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인간 사냥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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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인간 사냥꾼 (3)
2022.02.10.
긴장 때문에 온몸에서 악취가 밴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입은 바짝바짝 말라온다. 신 차장은 수건으로 얼굴을 훔친 뒤, 메이저가 사용하는 숙소를 향해 이동했다.
“계십니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메이저의 방문을 노크하는 신 차장의 가슴은 흥분 때문에 터질 것 같았다.
과연 놈이 내 말에 속아 넘어가 줄까? 오 박사로부터 나를 주시하라는 어떤 언질을 들은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지? 협박이라도 해봐야 하나?
안에서 문을 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긴장감이 목덜미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뭐, 뭐, 뭐야?”
문을 연 메이저는 근엄한 표정에 어울리지 않는 어눌한 말투로 더듬댔다. 웃통을 벗은 그의 단단하고 검은 근육질 상체가 눈에 들어온 순간, 신 차장은 협박이라는 선택지를 깨끗이 포기했다.
애초에 육체적으로는 자신이 제압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커터 같은 허접한 무기와 기습이라는 수단을 동원해도 달라지는 건 거의 없다.
“안녕하십니까, 메이저. 저기…….”
“너, 누, 누구야?”
나를 모른다!
신 차장은 그 한마디에서 무한한 희망을 얻었다. 그 말인즉슨, 오 박사가 특별 관리 대상이라는 언질을 아직 메이저에게 주지 않았다는 의미이고, 그만큼 달아날 수 있는 확률도 높아진다는 뜻이었다.
우우욱― 으아아아―
방 안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자 메이저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저는 식사실 책임자인 신 차장이라고 합니다.”
“시, 시, 식사실?”
“그 왜, 있지 않습니까? 작은 회장님 식사하시는…….”
메이저가 아, 하며 알아들었다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그의 눈빛에서 경계의 기색도 사라졌다. 신 차장은 얼른 말을 이었다.
“부탁드릴 게 좀 있어서요.”
“이, 이야기가 기, 길어?”
“네, 그게 좀…….”
“그, 그럼 드, 드, 들어와. 나, 나, 나 뭐 좀 하, 하던 중이라서.”
메이저가 열어준 문틈으로 발을 들이자 방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옷을 거의 입지 않은 여자가 셋이나 있었다.
속옷 차림의 여자 둘이 2층 침대 기둥에 수갑으로 묶여 있고, 나머지 하나는 기절한 것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얼굴과 갈비뼈, 허벅지에 보랏빛 멍이 커다랗게 든 여자들의 입술 주변은 터져서 피딱지가 앉았다.
사생활 영역을 엿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신 차장은 얼른 눈을 바닥으로 깔았다. 하지만 정작 메이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 그, 그래, 무슨 이야긴데?”
“아, 그게 말입니다, 제가 그…… 작은 회장님 보필을 하면서 그 뭐랄까, 스트레스가 좀 어지간히 쌓인 것 같아서 크게 폐가 되지 않는다면…….”
거기까지 말했을 때, 핑크색 속옷을 입은 여자가 갑자기 울부짖었다.
“으아아…… 아저씨! 제발 저 이 방에서 좀 빼주세요! 살려주세요!”
“아! 씨발 년이! 좀! 마, 마, 말하는데!”
신기하게도 욕설만은 더듬지 않는다. 메이저는 핑크색 속옷에게 성큼성큼 걸어가 머리채를 잡고 흔들다가 다짜고짜 풀스윙으로 따귀를 후려갈겼다. 구경하는 신 차장이 움찔할 만큼 강력한 한 방이었다.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숙였고, 이내 그녀의 입술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져 이미 여기저기 얼룩져 있는 카펫을 적셨다.
“기, 길을 들이는 중인데 마, 말을 드, 들어 처먹지를 않아, 저년들이. 두, 두 년이 똑같아.”
메이저는 재미있는 걸 보여줬다는 표정으로 빙글거렸다. 내뱉는 숨결에서 술 냄새는 나지 않는다. 맨 정신으로 이런 짓거리를 하는 거냐…… 라고 생각하면서도 신 차장은 비굴하게 마주 웃었다.
단순히 여자를 밝히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개 잡듯이 후려갈긴다고 하더니, 그 소문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잡아온 사람들 중 맘에 드는 여자들만 골라 방에 가두고 온갖 짓을 다 한 뒤, 송장이 된 다음에야 직원들을 시켜 끌어낸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군복을 벗은 것도 성폭행 사건 때문이었다던데, 놈으로서는 요즘 아주 물을 만난 셈일 터다.
흰색 속옷의 여자가 자꾸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낸다. 예전 같으면 벌레 쳐다보듯 무시해 버렸겠지만, 오 박사에게 찍혀 죽음의 공포를 느낀 순간부터 자꾸 마음이 약해진다.
하지만 신 차장은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지금은 남의 일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 쓰고 싶지도 않았다.
“무, 무슨 말을 했었지?”
“그, 하도 바람이 쐬고 싶어서 외부에 헬리콥터 타고 출동하실 때, 저도 한 번만 태워주십사 부탁드렸습니다. 헤헤헤.”
“그, 그건 규정 위반인데. 우리 헤, 헬기에는 우, 우리 쉐도우 쉴드 애들밖에 탈 수 없어.”
메이저는 의자에 걸터앉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쉐도우 쉴드 좋아하네. 좀비로 세상이 뒤집히기 전까지는 그저 태양 그룹에서 운영하는 사설 경비 업체 직원이었던 것들이…….
신 차장은 아니꼬운 속내를 비굴한 눈웃음으로 감추었다. 이 악마 같은 놈에게 약속을 받아내지 못하면 자신은 죽는다.
“예, 그건 압니다. 그래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직접 부탁드리는 거죠. 메이저께서 곧 법이니까 규정 같은 것보다 훨씬 위 아니겠습니까.”
“큭, 새끼, 아, 아, 아부하기는.”
“아닙니다. 아부는요, 사실이 그렇죠.”
암만 봐도 족히 열 살은 어린 것 같은 상대지만, 신 차장은 더욱 깊게 허리를 굽혔다. 그의 언변이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메이저는 자비로운 표정으로 신 차장을 바라보며 연기를 내뿜었다.
“뭐, 좋아. 노, 노, 높아서 무섭다고 울지만 말라고. 마, 마침 30분 뒤에 한 번 뜰 거니까. 그때 헤, 헬리포트로 와.”
잠시 고민하던 메이저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아이구, 감사합니다.
신 차장은 비굴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였다. 이것으로 죽음이 다가오는 걸 반쯤은 피한 셈이다. 이제 하나만 더 확보하면 되는데…… 신 차장은 마음속으로 체크리스트를 하나씩 지웠다.
“그, 그만 가봐. 느, 느, 늦지 말고.”
신 차장이 방을 나서며 문을 닫는 동안 내부에서는 또 철썩거리며 두들겨 패는 소리와 기진맥진한 여자들의 비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잘못이라고는 미친놈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밖에 없는 여자들의 애원 소리가 커질수록 메이저의 매질은 더 신바람을 냈다.
나는…… 몰라. 내가 어찌해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흰 속옷 입은 여자의 애절한 눈빛이 떠오른 신 차장은 진저리를 치며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냈다.
30분. 30분만 잘 버티면 나는 이 미친 세상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된다. 신 차장은 그렇게 생각했다.
신 차장은 쥐새끼처럼, 정말 말 그대로 쥐새끼처럼 숨을 죽인 채 헬리포트가 있는 옥상층 주변에서 시간을 보냈다.
혹시라도 오 박사가 이 자리에 나타나는, 재수 없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일부러 이 시간에 맞춰 오전 실험의 보고서를 그에게 제출하라고 연구원들에게 명령까지 해두었다.
웅― 웅― 후우웅―
약속 시간이 다가오자 널찍한 옥상의 중앙에서는 이미 두 대의 중형 헬기가 막 로터를 돌리기 시작했다.
“뭡니까? 지금 옥상 사용할 수 없습니다.”
검은 옷에 개인화기로 무장을 한 쉐도우 쉴드 대원들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프로펠러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 때문에 악을 써야 겨우 의사가 전달되는데, 경비병의 무전기에서 나는 잡음이 신경을 거슬렀다.
아…… 저, 난…… 그…… 메이저께서…….
당황한 신 차장이 말을 더듬을 때, 마침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 메이저가 그를 알아보고 손짓을 했다.
“이, 이, 일로 와! 너, 너, 넌 나랑 같이 타!”
“네, 넷!”
신 차장은 허리를 굽히고 종종걸음으로 메이저의 곁에 가 섰다.
헬기 우측에는 와이어로 고정하는 작업이 끝난 구조용 베슬이 널려 있었다. 탄탄한 밧줄로 촘촘히 짜인 사방 15미터, 높이 2.5미터의 양파 망처럼 생긴 베슬.
일단 저 안에 들어가 헬기 아래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여기로 실려 오면 예외 없이 모두 죽는다. 좀비 밥이 되거나, 실험용 샘플이 되거나, 혹은 메이저나 다른 망나니들의 성노리개로 죽을 때까지 고통을 받다가…….
수많은 목숨을 죽음의 건물로 끌고 들어온 그 베슬의 모습을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라서 신 차장은 문득 소름이 돋았다.
“며, 명심해! 저, 저, 절대로 헬기 밖으로 나가면 안 돼! 지금 세상이 예전 같지 않아! 사, 사방에 미친놈들이랑 조, 조, 좀비가 깔렸어!”
헤드셋을 씌워주며 메이저가 당부를 했다. 신 차장은 알겠다는 표시로 힘차게 머리를 끄덕였다.
“예비 탄창이랑 DEM 확인해!”
누군가의 명령이 떨어지고, 헬기에 오른 쉐도우 쉴드 대원들은 검은색 전투 조끼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대원들은 저마다 왼쪽 가슴에 꽂힌 두 개의 예비 탄창을 두드리고, 오른쪽 가슴에 달린 주머니 뚜껑을 열어 타원형의 빨간색 캡슐들이 든 플라스틱 케이스를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저거다!
DEM을 본 신 차장의 눈이 빛났다. 일시적으로 심장을 멈춰주는 저 약만 탈취할 수 있다면, 외부에서 홀로 좀비들과 맞닥뜨렸을 경우에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 제대로 쏠 줄도 모르는 총보다 훨씬 요긴하고 편리하다.
문제는 이 우락부락하고 사나운 놈들의 오른쪽 주머니에서 저걸 어떻게 빼낼 것인가 하는 거였다.
기다리다 보면 기회가 있겠지.
신 차장은 자신의 시선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고, 고, 고소공포증 같은 건 어, 없지? 하하하!”
헬기가 둥실 떠오르는 것이 느껴지자 메이저가 신 차장을 돌아보며 히죽거렸다. 신 차장은 무조건 그렇다고 맞장구를 쳤다.
설사 고소공포증이 있다 해도 어쩔 것인가. 여기 더 있다가는 99% 이상의 확률로 죽게 될 형국인데.
용산역 주변으로 크게 원을 그린 헬기는 기수를 북동쪽으로 바꿔 날아갔다. 신 차장의 눈은 자연스럽게 창밖의 경치를 훑었다.
유리창이 박살 난 채 방치되어 있는 고층 아파트들, 도로를 꽉 막고 멈춰 서버린 자동차들의 길고 긴 행렬, 불타 버린 변압기와 소형 건물들.
그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거리에 사람이 없는 도시는 죽음, 그 자체처럼 우울해 보였다.
“서울 전체가 전부 다 이런 식입니까? 이렇게 사람이 없는데 그동안 어떻게 그 많은 인원을 데려오셨습니까?”
“저, 저, 저래 보여도 마, 막상 착륙해 보면 숨어 있던 놈들이 무더기로 뛰어나와서 사, 사, 사, 살려 달라고 난리를 쳐! 무서워서 짱 박혀 있는 거야!”
메이저의 말을 듣고 다시 살펴봐도 시내에서 사람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는 모양이다.
괜찮을까? 이런 데에서 내가 누굴 만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지?
고민에 빠진 신 차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메이저가 반대편 창을 가리켰다.
“이, 이거 봐! 이건 꽤 보, 볼 만해! 장관이지!”
몸을 기울여 바라보니 6차선 도로 전체를 빼곡하게 메운 행렬이 보였다.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히 느껴졌다.
“좀빕니까? 저게 다?”
“그래! 저, 저, 저 정도가 중간 사이즈라면 미, 믿겠어? 밖에 나와 날다보면 하, 하루에도 저런 걸 여, 열댓 번씩 구경해. 좀비 밭이야!”
“그런데 왜 우리 사옥 근처에서는 저런 게 안 보였을까요?”
“그, 그야! 커, 컨테이너로 도로를 막았고, 또 저 새끼들이 호, 혹할 만한 미끼를 주변에 깔아놨으니 우리 쪽으로 오지를 않아서 그렇지!”
“미끼요? 그게 뭡니까?”
“저, 저, 저런 거야! 저기에 사람들을 잔뜩 모아놔서 그, 그리로 먼저 간다고! 사, 사람 기척을 느끼는 건지…….”
메이저가 가리킨 것은 철책과 군인들로 둘러쳐진 건물이었다. 철책 내부에는 진짜 사람들이 옹기종기 서 있었다. 살아 숨 쉬는 진짜 사람들! 그가 오늘 헬기에 올라 탄 이래 처음으로 발견한 생존자들이었다.
“군인들인데, 이렇게 비행하는 거 들켜도 됩니까?”
“큭크큭, 쟤들은 오, 오, 오히려 우리가 구조 활동을 돕는다고 알고 있어. 대기업이잖아. 사, 사람들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몇 명이나 데려가는지 신경도 안 써.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하나 봐. 무, 무, 물론 가끔 또라이 같은 놈들은 꼬치꼬치 캐물어 귀찮게 하지만, 우, 우리 회사 겨, 겨, 경남 지사에 연락하면 그쪽에서 알아서 해결하니까. 경남 지사가 시, 시, 실탄 제작하는 곳이라 별들이랑 잘 알거든. 저 쉐, 쉘터라는 것도 정부가 운영하는 시설이지만, 부지 선정하고 제공하는 건 우, 우리 회사가 하고 무, 물품 공급도 협조하고 있지. 이, 이런 게 본사 건물을 빙 둘러서 몇 개나 있는 거야. 마, 말하자면 좀비더러 그리로 가라고 길을 터놓는 거라 해야 하나. 하여튼 약은 놈들이야. 안 그래? 하하하!”
“여기가 대체…….”
“건대잖아. 저기 호, 호, 호수 보면 모르겠나?”
신 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저기까지만 어찌어찌 가면…….
지금 당장은 태양 그룹에서 어떤 만행이 저질러지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을 테니까 방관하지만, 시민들을 잡아다 좀비 밥으로 주고 있다는 게 밝혀지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목숨을 걸고 그 사실을 알린 영웅이 될 수 있다. 희망을 본 것 같아 가슴이 콩닥거렸다. 헬기가 면목까지 이르렀을 때, 메이저가 파일럿에게 명령했다.
“도, 도, 도, 동부간선도로 따라서 아파트 밀집 지역으로 가봐! 그쪽부터 훑기 시작하자!”
그의 말에 따라 두 대의 헬리콥터는 좌현으로 기수를 틀고 중랑천을 따라 올라가며 고도를 낮췄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묘한 게 시선을 붙잡았다.
“저, 저거! 사람 아닙니까? 천막인데요?”
신 차장이 가리킨 것은 길게 뻗은 선로 한가운데에 송전탑을 기둥 삼아 얼기설기 묶여 있는, 다양한 색깔의 누더기 천막이었다.
헬기가 다가가자 천막 아래에서 호리호리한 사내놈 하나가 뛰어나와 웃옷을 벗어 휘저으며 펄쩍펄쩍 뛰었다. 그 바로 옆에서도 또 몇 놈이 열렬히 손을 흔들어 댔다.
“후후후, 거, 거지 새끼들. 이런 데다 자리를 자, 자, 잡았네. 살아보겠다고 누더기로 지, 지, 집 지은 꼴 좀 봐라. 하여간에…….”
콧방귀를 뀐 메이저는 멈추지 말고 계속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쟤들은 왜 안 태우십니까?”
신 차장이 묻자 메이저가 고개를 저었다.
“저, 저, 저거 안 보여? 송전탑이랑 전선이 저렇게 보, 복잡하고, 주변에 처, 철책도 있잖아. 몇 새끼 잡아보려고 저런 데 접근했다가 바, 바, 밧줄이라도 얽히면 고, 골치 아파져. 위, 위험해.”
흠, 명이 질긴 새끼들이군. 오늘 뒈질 팔자가 아니었나 보다.
신 차장은 아직도 열심히 팔을 흔들어 대는 댓 놈을 보면서 생각했다. 너희들 중에 여자가 몇이라도 끼어 있었다면 이 메이저라는 양아치가 장소 따위 개의치 않고 어떻게든 기를 써서 태웠을 텐데…….
“방송 켜!”
건물 밀집 지역으로 들어서서 두어 무리의 좀비 행렬을 지나친 다음, 헬기 외부에 장착된 스피커에서는 예의 그 구조 안내 방송이 커다랗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저희는 긴급 구조대입니다! 생존자 여러분께서는 지금 빨리 본인의 위치를 알려주십시오! 오늘 이후 현 작전 지역에서 철수할 계획입니다! 서둘러 주십시오! 창밖으로 옷가지나 천을 내밀어 흔들어주시거나 건물 옥상 등의 장소로 이동해 주십시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저희는 긴급 구조대입니다!
“나, 나, 나온다! 나와! 하하하!”
크게 원을 그리며 천천히 두어 바퀴를 돌자 정말 반응이 있었다. 건물 창밖으로 하나둘씩 뻗어 나오는 가녀린 팔들을 보면서 메이저가 악마처럼 낄낄댔다.
새로운 장난감을 얻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에 적잖이 흥분한 것 같다. 가장 먼저 타깃이 된 것은 대로를 끼고 선 5층짜리 건물이었다. 옥상에 열 명 정도가 모여 서 있고, 그중 여자가 반이다.
“사다리 내려!”
생존자들을 한쪽 구석으로 몰아세우고 메이저의 명령에 따라 줄사다리가 내려졌다. 신 차장은 당황스러웠다.
“차, 착륙하는 게 아닙니까?”
“흥, 저, 저런 허접한 건물엔 헬기 차, 차, 착륙 못 해. 애초에 서, 설계가 그렇게 돼 있지 않아.”
이건 계획과 다르다. 그가 머릿속으로 그렸던 탈출은 옥상 위에 멈춰 서 있는 헬리콥터에서 눈치를 보다가 달아나는 것이었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게 아니었다.
어쩌지? 신 차장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러는 동안 메이저는 가장 먼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건물 옥상 위로 점프를 했다. 대원 둘이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
이제 조종사를 제외하면 헬기 안에는 신 차장과 마지막 대원 하나, 단둘만이 남았다. 게다가 놈은 옥상으로 내려간 대원들을 엄호하기 위해 아래쪽에 집중하고 있었다.
일전에 세 명이나 목숨을 잃은 적이 있어서 아무래도 더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DEM을 강탈해 달아나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하지만 여기서 어떻게…….
신 차장은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어 자신이 탄 헬기와 옥상의 거리를 재보았다.
10여 미터. 까마득하다. 스무 살 때의 그였다면 어찌어찌 도전해 봄직도 하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는 얘기다. 이러면 무리라고밖에는 할 수 없다.
두 번째 헬기는 고공을 선회 중이고, 운 좋게 DEM을 빼앗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줄사다리를 타고 기어 내려가는 동안 아래에서 베슬을 끌어당기고 있는 메이저가 그를 내버려 둘 리 없다.
이러다가 정말로 그냥 서울 구경만 하고 돌아가게 되면 안 되는데…….
신 차장은 땀을 줄줄 흘리며 사방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그런데 그때, 정말로 예상치 못한 기회가 그에게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