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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안전지대는 없다 (5) (160/449)


160. 안전지대는 없다 (5)
2022.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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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역시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총이다. 어떤 종류의 총인지는 몰라도 위협적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보안관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총알을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들이 서 있는 도로 위에는 버려진 자동차들이 든든한 장애물 역할을 해주었다. 어지간한 명사수가 아니라면 이 차량 사이를 뚫고 그들을 맞추기 어려울 것이다.

군인이라면 모를까, 일반인 중에 명사수가 있을 성싶지는 않다. 그리고 왠지 군인들은 저렇게까지 사람을 죽이지는 않을 것 같다는 막연한 추측도 있었다.

쓸모없는 충돌을 피해가고 싶은 마음과 새로운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이 팽팽하게 대립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근 열흘 만에 만나는 다른 사람들이고, 그래서 마음 한구석에 설레는 감정이 앞서는 것은 사실이다.

대롱거리며 매달려 있는, 이 끔찍한 죽은 사내의 시체에서도 몇 가지 긍정적인 단서가 잡힌다. 물론 딱 보자마자 떠오른 것이어서 비논리적인 판단이기는 하지만…….

“야! 너 뭘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 그러지만 말고 보안관, 저 새끼 좀 말려봐!”

신입이 유빈을 흔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유빈은 양쪽 관자놀이를 꾹 눌러 지끈거리는 머리를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가벼운 두통이 인다.

“아니, 나도 기본적으로 이 짓을 한 사람을 만나보고 싶어. 보안관이랑 생각이 좀 다르기는 한데…….”

“뭐? 이 새끼까지 왜 이래? 야! 너 그런 새끼 아니잖아! 존나 침착한 새끼였잖아! 이유가 뭐야, 대체!”

“이유는 간단한 거지. 우리 꼴을 좀 봐.”

유빈의 말에 모두들 자신을 한 번 아래로 훑어보고,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들 몰골이 말이 아니다. 흙과 먼지, 땀으로 범벅이 된 외양은 둘째 치더라도, 피로가 아우라처럼 온몸을 감싸고 뚝뚝 떨어진다.

다크 서클이 짙게 드리운 눈에 핼쑥해진 볼, 몸 여기저기에 나 있는 흉터들과 피딱지.

며칠간의 노숙과 번화가로부터의 탈출이 만들어낸 변화들이었다.

그제도, 어제도 하루 종일 노동을 하고 나서 번갈아가며 보초를 서느라 몇 시간 자지도 못했다. 그나마 자갈밭 위에 박스를 깔아 만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잠자리에서.

“보안관 장갑 벗었을 때 손바닥 봤어? 물집이랑 상처투성이야. 두 사람, 세 사람 몫을 혼자서 하려다 보니까 그런 거라고. 그러니까 노동력이 더 있어야 돼. 만약 그럴 수 있으면 우리끼리 도저히 못 했던 일들도 할 수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유빈은 경계심 가득한 시선으로 사방을 훑었다. 불안하기는 그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게 생존에 중요한 기회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끊임없이 정찰하고, 고민해서 판단하고, 부지런히 방어하는 것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전략 게임에서 장기전으로 흘러갈수록 승리를 보장해 주던 것은 역시 멀티였다. 멀티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원의 뒷받침이 필요했다.

“이 씨발! 생판 알지도 못하는 새끼들이랑 합치자고? 자다가 모가지를 따여봐야 속이 시원하겠냐? 응?”

“아니, 처음부터 합류할 생각 같은 건 없어. 같이 생활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마 저쪽 사람들도 그런 건 원하지 않을걸? 상대가 어떤 인간들인지 안심할 수 없는 건 서로 마찬가지일 테니까. 일단 한동안은 서로 시간대를 정해서 겹치지 않게 공동 작업이나 그런 걸 하면서 조금씩 알아가면 돼. 그리고…… 궁금하지 않아? 이 사람들은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살아남았는지. 우리가 모르는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을 수도 있잖아.”

철망 펜스와 시멘트를 가지고 좀비를 차단하는 성벽을 쌓을 수 있을지도 몰라. 예전에 술 취한 제니에게 말해줬던, 그 꿈같은 이야기처럼 말이야…….

유빈은 자기가 멋대로 떠올린 망상에 조금 도취됐다.

“공동 작업 같은 소리! 잘도 그런 걸 가르쳐 주고 일을 도와주고 하겠다! 슬슬 캐묻다가 등 뒤에서 뒤통수를 후려갈기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러니까 그런 일 당하지 않게 눈치껏 판단해야지.”

“눈치 까기 전에 총 맞는다고! 총! 너, 대가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위험하다고 느끼지 않으면 다짜고짜 쏘지는 않을 거야. 총알이 무한대로 있는 것도 아닐 테니까 아까워서라도 그렇게는…….”

“그건 네 생각이지! 저 새끼들은 그런 거 계산 안 하고 그냥 죽이는 게 존나 좋은 거라고! 이 뒈진 놈 꼴을 보면 모르겠어?”

“목소리 좀 낮춰. 내 생각엔 말이야, 정말 사람 죽이는 것에 맛이 들린 놈이라면 자기가 죽인 걸 길바닥에 전시해 놓고 경고 같은 건 안 해. 오히려 눈에 안 띄는 곳에 치워놓을 테지. 그래야 아무 생각 없이 가까이 오는 상대를 몰래 해치울 수 있으니까. 저쪽도 이래저래 겁이 많은 거야.”

잠시 멈칫했던 신입은 그래도 싫다는 듯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난 반대야! 목숨이 걸린 건데 혼자 멋대로 정하지 마, 개새끼야!”

신입은 말라서 끈적거리는 침을 튕겨가며 열변을 토했다. 두려움 때문인지 신입의 얄팍한 가슴은 벌렁벌렁 들썩였다. 딴에는 맞는 이야기라서 유빈은 제니와 삼식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희들 생각은 어때?”

“아…… 나는 솔직히 이런 애들 좀 싫기는 해. 아무래도 찜찜하고…….”

삼식이가 부정적인 이야기를 꺼내자 흙빛이었던 신입이 화색을 띠며 좋아했다.

“그렇지? 미친 새끼들이란 말이야. 이런 놈들 상대하지 말고 돌아가자.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그래, 삼식아. 너 생각 잘했다!”

“아, 근데 저기 보이는 저 코스트코랑 홈플러스까지는 가고 싶은데……. 저 둘 중 하나에만 들어가면 웬만한 필요한 건 다 있을 테니까.”

“뭐어?”

의외의 답이었는지 오만상을 찌푸리면서도 신입은 삼식이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60여 미터 전방, 넓은 도로를 좌우에 끼고 두 개의 대형 마트가 아주 요염하고 당당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워낙 큰 건물들이라서 당연히 처음부터 알아볼 수 있었어야 하지만, 시체에만 정신이 팔려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삼식이는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갖고 싶은 것들을 주워섬겼다.

“저기에는 초대형 커튼에, 텐트에, 에어 매트랑 담요, 해변용 접는 의자, 뭐, 그런 것들도 판단 말이야. 우와, 그 정도만 있으면 선로 위에 누워 있어도 대궐 부럽지 않겠다. 물론 먹을 거랑 물도 넘치도록 있겠지.”

손가락까지 꼽아가며 열심히 늘어놓는 삼식이의 표정은 진지했다. 자동차 의자에 몸을 구겨 넣은 채 하룻밤, 그리고 돌바닥에서 하룻밤……. 비록 찬바람을 맞는다 해도 이제는 좀 제대로 된 곳 위에다 몸을 뉘고 싶었다.

“물을 실컷 쓸 수 있으면 샤워하고 싶어요…… 장미 냄새 나는 바디 샴푸를 거품 수건에 듬뿍 짜서…….”

물이 잔뜩 있을 거라는 말에 제니도 가슴에 손을 모으며 홀린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길로 나온 이래 제대로 씻지 못한 덕분에 끈적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1대 4로 몰린 신입은 낙담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 발을 쿵쿵, 굴렀다.

“이 또라이들아! 생각 좀 해! 뒈지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목소리 좀 낮추라니까. 소리 듣고 찾아와 주길 바라는 거냐? 저기, 그리고 너희들…….”

신입의 입을 틀어막은 유빈이 삼식이와 제니에게 말했다.

“코스트코든 홈플러스든 오늘은 못 가. 저 안에까지 들어가서 돌아다닐 만큼 이 동네를 모르잖아. 그걸 감안하고 다시 생각해 봐.”

“으음…… 그래도 어차피 그런 물건들을 가져가려면 적어도 한 번은 와야 하는 거잖아. 내키지는 않지만 가까이 가봐야지, 뭐.”

삼식이의 반응에 제니도 찬성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빈은 제니에게 후드 티 모자를 쓰라는 시늉을 했다. 그녀의 얼굴을 알아본다면 멀쩡하던 놈들이라도 눈이 회까닥 돌아서 미친 짓을 할지 모르니까 미리미리 대비를 하고 싶었다.

제니도 유빈이 하고 싶은 말을 이해하고 모자를 푹 눌러쓴 뒤, 입 주변을 수건으로 두른다. 제니에게 자기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당부한 보안관이 모두에게 물었다.

“자, 이제 다 된 거지? 시간 그만 끌고 빨리빨리 움직이자.”

“잠깐만!”

삼식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자동차 문을 열고 뭔가를 꺼냈다. 긴 우산이었다. 삼식이는 두 손으로 그걸 잡고 자세를 낮춘다.

“너 뭐하냐?”

신입이 짜증스럽게 묻자 삼식이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이거, 총! 이렇게 하면 멀리서 봤을 때 총 든 것처럼 보일 것 같아서. 봐봐, 그럴듯하지? 그러면 저 사람들도 함부로 못 덤비겠지.”

“오우, 씨발! 이 새끼, 대가리 잘 쓰는데? 야, 우산 하나 더 없어? 응? 응?”

그렇게 생 바보짓을 하는 둘을 향해 유빈이 말했다.

“내가 만약 저쪽 사람들이라면 총 든 상대부터 노릴 거야.”

삼식이는 깜짝 놀라 우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신입도 더 이상 우산 타령을 하지 않았다. 일행은 가능한 한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춘 채 자동차 사이로 몸을 숨기며 천천히 전진했다.

저 사내를 난도질하고 거꾸로 매단 사람들이 컴컴한 유리창 안쪽 어딘가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걸 염두에 두고 나니, 건물 하나하나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유빈은 배낭에서 라이터 기름을 꺼내 자동차 다섯 대를 지날 때마다 한 번씩 차량 내부의 시트에 뿌리고 문을 열어두었다.

혹시라도 좀비들과 마주치게 됐을 경우, 여기에다 불을 질러 놈들의 주의를 흩뜨리고 그 틈을 타서 달아나기 위해서다.

사내의 시체와 홈플러스의 중간 정도 지점까지 이르렀을 때, 뭔가가 바람을 가르고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파창!

커다란 맥주병은 근처 바닥을 치며 박살이 났다. 다섯 사람은 얼른 자동차 사이로 몸을 숨겼다.

휘익―

또다시 날아오는 맥주병.

아까와는 방향이 좀 다르다. 날아온 곳을 눈으로 찾기 위해 보안관이 고개만 살짝 내밀자 좌우에서 킬킬대는 소리가 울려왔다.

“큭큭큭, 야! 다 보여, 이 새끼들아! 거북이처럼 대가리만 내밀면 우리가 모를 것 같아?”

“킥킥, 장님 새끼들인가? 우리가 친절하게 경고를 해놨는데도 굳이 여기까지 꾸역꾸역 기어 들어오네? 그건 죽여 달라는 의미냐?”

그렇게 조롱하는 말들 사이에 섞여 다른 목소리들이 위악적으로 웃어 댄다. 고요한 거리 위로 메아리가 치는 바람에 정확한 수를 가늠할 순 없었지만, 적어도 예닐곱, 어쩌면 열 명 이상일 가능성도 있다.

“야! 대가리만 내밀지 말고 당당하게 나와! 큭큭, 이 찌질한 새끼들아! 똑바로 서라고! 기분 나빠지면 콱 쏴 죽여 버리는 수가 있다! 큭큭큭.”

예상했던 대로 총알에 여유는 없는 모양이다. 만약 넉넉했다면 맥주병을 던지지 않고 경고사격부터 했을 테니까.

유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모습을 드러내니 실체를 몰랐을 때보다 훨씬 두려움이 줄어든다.

세상 풍파 다 겪은 걸걸한 아저씨들 특유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우리 또래다. 이야기해 볼 여지가 충분하다. 하지만 보안관은 조금 생각이 달랐던 것 같다.

“까불지 마, 이 개새끼들아!”

바닥에서 깨진 보도블록 조각을 집어 든 보안관은 가장 심하게 비아냥대는 놈이 있는 방향으로 힘껏 집어 던졌다. 미용 제품 가게가 있는 2층 건물의 옥상 쪽이다. 별것도 아닌 놈들이 허세 부리는 꼴은 더 봐주기가 어렵다.

꽈장창!

블록 조각은 애꿎은 대형 유리창을 박살 냈지만, 놈들에게 물리적 피해는 주지 못했다. 놈들은 보안관의 말투를 흉내 내며 계속 놀려댔다.

“까불지 마, 이 궤쉐뀌두라아~! 하하하, 등신. 옛다, 이거나 받아라!”

날아와 구른 것은 마네킹의 목. 흔히 보던 물건이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기분이 나쁘다. 그게 무슨 수류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안관은 잽싸게 다시 집어 날아온 방향으로 되던져 버렸다.

신입은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안은 채 내가 ‘이럴 줄 알았어’라는 말만 계속 되풀이했다.

“너 이 새끼들! 거기서 기다려!”

배낭을 내팽개친 보안관이 도끼를 꽉 쥔 채 놈들이 숨은 건물을 향해 뛰어들려 했다.

“그러지 마! 앉아!”

유빈이 그의 팔목을 잡아 자동차 뒤로 끌어당겼다. 무턱대고 컴컴한 계단을 뛰어 올라가게 할 수는 없다. 저쪽에서는 나름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기다리는 중일 테니까.

“아쭈! 까분다! 야! 나와봐! 나와보라고! 기다리라며? 야, 도끼 든 새끼! 덤비라고!”

서너 군데에 분산해서 숨어 있던 놈들로부터 계속 물건들이 날아온다. 어차피 대충 던지는 것이니까 크게 위협이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굳이 모습을 드러내서 타깃이 되어줄 필요는 없다.

핑―!

꽤나 빠른 소리.

커다란 너트가 자동차 유리에 박혔다. 아마 새총이나 뭐 그런 걸로 쏜 모양이다.

이건 좀 신경이 쓰였다. 놈들이 실컷 집어 던지고 떠들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던 유빈은 잠시 고요해진 틈을 타서 큰 소리로 외쳤다.

“이럴 필요 없잖아!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서로 돕자! 나이도 비슷한 또래인 것 같은데!”

물론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그런 제안이 단번에 먹혀들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기본적인 인사는 되어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돌아온 대답은 유빈의 예상을 한참 벗어난 것이었다.

“장난하나. 이 새끼가 누구를 빠가로 보고! 인철이가 그렇게 말하면서 접근하라고 하디? 뭐가 어째?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서로 도와? 지랄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이 개새끼야! 두 번은 안 속아!”

인철이? 진철이?

뭐라고 부른 건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뭔가 사연이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겠다. 유빈은 가능한 정직하고 선량한 목소리를 내서 다시 말했다.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우린 누가 시켜서 온 게 아니고, 그냥 지나가던 길이야! 인철인지 뭔지하고 전혀 관계없다고!”

말을 하면서 유빈은 보안관에게 제니를 잘 감싸라는 신호를 보냈다. 지금이야 만류가 통하지만, 혹시라도 날아온 물건에 제니가 다치거나 하면 그땐 보안관이 너무 흥분할까 두려워서다.

상대의 규모와 위치를 파악하고 있던 보안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등 뒤의 제니를 더 바짝 달라붙게 했다.

유빈과 자동차 하나를 사이에 두고 몸을 숨긴 삼식이도 걱정되는 표정으로 담뱃갑만 만지작거렸다.

“지나가던 길은 무슨. 씨발, 마실 나왔냐? 지금이 어떤 때인데 모르는 동네를 마음대로 돌아다녀! 개소리 집어치워, 이 개새끼야! 좀비들이 참 잘도 그렇게 내버려 두겠다. 한 시간이나 버티면 다행이지! 가서 인철이한테 전해! 씨알도 안 먹히니까 그냥 너희들끼리 살고, 이쪽에 집적댈 생각은 일찌감치 접으라고!”

건물 속의 놈들은 전혀 믿으려 들지 않았다. 유빈은 답답하면서도 놀라웠다.

뭐야, 살아남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나? 이쪽 파에, 저쪽 편에……. 불과 10분 전만 해도 이 근방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우리들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생존자라는 건 그저 밤에 멀리 드문드문 보이는 희미한 불빛으로 어렴풋이 짐작만 할 정도였었다. 어쨌든 이렇게 서로 앙숙이 질 사이라면 양쪽 전부와 손을 잡고 일을 한다는 건 어려워 보였다.

“젠장,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 말을 전하든 뭐든 할 거 아니야! 너희만 아는 이야기 그만 좀 하고, 우리 이야기도 좀 들어줘!”

몸을 일으킨 유빈은 두 주먹으로 자동차 지붕을 내려쳤다.

닥쳐―!

야유와 함께 어디선가 날아온 맥주병이 박살 나며 안에 들었던 맥주와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튄다.

유빈은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면서도 놈들의 모습을 훔쳐보는 데 성공했다.

계속 떠들어 대던 놈은 호리호리한 안경잡이. 제 딴에는 최대한 불량스럽게 말을 하고 있지만, 아무리 봐도 싸움꾼은 아닌 인상이다. 그리고 그 주변에 남자 둘과 여자 둘이 서 있다. 모두 평범했다.

“정말 인철이가 보낸 게 아니라도 상관없어! 이쪽 정찰은 여기까지니까 이제 너희 패거리한테 돌아가! 다음에라도 저 새끼 매달아둔 선은 넘어오지 말란 말이야! 그땐 곱게 안 보내줄 테니까!”

이번엔 대각선 뒤쪽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세 명이 건물 밖으로 나와 있었다.

새총을 잡아당기고 있는 녀석과 총을 든 녀석…… 그리고 예쁘장한 여자 하나.

여자는 타이트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몸매가 꽤나 단단해 보였다.

너희 패거리에게 전하라고 하는 걸 보면 이쪽이 전부 다섯 명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유빈과 눈이 마주친 트레이닝복의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혹시라도 덤벼들어 볼까 하는 생각이면 관둬. 총도 있고, 이래 봬도 15년 동안 이것만 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옆차기를 높이 차올리는데, 제법 빠르고 그럴듯했다.

태권소녀인가…….

좌우의 원거리 무기를 든 남자들을 한 수 아래로 깔고 있는 듯한 저 여유로 보아 저 여자가 저쪽의 에이스인 모양이다. 적어도 사악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면 보안관이랑 일대일을 하자고 해볼까? 보안관이 가볍게 제압하고 신사적으로 굴면 그때는 우리 말을 좀 귀담아들어 줄까?

아니, 그런데 저 표정이랑 말투가 아주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오히려 더 악수가 되면 어쩌지?

유빈이 뭔가 머릿속으로 꾸미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태권소녀는 거만한 손짓으로 10여 미터 앞의 편의점을 가리켰다.

“딴맘 먹지 말라니까…… 정말 꼭 어디 한 군데가 부러져 봐야 정신 차릴래?”

그녀의 손가락이 향한 곳, 코너의 편의점에서 커다란 덩치가 스윽 모습을 드러냈다.

보스는 너였구나!

보안관과 유빈이 동시에 마음속으로 외쳤다.

커다란 키, 100킬로그램은 우습게 넘을 것 같은 몸집, 못을 잔뜩 박은 야구 배트를 쥔 손은 솥뚜껑만 하고, 붉게 염색된 머리카락은 넓적하고 험상궂은 얼굴과 시너지를 이뤄서 웬만한 놈들이라면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제일 무서운 건 이 커다란 야수가 여자라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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