지날 수 있을 만큼 훤히 뚫린 산길. 보이는 한도 내에는 별다른 시설도 없으니, 이만큼의 인원이 이동할 이유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예전에 여기가 유명한 등산로였나?

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로 경치가 그럴듯하지는 않은데 말이야.

어쨌든 더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건 분명한 사실이기에, 두유 한 팩을 다 비운 진우는 다시 기운차게 걷기 시작했다. 음식이 든 가방이 가벼워질수록 마음은 무거워져 갔다. 제일 시급한 건 깨끗한 물을 찾는 일이다.

마시고, 발을 씻고 싶다.

봉와직염!

그 네 글자가 자꾸 두려움을 키웠다. 제대로 씻지 못한 발이 언제 감염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커져만 갔다.

발이 고장 나면 모든 게 끝이다. 의무대에서 지급해 주던, 그 만병통치 알약조차 없는 지금의 그에겐 더욱 그랬다.

“이건?”

산의 정상에 가까워졌을 즈음, 부러진 나뭇가지에 걸린 손바닥 크기의 천 조각이 진우의 시선을 붙들었다. 가지의 단면이 아직 생생한 것으로 보아 부러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게 분명하다.

그런데 이 천 조각에 붙은…… 이게 대체 뭐지? 고기인가?

진우는 나뭇가지에서 천 조각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거기 붙은 고깃덩이를 살살 집었다.

발바닥의 굳은살을 만졌을 때와 비슷한 느낌. 몇 초가 지나는 동안 진우는 천 조각이 폴리에스테르이고, 셔츠의 소매 부분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건…….

“윽!”

진우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백번을 양보해도 이건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떨어져 나온 살덩이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나뭇가지에 혈흔 정도는 남아 있었을 테니까.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진우는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해 K―2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당연히…… 당연히 이 오솔길을 보자마자 깨달았어야 하는 거였다. 이만큼 넓은 오솔길의 존재가 이상하다는 걸.

예전에 만들어진 길이었다면 며칠 만에 몰라보게 자라는 여름풀들이 아직까지도 이렇게 깨끗이 밟혀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이 길은 최근까지도 이용되던 루트였던 것이다.

좀비들이 떼를 지어 이동하는 루트.

진우는 다급하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높은 나무와 빽빽하게 얽힌 수풀들 사이, 오직 이 길만이 다른 차원인 양 뻥 뚫려 있다.

사아아앗―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이 등골을 얼리고 지나간다.

“젠장, 망했어…… 망했어…….”

진우는 다급한 얼굴로 좌우를 훑었다. 여기에 가만히 서서 좀비들이 몰려들어 와주기를 기다릴 수는 없다. 사정을 알고 나서 보자니, 이제껏 편안하고 고마웠던 모든 것이 두려움으로 바뀐다.

예외 없이 납작하게 밟혀 있는 풀들, 유난히 넓게 나 있는 길들, 뚝뚝 부러져 있는 가지들.

대체 얼마나 많은 놈들이 다녔던 걸까?

짐작도 잘 되지 않는다. 아니, 소름이 끼쳐서 상상하고 싶지 않다.

문제는 자신이 서 있는 이곳이 인간의 자유로운 이동을 위해 설계된 공간이 아니라, 거친 자연의 한가운데라는 점이었다.

오솔길을 벗어나 빽빽한 나무와 무성한 잡초 사이의 흙 비탈길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과연 현명한 결정일까?

저 경사가 연이어 있는 숲속에서는 한 시간에 1킬로미터도 주파하기 어려워 보인다.

저런 곳에서 만약 좀비를 만난다면 나는 그 포위망을 뚫고 달아날 수 있을까? 괜히 체력만 다 소진해 버리는 건 아닐까?

진우는 입술을 꾹 깨물면서 빠르게 고민했다. 심장 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리고, 하이바를 걸쳐 둔 목 뒤로 굵은 땀이 주르륵 흐른다. 그러는 사이, 아주 작은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와삭와삭.

짙고 푸른 나뭇잎들에 메아리치며 묻혀 뭉개진 소리지만, 분명히 들었다.

어느 쪽이지?

진우의 고개가 바쁘게 돌아갔다.

와삭, 다시 들려오는 가느다란 소리.

방향을 쫓으려는데 눈치 없는 산새들이 요란하게 지저귀며 방해를 한다.

뒤쪽인가?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순간, 역겨운 특유의 악취가 등 뒤에서 바람을 타고 전해진다.

“……웁!”

진우는 코를 막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직 시야 내에 단 한 놈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은 적어도 수십 미터의 간격은 있다는 의미.

하지만 뒤쪽, 저 울창한 나무들 사이 어딘가에는 분명히 놈들이 존재한다. 진우의 걸음이 빨라졌다.

“일단 이 고개라도 넘으면…….”

서둘러 발을 교차시켜 내디디며 울퉁불퉁한 산길 속을 달렸다. 고개 위에 올라섰을 때쯤엔 냄새도 점점 더 심해져서, 바로 등 뒤에 놈들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의심마저 들 지경이었다.

가깝다! 아직 시야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멀지 않다! 나보다 훨씬 더 빠르게 걷는구나, 이 개자식들!

진우는 이마를 찌푸렸다.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크게 호를 그리고 있는 오솔길로 더는 갈 수 없다. 그랬다가는 얼마 못 가 따라잡히고 말 테니까.

왼쪽은 내리막길, 오른쪽은 오르막길.

진우는 오르막길 쪽을 택했다. 올라가기는 더 힘이 들겠지만, 좀비들의 행렬을 위쪽에서 감시하며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끄응차!”

진우는 대각선으로 비껴 멘 가방 끈을 다시 한 번 단단히 조여 붙이고, 어른 허리만큼이나 굵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선 숲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 빠르게 달리는 것도 아닌데 걸리는 게 많다. 튀어나온 돌부리, 나무뿌리, 그리고 발목까지 자라난 잡초들이 전투화에 턱턱, 부딪친다. 그리고 눈앞에는 제멋대로 뻗은 나뭇가지들이 휙― 휙― 지나친다.

“후우! 후우!”

진우는 입으로 날숨을 내쉬며 전력을 향해 달렸다. 경사로는 눈으로 보던 것보다 더 가팔라서 이내 허벅지와 무릎에 묵직한 압박을 가해왔다.

미로처럼 어지러운 나무 사이를 누비며 지그재그로 뛰어 올라가던 진우는 낮은 활엽수 아래로 넘어지며 숨을 헐떡였다.

지친다. 몸이 무겁다. 게다가 며칠 전에 쏟아졌던 폭풍우의 여파로 젖어 있던 바닥이 아직 채 마르지 않았기 때문에 미끄럽고, 쩍쩍 들러붙는다.

“젠장, 이놈의 진흙!”

진우는 나뭇가지를 꺾어 전투화 바닥의 홈에 낀 흙을 긁어냈다. 모기와 날파리는 간만에 찾아온 손님을 격하게 반기며 계속 얼굴 주변을 날아다닌다.

손으로 놈들을 쫓고 돌아보니, 그렇게 힘들었던 것에 비해 실제로 올라온 거리는 얼마 되지도 않는다.

그래도 이 정도면…… 이 정도면 좀비들이 그의 낌새를 알아채고 쫓아올 만한 거리는 아니지 싶다. 진우는 굵직한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오솔길 쪽을 살피기 위해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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