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안전지대는 없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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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안전지대는 없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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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안전지대는 없다 (4)
2022.02.06.
양편의 어둠을 번갈아가며 살피던 유빈은 잠시 시선을 중랑천 남쪽으로 돌렸다.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던 호수는 여전히 그 넓이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달빛을 담아 검게 반짝이고 있다. 그리고 그 너머…….
원래의 계획대로였다면 벌써 어제 오후쯤 저 길을 지나 한강까지 내달렸을 터인데…….
유빈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손에 넣었다고만 생각했던 안정이 못내 아쉽기는 하지만,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 이제는 내일의 생존을 위해 고민하는 편이 더 중요하다.
내키지 않더라도 내일은 아침 일찍부터 이 선로 북쪽을 따라 계속 걸어가 봐야 할 것이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면 고온과 직사광선 때문에 고통스러운 탐사가 될 게 분명하다. 그런 귀찮은 것들을 모두 감수하더라도 알아야 한다.
유빈은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을 계속했다.
준비물은 어떻게 가져가야 할까…….
일단 햇살을 막아줄 긴소매 옷과 모자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물.
한 번 출발해서 돌아올 때까지를 한나절로 잡고 두 시간 정도 걸어갔다가 되돌아오면 될 테지…… 아, 피곤하다. 자꾸 눈이 감기려고 하네…….
“오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유빈은 자신을 부르는 제니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좌우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는 않았다. 앞뒤로 쭉 뻗은 선로는 여전히 어둠 속에 휩싸여 있고, 사방은 고요하다. 가장 큰 소음이라야 가끔 한 번씩 물 위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들이 수면을 치는 소리 정도일 뿐.
하지만 그 잠깐의 단절감이 유빈의 심장을 두드린다.
내가 졸았던가? 아니, 깨어 있었나? 확실하지 않다는 것 때문에 소름이 끼칠 만큼 두렵다.
“지금 처음 부른 거야?”
바짝 마른 목소리로 유빈이 물었다.
“……네.”
다행히 깊은 잠이 들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은 사건들이 머리를 스쳐 가면서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눈이 가물가물하고 온몸이 노곤하기는 했지만, 책임을 맡아놓고 그걸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니……. 유빈은 황급히 자신의 두 뺨을 쫙쫙, 두들겼다.
“……제니야, 왜?”
뺨을 두드려 아직 남겨진 졸음을 힘겹게 쫓아내며 유빈이 물었다.
에헤, 제니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뒤쪽을 가리킨다. 저녁때, 그가 설치해 둔 화장실―그건 너무 거창한 표현이고, 고양이용 배설물 모래를 뿌린 뒤 대충 가려둔 공간―이 있는 방향이다.
“아, 그래. 알겠어.”
유빈은 선선히 랜턴을 들고 일어섰다.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화장실을 천막으로부터 꽤나 멀찍한 곳에 지어놨기 때문에, 깜깜한 밤에 혼자 가기에는 조금 꺼림칙한 느낌이 있다. 하물며 여자인 제니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미안해요, 귀찮게 해서.”
제니의 귓속말에 유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네 덕에 나도 깼어. 후우, 아마 깜빡 졸았나 봐.”
저벅, 첫발을 떼자마자 자갈들이 미끄러지는 소리가 울린다. 제니와 유빈은 아차 싶어 어깨를 움츠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드르렁― 푸우~
보안관은 여전히 코를 골고, 삼식이는 숨을 내쉰다. 다행히 다들 깨어날 만큼 시끄럽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 위로 걸어가요.”
잠시 생각하던 제니가 가볍게 뛰어 좁은 선로 위에 올라서더니, 체조 선수처럼 두 팔을 벌려 균형을 잡는다.
“나는 자신 없는데……. 넘어질 것 같아. 그냥 신발을 벗고 살살 갔다가 오자.”
선로 위에 올라서 본 유빈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제니는 풀쩍 바로 옆의 선로로 건너갔다.
“자요, 제 손 잡아요. 이렇게 나란히 걸어가면 괜찮을 거예요.”
“아, 아니, 그건 좀…….”
“에이, 빨리요.”
제니의 채근에 못 이겨 유빈은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해서 둘은 마치 아주 옛날 청춘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선로 하나씩을 차지하고 서로 팔을 뻗어 손을 잡는 것으로 균형을 잡은 채 외줄걷기를 했다.
“후훗, 이거 꽤 재미있다. 그쵸?”
“아니, 좀 너무 쑥스럽달까…… 남사스러운데. 불안하기도 하고.”
“하여간! 좀 더 즐겨요. 지금 오빠가 잡은 이거, 제니 손이라고요.”
그렇게 한바탕 서커스를 하고 화장실에 도착했다. 제니는 유빈을 1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화장실과 직각이 되도록 세운 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칸막이 안으로 들어갔다.
바스락, 그녀가 허리를 굽히고 바지를 내리는 아주 작은 소리가 적막 속에서는 똑똑하게 전달된다. 예전 2층집에서 둘만 있었을 때의 기억이 되살아난 유빈은 긴장하며 말을 더듬었다.
“저, 저기, 지금 너무 가까운 기분인데…….”
“어, 그 각도에서 안 보이잖아요?”
“그래, 보이지는 않지. 근데…… 그, 소리가…….”
“하하, 음탕한 오빠일세. 대체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야, 상상을 안 하기 위해서 안 듣겠다는 거잖아…….”
“계속 말을 해요. 그러면 그 소리에 묻혀 안 들릴 테니까.”
“뜬금없이 무슨 말을…….”
한숨을 내쉬며 말을 끊으려는데, 얼핏 무슨 소리인가가 귓가에 들어오는 것 같다. 유빈은 다급하게 계속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내, 내일은 아침부터 계속 걸어 다녀야 할 거야. 출발하기 전에 긴바지로 꼭 갈아입어. 그 반바지 입고서 다니면 화상 입게 될지도 모르니까. 바지 가져왔지?”
“쉿, 쉿, 목소리 낮춰요. 다 깨우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면요.”
어느새 볼일을 마친 제니가 칸막이 위로 머리를 내밀며 속삭인다.
이 시험은 이제 끝난 건가……. 유빈은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땀과 먼지로 찐득해진 유빈의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흩트리면서 제니가 묻는다.
“야한 상상 많이 했어요? 이 좋은 머리로?”
“상상 안 했어. 안 하려고 열심히 지껄였잖아.”
솔직히 그건 거짓말이었다. 피로와 위기감에 찌들어 유전자를 남기고 싶은 욕망이 평소보다 몇 배나 더 강력해진 이십 대 초반의 남자가 그 상황에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면, 그건 이미 도인이거나 초인의 경지일 거다.
그리고 유빈은 초인도, 도인도 아니다. 짧은 찰나지만 유빈의 머릿속에는 온갖 에로틱한 이미지들이 불꽃처럼 일어났다가 사그라졌었다.
그중 일부는 아직도 화끈화끈 열을 내고 있기도 하다. 마음을 들키기 싫은 유빈은 얼른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리고 나 머리 안 좋아. 내 성적표를 보면 절대로 그런 말 못 할걸? 머리가 좋았다면 이런 데 갇혀 있을 이유가 없지.”
“아뇨, 좋아요. 그래서 지금 여기서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잖아요. 안전한 요새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보면서 제니가 속삭였다. 슬프게도 그건 사실이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임기응변일 뿐이다.
“위험을 느끼면 무작정 높은 곳으로 도망치는 건 말이지…….”
다시 천막 아래로 돌아왔을 때, 유빈이 중얼거렸다.
“겁에 질린 새끼 곰들도 하는 일이야. 그냥 본능이라고.”
“야한 상상을 하는 것처럼 말이죠.”
제니가 덧붙였다.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다섯 명은 어제의 반대 방향으로 탐사를 떠날 준비를 마쳤다.
식사는 걸어가는 동안 초콜릿 바를 씹으며 때우기로 했다. 공기에 아직 서늘한 기운이 남아 있을 때 가능한 한 멀리까지 살펴보고 오는 게 낫다. 한낮의 태양과 싸워가며 돌아다니는 건 체력을 더욱 소진시키는 일이다.
“아, 코 막혀. 새벽엔 좀 추웠어.”
삼식이가 코를 훌쩍이며 팔을 비빈다. 긴바지와 후드 티로 갈아입고 온 제니도 동의한다는 표정이었다. 잠자리는 지독하게 불편했다. 등이 배기고 목은 뻣뻣하다.
와사삭, 와사삭, 발밑의 자갈이 밟히며 파도 소리와 비슷한 음색을 만들어낸다.
20여 분을 걸어갔을 때쯤, 그들은 나란히 달리다가 갈라지도록 Y자로 설치된 또 다른 선로를 만났다. 가깝기는 하지만, 두 선로 사이에는 높은 철책이 가로막혀 있다.
그리고 5분 정도를 더 걸어가자 널찍한 왕복 7차선 도로가 나타났다. 거기까지 이르자 도로와 선로의 높이가 크게 차이를 보이지 않게 되었다.
상봉역이 가까워졌을 때, 일행은 걸음을 멈추고 외부로 시선을 돌렸다.
컴컴한 역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이제 여기까지 왔으니 다시 되짚어 돌아가든가, 아니면 거리로 나가보는 것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한다.
“조용하네.”
차단벽에 매달려 선로 바깥을 살피던 삼식이가 말했다. 그의 말처럼 거리는 아주 고요했다.
10여 분이 넘도록 가만히 지켜보았지만, 여기저기 얽힌 채 버려진 차량들 사이로 들개 떼 한 무리가 지나간 것 말고는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삭막한 죽음의 도시. 하지만 동시에 자원의 보고이기도 한 공간. 깨진 유리와 간판에 적힌 여러 가지 상호들이 그들을 유혹한다.
“어떻게 할래? 내려가 볼까?”
도로 건너편의 편의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보안관이 물었다.
먹을 것, 배터리, 그리고 온갖 요긴한 물건들…….
저 가게 안에는 분명 그런 것들이 가득할 것이다.
그 바로 옆의 옷가게는 또 어떤가. 당장에라도 땀과 먼지, 톱밥과 흙으로 범벅이 되어버린 이 옷을 벗고, 보송보송하고 접혔던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싶다.
그리고 물. 물은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지나치다고 생각되지 않을 물품이다. 다른 넷 역시 물욕이 가득한 눈으로 거리를 훑고 있었다.
택배 트럭을 털어온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얼마나 더 견뎌야 할지를 알 수 없기에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그러모으고 챙겨두어야 한다는 강박이 그들을 짓눌렀다.
유빈도 끊임없이 갈등하며 손톱을 자근자근 씹었다. 비교적 뻥 뚫린 7차선. 눈에 좀비는 보이지 않는다.
예전 초를 세어가며 지하 통로를 달려 번화가 안으로 뛰어 들어갔던 때에 비한다면, 이건 꽤 안전하다. 혹시 좀비가 나타나더라도 얼마든지 달아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차 하는 순간에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르기 때문에 신중해야 했다.
저놈들은 그렇게 많은 힘을 들이지 않아도 우리를 죽일 수 있다. 아주 살짝, 단 한 번만 좀비들의 이빨이 살갗을 뚫으면, 그것으로 끝이니까.
“살짝 엿보기만 하고 올까?”
한참을 더 고민하다가 유빈이 내린 결론은 상륙이었다. 호기심은 치명적이고도 강력한 유혹이다. 이곳의 사정이 어떤지 가까이 다가가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좋아!”
보안관은 손도끼를 휘둘러 단단한 플라스틱으로 된 차단벽에 몇 개의 구멍을 뚫었다.
돌아올 때 빠르게 짚고 올라올 수 있는 발판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리고 준비가 다 끝나자 유빈은 모두를 돌아보며 다시 한 번 주의 사항을 말했다.
“혼자 튀어나가거나 너무 빨리 걸으면 안 돼. 그리고 건물에 바짝 붙지 마. 만약에 위험하다 싶으면 곧바로 돌아오는 거야. 아무것에도 미련을 가지면 안 돼. 알지?”
“씨발, 아무것에도 미련을 가지지 않을 건데 뭐하러 모르는 데를 꾸역꾸역 제 발로 기어 들어가냐? 아~나, 이 새끼들. 왜 이렇게 자꾸 위험한 짓을 하려고 그러지?”
신입이 언제나처럼 엉덩이를 뒤로 빼며 짜증을 낸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벌써 보안관은 훌쩍 몸을 날려 거리 아래로 뛰어내렸다.
“너도 빨리 와, 이 새끼야!”
보안관이 신입을 딱 찍어 손짓을 했다. 게다가 제니도 아주 순진한 척하며 ‘빨리 뛰어요, 오빠’라고 채찍질을 해 댔다.
젠장!
신입은 머리를 벅벅 긁어 대다가 결국 거리로 내려갔다.
그 뒤를 이어 제니가, 삼식이가, 유빈이가 점프를 했다. 재빨리 인도를 벗어나 차도 위에 올라서자 선로 위에서는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가장 강렬하게 그들 모두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20여 미터 전방, 도로 표지판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한 남자의 시체였다.
마치 교수형을 당한 것 같은 모습으로 발목이 긴 밧줄에 묶인 채 대롱거리는, 벌거벗은 남자의 부패한 몸뚱이.
어제만 해도 수없이 많은 죽은 사람들을 보았던 보안관 일행에게조차 충분히 기괴하게 느껴질 만한 풍경이었다.
“크, 이 동네 인심 봐라. 저게 마스코트냐, 뭐냐?”
가장 먼저 침묵을 깨고 보안관이 입을 열었다. 말로는 여유를 보이지만, 그 역시 도끼를 쥔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왜 좀비를 저렇게…….”
제니가 겁먹은 목소리로 묻자 유빈이 좌우의 건물들을 살피며 대답했다.
“좀비가 아니야, 저거. 사람을 죽인 거야.”
“지랄, 뻥치고 앉아 있네. 그걸 어떻게 알아?”
신입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저걸 보면 알잖아. 좀비 시체에 저런 게 달라붙는 거 본 적 있어?”
유빈이 가리킨 것은 시체의 가슴팍에 달라붙어 살점을 파먹고 있는 까치들이었다.
픽, 픽, 조그만 대가리로 살을 쪼아댈 때마다 까맣게 썩은 시체는 허공에서 미세하게 흔들거렸다.
“어? 좀비는 새들도 안 먹나?”
신입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래, 안 먹어. 개들도 안 건드리고, 새들도 안 건드려. 그러니까 저건 멀쩡했던 사람의 시체야.”
말을 하는 동안에도 유빈의 시선은 주변 건물들의 위쪽을 훑고 있었다.
지역과 시대, 문화를 막론하고 저런 짓을 해놓는 이유는 대개 한 가지다. 다른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 두렵게 만들려는 경고. 그러니까 그 범인은 아마도 이 근처에 있을 것이다.
“오지 말라는 건가? 이거야 무슨 식인종도 아니고. 왜 이런 짓까지 하는 거야? 글씨로 써놓으면 될걸.”
삼식이가 고개를 저으며 투덜대는 동안에도 보안관은 한 발짝씩 천천히 신중하게 시체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런 식으로 대놓고 겁을 먹으라고 엄포를 놓으면, 더 기죽고 싶지 않다. 흉측하기는 해도 시체를 보는 일은 이제 꽤나 덤덤해졌다.
푸드드득―
보안관이 가까이 걸어가자 시체 위에서 아침 만찬을 벌이던 까치들은 서둘러 날갯짓을 하고 도망쳐 버린다. 좀비의 것과는 또 다른 지독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정말이야. 머리는 말짱해. 가죽이 좀 벗겨지기는 했어도 뼈가 깨지거나 한 흔적이 없어. 좀비였으면 이렇게 해서는 안 죽지.”
숨을 참아가며 시체를 살피던 보안관이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일러주었다. 이토록 무덤덤하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그 자신도 몰랐다. 심하게 부패하기는 했어도 죽은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시체였다.
사망 원인은…… 아마도 복부와 옆구리에 나 있는, 수없이 찔린 상처들 때문인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스무 군데 이상의 깊숙한 자상이 아주 골고루 펼쳐져 있다.
그리고…… 사타구니를 뻥 뚫고 나 있는 커다란 구멍.
“이건 또 뭐야? 뭘 어떻게 하면 이렇게 돼? XX가…….”
매우 검게 변색된 채 탄화된 구멍의 주변을 보며 중얼거리던 보안관은 단어를 잘못 선택했다는 걸 알고 목소리를 낮췄다.
“……거시기가 완전히 날아갔어.”
“총인가? 총에 맞으면 이렇게 될 것 같기는 한데…….”
곁으로 다가온 유빈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총으로, 또 칼로 아주 거하게 죽였다고밖에는 할 수 없다. 안색이 창백해진 제니는 삼식이의 손을 꽉 쥐었다.
“총? 총? 총이 있다고? 씨발, 그런데 이렇게 태평하게 뒈진 새끼 XX나 들여다보고 있어?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도 모르는 판국에?”
좀비가 아니라 사람 시체였다는 걸 알고 난 후부터 줄곧 쫄아 있던 신입이 패닉 직전의 목소리를 내질렀지만, 유빈과 보안관은 여기에서 마음속에 공포만을 담고 물러날 마음이 별로 없었다.
살인자라고 하면 무자비하고 끔찍하게 들린다. 하지만 유빈도 얼마 전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둘이나. 그 사실을 유빈과 친구들은 잘 기억하고 있었다.
광기와 공포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스포츠머리와 장발처럼 달려드는 놈이 있다면, 극단적인 선택을 피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닌 것이다.
문제는 이 중년 사내를 죽인 살인자가, 혹은 살인자들이 어느 쪽인가 하는 점이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벌인 일일까, 아니면 그저 자신의 힘을 드러내기 위한 유희였을까?
“아무래도 난 이 새끼들, 얼굴 좀 봐야겠어.”
잠시 더 고민하던 보안관이 입을 열었다.
“뭐? 왜에 또?”
신입이 미치겠다는 듯 울먹였다.
“뭐, 간단해. 이 죽은 사람이 나쁜 놈이었다면, 그래서 자기가 살기 위해 이 사람을 죽인 거라면 우리가 겁을 낼 필요가 별로 없어. 대체 얼마 만에 보는 살아 있는 사람이야?”
보안관은 매달린 사내의 시체를 도끼 자루로 가리키며 말했다. 끔찍한 비주얼에 어지간히 둔감해진 모습이었다.
“이 미친 새끼야, 저 뒈진 새끼 몸뚱이 꼬라지를 보고도 그딴 소리가 나오냐? 응? 존나 잔인한 살인마 새끼라고!”
“시끄러, 인마. 우리가 대가리를 뽀갠 좀비들도 이것보다 그렇게 상태가 좋지는 않아. 그런 점에서는 다 비슷한 처지라고!”
“그건 이야기가 다르지! 만약에 정말로 피에 환장한, 미친 새끼면 어쩔래? 재미로 사람을 존나 죽이는 새끼면 어쩌려고 그래?”
“아, 내가 보려고 하는 이유도 혹시 그럴까 봐서 하는 쪽이 더 크긴 한데 말이야.”
보안관은 목에서 뚜둑, 소리를 내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만약 그런 놈이라면 더 이상 접근해 오기 전에 미리 위험 요소를 없애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이었다.
좀비들과 달리 살아 있는 인간은 얕은꾀를 부릴 수 있고, 그래서 더 위험하기도 하다. 이왕 이쪽의 모습을 드러냈으니, 이대로 물러선다면 뒤를 밟게 해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음…….”
유빈은 얼굴의 땀을 훑어 내렸다.
채 빠지지 못하고 길가에 고였던 물들이 아침부터 올라간 기온 덕에 증발하면서 대기가 끈적끈적 달아올라 불쾌하게 온몸을 감싼다. 유빈의 두 눈은 뻥 뚫려 버린 사내의 사타구니에 고정되어 있었다.